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달 崔容達 | |
본관 | 강릉 최씨 |
출생 | 1902년 |
강원도 양양군 군내면 조산리[1] | |
사망 | 미상 |
국적 | 대한제국 → 북한 |
학력 | 함흥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 /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 / 학사) |
직업 |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교육인, 정치인 |
경력 | 경제연구회 대표, 조선건국동맹 치안부 책임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정치 노선 | 좌파 |
이념 | 공산주의, 사회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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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교육인, 정치인.2. 일생
2.1. 일제강점기
1902년 강원도 양양군 군내면(현 양양군 양양읍) 조산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키가 작고 마른 체격에 까무잡잡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대단히 형형했고 공부를 아주 잘했다고 한다.1925년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2기로 입학하여 문과 과정을 수료한 후 1927년 법문학부 법학과로 진학하였다. 법문학부에서 재정학 강좌담당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1년 선배인 유진오가 조직한 경제연구회에 동기생 박문규, 리강국 등과 함께 가입하였다. 경제연구회는 사회주의 이념 서클로서, 공산주의 이론 및 식민지시대 조선실정에 대한 공부를 하는 동아리였다. 거기에서 조선의 언어문화를 연구하고 조선 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을 수행하였다. 1929년 원산부두노동자 파업 때에는 경제연구회 대표로 파견되어 그 진상을 조사, 보고하기도 하였다.[2]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한 후, 법문학부 사법연구실 조수(1930.4~1932.3)로 남아 학업을 계속하였다. 1929년에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학술지 《신흥 新興》의 발간에 간여하였다. 그가 기고한 논문의 제목은 ‘사유재산권(私有財産權)의 기초(基礎)’(1929.7.)였다.
1932년 4월에는 유진오의 알선으로 보성전문학교 법과 강사(이후 교수)로 초빙되었다. 설립 때부터 구제 제1고등학교-도쿄제국대학 출신들이 장악한 경성제대 교수진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막론하고 경성제대 학부 출신을 자교 교수로 뽑아주지 않았던 반면,[3] 김성수가 인수하여 구제대학에 준하는 학교로 키워나가던 보성전문학교는 실력 있는 조선인들을 대거 교수로 뽑아주었기 때문이다. 그 후 다년간 보전 법과 교수로서 재직하였다. 그가 주로 담당했던 과목은 법철학이었다.
보전 법과 교수로 있으면서 조선공산당 재건 작업에 관여했고, 제자들의 의식화 활동에도 진력하였다. 최용달에 의해 의식화되어 공산주의자가 된 대표적인 학생이 바로 이호제이다. 물론 이러한 활동 때문에 수시로 경찰서에 불려가서 취조를 받아야 했다.
독일에 유학 갔던 리강국이 귀국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가담하였다. 1936년 7월 이주하, 리강국과 손잡고 '노동자신문'을 발행하였으며, 1937년 6월에는 서울에서 공산주의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그 후 제38호까지 노동자신문을 발간하고, 원산철도국을 비롯한 여러 공장에 적색노조를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1938년 10월 '적색노동조합 원산좌익위원회사건'으로 검거되었다. 그로 인해 1942년까지 무려 4년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하였다.
1942년 집행유예로 석방된 후, 보성전문 법과 교수직으로 돌아가자마자 다시 학생조직을 결성하였다. 그러다가 1944년 봄에 검거되어 6개월 동안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그 뒤에는 박문규, 리강국 등과 같이 비밀결사인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에 참여하였다. 그 사이 1년 선배 유진오는 일제의 고문을 못 견디고 전향하여 친일활동을 했다.
최용달도 친일 의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친일 전향자 단체인 대화숙에 가입했었기 때문. 물론 어디까지나 위장전향에 불과했고 이후에도 학생조직을 결성하고 건국동맹에 참여하는 등 끝까지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2.2. 광복 이후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건국동맹을 주축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1945년 8월 22일에는 유석현, 장권, 정의식 등과 함께 치안부 책임을 맡았다. 여담으로, 이 당시 유진오가 건국준비위원회에 찾아와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기다려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자, "그럴 필요 없다"고 차갑게 내쳤다고 한다.1945년 9월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여 조직된 조선학술원 상임위원을 역임하다가 월북하였다. 1945년 11월 북조선인민위원회에 참여하였다. 1946년 2월에는 사법국장을 역임하고 조선로동당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46년 3월 북한이 토지개혁을 실시했을 때에는 토지개혁법령의 입안자 겸 집행권자로서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진두지휘하였다. 또한 노동법령, 남녀평등권법령도 제정하였다.
1948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기초하였다. 경성제대 법학부 1년 선배이자 보전 법과 선배교수로서 막역한 친구이자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유진오는 남쪽에서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였기 때문에, 당시 유진오와 최용달의 남북한 헌법 기초는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최용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인민민주주의국가란 노동 계급을 선두로 한 광범한 근로인민의 국가이고, 자본주의 제도와 부르주아 통치의 복귀를 위한 모든 시도를 반대하는 강력한 도구이며, 사회주의로 가는 길로 국가 발전을 보장하는 과도기적 국가'이다. 이른바 사회주의 전단계의 국가인 것이다. 물론 그가 이렇게 꿈꾸었던 공화국이 머지않아 관료주의, 획일주의, 문화 쇄국주의, 좌익 전체주의로 명명될 1인 독재국가로 전락할 줄은 그로서도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1948년 8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에는 리강국과 함께 산업성에 딸린 일반제품 수입상사 사장직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다가 잠적하여 소식이 끊겼다. 일설에는 남로당 숙청 당시 '미제의 간첩' '반역자'로 몰려 박헌영, 리강국과 함께 숙청되었다고도 한다.
최용달이 기초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은 24년간 시행되다가 1972년 12월 27일 '사회주의의 완성'을 이유로 폐지되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이른바 '사회주의헌법'이었는데, 이것은 1992년에 다시 대폭 개정되어 '김일성헌법'으로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