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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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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 경신학당1 <colbgcolor=#fff> 제중원(광혜원)
1886~1905
1886~1909
제중원의학교
1905~1915
1909~1913
경신학교 사립세브란스의학교
1915~1917
1913~1917
조선기독교대학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교
1917~1944
1917~1942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1944
1942~1947
조선공업경영전문학교 아사히의학전문학교
1945
1947~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의과대학
1946~1956 연희대학교
1956~1978
1967~1976
연세대학교 삼애농업기술학원
1978~현재 연세대학교 서울캠퍼스
각주
1. 1905년 이전까지는 언더우드학당, 예수교학당, 구세학당 등 교명을 사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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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제중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 세브란스의과대학
2.1. 교명 변화
3. 연희전문학교 / 연희대학교
3.1. 연희전문학교 개교까지3.2. 연희전문학교3.3. 연희대학교3.4. 교명 변화
4. 연세대학교로의 통합5. 연세대학교 통합 이후6. 국제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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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YONSEI, Leading the Way to the Future
존중하고 존경받는 대학
1885년에 설립된 광혜원(제중원, 세브란스병원의 전신)과 1915년에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설립한 조선기독교대학(경신학교 대학부)이 연세대의 시초이다. 1917년 조선기독교대학과 세브란스연합의학교는 동시에 일제 하에서 최초의 사립 4년제 전문학교로 인가받아 각각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해방 후 각각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대학 인가를 받아 개교했으며,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이 합쳐지면서, 두 학교의 머리글자를 따서 연세대학교가 되었다.[1]

2. 제중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 세브란스의과대학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효시는 1884년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의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최측근 민영익은 정변 중 개화파 자객에게 피습당해 13번이나 칼에 찔려 중태에 빠졌다. 고종 황제독일 외교관 묄렌도르프의 추천으로 조선에서 의사, 선교사로 활동하던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 장로교)에게 민영익의 치료를 맡겼다. 알렌은 민영익의 상처를 서양 의술로 치료하고 민영익을 소생시켰다. 이에 감복한 고종은 알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비단 옷과 부채, 도자기 등을 선물하였는데, 이 때 알렌은 고종에게 병원 설립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이 설립되었다. 고종은 설립 12일 뒤 이 병원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제중원은 '중생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제중원은 조선 정부가 건물, 운영비, 병원 업무를 보조하는 주사 등의 하드웨어를, 미국 북장로회가 의사, 간호사, 일부 운영비 등의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일종의 합작 병원의 형태로 운영됐다. 이러한 진료 활동을 통해 서양 의학의 우수성이 널리 퍼졌다.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한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장로교), 동년 5월에 입국한 의료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2](감리교), 동년 6월에 입국한 의료 선교사 존 헤론(John W. Heron, 장로교)이 제중원에 합류했다. 사실 미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한국에 파견한 순서는 헤론, 언더우드, 알렌이었는데, 알렌이 최초로 한국에 입국하였고, 그다음으로 언더우드, 헤론이 입국하면서 선교사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알렌은 좋지 못한 성적으로 졸업한 평범한 의사였지만, 헤론은 알렌보다 나이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의대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선교사로 온 인물로 원래는 헤론이 한국에서 의료 선교를 이끌 예정이었다. 하지만 알렌이 가장 먼저 입국하였고 입국하자마자 고종의 신임을 얻어 나라에서 병원까지 얻어낸 상황이었기에 알렌이 자신이 선임이며 결정권이 있다고 여겼고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독선적인 성격의 알렌은 다른 선교사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알렌과의 갈등으로 인해 스크랜튼은 아예 제중원을 떠나 독자적인 진료소를 차렸다. 언더우드도 알렌과의 갈등으로 한국에 온지 1년만에 장로교 선교사직을 사퇴하고 감리교로 교단을 옮겨서 선교사로 활동하겠다고 청원하는 편지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을 정도였다.

1886년 3월 29일에는 16명의 학생으로 '제중원의학당'이 문을 열어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이 시작됐다. 의사는 단기간에 양성하는 것이 어렵기에 알렌이 시작한 최초의 의료 교육은 현재로 따지면 간호사나 간호조무사 등에 해당하는 보조인력 양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알렌은 1887년 9월 주미 한국공사관 개설을 위해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했다. 알렌은 이미 귀국하기 전에도 의료 교육의 한계에 대해 언급했다.

알렌이 떠나자 제중원은 평온을 찾았고, 헤론이 제중원을 이끌었다. 이후 엘러스 등의 의료 선교사가 참여했다. 하지만 휴가도 반납하고 전염병 환자를 돌보던 헤론은 결국 이질에 감염되어 1890년 7월 급서하였다. 헤론의 사망으로 제중원의 운영은 어려움에 처했다. 알렌이 시작한 제중원의 의료 교육 역시 헤론의 사망 즈음에 완전히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1891년 4월 헤론의 후임으로 빈튼이 부임했으나, 빈튼과 조선 정부간에 커다란 갈등이 생기면서 제중원은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또 미 북장로회 선교부에서도 운영에 비용이 드는 제중원을 포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한편 아내가 제중원의 의사였고, 본인도 제중원의학당에서 기초 과학과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당시 위기에 처했던 제중원이 운영을 지속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언더우드 등 서울지부 선교사들은 조선의 수도 서울에 왕립병원을 운영하는 것이 선교와 왕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큰 이점을 갖는다고 선교부를 설득했다.

언더우드는 18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캐나다 선교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던 토론토대학교 의학부 교수 올리버 R. 에비슨(O. R. Avison)을 만나 한국행을 권유했다. 언더우드에 감화된 에비슨은 한국행을 결심하였다. 심지어 감리교 신자였던 에비슨은 한국에서 원활한 의료 선교 활동을 펼치기 위해 교단을 장로교로 바꾸었다. 1893년 7월 가족을 데리고 토론토를 떠난 에비슨은 미국 북장로회 해외 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하여 그해 11월 1일부터 제중원에서 의료 선교를 시작하였다.

당시 제중원은 조선 정부가 시설을 제공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의사를 파견하여 공동으로 운영하는 반관반민 병원 형태였다. 하지만 에비슨은 조선 정부의 간섭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 그가 지방 출장을 다녀온 사이 정부 관리들이 에비슨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일본인 의사에게 병원 시설을 임대해 준 일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에비슨은 병원 운영권을 조선 정부에서 가져와 선교부가 100% 운영권을 갖길 원했다. 언더우드도 이에 동의하였다. 선교부는 조선 정부와 오랜 협상을 벌인 끝에 1894년 9월 제중원을 정부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받았다. 청일전쟁갑오개혁으로 이어지는 어수선한 정국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써 제중원은 사립 선교 의료기관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정부로부터 독립하게 된 제중원은 에비슨과 언더우드 등 북 장로회 선교사들의 긴밀한 협력으로 운영되었다. 정부로부터 지원이 끊긴 만큼 제중원의 운영을 위해서는 미국 선교회로부터 더욱 많은 기부금을 받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1899년 미국 클리블랜드의 부호 세브란스 씨를 설득하여 이에 감동한 세브란스 씨가 병원 신축 비용으로 1만불의 거액을 기부하였다. 그러나 기부한 1만 불의 용도를 두고 새뮤얼 마펫을 필두로 한 평양 측 선교사들이 병원 건축에 1만불을 쓰는 것은 낭비이며 이를 절반으로 줄이고 다른 선교 활동비로 쓸 것을 주장하며 병원 설립이 지연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세브란스는 자신이 기부한 금액은 오직 병원을 설립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단호한 의사를 밝혀 평양 측의 주장을 일축하고 병원이 세워질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언더우드는 1906년경부터 경신학교 대학부(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추진했는데, 평양 측 선교사들이 이미 평양에 숭실학교 대학부가 있다는 이유를 들며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결사 반대하였다. 이때문에 연희전문 설립을 놓고 수년간 논란이 지속되었고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이 거의 10년간 지체된 바 있다.

1904년 세브란스 씨로부터 기증받았던 후원금으로 지어진 신축 병원 건물이 서울역 앞에 완공했다. 기증자의 이름을 따 제중원을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칭했다.

한편 1899년 '제중원의학교'가 설립되었다.[3] 한국에 오기 전 토론토대 의대 교수였던 에비슨은 한국에 올 때부터 이미 의학 교육기관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제중원에 부임한지 얼마 안되어 한국인 의료인 교육을 시작했다. 사실 1899년 제중원의학교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여기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학생들이 있었고 이들도 모두 1899년 설립된 제중원의학교로 넘어오게 되었다.

1904년 세브란스병원 개원과 함께 제중원의학교는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7년 서울을 방문한 세브란스 씨가 병원 외에도 학교 시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3만 여 달러를 기부해 의학교 건물을 신축했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는 1908년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면허를 부여받았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는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장로교 이외에도 감리교 등 타 교단의 추가 지원이 더해지며 191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4]로 다시 교명을 변경했다.

1916년 언더우드 타계 후 세브란스연합의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양교의 교장을 겸임하게 된 에비슨은 두 학교를 동시에 대학 승격을 추진했고, 1917년 5월 14일 총독부로부터 사립전문학교로 인가받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이후 1923년 신교육령에 의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재인가되었다. 교명이 너무 길어서 보통 약칭 세브란스의전이라고 불렀다.

에비슨은 1935년 12월 세브란스의전 교장에서 은퇴했고,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에비슨은 한국에 영구 정착하기 위해 미국 친척들에게 인사하러 간다고 말하고 미국으로 갔다. 하지만 미국에서 아내가 병을 얻어 끝내 사망했고, 때마침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그는 결국 영영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해방 후 세브란스의전 명칭을 회복하였고, 1946학년도부터 예과 신입생을 모집했다. 이어 1947년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고, 학사과정을 6년제로 확대개편했다. 이에 따라 체계적인 예과 학사과정을 새로 구성해야 했는데, 1948년 신입생부터 연희대학교 생물학과에서 예과 과정을 이수하는 학사 교류 협정이 체결되었다. 1949년 양교 통합을 전제로 세브란스의과대학 의예과를 연희대학교 이과대학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임시휴교했다. 이후 부산 영도에서 이미 양교 통합을 협약한 연희대학교와 함께 부산 영도에서 합동으로 임시 캠퍼스를 열었다.

휴전 후 서울로 올라왔고, 곧 연희대학교 측과 통합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1954년 10월 신촌캠퍼스에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 신축 이전 계획이 수립되었고, 1955년 5월 신촌에 신축 병원을 기공했다.

2.1. 교명 변화

3. 연희전문학교 / 연희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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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연희전문학교 개교까지

1885년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조선에서 개신교 선교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한국인 교육 발전에 힘써왔다. 선교사로 파견되기 위해 신학교에서 의학 교육을 받았던 언더우드는 1885년 설립된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 병원 운영에 지속적으로 관여했고, 1886년 제중원에서 의학 교육이 시작되자 영어와 물리, 화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가고 후임인 헤론이 급사하여 제중원이 위기에 빠졌을 때 제중원의 유지에 크게 도움을 주었고, 1890년대 초 한때 미 북장로회 선교부가 경비가 많이 드는 제중원을 포기하려 했을 때,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서 제중원이 갖는 이점을 들며 제중원을 유지하도록 설득했던 이도 언더우드였다. 또 제중원이 정부로부터 떨어져 나와 사립으로 독립할 때 언더우드가 미국 재단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온 것이 제중원의 존속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울러 언더우드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한국인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언더우드는 1885년 고아원을 겸한 교육기관인 경신학당(현 경신중·고등학교)을 설립했다. 참고로 아래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연희전문학교는 원래 경신학교 대학부로 설립되었다. 비록 대학으로서 연희전문학교의 직접적인 시작은 1915년 3월이었지만#, 이화여대, 숭실대, 배재대 등의 예에서 볼때, 연희전문학교 및 연세대학교의 설립도 중등교육기관으로서의 경신학당이 설립된 1885년으로 소급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 경신학당 전통 긍정론의 입장이다.

이후 경신학당은 1901년 '중학교'(중고교 포함)가 설치되며 중등교육 기관으로 발전하였으며, 1905년 경신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나아가 언더우드는 서울에서 대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언더우드와 에비슨은 1890년대 중반부터 서울에 종합대학을 세우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1895년 2월 고종이 내무대신 박영효를 통해 미국식 국립대학 설립을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제중원이 정부에서 독립하기 전 정부의 간섭에 신물이 난 언더우드와 에비슨은 이를 거절하고 미 선교부의 지원을 받아 독자적인 기독교 사립대학을 설립할 꿈을 품었다.

언더우드는 1906년 경신학교를 중심으로 감리교측의 배재학당, 그리고 세브란스 의학원 등을 연합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내부 반대 의견 때문에 실패했다. 평양에 숭실학교 대학부가 설립되었기 때문에 평양 선교사들이 숭실학교 대학부 하나만 잘 키우자면서 서울 대학설립을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평양 숭실학교와 별도로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 반드시 대학교가 설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대학 설립 추진을 이어갔다. 하지만 숭실학교 대학부의 존재는 큰 걸림돌이었다. 미 선교본부 뿐만 아니라 국내에 있는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이미 교수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숭실학교에 소속된 상태였다. 이에 숭실학교 자체가 기득권 세력이 되어 언더우드 등 서울파 선교사들을 압박했다. 평양 선교사들은 서울에 대학이 설립될 경우 평양의 숭실학교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 두려워 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서울파 선교사들은 서울에 반드시 대학이 설립되어야 하는 여러 이유를 들었다. 수도 서울에 대학교를 만드는 것은 상징성, 영향력, 시너지 효과 등 여러 측면에서 커다란 파급력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수한 학생들을 모집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교수진 또한 일본 유학파 출신 엘리트들이 주로 서울에 많았기 때문에 우수한 교수진 확보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선교부가 함께 운영하고 있는 세브란스연합의학학교가 서울에 있기 때문에 서울에 대학을 설립한다면 세브란스의학학교와 과학부 교수진을 공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렇게 서울에 대학을 설립하는 문제를 두고 선교부는 토론을 이어갔지만 수년이 지나도록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서울에 대학이 세워지게 되는데 결정적인 요인은 자금이었다. 언더우드의 친형인 존 토머스 언더우드가 거액의 자금을 기부했기 때문이다.

언더우드는 1908년~09년 안식년을 맞아 일년간 미국에 돌아가 서울에 연합 기독교 대학을 세우자고 설득했고, 52,000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또 에비슨도 미 북장로교 선교부에 서울에 연합 대학을 설립해야 하는 이유를 편지로 쓰며 설득했다. 하지만 마펫을 필두로 한 평양 선교사들은 이에 반대했고 미 북장로교 선교부도 평양 측 주장을 수용했다.

언더우드는 191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과 캐나다의 장로교 및 감리교 재단으로부터 대학 설립 자금을 모아 귀국했다. 자금의 상당부분은 언더우드의 친형이자 미국에서 타자기 사업으로 성공하여 부호가 된 존 토머스 언더우드(John Thomas Underwood)의 기부금이었다. 대학 서립을 위한 자금을 가지고 귀국한 언더우드는 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갔고, 당시 대학이 없던 조선에서 일제가 대학 설립을 허가해 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보였다.

일단 언더우드는 일제에게 허가를 못받더라도 대학을 개교할 준비를 하기로 했다. 언더우드는 형에게 받은 자금을 바탕으로 서울에서 대학 개교를 추진했고, 평양 측을 설득했다. 1914년 숭실학교 부교장인 감리교 선교사 아서 베커(Arthur Lynn Becker 백아덕) 교수가 언더우드의 뜻에 동참하기로 결정한 것은 연희전문학교 개교의 직접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1914년 3월 연합 기독교 대학 이사회를 구성했고, 3월 27일 언더우드 자택에서 첫 임시 이사회 회의가 열렸다. 이때 참석한 에비슨, 노블, 빌링스, 하디, 밀러, 베커 등이 언더우드의 뜻에 동조하면서 대학 설립은 급진척되었다. 당시 선교 본부는 평양 측의 반대로 인해 당분간 개교를 연기하는 것이 낫겠다는 의견을 보내왔지만 에비슨과 베커 등은 이미 수년간 질질 끌어온 일이라 지금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대학 설립을 강행하자고 주장했다.

평양 숭실학교에서 과학부를 담당하던 베커 교수는 서울에 대학을 세워야 우수한 인적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언더우드의 말에 공감하고 1914년 3월 평양에서 자신의 뜻을 따르는 학생 20여명을 함께 데리고 서울로 상경했다. 이에 1914년 4월 서울에서 평양에서 합류한 학생들과 서울에서 모집한 학생들을 합하여 30여명 규모로서 서울에서 배재학교와 경신학교 연합 대학부 강의를 시작했다. 교사로는 배재중학교와 종로 YMCA 건물을 사용했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주도했던 주요 인물은 언더우드, 숭실학교 부교장이었던 베커, 세브란스병원 원장이자 세브란스연합의학교 교장인 에비슨, 빌링스, 밀러 등이었다.

한때 1914년을 연희전문학교의 설립 연도로 표기하기도 했다. 일제 시대에는 연희전문학교 개교 연도를 1914년으로 표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허가 등 절차상 문제로 1915년을 개교 연도로 확정했다고 한다. 1914년 당시에는 베커가 교장을 맡았다.

결정적인 문제는 미국 선교회 본부로부터 아직 승인을 받기 이전이었다는 점이다. 개강한 후 1914년 4월말 뉴욕 선교회 본부에서 본격적으로 이 문제가 다뤄졌다. 동시에 뉴욕에서 정관 초안이 작성되었다. 하지만 평양 측의 격렬한 반대 때문에 논의가 계속 지체되었다. 6월 뉴욕에서 서울안 지지로 의견이 모아졌지만, 평양파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뉴욕 선교본부가 공식 승인이 지연되었다. 마펫을 필두로 한 평양 측은 언더우드와 에비슨의 퇴임과 한반도에서 축출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마펫의 맹공으로 언더우드는 선교회 탈퇴까지 고려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내었다. 여담으로 당시 존 토머스 언더우드와 더불어 선교부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존 세브란스도 서울을 직접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수도 서울에 종합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며 서울 대학 설립안을 지지했었고, 이러한 세브란스의 지지도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되는데 일조했다.

결국 1914년 12월에야 미 선교본부는 서울 연합 대학 설립을 공식 승인했다. 서울에 정식으로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결정되면서 숭실학교 대학부는 초급대학(junior college)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1915년 초 선교부는 한국기독교대학 현지이사회를 공식적으로 조직했다.

3.2. 연희전문학교

미국 선교회 본부로부터 승인을 받은 서울지부 선교사들은 개교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던 중 1915년 3월 24일 총독부가 ‘전문학교규칙’과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공포했다. 선교부가 대학 설립을 본격화하자 일제가 선교사들의 고등교육기관(=대학) 설립을 억제하기 위해 규제를 강화한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개정된 사립학교규칙에서는 학교에서 종교 교육이 금지되었고, 몇년간의 유예기간 후에 모든 교원은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또 재정 관련 규정도 강화되었다. 이러한 규칙들은 다분히 연희전문학교를 타겟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러나 불똥은 얘기치 않게 보성전문학교 측으로 튀었는데, 1905년 개교 이래 보성전문학교라는 교명을 계속 이어가던 보성은 1915년 3월 발표된 '전문학교규칙' 조건에 미비하다는 이유로 1915년 4월 1일자로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되었다.

언더우드와 선교부 서울지부는 1915년 4월 12일 '조선기독교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을 공식 개교하였다. 경신학교를 중심으로 서울에 있던 다른 개신교계 학교인 배재학교, 숭실학교의 연합 대학부 형태였다. 교사는 신촌에 새로운 건물을 완공할 때까지 종로 YMCA 건물을 3년간 사용했다. 미국 개신교 재단들로부터 원활한 지원을 받기 위해 교명에 Christian을 넣었다. 사실 조선기독교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이라는 명칭은 미국 선교본부 보고서에 작성되는 대외적인 영문 명칭에 가까웠고, 국내에서는 '경신학교 대학부'라는 이름으로 첫 신입생을 모집하고 개교했다.

교장은 언더우드, 부교장은 세브란스 의학교의 교장이기도 한 에비슨, 교감(학장, dean)[6]은 베커였다. 설립 당시부터 4년제 정규대학을 표방하였고 미국식 대학 시스템을 도입했다. 개교 당시 학과는 문과, 수물과, 상과, 농과, 신과 5과를 두었다. 문이과 및 순수학문과 실용학문을 망라했고 미국 기독교 재단의 지원으로 설립된 만큼 신학과도 설치하였다. 당시 보성법률상업학교(보성전문학교)가 법과와 상과의 문과 계열 실용학과 2개로 구성된 것과 대비되었다. 개교 당시 첫 학생은 61명이었다. 개교 이후 일제에 제출한 대학 설립 신청서 및 1915년 연말 선교부 보고서 등에 따르면 연희전문학교는 이후 의학과(세브란스의학교와의 통합을 전제), 전기공학과, 건축과 등을 개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총독부의 불허 등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당시 선교부 일각에서는 신학교 중심의 학교 설립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언더우드, 에비슨, 베커 등은 이에 반대하고 철저히 미국식 4년제 대학을 따른 정규 대학을 만들 것을 구상하였다. 신학과를 만들어 기독교 교육을 하되, 다른 전공들은 기독교 이념과 관련 없이 학문의 자율성을 보장하도록 하였다. 설립되는 대학은 선교의 직접적인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되고, 대학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자연스레 기독교가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설립 당시 이전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미 북장로교 측이 평양 숭실대학 측의 반대로 인해 연희 설립에서 한발 빼게 되었고, 이때 오히려 감리교가 나서서 연희 설립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로 인해 연희전문학교는 장로교라는 특정 교파가 주도하는 것이 아닌 감리교를 포함한 여러 교단이 연합하여 운영하는 기독교 재단으로 설립되었고, 이러한 배경은 연희전문학교가 종교 재단으로부터 지원은 받지만 재단의 입김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대학 공동체로 발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연희 설립 초기에 많은 도움을 준 감리교의 영향은 아펜젤러관, 핀슨관 등 연희전문학교 초기 캠퍼스의 상당수에서 감리교 측을 기념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언더우드와 에비슨 및 선교부는 4년제 정규대학 설립을 목표로 하였고, 개교와 동시에 조선기독교대학은 총독부가 정한 기준을 상당히 충족하고 있음을 주장하며 총독부에 '대학' 인가 지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지원서에는 세브란스의학교와의 통합을 전제로 의과를 포함한 4~6년제 종합대학 안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일제는 대학령(大學令)이 제정되지 않아서 그 설립을 불허했고, 전문학교 허가마저 지연되고 있었다. 앞서 언급된 종교 교육 문제 및 교원들의 일본어 구사 문제에 더해 총독부는 교육 과정을 3년제로 축소하고 과학 관련 전공을 폐과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결사적으로 반발했다.

재단 본부가 미국에 있다는 점은 총독부와의 타협의 여지를 마련했다. 미국 뉴욕 선교부가 직접 나서서 총독부와 대화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뉴욕 선교본부가 총독부의 3년제 축소 요구 등을 수용하려 하자 서울 선교사들은 결사 반대에 나섰다. 한편 기독교 신자 일본인들도 도움을 주었다. 총독부 내에서 소수지만 기독교 신자 일본인 관료들이 내부에서 총독부가 연희전문학교 설립에 우호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힘썼다. 또 연희 측은 일본에 세워진 기독교계 대학들에 접촉하여 인허가와 관련된 자문을 구했고, 일본 기독교 대학들은 연희전문 측에게 종교를 교과과정 밖에서 가르치면 된다고 조언했다. 그결과 연희전문학교는 교과과정 외 과목인 채플을 개설해서 총독부의 종교 교육 금지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신학과는 폐과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애초에 언더우드와 에비슨은 미국식 정규 대학을 설립하여 선진 학문을 교육하면서 간접적으로 선교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구상하였기 때문에 신학과의 폐과에 큰 미련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7]

연희전문학교는 개교 당시 본과가 개설되는 1917년[8]에 측량과, 건축과, 전기공학과 등 공학 전공을 개설하려고 계획했지만 조선인들이 과학을 교육받길 원치 않았던 일제는 이과 관련 전공들을 모두 폐과할 것을 요구했다. 선교사들은 격렬히 반발했고, 뉴욕 선교본부까지 나서서 총독부와 협상하며 타협한 결과 물리학, 수학, 응용화학 3개 전공을 살리고 나머지 이공계 관련 전공을 폐과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선교사들이 신학과 폐과 요구까지 수용하자 일제는 수물과 3개 전공 유지는 어쩔 수 없이 수용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 선교사 교수들은 미션 스쿨의 가장 중심에 있는 종교 교육을 포기해가면서까지 조선인들에게 과학 교육이 중요하다는 소신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학교 설립 직후 언더우드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 1916년 4월 미국으로 돌아간 후 그해 10월 미국 현지에서 타계했다. (언더우드에 관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언더우드가 타계한 것에는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둘러싸고 이를 불허하려는 일제의 압력 때문에 크게 부담을 느껴 건강을 상했다는 의견도 있다. 언더우드가 타계하자 1916년 12월 부교장인 에비슨이 뒤를 이어 교장에 취임했다. 이로서 에비슨은 세브란스의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양교의 교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에비슨은 교장에 취임하면서 설립자 언더우드가 못다 이룬 꿈을 반드시 실현하자며 학교 구성원들을 독려했다. 비록 언더우드가 타계했지만 미망인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9] 여사 및 아들 호러스 호튼 언더우드 등 그의 가족들은 계속 한국에 남아 연희전문학교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천신만고 끝에 1917년 4월 17일 400명 정원의 4년제 ‘사립연희전문학교’로 설립을 인가받았다. 전문학교 허가를 내주지 않으려고 했던 일제를 설득하여 결국 인가를 받아낸 데에는 에비슨의 노력과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설립 당시부터 4년제 종합대학교를 계획했지만 대학교 설립 허가를 해주지 않았던 일제의 방침 때문에 대학교로 인가받지 못하고 구제전문학교[10]로 인가가 떨어졌다. 다만, 대학령 자체가 1919년에 공포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일본 본토에서조차 사립대학의 설립이 불가능했다.[11] 문학과, 신학과, 농학과, 상과, 수학과, 물리학과, 응용화학과(산업화학과) 등의 학과를 두었다. 이중 농학과는 사실상 지원자가 없어 초기에 잠깐 운영되고 1921년에 사실상 폐과되었다. 또 신학과 역시 앞서 서술된 이유로 1919년 폐과되었다.[12]

그나마 4년제 종합대학을 표방하여 대학으로서의 구색을 갖춘 연희전문은 4년제 구제전문학교로 인가받아 정식으로 전문학교라는 교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1905년 법률학과와 이재학과(경제·경영학과)의 2개 학과로 구성된 2년제[13] 전문학교로 개교한 보성전문학교의 경우 일제의 ‘전문학교규칙’에 따른 전문학교 허가를 받지 못하여 일제로부터 전문학교 교명 사용을 금지당했고 1915년부터는 '보성법률상업학교'라는 격하된 교명을 사용해야 했다. 보성법률상업학교는 1921년 12월 28일 보성전문학교로 승격이 승인되었다. 의학전문학교를 제외하면 보성전문 등 대부분의 전문학교가 3년제였던데 반해 연희전문은 4년제여서 교육기간이 더 길었다. 4년제로 승인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3년제로 줄일 것을 강요하였다. 결국 타협책으로 상과는 3년제로, 상과를 제외한 문과, 수물과, 신과, 농과는 4년제로 허가를 받았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미국식 대학 모델은 사실상 연희전문학교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것이었다. 연희전문학교는 설립 당시에 미국식 4년제 종합대학 허가를 받기 위해 설립되었고, 비록 일제에게 대학 설립이 불허되었지만 원래 목표로 했던 미국식 4년제 대학 시스템을 철저히 따랐고 일제가 허가만 해주면 언제든 대학으로 승격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이런 미국식 대학은 당시 한국에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아래에 나오지만 연희전문대학이 개교하고 이미 25년이 지난 1940년에 쓰여진 '조선 1940'이라는 잡지 기사에서도 연희전문학교는 미국 대학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는 서술이 나오는 반면 보성전문학교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선배와 상급생에게 절대복종하며 집단을 이루는 무서운 집단"이라 묘사되는 등 미국식 대학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연희전문학교와 한국인이 설립 운영하는 보성전문학교 간에 학풍의 차이가 무척 크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교수진에 있어서도 연희전문학교는 물론 총독부 규정 때문에 일본 유학파 출신의 교수들도 채용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초창기 교수진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미국인 교수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이후 대거 채용된 한국인 교수들의 경우에도 미국 유학파가 무척 많았다. 반면 경성제대나 보성전문의 경우 교수진의 대부분이 일본 유학파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희전문학교와 타 학교 간의 학풍과 분위기 차이가 컸다.

설립 준비 시절부터 언더우드는 교지 선정 문제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했고 고심 끝에 고양군 연희면 신촌에 있는 연희궁터 일대의 넓은 부지를 학교터로 낙점했다. 친형 존 토머스 언더우드로부터 이미 자금을 받아왔기 때문에 자금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연희동 일대 부지가 대부분 총독부 소유였고 총독부는 이 땅을 다시 동양척식회사로 넘긴 상태였다. 언더우드는 총독부로부터 연희동 부지 매입을 위한 협상을 했으나 선교부가 대학을 설립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던 총독부는 좀처럼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언더우드는 선교부가 운영하던 종로 YMCA 건물에서 임시로 개교를 했다. 당장 3개 학년은 운영이 가능했지만 4개 학년이 사용하기에는 강의실이 부족하므로 3년 안에 교사를 완공하여 이전해야 했다. 그 와중에 언더우드가 1916년 타계했고, 신촌 캠퍼스 설립 과제는 후임 교장인 에비슨에게로 넘어갔다. 결국 1917년 총독부로부터 연희동 교지 매입에 성공했고, 1917년 9월 신촌에 교사를 착공했다. 1918년 신촌캠퍼스 최초의 교사인 치원관[14]이 완공되어 1918년 신촌 캠퍼스로 이전했다. 사실 치원관은 빠른 완공을 위해 목조건물로 지어진 임시 교사였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찰스 M. 스팀슨씨(Charles M. Stimson)의 기부금으로 석조건물인 스팀슨관이 1920년 9월 완공되어 본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친형 존 토머스 언더우드의 기부금으로 지어진 현 연세대학교 본관 건물과 미국 메사츄세츠 피츠월드 제일감리교회에 의한 기부금으로 지어진 현 신학관이 완공되어 캠퍼스의 기본 골격이 완성되었다.

연희전문학교 설립 이후 미 선교부 등 미국 기독교 단체들의 후원, 특히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친형인 존 토머스 언더우드의 기부금이 학교 운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연희전문학교는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시설은 물론이고 우수한 교수진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25년 경성제대 예과의 경상비가 462원이었고, 보성전문학교의 경상비가 142원이었던 반면 연희전문학교는 661원의 경상비를 지출했다. 교수 수준 또한 조선에서 최고였다. 기록에 따르면 1930년 연희전문학교 교수 월급은 220원이었는데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 도지사 월급 120원의 거의 두 배였다. 자연계 전공에서는 당시 조선에서 해당 분야의 최고의 전문지식을 가진 미국인 선교사들을 대거 교수진을 채용하였고, 또 경성제대가 사실상 교수진 거의 전원을 일본인들만 채용했기에 조선 출신 최고의 지식인들이 대거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4년제 대학교를 표방하며 설립된 만큼 교수진은 대부분 유학파 석박사 출신들이었으며, 주로 미국 대학 박사 출신이었다. 나중에 세워진 경성제대와 비교해도 교수들의 학력은 밀리지 않았다. 위에도 나와 있지만 당시 연희전문학교 교수 연봉과 복지는 한반도에서 가장 좋은 수준이었다. 당시 보성전문학교만 해도 교수진의 대부분은 일본 유학파 출신이지만 석박사 출신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일본 대학교 학사 학위 소지자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학교와 달리 교수 채용은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주로 미국 박사 출신들이 많긴 했지만 서구식 대학을 표방했음에도 서구식 학제에만 얽매이지는 않았다. 한국 전통 교육체계 하에서 높은 학식을 쌓은 전통 학문의 고수들도 교수로 채용했는데 아래에도 서술된 위당 정인보 선생 등이 그러한 예다.

연희전문학생들은 1919년 3⋅1 운동, 1920년 조선 학생 대회, 1923년 조선 학생회 조직, 1926년 6⋅10 만세 운동, 1929년 광주 학생 운동 등 민족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에비슨 교장을 비롯한 연희전문학교 교수진들은 학교의 숙원인 종합대학 승격 및 이를 위해 연희, 세브란스의전 양교 통합을 추진해왔고, 3.1운동 후 일제의 통치가 유화정책으로 바뀌자 1920년 발빠르게 종합대학 승격 계획을 수립, 추진했다. 아울러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연희전문학교과 세브란스 의전의 통합 계획 역시 가속화되었다. 또한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다양한 학과 증설 계획도 세워졌다.[15]

그러나 일제는 1923년 개정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고 이외에는 대학 설립을 일체 불허했다. 이 개정 교육령에 의해 연희전문학교는 종학대학 승격이 좌절됨은 물론 오히려 문과, 상과, 신학과를 제외한 이과 계열 학과들이 일시 폐쇄되었다가 반발에 의해 원상 복구된 일도 있었다. 당시 연희전문의 이과를 총괄하던 베커 학장은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원한경)[16] 박사 등과 함께 미국 선교본부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학과가 복구된 직후 학칙을 개정하여 1924년 3월부터 학과를 증설하는 등 일제의 탄압에 맞대응하기도 했다.

이렇게 일제의 탄압과 견제가 심해지자 학교 구성원들의 좌절은 컸지만 오히려 그동안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전의 합동 작업이 가속화되어 1926년 연희전문학교 및 세브란스 의학원 교수와 이사간에 양교 합동안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제의 간섭하에 양교 통합은 성취되지 못했다. 이후에도 일제강점기 동안 몇 차례 더 양교 통합이 추진되었으나 모두 좌절되었다.

학풍은 서양 학문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동양과 조선의 사상 및 전통과의 결합을 추구하였다. '자유와 진리'라는 교훈에서 나타나듯 실용학문 뿐만 아니라 돈이 안되는 분야인 순수학문에도 적극적이었다. 일제시대 당시 대학급 고등교육기관들이 실용학문 일색이었던 것에 반해 연희전문학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전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기독교 재단의 도움을 받아 세워진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종교, 정치, 이념에서 자유로운 학풍을 추구했다.

특히 연희전문학교는 본격적으로 서양식 이과(자연계) 학과를 개설하여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학, 물리학, 화학 등 이과(자연계) 과목의 대학 강의를 개설하였다. 의학, 생물학 분야는 이전부터 세브란스의전에서 강의해왔지만 의학, 생물학을 제외한 수학, 물리학, 화학은 연희전문이 조선에서 처음이었다. 생소했던 자연계 학과였던 수학과, 물리학과, 응용화학과 등은 해당 전공 박사 출신 미국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었다. 서양 선교사 출신 교강사들은 세브란스의전과 겸직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시간대학교 물리학 박사 출신 아서 베커(Arthur Lynn Becker 백아덕)가 초대 수물과 학과장을 맡았으며,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된 후 수물과가 수학과, 물리학과, 응용화학과로 분리 개편하면서 베커가 물리학과장, 미시간대학교 천문학과 교수 출신인 칼 루퍼스(Will Carl Rufus)가 수학과장, 에드워드 밀러(Edward Hughes Miller, 밀의두, 密義斗)[17]가 응용화학과장을 맡는 등 미국 대학원에서 해당 학문을 전공한 이들로 교수진이 구성되었다. 설립 초기부터 이미 킴볼(Kimball) 물리학 교과서를 사용하는 등 정규대학에 준하는 커리큘럼의 교육이 이루어졌고, 수물과를 졸업한 학생들은 1회 졸업생부터 하버드대를 비롯 미국으로 활발히 유학하여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 이원철(연희전문 수물과 1회 졸업, 미시건대 이학박사), 한국인 최초의 수학박사 장세운(연희전문 수물과 1회 졸업, 노스웨스텐대 수학박사)을 배출하는 등 조선의 고등 과학 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연희전문은 1940년대 이전까지 조선에서 유일하게 대학 수준의 자연과학 전공을 교육한 학교였다. 나중에 경성제대가 1941년 이공학부를 설치하여 물리학과, 화학과 및 공대 전공들을 신설했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여파로 예산이 삭감되는 등 제약이 많았다고 한다. 그 밖에 연희전문 이후에 전문학교로 승격된 보성, 이화, 명륜(성균관) 등 사립 전문학교들은 대부분 사회과학, 문과 중심의 학교였다.

서양 선교사 출신의 교수들에 의해 서양 학문을 적극적으로 교육함과 동시에 민족주의 교육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훗날 국학이라는 이름으로 계승되는 민족의식 교육의 산실이던 문과와 당대 사회과학 트렌드에 따라 유물론적 방법론을 도입하던 상과 교수진 등이 학풍을 주도했다. 학교의 제2대 교장이면서 학교의 기틀을 잡은 에비슨은 조선인 교육 활성화를 위해서는 한문 사용을 줄이고 한글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기고한 바 있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에비슨은 한국어, 한국역사 교육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고, 이 분야의 석학들을 서구식 학위에 관계없이 대거 교수진으로 영입하였다. 대표적으로 위당 정인보 선생은 서구식 학교 교육이 아니라 한학 교육을 받았지만 에비슨은 그의 학문적 명망으로 주저 없이 교수로 영입했다. 아무런 서구식 학위가 없는 초야의 촌부 정인보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채용된 것은 1922년 당시에도 파격으로 여겨졌다.

연희전문학교는 특히 식민지 지배를 위한 관학(官學)을 추구하던 경성 제국 대학의 학풍과 대립하면서 민족주의 학풍이 더욱 강해졌다. 당시 이러한 반(反)관학적, 민족주의 학풍을 이끌었던 이는 최현배, 정인보, 백낙준, 백남운 등이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에서는 한국어 및 한국사 교육이 이루어졌는데, 일제가 1922년 개정 교육령 이전까지 학교에서 조선어 및 한국역사 교육을 일체 금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연희전문학교의 국학 교육 및 연구는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물론 초창기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정규 과목으로 개설하지 못하고 정규 수업 시간을 피해 가르쳤다. 1924년 이후 일제가 경성제대 등에서 부분적으로 조선어 및 역사 교육을 열어놓았지만 이는 한국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대해 더 자세히 연구할 필요를 느껴 식민통치 연구 목적으로 개설한 것이었다. 아무튼 이를 구실로 연희전문학교에서도 그동안 비밀리에(라고 하지만 공공연히) 진행해오던 국학 수업을 백낙준 문과 학장을 비롯한 문과 교수들의 강한 의지로 경성제대의 예를 들며 대놓고 정규 과목으로 개설하는 등 국학 연구 및 교육을 더욱 활발하게 진행했다. 물론 일제의 검열이 있었지만 베커 이과 학장을 비롯한 미국인 교수들이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면서 탄압을 어느정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대놓고 국학 연구를 하며 일제의 심기를 거스른 결과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되며 상당수의 교수들이 해직되는 고난을 겪었다.

국학을 포함한 문과(인문학) 교육에서 연희전문학교의 기여는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일제에 의한 관학은 물론, 조선인들이 주도로 만든 전문학교 할 것 없이 대부분 실용학과를 중점적으로 개설했다. 때문에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하면 실용 학문이 아닌 순수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가 거의 없었는데, 전문학교 중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 등 이과 전공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문과 계열에서도 상학, 법학이 아닌 문학, 철학, 역사 등 인문학을 가르치는 문과는 연희전문학교 외에는 1920년대에 전문학교로 인가받은 숭실전문학교, 이화여전 뿐이었다. 특히 남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서울의 고등교육기관(현대의 대학에 해당) 중에서 국학을 가르치는 학교는 연희전문학교가 유일했다. 보성전문학교에서는 국학 연구 및 수업이 없었다. 유진오 고려대학교 전 총장은 "민족대학이라는 보성전문은 국학에 관한 연구에 관심이 없었으나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대학이면서도 연희전문이 먼저 국학에 손을 대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하며 국학 연구에서 연희전문학교의 공로를 인정하였다.

공학(공대) 교육에 있어서도 연희전문은 한반도에서 선구자였다. 연희전문학교 인가와 함께 설치된 산업화학과(응용화학과)는 한국 최초의 4년제 공학 교육 과정이었다. 비록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공업전문학교)[18]가 먼저 개교했다고 하지만 경성고등공업학교는 2년제 과정이었다가 이후 3년제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경성제대가 이공학부를 설치한 것은 1941년이었다.[19] 그리고 시기상 경성제대 이공학부는 졸업생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원래 연희전문학교는 개교 당시 재단 이사회 보고서 및 뉴욕 선교회 본부 보고서와 서신 등에 따르면 응용화학과 외에도 전기공학과, 건축과, 측량과 등 공학 관련 전공을 다수 개설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과학 교육을 원치 않았던 일제는 연희전문학교에 이과 관련 전공을 모두 폐과하지 않으면 전문학교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결국 뉴욕 선교본부까지 개입하여 타협한 결과 물리학과, 수학과, 응용화학과 3개 전공만 간신히 허가받고 나머지 전공은 모두 불허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느슨해진 1930년경부터 연희전문학교는 토목공학, 건축학, 측량학 관련 전공 수업을 개설하였고, 수물과를 이론전공(순수과학) 및 응용전공(공학) 두 가지 트랙으로 나누며 사실상 공대를 운영했다. 게다가 이론과 실용 학문을 겸비해야 한다는 에비슨 교장의 지론에 따라 응용 과정(공학) 뿐만 아니라 이론 과정(순수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조차도 모두 기초 공학 수업을 필수로 수강하도록 지정했다고 한다. 에비슨 교장의 이러한 조치는 졸업생의 원활한 취업 및 사회 진출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 연희전문은 실용학문과 순수학문을 망라했지만 아무래도 문과, 수물과 등 순수학문 전공자들은 당시에도 취업이 교직 등으로 편중되었다. 때문에 에비슨은 수물과 졸업생들이 교직 이외에도 관공서, 기업 등 다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공업 수업을 필수로 이수하도록 했던 것이다. 일제는 초창기 연희전문학교가 공학 전공을 개설하는 것을 억압했지만, 1930년대에는 한반도에서 중화학 공업을 확대하면서 이공계 전문 인력이 필요하던 시기라 이를 적당히 눈감아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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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에서도 나오지만 당시 연희전문은 조선에서 손꼽히는 부모님의 표정이 흐뭇해지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유명했다.

1940년경 마해송 등 당시 조선의 지신인들이 중심이 되어 발행한 '조선 1940'이라는 잡지에는 다음과 같이 연희전문학교에 대해 묘사했다.
"학교건물이 신촌의 아름다운 소나무 숲 언덕 위에 있어 이화전문이 언덕을 넘어 저편에 로맨틱하게 위치하는 점 등, 지나치게 혜택받은 그들에게 질투가 날 정도다. 연희전문 학생과 이화전문 학생이 사이가 좋은 것은 자연의 이치다.(중략) 그들은 미국학생처럼 행복하다. 청춘을 마음껏 즐긴다"
조선 1940 #

같은 기사에서 당시 보성전문학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연희가 게이오라면 보성은 와세다나 메이지(대학) 풍이다. 학생은 어떠한 경우에도 선배와 상급생에게 절대복종한다. (중략) 예를 들어 보성전문의 학생이 우연치 않은 일로 학교 밖에서 억울하게 당하거나 해를 보았을 때 학생들은 당장 집단을 이루어 반드시 복수를 한다고 한다. 무서운 학교다". 또한 경성제대는 '신사형', 이화여전은 '낙원의 처녀들'이라고 묘사했다. #

그러나 외부에 상당히 부르주아적으로 비춰지는 이미지와 달리 연희전문 학생들은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는데, 대표적으로 1930년대 조선어학회조선일보가 벌인 문자보급운동에도 앞장섰다. 1934년 이 운동에 참여한 경성제대학생은 75명, 보성전문학생이 61명인데 반해 연희전문학생은 무려 191명이 참여했다.

초창기에는 대부분의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었다. 이는 초창기 교수진의 대다수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일제가 한국어 수업을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총독부의 규제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일본어로 수업이 진행되었지만 연희전문학교에서는 대부분의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었던 것이다.[20] 때문에 당시 '신촌에서는 개도 영어로 짖는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차츰 한국인 교수도 확충되었다. 특히 연전 졸업생이 미국으로 유학가서 박사 학위를 받고 모교의 교수로 부임하는 경우도 늘어났는데, 대표적으로 당대 대표적인 천문학자이자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였던 이원철 교수는 1915년 연희전문학교 설립 때 입학하여 1919년 1회 졸업생으로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가서 앨비온대를 거쳐 미시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21] 귀국하여 1926년 모교인 연희전문으로 돌아와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원철 교수의 합류로 당시 연희전문학교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대학 수준의 천문학 강의가 열리게 되었고 이는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큰 화제가 되었다. 이원철 이외에도 당시 연희전문학교는 하버드 대학교, 시카고 대학교 등 미국의 명문대에도 유학생을 배출했다. 이처럼 당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가는 사례가 심심치 않았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들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학비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갈 수 있었다. 때문에 당시 미국으로 유학가기를 원했던 젊은 학생들에게 연희전문학교는 꿈의 학교로 통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한국인 교수가 미국인 교수를 역전하게 되었고,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일제와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게 되면서 미국과의 교류가 단절되며 남아 있던 미국인 교수들은 사실상 반강제로 교직을 떠나게 되었다. 이에 학교는 거의 한국인들에 의한 학교로 거듭났으며, 교장 역시 그간 언더우드, 에비슨, 언더우드의 아들인 원한경 등 선교사 출신들이 맡아오다가 역시 1941년 일제에 의해 원한경 교장이 물러나고 한국인 윤치호가 교장이 취임하며 한국인이 맡게 되었다. 윤치호 역시 일제에 비협조적인 인물이었지만 일제 입장에서 미국인보다는 조선인이 훨씬 만만했기 때문이었다.

일제 시대를 거치며 한국인 교수진이 확충되면서 사실상의 운영이 차츰 한국인의 손으로 이관되었다. 이는 설립자인 언더우드 등 미국 선교사들이 철저히 미국식 대학 모델을 적용한 덕분이었는데, 미국식 대학은 중세 이래 대학의 길드식 자율 자치 운영 모델을 그대로 유지하였고[22], 철저하게 미국 대학 모델을 따랐던 연희전문학교 역시 한국인 교수진이 확충되면서 자연스레 한국인에 의한 운영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물론 학생들의 수업료로 인한 수입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계속해서 미국 기독교 재단들의 지원이 학교 운영의 원동력이었고, 때문에 선교부 일각에서는 미국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학교를 운영을 주도해야 한다는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에비슨 교장은 한국인, 미국인 할 것 없이 학교 구성원들이 동등하게 학교 운영에 참여하도록 하였고, 젊은 신임 한국인 교수들에게도 능력과 열의가 있으면 비중있는 보직에 앉혔다. 이러한 운영을 통해 학교 운영의 주체로 한국인들의 참여가 늘어났다.

연희전문학교는 일제의 가혹한 사상적인 탄압 대상이 되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등 일제가 일으킨 사상 탄압 사건에 주요 교수진이 검거되어 큰 타격을 받았다. 1938년 4월부터는 일본어, 일본사교육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1944년 4월에는 본 대학교를 적산이라는 명목으로 몰수하고 총독부의 관리하에서 한국인 간부와 교수진을 추방하였으며, 교명을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라'고 고쳐서 1945년 8.15 광복까지 이르렀다.

3.3. 연희대학교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실시되자 9월 ‘연희전문학교 접수위원회’가 조직(접수위원 백낙준, 유억겸, 이춘호, 김윤경, 이묘묵, 조의설, 김성권)되어 미군정청으로부터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의 재산과 운영권을 인수받아 연희전문학교로 교명을 회복하고 정식으로 재개교하였다. 1945년 10월 유억겸 교수가 5대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1945년 12월 18일 백낙준 박사가 6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일제시대 때 강제로 교직을 떠났던 국내외 여러 교수들이 다시 합류했다. 계속 국내에 머물렀던 한국인 교수들 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교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귀국해야 했던 미국인 교수들 가운데서 베커(Becker), 빌링스(Billings), 원일한 교수 등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학교의 재건을 도왔다. 당시 연희 교수진들 중에서는 외국인 교수들 뿐만 아니라 백낙준 등 미국 유학파들이 상당수 있었고, 일제 시대부터 연희전문은 영어 수업이 많았기 때문에 연희전문 출신 동문들은 영어에 능통한 경우가 많아 미군정청에서 요직을 겸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연희전문이 종합대학교로 승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옷을 벗은 교수들이 다시 합류하게 되었지만, 반면 여러 교수들이 떠나기도 했다. 해방 후 일제가 떠나면서 전원 일본인으로 교수진이 구성되었던 경성제국대학이 껍데기만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좌익 세력은 백남운(白南雲), 신남철(申南澈) 등을 중심으로 학술원을 조직하고 경성대를 접수하려 하였고, 일단 미군정청은 경성제대를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후 급히 교수진과 편입생을 모집하여 1946년 봄 개강시켰다. 당시 급조된 경성대학 교수진의 상당수는 연희 출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 강제 징용 등으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학생들의 일부가 연희로 돌아오지 않고 경성대(서울대)에 편입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연희는 종합대학 승격을 준비하였으나, 당시 연희전문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미국 재단으로부터 지원금도 있었고, 국내 뿐만 아니라 미주 동문회에서도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기부금을 보내주었지만 이것으로는 당시 재벌이라 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김성수가 이끄는 보성전문에 비해서는 재정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때 부산 출신의 자수성가한 30대 사업가 하원준이 시가 3,565만원의 토지 1,112,400여평을 연희대에 기부하여 재정 문제를 크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때 연희대의 재정에 큰 도움을 준 하원준씨의 성암재단을 기념하기 위해 1960년 준공된 연희관 옆 건물이 성암관이라고 명명되었다.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의 정식 인가로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연희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사족으로 1946년 당시 미군청으로부터 이화여대의 제1호 인가서(1946년 6월 24일)에 이어 7월 31일 제2호 인가서를 받아 두번째로 종합대학 승격이 결정되었다. 보성전문학교가 개명하여 신청한 고려대는 신청일이 1946년 8월 5일로 기록된 제3호 인가서를 1946년 8월 15일부로 받아 세번째로 종합대학 승격이 확정되었다.

연희대학교 정식 출범 9일전인 8월 6일, 학제 개편을 통해 문학원(국문학과, 영문학과, 사학과, 철학과, 정치외교학과), 상학원(경제과, 상학과), 이학원(수학과, 물리기상학과, 화학과), 신학원 4학원(단과대학) 11학과의 체제를 갖추었고, 초대 총장에 백남준 연희전문 교장이 그대로 임명되는 등 주요 보직 인선이 확정되었다.

동시에 1946년 9월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여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남녀공학제를 실시하는 대학교가 되었다. # 당시 연희대학교가 국내 최초로 남여공학을 실시한 것에 대해 국내의 반대 여론도 높았다고 한다. 해방 직후 부족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1946년 처음 입학한 10여명의 여학생들을 위해 여학생 시설들을 갖추느라 어려웠다고 한다.

동시에 광복 직부 학교를 재건하고 대학으로 승격한 연희대학교는 세브란스의대와 통합 논의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47년 세브란스의과대학의 예과 과정을 연희대학교 생물학과에서 이수하는 학사 교류가 체결되었고, 양교 통합을 전제로 1949년 세브란스의대 예과가 연희대 이학원(이과대학)에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광복 후 1940년대 후반 정부 수립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겪었던 각종 사회 혼란, 특히 극심한 좌우 대립 상황에서 연희대는 본의 아니게 그 전면에 위치하게 되었다.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학교이며,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당시 미군정청과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기에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연희대학교는 좌파 세력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공산당은 좌익학생들이 연희전문학교를 점령하도록 전력을 다했다. 연희대는 미국계 기독교 학교이기 때문에 좌익 세력들이 이 학교를 점령한다면 파급이 클 것이라고 믿었다. #

1949년 3월 17일 설립자의 장남이자 연희전문학교 제3대 교장을 역임하였고, 당시 연희대 명예총장이자 미군정청 중앙심의회 등에 참여하고 있던 원한경 박사의 부인인 엘터 여사가 교수부인회 모임에서 좌익 세력의 권총 저격 테러로 숨지는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교수부인회 모임은 1948년 제3차 UN총회에서 장면, 조병옥(연희 교수 역임), 정일형(연희 문과 졸업) 등과 함께 대한민국 승인 외교에 성공하고 돌아온 모윤숙을 연희대 교수부인회가 초청한 자리였다.

1950년 연희대학교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아울러 제1회 학사 졸업생이 배출됨에 따라 대학원이 개설되었다.

1950년 5월 기존 문학원, 상학원, 이학원, 신학원 4개 학원이 문과대학, 상경대학, 이공대학, 신과대학으로 개편되었고, 아울러 교육학과, 법학과, 생물학과, 전기공학과, 공업화학과, 의학예과가 증설되었다.

그러나 그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임시휴교했다. 9월 UN군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UN군이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연희대학교 교정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본관 건물 등이 훼손되기도 했다. 서울 탈환 이후 11월 재개강했으나 1.4후퇴 후 결국 부산으로 피난했다. 6.25 당시 북한의 남한 지식인 납북 작전에 의해 전현직 교수들이 북한에 강제 납북되기도 했는데, 김규식, 정인보, 이순탁, 이춘호, 최용준 등이 납북되었다.

1.4 후퇴 후 당시 문교부(교육부)에 의해 대구와 부산에서 열린 전시연합대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결국 연희대는 피난지 부산 영도에서 단독 개교를 결정했다.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백낙준 총장을 비롯하여 당시 정부 고위 관료 포진해 있던 연희전문 출신의 정부 요인들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이미 양교 통합을 합의했던 세브란스의과대학도 함께 임시캠퍼스를 사용했다. 우선 부산 영도 바닷가에 소재한 남항초등학교의 도움으로 남항초등학교 옆에 목조 가건물과 텐트를 세워 교육을 재개했다. 때문에 당시 초등학생들과 교사를 공유하며 공부했다고 한다. 이어 남항초등학교 앞 바닷가쪽 보리밭 845평(현 부산보건고 자리)을 구입하여 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UN으로부터 지원받은 목재를 이용하여 영구적인 목조 교사를 지었다. 당시 UN으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백낙준 문교부 장관의 알선 덕분이었다. 덕분에 당시 연희대학교는 피난지에서 조촐하지만 무려 도서관까지 갖춘 교정에서 교육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영도에는 부산 도심에서 오는 시내버스 노선이 없었지만 연희대학교 학생이 2000명에 육박하자 결국 시내버스 노선이 영도까지 연장되었다고 한다. 당시 전쟁통에도 천막을 치고 교육을 이어가던 연희대 부산 영도 교정을 영국 타임지가 취재하여 한국 교육 현상으로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부산 교정은 이후 부산연세실업초급대학을 거쳐, 한성여자실업초급대학, 금성여고, 금성여상, 영도여상, 한국테크노과학고를 거쳐 현재 부산보건고로 이어지고 있다. 2023년 2월 부산 영도 부산보건고에서 연세대학교 영도캠퍼스 옛터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1953년 8월 휴전에 따라 서울로 환도했다.

서울로 환도한 후 6.25 서울 수복전 당시 파괴된 교정을 복구하였다. 이어 종합대학교로 승격된 이후 야기된 공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격적인 캠퍼스 증축 플랜을 마련하였다. 이에따라 1954년 (구) 광복관, 과학관(현 연희관), 중앙도서관(용재관), 대강당, 체육관이 착공되었다.

1954년 정법대학이 신설되어 정치외교학과와 법학과가 정법대학에 소속되었다.

1955년 종교음악과(신학대학)가 신설되어 음악대학의 시초가 되었다.

1956년 5월 구 광복관이 준공되었다. 정법대학이 학생회관에서 광복관으로 이전하였다.

1956년 10월 과학관(현 연희관)이 준공되었다. 이공대학이 입주하여 사용하였다.

3.4. 교명 변화

4. 연세대학교로의 통합

두 학교는 초기에 모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서울지부에서 운영했다(제중원은 1894년 이후). 이미 1912년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준비하던 당시 미국 선교회 본부는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통합을 고려했다. 하지만 일제의 허가 및 운영 등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일단 각각 따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선교회가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교를 따로 운영하기로 한 결정적인 요인은 일제의 허가를 받기 어려운 문제 이외에도 당시 해당 학교가 장로교, 감리교 등 여러 교단이 연합해서 운영하였는데, 각 교단이 원하는 방식이 달라 이를 타협하는 것이 초창기 운영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였다고 한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숭실학교를 비롯 평양측 선교사들의 맹렬한 반대 때문이었다. 원래 연희(경신), 세브란스 양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교파는 미북 장로교 선교회였다. 하지만 미북 장로교 측은 평양에 많은 선교사를 파견했고 평양 숭실학교도 장로교 측에서 세운 학교였기 때문에 평양 선교사들의 반발을 고려하여 서울에 대학을 세우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서울 쪽에 많은 선교사를 가지고 있던 감리교가 총대를 메고 나서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심지어 연희전문학교 설립에 재정적으로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언더우드의 친형 존 토머스 언더우드와 존 세브란스가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교단을 옮겨 연희전문을 지원했을 정도였다. 이같은 문제 때문에 원래 경신학교가 장로교 측 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신학교 대학부인 연희전문은 초창기에 감리교가 주도적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고, 장로교는 한동안 세브란스만 지원하고 1921년까지 연희전문에 대한 지원을 보류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결국 초기에 연희전문과 세브란스는 장기적으로 통합하려는 마스터 플랜에도 불구하고 일단 별개의 재단으로 개교하게 되었다. 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도 한 원인이라고 한다.[23] 결국 일단 양 학교를 별도의 재단으로 운영한 후 추후 통합을 재논의하기로 했다고 한다.

결국 1915년 세브란스의학교와 별도의 재단으로 연희전문학교가 개교했다. 하지만 연희전문학교 개교 이후에도 꾸준히 선교부에서는 두 학교의 통합을 계획했다. 일단 1915년 4월 연희전문학교 개교 당시 총독부에 제출한 '대학' 설립 지원서에는 향후 의과를 포함하여 4~6년제 종합대학 계획이 서술되어 있다. 새로 개교한 연희전문학교 커리큘럼은 세브란스의학교와의 통합을 전제로 구성되었다. 연희전문학교는 예과 2년 후 전공을 선택하여 본과 2년 과정을 거친 후 졸업하도록 했다. 참고로 1924년 개교한 경성제국대학 역시 예과 2년 후 본과(전공) 2년 과정이었다. 1915년 12월 28일에 작성된 연희전문학교 이사회 교무 보고서에 따르면 연희전문학교는 예과 2년 후 본과 과정에서 의학, 인문학, 교육학, 산업화학, 전기공학, 상학, 농학 등의 전공으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다. 즉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통합이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1916년 언더우드가 사망하면서 양교 통합은 잠시 동력을 잃었다. 하지만 사망한 언더우드의 친형인 존 토머스 언더우드는 죽은 동생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미 선교회 본부에서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존 토머스 언더우드는 뉴욕 선교본부 안에 '조선 개신교육을 위한 협력이사회'를 설립하여 회장을 맡고 있었고, 세브란스병원을 지원하던 존 세브란스가 재무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존 언더우드와 존 세브란스는 양교 통합을 추진하기로 하고 서울 연희동에 통합대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서울역 앞의 좁은 부지로 고민하던 세브란스 측도 연희동으로 확장 이전하는 것에 적극 찬성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출연한 기부금으로 1917년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병원 및 의학전문학교는 공동으로 서울 연희동에 교지를 매입했다. 존 언더우드의 기부금으로 연희전문학교 측은 신촌의 현 연세대 본교 주변 부지를 매입했고, 존 세브란스의 기부금을 받은 세브란스 측은 그 옆 현 세브란스 병원 인근 부지를 매입했다. 양교의 통합을 통해 병원 확장 문제는 물론 의과, 상과, 문과, 이과, 신과, 농과 등을 갖춘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려는 장기적 플랜을 가지고 있다.

1916년 언더우드 사망 후 에비슨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이 연희전문학교 교장까지 겸임하였다. 당시 존 토머스 언더우드는 에비슨이 양교의 교장 업무 겸직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자동차를 제공했고, 덕분에 에비슨은 매일 오전에 서울역 앞 세브란스로 출근했다가 오후에는 자가용으로 신촌의 연희전문학교로 이동해서 업무를 볼 수 있었다. 학교 초기의 역사와 관련된 선교사들의 다수가 두 학교의 설립에 모두 관여했고 두 학교에서 동시에 강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에비슨은 본인이 교장을 겸직하던 두 학교의 통합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1920년대 일제의 민립대학 설치 억제 정책에 의해 결국 성취되지 못했다.

특히 양교 통합 작업은 1919년 3.1 운동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운동에 가담했던 연희전문학교는 상당수의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는 참사를 겪었고, 학교는 휴교해야 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며칠 전에 1회 졸업생을 배출했던 연희전문학교는 이로인해 큰 타격을 입었고 이후 학교가 정상화되기까지 약 2~3년의 세월이 걸렸다.

3.1 운동 후 일제의 유화적인 문화통치가 펼쳐지자 종합대학교 승격을 목표로 양교의 통합이 재추진했다. 그러나 일제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 하나만으로 조선의 대학을 퉁쳐버렸다.[24]

경성제대가 세워지자, 오히려 연희전문학교 및 세브란스 의전 양교 통합에 관한 내부 조율이 빠르게 진척되어 1926년 3월 에비슨의 주도로 연희전문학교 및 세브란스 의전 이사 및 교수진간에 양교 합동안이 합의되었고 미 선교회 본부로부터도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 및 제지로 성취되지 못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걸쳐 몇 차례 합동안이 다시 제안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양교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39년 또다시 양교를 통합하여 종합대학을 건설하는 안이 추진되었지만 일제의 간섭으로 실패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양교의 통합이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한편 세브란스의과대학이 1947년 6년제로 학사제도가 확대 개편되었고, 이에 따라 체계적인 예과 운영이 필요해졌다. 1947년 양 학교 간 학사제도 교류 협정이 체결되어 1948학년도 세브란스 의과대학 신입생부터 연희대학교 생물학과에서 예과 과정을 거친 후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본과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 체결되었다. 이후 1949년 두 학교의 통합을 전제로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의예과가 연희대학교 이과대학에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1949년 5월 연희와 세브란스 교수단이 합병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통합은 6.25 전쟁으로 다시 지연되고 말았다. 그러나 양교는 이미 통합에 잠정 합의한 만큼 부산 영도에서 공동으로 임시캠퍼스를 열어 운영했다.

휴전 이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 통합 위원회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개최되었고, 이 자리에서 합동안을 제정했다.[25]

1954년 10월 신촌캠퍼스에 세브란스병원 신축 이전 계획이 시작되었다.

1955년 3월 23일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대의 양교합동이 최종 결정되었다.

1955년 5월 25일 신촌캠퍼스 현 위치에 세브란스병원 신축 건물이 착공되었다.[26]

연희와 세브란스 두 학교는 통합에는 이미 뜻을 같이 했지만 정작 통합된 학교의 교명을 정하는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통합이 지연되었다. 연희대학교 측은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연희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세브란스 의과대학 측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연희대학교 세브란스 의과대학이라는 명칭도 제안되었지만 역시 수용되지 않았다. 결국 1956년 10월 희와 브란스의 앞 글자를 따 연세대학교라는 새로운 교명을 만드는 것이[27] 합의되었다. 1956년 재단법인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었고, 1957년 1월 5일 통합 연세대학교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초대 총장은 백낙준, 부총장은 최현배였다. 이후 5월 둘째주 토요일을 창립기념일로 정하여 기념하게 되었다.개교기념일 휴강을 없애버리신 어르신들

5. 연세대학교 통합 이후

1957년 신학기부터 연세대학교 출범에 따른 새 학교 교표(로고)와 배지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새 학교 로고는 1946년부터 사용되던 연희대학교의 교표 디자인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연희대학교의 '희'자를 '세'자로 바꾸어 연세대학교로 고친 차이 밖에는 없었다. 교훈 역시 연희대학교의 교훈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가 통합 연세대학교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1957년 도서관학과가 신설되었다.

1957년 11월 23일 용재관이 준공되어 중앙도서관으로 사용되었다.

1959년 경영학과, 건설공학과, 행정학과가 신설되었다.

1959년 11월 24일 대강당이 완공, 낙성되었다.

1960년, 1946년 연희대학교로 승격될 때부터 사용하던 학교 교표(로고) 디자인을 새로운 디자인으로 바꾸었다. 연세 두 글자의 자음 'ㅇ', 'ㅅ'을 형상화하여 방패에 새긴 형태로 이 'ㅇ', 'ㅅ' 방패 디자인은 이후 2023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동길 명예교수에 따르면 이 디자인은 양주동 전 교수가 도안했다고 한다.

1962년 2월 이공대학에서 이학부, 공학부가 분리되었다.

1962년 6월 세브란스병원, 의대교사, 간호학교 기숙사가 완공됨에 따라 세브란스병원과 의대가 서울역전에서 신촌캠퍼스로 이전하였다.

1962년 6월 국민 건강증진과 연세대학교 교육재원 확보라는 사명하에 연세우유가 설립되었다.

1963년 건설공학과가 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 기계공학과로 분리 신설되었다. 종교음악과가 신과대학에서 분리되어 음악대학으로 승격되었고, 아울러 신설된 음대에 성악과, 기악과, 작곡과가 신설되었다. 체육학과가 신설되었다.

1963년 교육관(유억겸기념관)이 준공되었다.

1964년 구 부산 영도캠퍼스에서 운영하던 연세실업초급대학을 폐지하고, 부산에 4년제 가정대학을 신설하였다.

1965년 지질학과가 신설되었다.

1966년 3월 가정대학을 부산 영도캠퍼스에서 서울캠퍼스로 이전, 통합하였다.

1967년 응용통계학과가 신설되었다.

1968년 치과대학, 치의예과, 천문기상학과가 신설되었다.

1968년 학생회관이 준공되었다.

1968년 가정관(현 빌링슬리관)이 완공되어 가정대학이 입주하였다.

1969년 간호학과가 간호대학으로 승격, 상학과가 경영학과에 통폐합, 생화학과, 요업공학과, 전자공학과, 식품공학과가 신설되었다.

1969년 5월 경영학교실단(현 백양관) 건물이 준공되어 상경대학이 사용하였다. 경영학교실단(경영관)은 남북 두개의 건물 사이에 배럴볼트라는 구조로 기둥 없는 로비층이 설치되어 주목을 받았다.

1972년 불문과, 독문과, 사회학과, 신문방송학과가 신설되었다.

1972년 종합교실단(종합관)이 준공되었다. 교양 수업 강의실로 사용되었고, 공간이 부족한 문과대학 등에서 일부 공간을 사용하였다.

1973년 아동학과가 신설되었다.

1973년 3월 의대대학 신관이 준공되었다.

1973년 공학관(현 제1공학관)이 준공되어 공학부가 과학관(현 연희관)에서 공학관으로 이전하였다.

1974년 중어중문학과가 신설되었다.

1974년 3월 치과대학 부속병원이 인가되었다.

1976년 8월 음악관(구관)이 준공되었다.

1976년 10월 이공대학이 이과대학과 공과대학으로 분리되었다.

1977년 학생회관이 증축, 완공되었다.

1978년 원주분교가 신설되었다.

1979년 3월 30일 신 중앙도서관이 준공되었다.

1981년 심리학과, 사회사업학과 신설, 사범대학(교육학과, 체육교육과) 독립, 정법대학을 사회과학대학으로 개편, 법학과가 정법대학에서 분리되어 법과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82년 전산과학과가 신설되었다.

1982년 3월 인문관(현 외솔관)이 완공되어 문과대학이 언더우드관에서 인문관으로 이전하였다.

1982년 10월 사범대학을 교육과학대학으로 개칭하였다.

1983년 국내 최초로 가정대학에 남학생 입학이 허용되었다.

1985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 행사를 열었다.

1988년 5월 백주년기념관이 준공되었다.

1989년 11월 무악학사(기숙사)가 준공되었다.

1990년 노어노문학과가 신설되었고, 가정대학을 생활과학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991년 4월 음악관 신관이 완공되었다.

1993년 도시공학과가 신설되었다.

1994년 산업시스템공학과가 신설되었다.

1994년 3월 제2공학관이 완공되어 금속공학과, 세라믹공학과, 전자공학과, 식품생활공학과, 전파공학과가 제2공학관으로 이전했다.[28]

1996년 6월 대우관이 완공되어 상경대학이 경영관(현 백양관)에서 대우관으로 이전하였다.

1996년 8월 한총련 사태로 신촌캠퍼스가 점거당했으며, 종합관 등이 전소되었다.

1997년 7월 제3공학관이 준공되어 전파공학과, 기계설계학과, 도시공학과, 산업시스템공학과, 컴퓨터과학과가 제3공학관으로 이전했다.

1998년 8월 제2인문관(현 위당관)이 건립되었다.

1998년 12월 상남경영관이 건립되었다.

1999년 2월 생활과학대학(삼성관)이 건립되었다. 생활과학대학이 가정관(현 빌링슬리관)에서 이전해 왔다.

1999년 3월 연세공학원이 준공되었다.

2000년 5월 새천년관이 완공되어 국제학대학원, 정보대학원 및 기타 연구원(실)이 입주하였다.

2000년 7월 과학원이 완공되어 지구시스템과학과, 생화학과, 시스템생물학과가 이전하였다.

2002년 1월 광복관 재건축이 완료되었다.

2003년 경영대학이 상경대학에서 분리 신설되었다.

2003년 4월 산학협동관이 준공되었다.

2003년 10월 언더우드기념관이 개관했다.

2005년 언더우드국제학부가 신설되었다.

2005년 2월 첨단과학기술연구관이 완공되었다.

2005년 5월 세브란스 새병원이 건립되었다.

2005년 5월 새 신학관이 건립되었다.

2008년 문화인류학과가 신설되었다.

2009년 11월 GS칼텍스산학협력관이 완공되었다. 화공생명공학부가 입주하였다.

2011년 8월 교육과학대학이 철거 예정인 용재관에서 종합관으로 이전하였다.

2014년 4월 연세암병원이 완공, 개원하였다.

2015년 경영관이 완공되어 경영대학이 대우관에서 경영관으로 이전하였다.

6. 국제캠퍼스

2010년 송도캠퍼스란 명칭으로 개교했다가 곧 국제캠퍼스란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인천광역시의 중점 사업중 하나인 송도국제도시의 개발에 따라, 신촌캠퍼스의 포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2005년 말 TF팀의 결성과 2006년 초 인천광역시와의 <연세대학교 송도국제화복합단지 건립을 위한 협약>을 시작으로 본격화되었다.

2008년 1단계 영역이 착공되었고, 2010년 자유관과 종합관, 기숙사 A, B, C동, 지혜관 A, 국제캠퍼스 기념관 등 1-1단계 사업이 완공되었다.

완공 이후 2011년, 소수의 학과들을[29] 국제캠퍼스에서 시범적으로 적용하였다.

2013년에는 1학년 전체를 1학기씩 송도에서 교육받도록 시범적용을 하였다.

2013년 1-2A단계 사업이 완공되어 언더우드 기념도서관, 크리스틴 채플, 지혜관 B, 진리관 A, B, C, D, 포스코 그린빌딩이 추가되었다.

더불어 2014년 1-2B단계 사업이 완공되어서 국제캠퍼스 내에서 학부생들이 사용할 기본적인 시설들은 전부 완공되었으며, 2014년부터 신입생 전체가 국제캠퍼스에서 1년간 수학하게 된다.[30]

학교 측에 따르면 아직 완공 기한은 정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2020년대 중반이면 대략적으로 완공되지 않을까.. 라고 두루뭉실하게 말하는 편.[31]

[1] 통합 당시부터 지금까지 부총장급 직위인 세브란스 의료원장 등은 의대 교수들이 선거로 직접 선발하고 있다.[2] 1886년 이화학당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튼 부인의 아들. 어머니와 함께 선교를 하러 한국에 왔다.[3] 1886년 개설된 제중원의학당에서의 교육은 1890년 무렵 중단되었다.[4] 여러 기독교 교단의 연합이라는 의미이다.[5] 일제의 강요로 변경하였다.[6] 당시 베커의 영어 명칭은 학장에 해당하던 dean었지만 한국어 명칭은 교감이었다. 그가 맡았던 역할이 이과 세 학과의 학장과 같은 역할이었기 때문에 학장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연희전문학교는 최초의 미국식 4년제 대학이었기 때문에 한국어 명칭이 확립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기 때문에 지금과 다른 명칭을 사용한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7] 이후 1923년 개정 교육령으로 학교에서 종교 교육이 허가되었고, 이에 에비슨 교장은 명목상으로 신학과를 부활하였지만 실제로는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8] 연희전문학교는 설립 초기에 1~2학년은 전공이 없는 예과 과정, 3~4학년은 전공 과정을 거치도록 했다.[9] 시카고여자의과대학(현 노스웨스턴대학에 소속) 출신으로 1887년 대학을 졸업한 후 1888년 선교를 위해 조선에 입국하여 광혜원에서 부인과 의사로 근무하며 선교활동을 하였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결혼하였고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학당에서 고아들에게 산수와 영어, 성경 공부를 가르쳤다. 특히 한국 여성들을 위한 교육에도 공헌했다. 1921년 70세의 나이로 한국에서 사망,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10] 당시 일본 제국에서 공포된 '전문학교령'에 의거하여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을 일컫는다.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전이 1917년 사립학교로는 최초로 구제전문학교 인가를 받았다.[11] 1919년 이후에 개정된 대학령에 의거하더라도 재단예치금 최소 3만엔의 재정 조건을 비롯한 구제대학의 요건이 워낙 까다로웠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1945년 종전까지 단 한 곳도 사립 구제대학으로 승격하지 못했다. 참고로 법문학부와 의학부의 단 2개 학부로만 구성된 경성제국대학이 혼자서 그렇지 않아도 만년 적자였던 조선총독부의 전체 교육예산의 1/3~1/2 가량을 소비했을 정도다. 그만큼 당시 기준으로 대학이라는 것이 고급 엘리트 교육기관이었으며 설치와 유지를 위해 엄청난 비용이 들었던 것이다.[12] 이미 1915년 입학한 학생들은 졸업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1919년에 폐과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결국 신학과 졸업자는 한 명도 배출되지 않았다. 이전에 전과하거나 자퇴한 것으로 보인다. 1922년 신교육령이 반포됨에 따라 학교에서 종교 교육이 일부 허용되었고 이에 연희전문학교도 명목상 신학과를 부활했지만 실제로는 에비슨 교장이 신학과 입학생을 모집하지 않았다. 때문에 실질적으로 폐과인 상황이 이어졌다.[13] 1907년 수업연한을 3년으로 연장[14] 현 체육교육관 뒤편에 위치했다.[15] 비록 일제의 불허로 전공이 개설되지는 않았지만 법학, 사회학, 공학 전공 교수진을 영입했다. 나아가 음악과 등을 설치하여 예체능 계열까지 확대하는 것이 목표였고 실제로 김영환, 현제명 등 음악 전공자들이 교수진으로 영입되었다.[16]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아들[17] 컬럼비아대학교 이학석사. 1942년 간첩 혐의로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뤘다.[18] 경성공업전문학교는 방직과, 토목과, 건축과, 광산과, 응용화학과가 개설 운영되어 오다가 1937년 전기공학과, 기계과가 추가 개설되었다.[19] 예과생은 1939년부터 받았다.[20] 연희전문학교에서도 일본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있었다. 일제의 규제 때문에 반드시 일본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있어야 했고, 일본인 교수도 채용해야 했다.[21] 앨비온대와 미시간주립대 모두 베커 학장 및 루퍼스 학과장의 모교였고 그들의 추천 덕분에 유학할 수 있었다. 물론 이원철은 유학가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쳤다.[22] 대학의 기원이 된 중세 길드식 대학의 모태인 독일 등 유럽 대학은 근대 이후 국가의 영향력을 크게 받게 되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 좌파 정당의 주도하에 대학 평준화 정책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유럽 대륙의 대학 경쟁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세계 최고의 대학 중 하나였던 베를린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 소르본 대학 등은 현재는 평범한 평준화 대학으로 전락했다. 반면 미국과 영국에서는 국가의 개입을 최소하는 자유주의, 실용주의 사조의 영향하에 대학 역시 정부에 대한 자율성이 존중되어 왔고 그 결과 20세기 후반 세계적 명문대의 대다수를 미국 대학이 차지하게 되었고, 영국 대학 역시 경쟁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23] 세계대전 발발로 일부 교단이 재정이 어려워져 지원을 중단했고 이때문에 세브란스와 연희를 지원하는 교단이 차이가 생겼다.[24] 학교 교과서에는 일제가 사립대학 승격을 불허한 대신 경성제대를 설립해서 퉁치고 입막음하려 했다는 식으로 설명되어 있으나 최근 들어서는 폐기된 이론이다. 일제는 민립대학설립운동 및 각 지역의 구제전문학교들의 사립대학 승격 요구 전부터 경성제대 개교 계획은 세워 왔으며 어쩌다 그 시기가 우연찮게 맞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경성제대와는 별개로 조선인들이 고등교육을 받아서 의식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경계해서 사립대학 추가 설립 및 승격을 불허한 건 사실이었다. 경성제대는 유일한 관립대학이라는 지위를 통해 식민지배에 충성하는 황국 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경성제대 출신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건 아니다.[25] 한때 이화여대의 합류 가능성도 잠시 논의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학과들이 중복되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의견 제기 수준에서만 그치고 불발되었다.[26] 미국 China Medical Board 기부금과 주한 미8군의 도움을 받았다.[27] 단순히 이름만 붙인게 아니라 세상을(世) 이끄는(延) 인재를 기르는 대학이 되겠다는 의미까지 끼워맞췄다.[28] 연세뉴스[29] 학교에서 발표하기로는 우수한 학과들을 우선적으로 적용한다고 했지만, 자연대나 공대처럼 실험실과 장비가 필요한 학과는 제외된 반면, 의치대처럼 학과가 인기가 좋아 송도로 보내도 무방하거나, 역사가 짧아서 힘이 없는 곳들이었다.[30] 음악대학, 미래캠퍼스 제외.[31] 조감도와 비교했을 때 지금은 대충 55% 정도 완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