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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09:55:45

진창현

파일:무궁화장 약장.png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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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C008><colcolor=#00A99A>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진창현
陳昌鉉 | Jin Chang-hyeon
파일:attachment/jinchanghyeonportrait.jpg
출생 1929년[1]
경상북도 김천군 감문면 태촌리 배시내마을
(現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태촌리 이천마을)
사망 2012년 5월 13일 (향년 83세)
일본 도쿄도 쵸후시 와카바초 자택
국적 조선적
본관 미상
학력 곡송심상소학교 (졸업)[2]
김천고등보통학교 (중퇴)[3]
후쿠오카현립 후쿠오카구제중학교 (야간과정 졸업)[4]
메이지대학 (영문학 야간학부 / 학사)
1. 소개2. 생애3. 수상 경력4. 에피소드

[clearfix]
무감사 현악기 제작자(Hors Concours)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
동양의 스트라디바리, 진창현
1984년,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
스트라디바리도 70세부터 88세까지 최고의 악기를 만들었어요. 한국 나이로 80세가 되었으니 나는 지금부터 황금시대입니다. 바이올린 제작자로서 청춘인 거죠. 난 기대하고 있어요. 내일 더 좋은 악기를, 다음 날 더 좋은 악기를 만든다는 꿈. 그것만 생각해도 나는 행복해요.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비밀에 80%까지 근접했다고 스스로 확신했을 때, 남극으로 갔어요. 탄생의 순간이 가장 근접하게 남아 있는 땅, 남극이 심경에 주는 자극은 대단합니다. 머리가 너무 청명해져서 잠이 안 올 정도죠. 그 땅에서 귀에는 안 들리지만 사람의 뇌를 흔드는 음파, 초음파에 대한 영감을 떠올렸습니다. 파장이 짧아 멀리 가는 초음파가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에 들어 있어요. 남극 여행을 다녀온 후 1년 만에 10% 정도 스트라디바리우스의 비밀에 더 다가섰죠. 지금 아주 정신이 충일한 상태에서 살고 있으니 곧 나머지 10%도 정복하지 않을까요?

또다른 소망 하나가 있어요. 내가 묻히게 될 묘를 미리 만들어놓았는데, 내 자손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인생을 걸고 만든 작품을 가진 사람들이 한 번쯤 찾아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이 소망도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죠?
2008년 11월, 잡지 "행복이가득한집"과의 인터뷰에서

1. 소개

재일 조선인 출신의 현악기 제작자.

2. 생애

일제강점기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나무를 깎아 고무동력기를 만드는 등 손재주를 발휘했고, 이후 고향에서 약장수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면서 현악기의 매력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소학교 4학년 때 중일전쟁의 징병을 피하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와 교사로 부임한 아이카와 키쿠에(相川喜久衛)가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기초적인 바이올린 연주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이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봤고, 순사가 될 것을 강요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교사가 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중학교 과정을 끝마치기 위해[5] 후쿠오카로 건너가 낮에는 막노동을 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는 고학을 했다.

일본이 패전한 뒤에도 남아서 계속 육체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이후 요코하마로 옮겨가 인력거를 몰면서 학비를 모아 메이지대학의 영문과 야간학부에 입학했다. 여기서 영어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당시 조선인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 때문에 일본에서는 교사로 일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대학 재학 중에 제로센 설계자였던 이토카와 히데오가 대학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소리에 대해 음향학적으로 고찰하는 강연회에 참석한 뒤, 현악기 제작자로 장래 희망을 바꾸었다. 하지만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아 찾아간 일본 현악기 장인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제자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나가노의 기소후쿠시마 쵸에 있던 스즈키 바이올린 공장에서도 입사를 거절당해 근처 공사장에서 채석과 벌목 같은 거친 노동을 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 와중에 현악기 제작에 필요한 양질의 목재를 감별하는 법을 익혔고, 목재를 바이올린 공장에 팔고 공장의 제작 과정을 어깨너머로 봐가면서 바이올린 제작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이후 공사장 근처에 오두막을 짓고 막일과 바이올린 제작을 병행했고, 아내의 제안으로 도쿄에 가서 악기 매입을 시도했다. 이 때 도호학원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바이올리니스트 시노자키 히로츠구(篠崎弘嗣)[6]가 어린이 교육용 악기로 사들이기 시작했고, 이후 도호학원을 위해 정기적으로 바이올린 제작과 납품, 수리를 시작했다.

1961년 가을에는 학원과 비교적 가까운 도쿄마치다시로 이사했고, 약 1년 뒤 쵸후시와카바초로 다시 이사해 바이올린 공방을 만들어 악기 제작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후 교육용에서 성인용으로 악기 제작 영역을 넓혔고, 바이올린 외에 비올라첼로의 제작도 시작했다. 악기 제작으로 어느 정도 생계 유지가 가능해지자 1970년에는 2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동생의 명성을 시샘했는지 이복형이 북한공작원이라고 허위 신고를 하면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일본 경찰의 신원 보증이 있은 다음에야 풀려나 도망치듯 일본으로 돌아오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자작 현악기들로 도쿄에서 개인전을 개최해 악기상들의 관심을 모았고, 1974년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진창현: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1976년 12월에는 미국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The Violin Society of America) 주최의 제2회 국제 현악기 제작자 경연대회에 참가해 여섯 개 부문 중 바이올린 세공 부문, 비올라 세공/음향 부문, 첼로 세공/음향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세계구급 제작자로 명성을 확고하게 만들었고,[7] 1984년에는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에서 '경쟁 외 제작자Hors Concours'[8] 자격과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 칭호를 받았다.[9]

이후에도 계속 쵸후시의 와카바초 JIN공방에서 현악기 제작을 계속 했고, 2000년에는 미국 신시내티에서 열린 국제 현악기 제작자 경연대회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무감사 현악기 제작자의 제작 참고 악기로 선정되어 전시되기도 했다. 2001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 바이올린 '광주호'를 시작으로 이듬해 바이올린 '대구호', 비올라 '한라호', 첼로 '백두호'까지 네 점의 악기를 무상 기증하면서 대인배 인증을 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후지 테레비에서 구술 회고록을 바탕으로 각색한 드라마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海峡を渡るバイオリン)'이 방영되었고, 여기서 진창현 역을 쿠사나기 츠요시가 맡아 화제가 되었다.[10] 이외에도 2003~06년에는 야마모토 오사무가 일대기를 '천상의 현(天上の弦)'이라는 제목의 만화로 만들어 쇼가쿠칸에서 연재하기도 했다.

80대에 접어들며 아들들에게 가업을 물려준 뒤에도 계속 공방에서 악기 제작을 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지만 2012년 2월에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투병 중이던 5월 13일에 쵸후시 와카바초의 자택에서 향년 83세로 타계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3. 수상 경력

4. 에피소드



[1] 정확한 날짜 불명.[2] 곡송초등학교. 지금은 폐교되었다. 이철우 現 경상북도지사도 이 학교 출신이다.[3]김천중학교. 이후 명예졸업장을 받았다.[4] 現 후쿠오카 중·고등학교[5] 당시 진창현이 다녔던 중학교는 김천중학교였다. 13회 명예졸업.[6] 스즈키 신이치와 함께 일본 현악 교육의 거물로 손꼽히는 인물로, 자신의 성을 딴 바이올린 교본도 만든 바 있다. 한국에서도 현악기 초심자들이 흔히 접하는 것이 스즈키 아니면 시노자키 교본.[7] Chang Heyern Jin이라고 표기된 수상자가 바로 진창현이다. 링크를 통해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단일 경연대회에서 서로 다른 5개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제작자는 진창현이 유일하다. 그 다음으로 단일 경연대회에서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파울 비스마이어(Paul Wiessmeyer; 독일의 바이올린 제작자.)로 이 사람은 1982년 경연대회에서 서로 다른 네 개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참고로 1980년부터 현악기에 쓰이는 현의 제작자 경연대회도 시작되었다.[8] 프랑스어로 '경쟁 외(outside of competition)'라는 뜻이다. '이미 실력이 너무 뛰어나니 더 이상 대회에 나오지 말라'는 의미를 가진 상인데, VSA 대회에서 세 개 이상의 금메달을 수상한 제작자들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어째서인지 한국에서는 '누구의 감사를 받지 않고 제작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의 '무감사'라는 해괴망측한 오역으로 소개되었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다. 개인 제작자라면 누구나 자기 이름을 걸고 악기를 판매할 수 있다. 지금까지 Hors Concours 칭호를 받은 사람은 단 30명뿐이다.[9] 마스터 메이커 칭호를 받은 사람은 전 세계에서 단 5명뿐이며, 아시아 출신으로서는 유일하다.[10] 나머지 배역들의 캐스팅도 꽤 주목할 만한데, 진창현의 아내인 나미코 역을 칸노 미호가, 진창현의 어릴 적 멘토였던 아이카와 선생 역을 오다기리 죠가 맡았다.그리고 아버지는 정동환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