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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尹仁駒1903년 ~ 1986년 (향년 83세)
대한민국의 종교인이자 교육자이다.
초대 부산대학교 총장이자 연세대학교의 제3대 총장이기도 하다.
2. 생애
윤인구는 1903년 11월 1일 경남 동래부 구포에서 아버지 윤상은(1887-1984)과 어머니 박영자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윤인구의 어머니, 박영자는 구한말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앞장섰던 박기종(朴琪淙, 1839-1907)의 막내딸이었다. 외할아버지 박기종은 일본자본 및 열강자본과 치열한 경쟁을 하여 1898년 최초의 한국 민간철도회사를 설립했다. 평생을 통하여 철도부설에 뜻을 두었으며, 국내철도는 민족계 회사에 의하여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 최초의 기선회사 설립에 참여한 인물이자 부산 최초의 근대학교인 부산상업학교의 전신인 개성학교(1896년)를 설립한 사람이다. 윤인구의 할아버지 윤홍석은 양산에서 만선재를 열어 많은 인재를 길러낸 분이었고, 그의 자녀들은 구한말 관료계에서 활동했던 이들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윤상은은 박기종의 사위가 되었다.[1] 윤인구의 아버지, 윤상은(尹相殷)은 근대 자본주의 정신에 기초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계 지방은행(구포은행) 설립자, 행정관료, 교육가, 농업경영가 등 여러 분야에서 근대를 개척하고 경영했던 인물이다.[2]부산대학교 설립에는 윤인구의 기여와 헌신이 절대적이였다. 그는 3.1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일제강점기의 탄압과 폭압을 몸으로 경험했고, 자신의 집안은 영남최고의 가문으로 백산상회 안희제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고, 상해임시정부의 자금역할을 담당하여 일제에 감시와 탄압받으면서도 저항했던 집안 환경과 서구대학(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과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유학했던 자신의 경험은 부산대학교를 국립대학으로 설립하는 데 일제 식민지교육의 잔재를 청산하고 완전히 새로운 대학을 설립해야 된다는 사고의 바탕이 되었다. 대학설립의 실무를 진두지휘했던 윤인구 초대총장의 교육철학이 위대한 것은 자신이 영국유학을 하면서 "교육과 의료 만큼은 시장에 맡기는 것보다는 국가가 책임지는 게 훨씬 낫다"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3]의 영향을 받아 부산대학교를 미션스쿨로 만들거나 학교내 신학과목을 개설하여 종교적 색채를 띄게 하지 않았고, 대학교육은 국가가 책임지고 맡아서 운영해야 한다는 교육자로써의 사명감에 의해 해방되자마자 곧바로 설립된 과도정부인 미군정청 문교당국의 국가예산지원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초창기 국립대학 설립재원을 부산시민을 비롯한 지역유지, 각종 종교단체의 기부금으로 모금하여 국가예산으로 헌납한 후 대한민국 문교부에 의해 국립대학으로 설립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1] 이상규, "부산경남지방 기독교회의 선구자들", 고신대학교 출판부, 2012, p.290[2] 발굴 한국현대사인물 윤상은(1887~1984),'민족은행 세워 일제 돈줄장악 저항' 한겨레신문 1991년 10월 25일 기사 참조)[3] 국부론과 보이지 않는 손을 주장한 그 애덤 스미스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