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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파일:Magsaysay_award_medal.png 한국인 막사이사이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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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장기려
張起呂 | Chang Kee-ryo[1]
파일:5808_6231_312.jpg
출생 1911년 10월 5일[2]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3]
(現 평안북도 룡천군 신암리 두바위골)
사망 1995년 12월 25일 (향년 84세)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2가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4]
본관 안동 장씨 (安東 張氏)[5]
학력 송도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나고야제국대학 (의학 / 박사[6])
직업 외과 의사
종교 개신교 (장로회)
1. 개요2. 생애3. 업적4. 여담5. 관련 저서

[clearfix]

1. 개요


많은 기독교인의 품성의 롤모델이라고 볼수있는 존경받는 훌륭한 대한민국의 의사. 부산복음병원(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설립자 겸 초대 원장, 제2대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장 겸 병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1968년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창설했다. 1977년 의무의료보험이 출현하기 이전 임의가입의료보험의 체제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의료보험조합이며, 이는 이후 대대적인 언론보도를 통해 전국적인 의료보험조합 설립운동인 청십자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청빈과 봉사하는 삶을 산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별명으로는 '바보 의사'[7], 한국의 슈바이처, 작은 예수 등이 있다.

EBS-e 1부 EBS-e 2부 EBS 요약

2. 생애

1911년 10월 5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현 룡천군 신암리 두바위골)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운섭(張雲燮, 1877. 5. 9 ~ ?)이며 어머니는 해주 최씨 영세(崔永世)의 딸이다.

드라마 야인시대의사양반 역의 모델이 되었던 백인제의 수제자로 송도고등학교,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경성의전 외과 조수로 입문하고 나고야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이후 스승 백인제는 장기려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대전도립병원(현 충남대학교병원) 외과장 자리를 추천하였다. 당시 조선인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는 자리였고, 아마도 백인제는 자신이 퇴임한 후 경성의전 외과학 교실을 장기려가 이끌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이나, 장기려는 일본인들과 일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세브란스 외과 이용설의 추천으로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장으로 부임한다. 1948년 7월 7일,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 157호에 따라 한설야, 남일, 리문환, 리순근, 리동화, 허남히, 리병제, 정준택, 계응상, 태성수와 함께 고등교육원 내에 설치된 최고과학기술평의회 성원으로 위촉되었다. 그 이후 평양의학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내던 중 6.25 전쟁 중 차남 장가용(張家鏞)과 단신으로 월남하여, 피란민들로 가득한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세웠다.[8]

김일성을 수술해준 인연 덕에 장기려는 북에서 매우 우대받았는데 모범근로자로 선정되어서 포상도 자주 받았고 여러차례 상도 받았다. 김일성이 맹장염으로 앓아누운 적이 있었는데, 김일성은 장기려부터 찾았지만 그와 연락이 안돼서 소련 군의관이 집도했는데 북에서는 장기려가 수술했다더라라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장기려의 명성은 높았고 북에서의 지위도 높았다. 심지어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교회에도 가고 예배를 할 특권도 주어졌다. 게다가 그가 월남했을 때도, 북에서는 그가 월남한 것이 아니라 남측에 납치된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 덕분인지 이북에 남은 아내와 딸들과 아들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월남자 가족은 동요계층, 심지어 적대계층에 편입되어서 수모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이례적인 사례이다.

평양 철수로 월남한 직후에는 북에서 우대받은 일로 인해 자주 방첩부대(현 국군방첩사령부)에 끌려가서 문초를 당했는데, 다행히 한 미국인 선교사가 신분을 보증해줘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을 평전에서는 '조봉암억울하게 죽었는데, 이러한 사회에서 온전하게 있었을까?'라는 표현으로 서술하고 있다.

춘원 이광수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를 만나고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로 삼았다는 말이 있는데 장기려 본인은 부정했다. 사실 안빈이 과학에 미쳐 인도주의적 이미지가 없는 광기 가진 인물로 그린 티가 있는 것과 이광수가 보이는 비극적 죽음을 선택한 여성을 비하한 예를 생각한다면 자기가 모델이란 점에 굉장히 불쾌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후에 한국 최초의 부검의가 되는 문국진이 제자인데, 부검을 1950년대만 해도 두번 죽인다는 인식이 깊게 깔려 반대를 외쳤던 일화가 있다는 점에서 추측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눈총과 고된 업무로 지친 제자 문국진이 부검의를 관두려고 할 때 불같이 혼을 내 정신을 차리게 한 이도 장기려다.[9]

일제강점기때부터 외과의사로 살아왔고, 그의 아래에서 일한 제자들은 모두 다 외과 전문의이긴 하나 해방이후 국가가 주관하는 첫 외과전문의 시험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의사가 되려고 공부했지 전문가가 되려고 공부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대한외과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부산에서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이외에도 청산리병원을 비롯한 부산에 설립한 의료시설이 많다. 부산 지역 대학병원 외과의 뿌리는 장기려로 시작되거나 직간접으로 연관되어있으며, 심지어 장기려 박사가 제2대 원장 겸 의과대학장으로 재직했던 부산대학교병원에는 장기려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초량동에 정식으로 장기려 기념관이 세워졌다.

199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지병인 당뇨병에 의한 합병증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84세.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매우 청빈한 삶을 살았으며, 향후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10] 별세할 때까지 본인의 개인 사택 없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옥탑방에서 기거했으며, 향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3. 업적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968년 청십자 의료보험을 창설, 많은 사람에게 골고루 나은 의료혜택을 입도록 한 것이다.[11]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12]은 1977년 의무의료보험조합이 출현하기 이전에 유일하게 성공했던 임의의료보험조합으로 전국적으로 의료보험조합 설립운동인 청십자운동을 일으키는 계기와, 의료보험조합의 필요성에 대해서 국민들에게 큰 인식의 전환을 마련시켰다.[13]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의료보험 도입에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한 것에는 이견이 없다. 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현행 의료보험의 기초가 되었으며, 의료보험 도입으로 인한 의료환경변화의 여파를 생각한다면 그가 한국 의료계에 끼친 영향은 독보적이라고 한다. 반면, 의료보험연합회는 1997년 발간한 "의료보험의 발자취"에서 청십자의료보험에 대해서는 1968년 이후 시작된 임의가입의료보험조합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했던 사례로 격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1977년 의무의료보험조합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공백기를 매웠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의료보험의 도입에 대해서는 당시 보건사회부 중심의 관의 주도로 진행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는 의료보험을 도입한 의료행정가이기 이전에 유능한 외과의사였는데, 이러한 공적으로 장기려는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부문)을 받았으며, 1995년 인도주의 실천 의사 상 등을 받았다. 노년에는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백병원 명예원장으로서 집 한칸 없이 협소한 옥탑방에서 지내면서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한국의 성자로 칭송 받고 있다. 1943년 국내 최초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내는데 성공하였고, 1959년에는 간암 환자의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하였다. 한국 외과학에서 미개척 분야였던 간장외과의 발전과 의료 인재 양성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4. 여담

5. 관련 저서



[1] 영어 위키백과에서의 표기. 그리고 개정된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Jang Gi-ryeo,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으로는 Chang Ki-ryŏ라고.[2] 음력 1911년 8월 14일[3] #[4]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다. 평생동안 예수의 인격을 흠모하던 크리스천인 그였기에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평안도는 김씨 정권이 자리잡기 전까지는 한반도에서 개신교의 성지로 유명했었다. 그리고 서울백병원은 스승 백인제가 설립한 병원이며, 당시 장로 직분이었다.[5] 한국에서는 인동 장씨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이쪽으로 오인할 수 있지만 안동 장씨다. 장양공(莊襄公)-화성군(花城君)-철공계(哲公系)-희증공파(熙增公派)-의사공파(義士公派) 34세 기(起) 항렬.[6] 박사학위논문: 急性虫様突起炎並に虫様突起炎性腹膜炎の細菌学的研究 (1940)[7] 아래에 언급되지만, '바보'라는 칭호는 장기려의 선량한 품성을 칭송하는 표현이다. 이와 비슷하게 바보가 긍정적으로 쓰이는 케이스는 노무현을 칭송하는 '바보 노무현'과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지칭하던 '바보 추기경'이 있다.[8] 본래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UN군평양을 점령하자 다친 그들을 치료했으나 50여일 뒤인 12월 4일, 북한군들이 중공군들과 평양으로 다시 들어온 다는 소식에 부인 김봉숙의 권유에 따라 남으로 피란했다.[9] 참고로 북한에서는 부검이 일상화되었는데 여전히 부검에 대한 인식이 나빴던 한국에서는 1994년 김일성이 죽은 후 김일성을 부검했다는 북한 보도에 암살의 증거로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10] 사실 엄밀히 말해서 재산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수중에 천만 원 정도는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천만 원을 자신을 간병해 주었던 간호사에게 전부 주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간호사가 받지 않으려고 하자 장기려 유족들이 제발 받아달라고 호소를 했다.[11]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은 1955년 설립된 부산노동병원의 의료보험조합이다. "의료보험의 발자취", 의료보험연합회, 1997.[12] ET 할아버지로 유명해지는 채규철, 김서민 등과 함께 설립. 1977년 의무보험이 시작되기 전 임의가입의료보험조합시절 유일하게 성공한 의료보험조합으로 청십자운동이라는 전국적인 의료보험조합 설립운동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자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그러나 청십자의료보험을 통해 만든 병원은 아직 부산 전포동에 청십자병원(행복한병원)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13] 1963년 의료법에 따른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은 중앙의료보험조합인데 업무를 시작한지 몇개월 되지 않아 납부문제 등의 어려움으로 문을 닫는다. 이후 몇개 의료보험조합이 설립되었으나, 임의가입의 제도적 한계와 불신의 문제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었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성공비결은 국가에서 1억원 가까운 막대한 예산투입과 당시 부산시의 지방비를 지원한 것, 그리고 부산사람들의 의료보험조합에 대한 상대적으로 높은 신뢰도와 상대적으로 높은 납부율로 지적된다.[14] 장기려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이후에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보강된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수가가 계속 낮아졌는 데, 이에 상응하는 만큼 의료인들의 수익이 보장되느냐를 놓고 찬반 논쟁이 한번씩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이를 알만한 의료인 출신 방송인 한 명이 이를 무시한 발언을 하다가 심각한 후폭풍을 맞았다는 것을 생각하면...[15] 당시 조선에 있던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등은 모두 구제중학교에 상응하는 중등교육기관이라 장기려가 갈 급이 아니었다. 장기려는 이미 구제중학교에 상응하는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구제고등학교, 구제전문학교, 혹은 대학예과를 가야 했다. 당시 일본(식민지 조선 포함)의 학제는 구제대학 학사과정에 진입하려면 이 셋 중 어디 하나라도 나와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될 거면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가 아니라 중등교사를 양성하는 고등사범학교를 가야 했다. 고등사범학교도 구제고등학교에 상응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기 때문. 그러나 고등사범학교는 조선에는 없고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대학),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현 히로시마대학),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등 죄다 일본 본토에만 있었다. 이러면 유학이 되니 학비도 당연히 엄청 깨지고, 게다가 고등사범학교는 구제전문학교들보다 격이 우월하여 입결도 구제전문학교보다 훨씬 높았다.[16] 지강유철의 평전 '장기려, 그 사람'에는 "공업이 국가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17] 전술했듯 일본 제국의 구제대학 본과(학사과정)은 고등보통학교 졸업 학력으로는 바로 들어갈 수 없고 예과에 먼저 합격하여 본과로 자동 진입하거나 구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을 합격하여 입학하거나 구제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을 합격하여 선과생으로 입학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예과 시험에서 미역국을 먹은 것.[18] 단, 4년 성적 평균으로 석차를 냈기 때문에 실제로는 차석이었다고 한다.[19] 제자였던 허정 전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장이 증언하기를, 주변 친구들과 제자들이 재혼을 권유해도 장기려 박사는 "결혼은 한 번만 하는 거라네."라며 고사했다고 한다.[20] 사실 장기려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다. 북에서는 장기려가 남측에 끌려갔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장기려의 가족들이 북한에서 대우를 받고 살 수 있었던 것인데 만일 정부의 말을 듣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긴다.[21] 여담으로 베를린의 경우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냉전 시절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이 직접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터진 사건이 동베를린 간첩단 조작 사건이다.[22] 차남 장가용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 의사가 되었고, 2008년에 사망했다. 장가용의 아들이자 장기려의 손자인 장여구 서울백병원 교수도 의사가 되어 3대 의사 가문을 이루어내었다. 나아가 장여구의 아들도 중앙대 의대에 재학 중이므로 이 아들까지 의사가 되면 4대에 걸친 의사 가문이 된다.[23] 현재 국내에서 유일한 곤충법의학 전공 교수로 있는, 고신대학교 교수 문태영이 바로 문국진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