성명 | 노하순(盧夏淳) |
자 / 호 | 몽룡(夢龍) / 창유(暢幽) |
본관 | 광주 노씨 |
생몰 | 1915년 6월 18일 ~ 1945년 6월 11일[1] |
출생지 | 강원도 울진군 삼화면 명도동 (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명도리) |
사망지 | 대구형무소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노하순은 1915년 6월 18일 강원도 울진군 삼화면 명도동(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명도리)에서 노종만(盧鍾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3년간 한학을 수학했고, 이후로는 농업에 종사했다. 그러다가 1938년 4월 12일 울진군 울진면(현 죽변면) 죽변리에 거주하는 사덕수(史德洙)의 집에서 임시헌(林時憲), 남원수, 전찬문(田燦文), 장세전, 최효대(崔孝大) 등 울진 출신 인사들과 회합하여 준향계(準香契)를 조직했다. 준향계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하여 소규모의 조직형태로 운영되었고 활동은 반일선전활동 및 조직의 내부결속을 다지는데 치중되었으며 일제의 중국침략전쟁이 장기화되면 반드시 일제가 불리한 처지에 놓일 것을 예상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국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했다.준향계 게원들은 여섯 차례 회합을 가졌고, 이두연(李斗淵), 주영석(朱永錫), 주예득(朱禮得) 등을 동지로 포섭했다. 또한 노하순은 준향계와는 별도로 1939년 10월 28일 임시헌, 남원수, 주영석(朱永錫), 남정성, 전원강 등 울진출신 인사들과 함께 준향계와 유사한 목적·조직형태 하에 창유계(暢幽稧)를 조직했다. 그러나 1943년 3월 경찰에게 발각되어 두 조직 모두 와해되었고, 노하순 역시 이때 체포되어 6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6월 11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노하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