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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3:03:52

이이화

파일:무궁화장 약장.png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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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이화.jpg
이름 이이화(李離和)
본관 연안 이씨[1]
출생 1937년 8월 27일
경상북도 달성군 달서면 비산동
(現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
사망 2020년 3월 18일 (향년 82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광주고등학교 (졸업)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 중퇴)
경력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석좌교수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
고구려역사문화재단 상임공동대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1. 개요2. 일생3. 저서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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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사는 세상과 소통하는 실천 학문이에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해요.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열어갈 수 없어요.”
2015년 4월 ,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中
질문 :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뿐 아니라,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있습니까?
대답 : "내가 <한국사 이야기>를 쓰면서 표방한 것이 세가지예요. 민족사, 민중사, 생활사를 쓰겠다고요. 침략적 우월적 민족주의 말고 외세 침탈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는 생존적 민족주의, 대다수 평범한 상놈과 종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민중사, 그리고 뭘 먹고 뭘 입고 어디서 살았는지, 어떤 놀이를 했는지 그 생활을 조명하는 생활사. 역사라는 게 태정태세문단세… 그딴 거나 외우고 연도나 외우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 왕들 이름 다 외워서 뭐할 거야?
2015년 11월 , 한겨레와의 인터뷰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것은 헛소리예요. 인류는 과거를 기억하면서 미래를 만들었어요. 예를 들어 6.25 동란으로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파탄났어요? 그래서 우리가 전쟁은 더 이상 하지 말자고 하는 거예요.”
2017년 7월 , 경향신문과의 인터뷰 中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재야에서 한국사를 연구하며 100여 권의 대중 서적을 출판했다. 한국사를 대중화하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생전에 역사학계의 원로 대우를 받았다. 작품으로 22권의 분량을 자랑하는 <한국사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2. 일생

네이버캐스트에 인터뷰로 소개된 그의 일생

1937년 8월 27일, 경상북도 달성군 달서면 비산동(現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2]의 빈민촌에서 한학자였던 아버지 야산(也山) 이달(李達, 1889 ~ 1958)[3]과 어머니 박순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7살 되던 1943년 전라북도 익산군(現 익산시)으로 이주했으며,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대둔산 자락의 충청남도 논산군(現 논산시)으로 이주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충청남도 서산군 안면면(現 태안군 안면읍) 안면도로 피난했고, 이후 부여군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이달은 이곳 부여군에서 사망했다.

아버지가 한학자였기에 그는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니지 않고 한문 교육을 받고 자라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학교에 다니고 싶어 16살의 나이에 가출한다. 가출한 그는 고향인 경상북도 대구시(現 대구광역시)와 부산시(現 부산광역시), 전라남도 여수시의 고아원을 전전하다가 전라남도 광주시(現 광주광역시)로 올라와 입시 공부를 했고, 1955년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여관 종업원으로 일하며 고학하던 끝에 광주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그는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지만 어려운 형편 탓에 1년 만에 중퇴하고 만다.

대학을 중퇴한 이후 이이화는 온갖 잡일을 하면서 떠돌아다녔다.[4] 그러면서 그는 독서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67년 동아일보 출판부에 임시직으로 들어가게 되어서야 그는 옛날보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그는 천관우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그 과정에서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5] 1973년 동아일보를 나온 이이화는 「신동아」로 빠져나가 독립운동가 신규식평전을 썼고, 「창작과 비평」에서는 허균에 대한 글을,[6]뿌리깊은 나무」에서는 한국사 내의 파벌에 대한 글을 각각 연재하였다. 1980년 뿌리깊은 나무에서 <허균의 생각> 초판을 연재하다가 신군부가 <허균의 생각>을 금서로 지정한 적이 있었다. 이이화의 말에 의하면 허균의 호민론이 신군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다. #

이 외에도 한국사에 대한 여러 글을 잡지에 연재하였고, 1974년 민족문화추진회(現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설립한 국역연수원(現 고전번역교육원) 연수부 1기에 입학해 수료한 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전 번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고전 번역을 담당했으며[7][8] 또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現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일하기도 했다.[9]

이런 그의 활동으로 몇몇 저작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상당한 양의 원고 청탁이 들어오며 이이화는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집필 및 연구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1986년 임헌영, 서중석, 박원순 등과 함께 역사 대중화를 지향하며 역사문제연구소를 조직했다. 거기서 그는 민중사와 생활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했으며, 특히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조명과 기념/추모 사업을 벌였다. 1994년부터는 한국사를 '통사'로 엮겠다는 다짐으로 은둔 생활로 들어가 2004년까지 10년 동안 22권의 <한국사 이야기>를 완성하였다. 이 책을 통해 이이화는 명실상부한 역사학자로 거듭났고, 많은 학술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 친일인명사전 집필, 동학농민운동 명예회복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면서 왕성히 활동했다.

2020년 3월 18일 향년 84세, 만 82세로 사망하였다. 이튿날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3. 저서

공저와 만화, 어린이 도서는 제외한 저서는 다음과 같다.

4. 기타


[1] 통례문부사공파 23세 화(和) 항렬.[2] 달성공원 근처였다고 한다.[3] 본명은 이순영(李侚永). 한학자였으며 주역 연구로 유명하다.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의 연안 이씨 집성촌에서 출생. #[4] 이 당시 그는 본적이 경상북도 김천군으로 되어 있었지만 거주지가 일정하지 않은 터라 본의 아니게 병역기피자가 되어 버렸다. 또 당시에는 5.16 군사정변이 터지던 때라서 검문도 피해 다녀야 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본인에 따르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기피자 신분이 풀렸다고 한다.[5] 본인 말로는 학사과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6] 이이화와 「창작과 비평」 간의 선은 시인 신경림이 놓아주었다고 한다.[7] 당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로 있던 박병호(朴秉濠, 1931 ~ )가 고전 해제집을 내고자 이이화에게 직접 부탁을 했다. 그러자 이이화는 "출퇴근 시간을 따지지 말 것"과 "자기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박병호가 이를 수락하면서 규장각에 취직한다. 여기서 그는 박사학위 과정을 밟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일했는데 그에게는 일종의 박사 과정이었다고 한다.[8] 한편 여담으로 이 당시가 전두환 정권인지라 일 끝나면 동료들과 함께 민주화를 요구하며 데모를 나가기도 했다고...[9] 이이화 본인의 말에 따르면 별로 내켜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름도 이름인지라 직장 이름을 들으면 '정신병원(...)이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단다.[10] 초판이 1980년 출판되었으며 신군부가 금서로 지정한 이후 개정판이 여러번 출판되었다.[11] 원래 이 만화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잘못된 정보가 적지 않다.[12] https://m.blog.naver.com/humans13/222108060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