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2957, #003876, #003876, #002957);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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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비슨 | 오긍선 | 이영준 | 최동 | 이용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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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선 | |||||
연희전문학교 교장 · 연희대학교 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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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876><colcolor=#fff> 창씨명 | 미야모토 조세쓰(宮本容卨) |
본관 | 전주 이씨[1] |
출생 | 1895년[2] 10월 12일 |
평양부 희천군 (현 자강도 희천시) | |
사망 | 1993년 3월 8일 (향년 97세) |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영동세브란스병원 | |
호 | 여천(與天) |
가족 | 아버지 이재후[3], 어머니 최재신[4] 부인 이재숙[5], 아들 이근영[6], 딸 3명 |
학력 | 숭실중학교 (졸업)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 노스웨스턴 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7] / 석사·박사) 경성제국대학 (박사)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2 |
비고 |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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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내과 의사, 교육자, 정치인.2. 생애
2.1. 해방 이전
1895년 10월 12일 평양부 희천군(現 북한 자강도 희천시)에서 아버지 이재후(李載厚)와 어머니 최재신(崔載信)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평안남도 평양부 대흥면 상영동·공수동·열녀동[8](현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 방면으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고, 상경한 뒤에는 경기도 경성부 견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29-1번지에 거주했다. 1955년에는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가 199번지에 거주했고, 1956년에는 중구 남대문로5가 25번지에 거주했다. 1967년에는 종로구 원서동 9-6번지, 1977년에는 서대문구 창천동 500-18번지에 거주했다.숭실중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협화의학원 부속병원에서 내과의사로 근무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해 노스웨스턴 대학교 의과대학원에서 정형외과 전공으로 의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 시절 안창호를 만나 1924년 흥사단에 입단해 단원으로서 활동했다. 귀국 후 1927년 모교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에 부임했고, 1937년에는 경성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1939년 12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사 측에서 공소하여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친일로 전향하여 1941년 8월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의 전신인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에 위원으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 9월 7일 이각종 등과 함께 남대문 앞에 전쟁 채권을 들고 나서서 "銃後奉公(총후봉공)은 채권으로부터"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중들에게 일제에 협력할 것을 독려했다. 이후에도 유억겸·장덕수·최용달·윤치호·현제명 등과 함께 친일 전향자 단체인 대화숙(大和塾)[9]에서 활동하고 매일신보에 친일 연설을 기고하는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활동하였다.
美國(미국)은 건국의 역사 그 자체가 약탈에서 시작되어 횡폭과 잔인한 피(血)로 세운 나라인 만치 그 국가의 의가 있을 리 없으며…… 이런 나라를 조국으로 가진 美國人(미국인)의 본성이 잔인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문명하다는 그놈들은 오늘날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고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놈들이야말로 元(원)의 대군과 같이 太平洋(태평양) 바다 속에 몰살하지 아니하면 東洋(동양)의 평화는 영원히 바랄 수 없을 것이다.
1944년 8월 6일, 매일신보 신간에 기고한 글.
1944년 8월 6일, 매일신보 신간에 기고한 글.
2.2. 해방 이후
8.15 광복 후 미군정 초대 보건후생부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장 등을 지내면서 대한민국의 의료시스템 구축에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출신의 최응석(崔應錫)[10]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세력은 소련의 의료국영시스템을 추구하였고, 우익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이용설은 미국 유학파로서 사립병원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미군정은 이용설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의 기반이 잡히기 시작했다.1947년 5월 10일에는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백인제(白麟濟), 김성진(金晟鎭), 이용설(李容卨), 고병간(高秉幹), 정구충(鄭求忠), 최상채(崔相彩), 박건원(朴乾源), 전성관(全聖寬) 등과 함께 현 대한외과학회의 전신인 조선외과학회의 창립위원으로서 학회 창립에 가담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기도 인천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에서 의료인 답게 국민의료법, 약사법을 질의하였으며, 노동과 관련된 근로동원법, 노동위원회법에도 질의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국민당 윤치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조선산업진흥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했고, 1955년 10월부터 1961년 10월까지 제15대 세브란스병원장을 지냈다.
1993년 3월 8일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영동세브란스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인천시 갑) | 무소속 | 9,032표 (29.96%) | 당선 (1위) | 초선 |
1954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중구 을) | 무소속 | 3,090표 (15.66%) | 낙선 (4위) |
4. 둘러보기
경기도 제2대 국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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