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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9 22:26:35

백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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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앙의료원 설립자
백인제
白麟濟 | Paik Inje
파일:백인제.jpg
출생 1899년[1] 1월 28일
평안북도 정주군 남면 이리
(現 평안북도 정주시 남양리)[2]#
사망 1953년 이후 (향년 55세 이상)
북한
본관 수원 백씨[3]
부모 아버지 백희행, 어머니 한모씨
형제자매 4남 3녀 중 셋째
첫째형 백용제(白龍濟)(1887 ~ 1909)
둘째형 백봉제(白鳳濟)(1896 ~ 1946)
남동생 백붕제(1910 ~ 1952?)[4][5]
학력 오산학교 (졸업)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의학 / 박사[6])

1. 개요2. 일생3. 가계도4. 선거이력5. 기타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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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외과의사이자 독립운동가. 백병원 설립자다.

2. 일생

1899년 1월 28일(음력 1898년 12월 17일) 평안북도 정주군 남서면 이리(현 정주시 남양리) 부호마을에서 부호였던 아버지 백희행(白禧行)과 어머니 청주 한씨 한응모(韓應模)의 딸 사이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동생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백붕제가 있으며, 백낙청이 조카다. 고조부 백경해(白慶楷)는 종2품 한성부 좌윤(左尹)[7], 증조부 백종걸(白宗杰)은 정3품 병조 참의(兵曹參議)와 승정원 우승지(右承旨)를 지냈다.

백인제는 오산학교 재학 4년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오산학교 졸업 후에는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예비과정에 입학하였다. 경성의전에서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죄로 10개월 옥살이를 하고 퇴학당하고 만다. 출옥 후 조선총독부와 경성의전의 유화 조치에 힘입어 복학하여 결국 전학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3.1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졸업과 동시에 자동 부여되는 의사 면허증을 받지 못했다.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2년을 부수(副手)[8]로 근무하고 나면 의사 면허를 내주겠다는 제안을 받아 조선총독부부속병원에서 외과 마취 부수를 하며 마취 기술을 익혔다. 마취과 전문의가 따로 없던 시절이라 마취는 외과 의사한테 중요한 작업이었고, 여기서 익힌 마취 솜씨는 나중에 그가 외과 의사로 이름을 날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조선총독부 의원에 의사로 근무하였다.

1928년 도쿄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9] 학위 논문 제목은 '실험적 구루병의 연구(전편) : 실험적 흰쥐 구루병의 생성 및 그 일반적 재검색'이었다. 같은 해 경성의전 외과학 교실의 주임 교수가 되었다. 교수 재직 중이던 1930년과 1936년, 두 차례, 약 2년에 걸쳐 독일 베를린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유학하기도 했다.#

경성의전 교수로 있으면서 학생 시절의 일본인 스승 우에무라 슌지(植村俊二)가 경영하던 외과 의원을 인수하여 위탁 경영을 하고 있었는데 1941년에 경성의전을 사직하고 '백인제 외과의원'을 정식 개업하였다.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루며 1946년까지 5년간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1946년 11월에 한국 최초의 민립 공익법인 재단법인 백병원을 창설했고 1946년 10월 경성의전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국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통합될 때 제2부속병원장 겸 제3외과 교실의 주임 교수를 맡는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민주당 윤치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6.25 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여 납북되었고,[납북기록] 이후 납북된 다른 남한의 의학계 인사들은 직장을 얻었지만, 북한에서 반동으로 낙인찍힌 백인제는 오히려 수용소에 수감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3. 가계도


동생으로 친일 관료인 백붕제가 있다. 백붕제의 아들이 문학평론가 백낙청이다. 즉 백낙청이 백인제의 조카이다. 백낙청에게 백인제는 백부가 된다. 친아들은 백낙조(1934~2000) 학교법인 인제학원 설립자이며, 종손자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백영경 교수이다. 시인 백석[16]은 부친 백희행과는 10촌 지간으로 11촌 족숙 뻘이다. 백낙환 이사장 인터뷰(백인제 박사의 조카), 병원신문, 내가 만난 원로-백인제(白仁濟 박사), 미래한국

4. 선거이력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서울 1[17]

[[무소속(정치)|
무소속
]]
5,688(8.69%) 낙선 (3위)

5. 기타

유명한 제자로 장기려 박사가 있다.

백병원의 표어가 인술제세(仁術濟世), 인덕제세(仁德濟世)다. 인제대학교의 '인제(仁濟)'는 여기서 따온 것이라고 하지만 본인 이름의 한자를 바꿔 만든 역 두문자어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의 백인제 가옥[18]은 서울민속자료 제22호로 지정되어 있다. 2012년 혜화동에서 백인제 가옥으로 서울시장 공관을 옮긴다는 기사가 났으나 문화재 논란, 친일반민족행위자 건축[19] 논란으로 철회하고 은평뉴타운으로 이전했다.

2015년에 가회동 백인제 가옥이 100년 전 서울 최상류층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역사 박물관으로 오픈됐다.# #

백인제 박사는 엄청난 땅부자였다고 한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서 피고인의 팔다리에 있는 상처와 요통이 고문에 의한 것인지를 검사한 의사다. 눈에 있는 상처가 고문에 의한 것인지를 검사한 건 공병우다. 상처가 고문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진단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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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 백인제를 검색하면 인물 정보에 의사양반 사진이 나왔으나 지금은 원래 사진으로 교체되었다. 또한 납북 관련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아 나이가 123세로 나온다.하지만 지금은 1950년으로 수정되어 있으며 사진도 없다.[21]

6. 대중매체에서

SBS 드라마 야인시대존재감이 큰 등장인물이자, 내가 고자라니의 주역인 의사양반의 모티브가 이 백인제 박사일 가능성이 높다. 병원 이름도 백병원이고, 다른 병원에서 안 돼서 이리로 왔다는 언급과, 가장 위험한 급소 중 하나를 총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고자 선에서 끝내고 완벽히 살려낸 것으로 보아 의사로서의 실력이 상당한 것도 충실한 고증이다. 담당 배우인 강승원의 외모 또한 실존인물과 매우 흡사한데, 야인시대에 출연했던 배우들 중 일부가 실존인물과 담당 배우가 많이 닮았다고 해당 인물들의 주변인들이 증언하기도 했다.외적인 소품인 뚜렷한 검은 원형의 안경으로 고증에 충실한 야인시대의 의도를 볼 수 있다.

다만 당시 신문에 따르면 실제로 심영이 입원한 곳은 백병원이 아닌 김성진 외과였다고 전해진다. 김성진도 당대에 이름을 날린 뛰어난 외과의사였다. 백병원에 입원했다는 건 김두한의 증언에 따른 것. 하지만 신문에서도 김성진 외과에서 응급처치를 받았다까지만 나와있고, 김두한의 증언에 허풍이나 과장이 많이 섞여있기는 하지만 심영 습격 사건은 정황상 김두한이 실제로 벌인 일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병원을 헷갈릴 이유도 딱히 없어서 처음에 김성진 외과에 입원한 이후 의료전달체계에 의해 백병원으로 옮겨왔을 가능성도 높다. [22]


[1] 1898년생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는 음력으로, 양력으론 1899년생이다. 또한 1898년 1월 28일생으로도 알려져 있다.[2] 수원 백씨 집성촌이다.[3] 인주공파(仁州公派) 19세 ◯제(濟) 항렬. 수원 백씨 31세.[4] 형과 마찬가지로 납북됐다.[5] 형과는 달리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6] 박사 학위논문: 実験的佝僂病の研究 (1928)[7]서울특별시 부시장에 해당한다.[8] 조수(助手)보다 아래 직급.[9] 도쿄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건 조선인으로서는 그가 3번째다.[납북기록] 6.25 사변이 나자 신변의 위급을 느껴 당일로 서울시 중구 을지로3가 22번지 친우 박씨 댁에 은신. 1950년 7월 19일 오전 5시경 피신해 있던 곳에서 사복한 공산당정보원(30세 미만) 2명에게 체포되어 시울시 남대문통 현 국립도서관(당시 정치보위부)에 수감되었음. 정치보위부와 서대문형무소에 동거하던 권씨 말에 의하면 白은 2주간 보위부에 있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함. UN군의 인천상륙과 동시에 동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약 3,000면 가량되는 전원을 몇 부대로 나눠 낮에는 수풀과 건물 속에 숨기고 밤이면 보행을 계속 시켰는데 그때 오행히 기회를 얻어 탈출에 성공한 사람도 있다 함. 전기 권씨 말에 의하면 백박사는 자기와 같이 그 행렬 중에 섞여 동두천이라는 38선 가까이까지 간 것을 증언하였음(이 권씨는 탈출에 성공한 사람의 한 사람). 서울대학 교수 나세진 박사가 이북에서 넘어온 교환포로 신체검사 당시 들은 바에 의하면 백 박사는 대단한 감시하에 강제로 환자 진료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또 자기도 진료 받은 일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함. #[11] 정인욱 강원산업그룹 창업주의 3녀.[12] 신봉조 전 이화학당 이사장의 아들.[13] 사실상 백인제의 양자나 다름없다. 생후 6개월에 친모가 사망했는데 이 때 백붕제의 나이가 불과 17세였다. 할아버지 손을 거쳐 백부 백인제의 슬하에서 성장했다.[14]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명예교수 성대경(1932~2016)의 아들.[15] 김치열 전 내무부장관의 딸.[16]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으로 인주공파 25세 행(行) 항렬이다.[17] 중구[18] 영화 암살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부호 강인국의 저택으로 촬영되기도 했다.[19] 처음 이 집을 짓고 거주한 사람이 이완용의 조카이자 본인도 친일 부역자인 한상룡이다.[20] 다만 원래 고문 흔적이 남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고문 기술이며, 정판사 사건에서 자행된 건 물고문이라 상처를 남기는 고문이 아니며, 고문이 가해진지 5개월이나 지났다는 점에서 고문 흔적은 진짜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21] 문서에 나와있지만 1953년까지는 살아있어서 이마저도 잘못된 정보이다.[22] 야인시대에서도 의사가 "당신, 다른 병원에서 안돼가지고 이리로 왔어요." 라고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