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1월 18일[1] ~ 1957년 2월 27일 (향년 55세)
1. 개요
일제강점기의 교육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창씨명은 리노미야 보모쿠(李宮卯默)이다.2. 생애
1902년 1월 18일 평안남도 상원군(現 평양시 상원군)에서 아버지 이수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3년 평양부 광성학교 고등과에 입학해 1917년 졸업했고, 1917년 연희전문학교[2] 문과에 입학해 1921년 졸업했다. 이후 잠시 공주군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주 소재 마운트 유니온 대학교 문과에 입학해 1925년 졸업하고 1925년부터 시라큐스 대학교 대학원에서 역사학과 철학을 주 전공, 정부 및 사회학을 부전공으로 해 수학한 뒤 1926년 도서관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27년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수학하다가 1931년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박사 학위 취득 후 모교인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사학을 강의하던 중 1934년 귀국해 모교인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고,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장, 연희전문학교 학감 등을 겸임했다.
그러나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었고,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노진설 등과 함께 사상전향서를 제출하고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에 충성을 맹세한 뒤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이후 연희전문학교 학감 및 교장에 취임했다. 1938년 6월 18일 노진설을 비롯해 정영도(鄭英道)·김여제(金與濟)·갈홍기·김여식(金麗植)·전영택(田榮澤)·류형기(柳瀅基)·이명혁(李明赫)·박태화(朴泰華)·차상달(車相達)·하경덕(河敬德)·현제명·홍난파 등 13인의 흥사단원과 김기승(金基昇)·김노겸(金魯謙)·이기윤(李基潤)·최봉칙(崔鳳則) 등 4인의 동우회원 등 17인과 함께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친일단체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에 가입했으며, 8월 18일 위 사람들과 함께 흥사단으로부터 출단 처분을 받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1941년 1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이 개편되어 경기도 경성부에 친일 전향자 단체인 대화숙(大和塾)이 창설되자 유억겸·장덕수·김한경·조두원·한상건·민병회·최용달·윤치호·이용설·현제명 등과 함께 조선인으로서 가입해 단체에 협력했으며, '미영격멸(美英擊滅)'을 주제로 시국 강연을 다니기도 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국내 실정을 알린다는 명목으로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즈를 창설했고,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존 리드 하지의 특별보좌관에 임명돼 주로 통역관으로 기용되었다[3]. 한편 대한민국농구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51년 8월 제3대 주 영국 공사에 임명되어 재직하던 중 1957년 2월 27일 오전 11시 영국의 어느 병원에서 사망했다.
[1] 음력 1901년 12월 9일. 이묘묵이 1927년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 제출한 입학신청서 참조.[2] 당시 영문 명칭은 1915년 창립된 연희전문학교의 전신인 조선기독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이었다.[3] 이때 이묘묵은 존 하지 중장 옆에서 보좌하며 통역관 역할했던 유일한 조선인으로 그의 힘은 당대 '남조선 땅덩어리의 반을 먹을 만큼 막강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미군정기 시기 인사,행정,정책등에는 이묘묵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미군정기에 활동한 강력한 비선실세 친일파, 이묘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