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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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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혁2. 역사
2.1. 평양신학교
2.1.1. 1901-19102.1.2. 1910-19382.1.3. 1938-1945
2.2. 총회신학교
2.2.1. 1945-19602.2.2. 1960-1969
2.3. 총신대학교
2.3.1. 1970-19802.3.2. 1980-

1. 연혁

총신대학교의 역사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일시 내용
1901. 05. 15.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 선교사 자택에서 본교의 전신인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가 개교.[1] 초대교장으로 마포삼열(Samuel A. Moffet) 박사가 취임
1908. 05. 12. 평양시 하수구리 100번지에 교사를 건축하여 이전.
1925. 10. 20. 제2대 교장으로 라부열(R.L.Roberts) 박사가 취임.
1938. 09. 20. 신사참배 거부로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 폐교.
장로회신학교
1948. 05. 00. 서울 남산에서 장로회신학교 개교.
1948. 06. 00. 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박형룡 박사가 취임.
총회신학교
1951. 09. 18. 본교 이사회 결의에 의하여 총회신학교를 개교하고, 초대교장으로 감부열(A. Campbell) 박사가 취임.
1953. 10. 12. 제2대 교장에 박형룡 박사가 취임.
1960. 03. 27. 본교 교사 위치에 국회의사당 건립이 예정되어 남산동 소재 대한신학교 건물을 임시교사로 정하고 이전.
1960. 08. 22. 본교 교사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 319번지 소재의 새 교사로 이전.
1960. 09. 27. 제3대 교장에 박형룡 박사가 취임.
1963. 01. 01. 제4대 교장으로 이상근 박사가 취임.
1964. 02. 01. 제5대 교장에 박윤선 박사가 취임.
1964. 03. 22. 제6대 교장으로 명신홍 박사를 선임.
1965. 08. 30. 사당동 산 31-3 소재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
1969. 02. 13. 제7대 교장에 박형룡 박사가 취임.
1972. 03. 01. 김희보 박사가 제8대 학장으로 취임.
1973. 11. 17. 기숙사를 준공.
1976. 12. 27. 제2교사를 준공.
1980. 09. 01. 정성구 교수가 10대 학장으로 취임.
1983. 05. 15. 양지캠퍼스에 제1교사를 준공.
1984. 10. 05. 보육과 학과명칭을 유아교육과로 변경.
1985. 03. 16. 총신대학교 부속유치원 설립인가.
1985. 05. 10. 사당동 캠퍼스에 학생회관을 준공.
1986. 05. 27. 박영희 교수가 제12대 학장으로 취임.
1986. 10. 16. 양지캠퍼스에 생활관과 식당을 준공.
1987. 10. 05. 학생회관 4층을 증축.
1990. 06. 01. 박영희 교수가 제13대 학장에 취임.
1992. 04. 16. 차영배 교수가 제 14대 학장에 취임.
1994. 04. 20. 사당동캠퍼스에 본관증축 및 여자생활관을 준공.
1994. 04. 31. 양지캠퍼스에 도서관을 준공.
총신대학교
1995. 03. 01. 교명 총신 대학을 총신대학교로 변경.
1995. 03. 30. 김의환 박사가 총신대학교 제1대 총장(역대15대)에 취임.
1995. 10. 04. 종교음악과를 교회음악과로 학과명칭 변경.
1996. 09. 24. 양지캠퍼스에 제2생활관(지하 1층, 지상 3층) 준공.
1998. 02. 13. 사당동 캠퍼스 종합관(지하 1층, 지상 7층)을 준공.
1998. 10. 19. 아동학과 신설.
2000. 09. 26. 김의원 박사가 총신대학교 제2대 총장(역대 16대)에 취임.
2001. 05. 16. 총신대학교 개교 100주년기념예배.
2001. 07. 26. 사회복지학과 신설.
2002. 02. 19. 양지캠퍼스에 총신100주년기념예배당(지상 4층) 준공.
2003. 09. 04. 양지캠퍼스 제3생활관 준공.
2004. 03. 01. 종교교육과 학과명칭을 기독교교육과로 변경.
2004. 11. 25. 김인환 박사가 제3대(역대 17대) 총장에 취임.
2005. 10. 21. 문소기독교박물관 개관(양지).
2005. 12. 16. 대학 아동학과, 사회복지학과 야간에서 주간으로 변경.
2007. 03. 26. 사당캠퍼스 제2종합관(지하1층, 지상4층) 준공.
2007. 09. 20. 양지캠퍼스 행정동연구동(지하1층, 지상5층) 준공.
2007. 10. 24. 사당캠퍼스 학생회관 건물을 총신대부속유치원 시설로 리모델링.
2008. 05. 01. 양지캠퍼스 도서관을 리모델링.
2008. 06. 05. 양지캠퍼스 도서관 건물 1층을 문소기념박물관 추가 시설로 리모델링.
2008. 10. 23. 사당캠퍼스 3층에 총신역사갤러리를 오픈.
2009. 03. 13. 양지 제1생활관 리모델링 준공.
2009. 09. 18. 정일웅 박사가 제4대 총장(역대 18대)에 취임.
2012. 03. 15. 양지 제2생활관 리모델링 준공.
2013. 01. 30. 학교법인 명칭을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신대학교로 변경.
2013. 05. 29. 양지캠퍼스 강의동 및 도서관 리모델링 준공.
2013. 05. 30. 사당캠퍼스 신관 리모델링 준공.
2013. 08. 19. 학부에 중독재활상담학과를 개설.
2013. 12. 17. 길자연 박사가 제5대 총장(역대 19대)에 취임.
2015. 08. 25. 김영우 목사가 제6대 총장(역대 20대)에 취임.
2019. 05. 25. 이재서 박사가 제7대 총장(역대 21대)에 취임.
2019. 09. 03. 사당캠퍼스 백남조기념홀 명명
2020. 02. 24. 상담대학원에 아동상담심리학과(계약학과) 석사과정을 신설
2020. 05. 08. 신학대학원에 목회학심화석사(S.T.M)과정을 개설
2020. 09. 12. 평화통일개발대학원을 신설.
2023. 05. 25. 박성규 목사가 제22대 총장에 취임.
출처

2. 역사

2.1. 평양신학교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장로회신학대학교
, 한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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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1901-1910

총신대학교는 1901년 5월 15일 평양 대동문 옆 술막골에 소재한 마포삼열(Samuel A. Moffet) 선교사의 집에서 설립된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그 전신으로 한다. 이 신학교는 체계적인 현지 목회자 양성의 필요성을 인식한 미국장로교 선교부 평양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설립되었다. 이 학교의 첫 학생은 장대현교회 시무 장로였던 방기창과 김종섭 두 명이었다. 공의회는 같은 해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합동공의회를 조직하여 선교사들을 돕는 한국인 조사들의 신학교육을 위한 구체적인 제도 마련에 착수했다. 합동공의회는 1901년 만장일치로 신학교 설립을 결의했고 이듬해 신학생들을 위한 5개년 교과과정을 제안한 후 전국 교회에 학생을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평양에서 시작된 신학교는 1903년부터 네 명의 학생을 추가로 모집하여 1년 교육과정을 3개월에 집중 교육하는 방식으로 여섯 명의 신학생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 신학교의 첫 교수진은 초대 교장인 마포삼열과 배위량(W.M. Baird), 소안론(S.L.Swallen), 이길함(Greham Lee), 한위렴(William B. Hunt), 편하설(C.F. Bernheisel) 선교사였다. 평양신학교는 1903년 조사들을 위한 3년 과정과 신학교육을 위한 5개년 과정을 운영했으며, 이 과정은 1903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평양신학교의 교육은 처음부터 이론과 실천의 조화를 추구했다. 교육 과정은 매년 3월부터 6월까지 6주씩 두 차례에 걸쳐 시행되는 3개월의 학교 수업과 9개월의 현장 목회 실습으로 이루어졌다. 현장 실습 기간에도 모든 학생들은 자율학습과 할당된 독서 과제를 읽고 제출하는 학업을 지속해야 했으며 3월 입학 시 시험을 통해 그 결과를 평가받아야 했다. 1904년에는 학생 수가 19명으로 늘어났고 각 지방공의회에서 선발된 목회자 후보생들이 장로교 공의회의 인준을 받았다. 1905년에는 4월부터 6월까지 총 3개월간 학생들이 학교에 머물며 신학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사 제도를 변경했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사경회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은 평양신학교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부흥운동의 결과로 더 많은 학생들이 신학교에 입학했고 이 해 재학생의 수가 75명이 이르렀다. 평양신학교의 첫 졸업생은 1907년 6월 20일 배출되었다. 이들은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이기풍이었다. 이들 졸업생이 1907년 가을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9월 17일에 마침내 이 땅에 “조선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라는 명칭의 독립적인 장로교회가 조직되었다. 또 이 때부터 이제까지는 평양공의회가 관장해 오던 평양신학교를 전국 장로교공의회가 장로교회의 신학교로 인준하고 직접 관장하기 시작했다. 이로서 이전까지는 여러 가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던 평양신학교가 비로소 “조선장로교신학교”라는 공식 명칭을 확정할 수 있었다. 조선장로교신학교는 입학시험과 학사관리에 엄격했으며 처음부터 총회 산하 각 노회와 긴밀한 유대 관계 속에서 목회자 후보생들을 위탁받아 철저하게 교육했으며 매년 학생들의 학업 결과를 소속 노회에 통보했다.

1908년 5월 15일에는 평양 하수구리 100번지 언덕에 마련된 약 6,000평의 대지 위에 학교 건물 건축의 정초식을 거행했다. 새로운 교사는 시카고에 살던 맥코믹 여사의 기부금을 기초로 하여 2층 한옥으로 건축되었다. 호주장로회, 미국남장로회와 북장로회, 그리고 캐나다장로회 이상 네 개 선교부의 후원을 받아 매년 3개월 동안 학생들이 신학수업을 위해 머물 수 있는 기숙사가 1911년 기공하여 1913년 완공되었다.

2.1.2. 1910-1938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합방한 이후에 조선장로교신학교는 일제 무단통치에서 자행된 탄압과 105인 사건 등으로 인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조선장로교신학교는 1910년 전개된 백만인구령운동과 1919년 발생한 3.1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3.1 독립선언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길선주 이상 네 명이 본교를 졸업한 동문이었고 또 다른 대표 이승훈은 당시 장로교신학교의 재학생이었다. 이들 뿐 아니라 강규찬, 김선두, 김창건 등 수많은 동문들이 독립선언에 참여한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서 본교의 발전은 계속되었다. 1912년 7개 노회로 장로교 총회가 성립된 후 총회는 장로교신학교의 신경을 확정하여 신학교의 체제를 정비했다. 1915년에는 제 8회 졸업생으로부터 동창회가 조직되었으며 양전백 목사가 첫 회장이 되었다. 1916년 제5회 총회에서는 신학교육부를 설치하고 3명의 이사를 파견하여 이사회를 구성함으로써 총회 차원에서 신학교 관리와 지원을 체계화 했다. 1918년에는 정통신학의 교육과 보급을 목표로 한 「신학지남」이 처음으로 발행되었다.

1921년 9월부터 방위량 선교사가 미국에서 모금해 온 기부금을 바탕으로 삼아 현대식 3층 건물로 된 새교사를 건축하기 시작하여 1922년 9월 27일 낙성식을 거행했다. 재학생의 수가 400명이 넘어서자 기숙사 시설도 새로 확충되어 학생들의 학업과 경건훈련을 강화할 수 있었다. 학생 선발은 더 철저하게 이루어졌지만 입시의 편의를 위해 1922년부터 입학시험은 각 지방에서도 실시되었다. 또 1923년 3월부터는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 교육을 위한 부설 주일학교부를 신설하여 각 노회별 주일학교 교사 강습을 실시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주일학교 교회 교육을 선도했다.

1925년 제1대 교장인 마포삼열이 사임하자 그의 뒤를 이어 라부열(Stay L. Roberts) 선교사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1920년부터는 1년 1학기제가 1년 봄 학기와 가을학기의 2학기제로 개편되었으며 수업연한도 5년에서 3년으로 수정되었다. 매주 수업은 18-19시간으로 이루어졌으며 토요일 오후와 월요일 오전을 제외한 매일 수업이 이루어졌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비롯한 영어 수업이 강조되었으며 목회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오르간 연주와 성악 수업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 시기 신학교에 대한 총회의 적극적인 지원도 더 활성화되었다. 1928년부터는 신학교육부 한국인 이사가 3명에서 6명으로 늘어나 과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1929년 제18회 총회는 신학교를 재정을 담당하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여 학교의 자생적 발전을 적극 후원했다. 이와 같은 후원 속에서 본교는 신학교 도서구입 운동을 전개해 다수의 서적을 도서관에 확보할 수 있었다. 1927년에는 신학연구과를 개설하여 가을에 3개월 과정으로 졸업하고 임직한 현직 목회자들을 위한 재교육을 실시했다. 또 신학교 입학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신학 교재를 우편으로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통신과를 운영했으며, 목회자들에게 단기간 성경 연구와 수양회 및 사회 연구의 기회를 마련하는 별신학 과정을 운영하기도 했다.

1925년 가을학기부터는 한국인 출신 교수들의 강의도 시작되었다. 최초로 정식 교수로 임명된 한국인 교수는 남궁혁이었다. 그 이전 김선두 목사는 1924년 가을부터 강의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성휘 교수는 1926년 후기에 임시 교수로 출강하기 시작하여 1929년 9월 조교수가 되었으며, 박형룡은 1928년 봄에 임시 교수로 강의를 시작하여 1933년 루이빌 침례교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37년 9월 7일 정식 교수로 임명되었다. 박형룡 교수는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본교에까지 영향을 주기 시작한 진보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신비주의의 도전에 맞서 보수적 신학을 사수하기 위해 분투했다.

2.1.3. 1938-1945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일제는 소위 문화정책을 펼쳤다. 조선총독부는 특히 효과적인 식민지 통치를 위해 신사참배를 정치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강요했고, 전국 각 학교에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서 강요했다. 이미 1925년 선교사들은 일제가 요구했던 신사참배를 종교의례라고 규정하고 이를 거부하기로 결의한 바 있었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더 노골화된 일제의 요구에 맞서 장로교회 산하 각급 학교들은 신사참배가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고 보고 총독부에 지시를 거부했다. 그 결과 평양 숭실중학교와 숭의여학교의 교장이 사임 처리되고 폐교되는 등 장로교회 산하 여러 학교들이 피해를 입었다. 본교 역시 신사참배를 거절한 결과 발생한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장로교회는 결국 일제의 위협과 회유에 굴복하고 말았다. 1938년 2월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고 참배하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같은 해 9월 총회가 열릴 때까지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그리고 평양 서문밖교회당에서 열린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9월 9일 신차참배를 결의하고 바로 다음날 임원들과 총대 일동이 평양 신사를 참배했다. 이에 반발한 주기철, 한상동, 이기선 등 본교 출신 목사들은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며 당시 재학 중이던 학생들도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섰다.

신학교는 총회 직후인 9월 학기 휴교를 선포했다. 교수진은 이듬해 2월 1일 모여 봄 학기는 통신으로 수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지만 봄 학기 이후 무기한 휴교 상태에 들어감으로써 사실상 폐교했다. 1934년 4월 13일 거행된 제34회 졸업식은 구 평양신학교의 마지막 졸업식으로서 모두 54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던 여러 선교사들이 귀국하고 학교가 사실상 폐교 상태가 되자 1939년 총회 직후 총회신학 교육부는 3월 3일 평양서문밖교회에 모여 평양신학교의 재건을 결의했다. 이른바 (후)평양신학교는 1940년 2월 9일에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전문학교에 준하는 학령을 인정받는 학교로서 4월 11일에 개교했다. 그러나 이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한 채필근은 적극적인 친일 강연을 했던 인물이었다. 새로 개교한 신학교의 학생들은 주기적으로 신사참배를 했으며, 예배 중에는 황국신민서사 암송 및 동방요배 등을 해야만 했다. 같은 해 4월 서울에서는 미국에서 자유주의적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 온 김재준, 송창근이 주도해 조선신학교가 개교했고 이 학교는 1945년 9월 열린 제32회 총회에서 인준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이 발생하자 일제는 장로교회와 감리교, 성결교를 해체하기 위해 교단 간의 합병을 강제했고 1945년 7월 19일 마침내 조선의 모든 개신교단을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시켰다.

2.2. 총회신학교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고신대학교
, 부산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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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1945-1960

한국의 교회와 신학교육의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순간 일제가 패망하고 8.15 해방이 찾아왔다. 북한에서는 곧 평양장로교 신학교가 재건되지만 공산정권 치하에서 많은 탄압을 받았다. 북한의 평양장로교 신학교는 1950년 3월 감리교의 성화신학교와 강제로 합병되어 조선기독교신학교가 되었다가 1950년 7월 폐교되었다. 남한에서는 부산에 고려신학교가 1946년 이미 개교했다. 1947년에는 조선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51명의 학생들이 조선신학교 교수진의 자유주의 신학을 문제 삼는 진정서를 총회에 제출했다. 1948년 5월에는 서울 남산에서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했다. 1949년 개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5회 총회는 서울 남산의 장로회신학교를 평양 조선장로교신학교의 정통성을 계승한 신학교로 인준했고 이 학교의 교장으로 박형룡 박사가 취임했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부산중앙교회에서 속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6회 총회는 조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설립하여 직영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해방 후 발생한 신사참배 문제 처리 문제와 자유주의 신학 문제를 둘러싼 신학교의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한 총회의 결정이었다. 이 결정에 따라 대구 대신동 283번지에 위치한 임시 교사에서 총회신학교가 개교했다. 이 총회신학교의 교장에는 감부열(Archibald Campbell) 선교사 취임했고 박형룡, 한경직, 권세열, 명신홍, 김치선 등이 교수진을 구성했다. 학제는 예과 2년, 본과 3년, 별과 3년으로 정했으며 1952년에는 약 500명의 학생이 재학했다. 1952년 9월에는 학생회의 학술지인 「로고스」가 창간되었으며 그 동안 간행되지 못했던 「신학지남」도 1954년부터 다시 발행되기 시작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자 총회신학교 이사회는 새로운 교장으로 박형룡 박사를 선임하고 학교 교사를 서울시 중구 회현동 1가 산1번지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의 완전한 이전은 1954년에 완료되었으며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 시설도 차음 완비되었다. 총회신학교는 1955년 문교부로부터 대한예수교장로교회 신학교의 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1950년대 한국장로교회는 여러 차례 분열을 겪었다. 신사참배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발생한 고신측과의 분열,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을 둘러싼 문제로 발생한 기장측의 분열에 이어 세계기독교협의회(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의견 대립 등의 문제로 인해 장로교회는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했다. 당시 총회신학교는 학교 부지 구입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의 책임을 지고 1958년 교장직을 물러난 박형룡 박사의 뒤를 이어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잠시 교장 대리를 맡고 있었다. 1959년 장로교회의 분열의 주된 원인은 해방 이후 계속되어 온 신학적 이해의 갈등과 교권의 갈등이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구체화된 결과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했던 측은 스스로 통합측이라고 명명하고 대광교등학교를 거쳐 이후 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대지를 구입하여 교사를 짓고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했다. 한편 보수정통신학을 지키려한 교수진과 학생들은 남산 학교에 남아 학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1960년 국회의사당 건립이 총회신학교 자리에 예정되자 1960년 3월 남산동 소재 대한신학교가 사용하는 교사를 주간에 임시로 사용하기로 하고 학교를 이전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22일에는 용산구 한강로 2가 319번지 소재 용산 교사를 구해 바로 다음 학기부터 이곳에서 5년간 수업을 진행했다.

2.2.2. 1960-1969

1960년 12월 14일 속개된 합동총회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과 고신측이 합동했으나 이후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1963년 고신측 일부가 환원함으로써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의 합병을 통한 총회 산하 신학교의 일원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두 교단의 합동 조건이었던 신학교 윤번제를 지키기 위해 이상근 박사가 1962년에 교장에 취임했고 1964년에는 박윤선 박사가 교장에 취임했다. 1965년 총회는 총회신학교의 신학교육을 체계화하기로 하고 학제를 개편했으며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신학교 건축을 위한 전국적인 모금 운동이 1963년부터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1965년 윤번제가 폐지된 후 취임한 교장 명신홍 박사는 전국 교회와 미국까지 찾아가 모금 활동을 펼쳤다. 부산부전교회의 백남조 장로는 사재 200만원을 헌납하여 새로운 교사 건설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들과 전국교회의 헌신을 통해 총회신학교는 1965년 8월 30일 사당동 산 31-3번지에 18,000평의 교지를 확보해고 그 위에 884평의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했다. 총회신학교는 문교부로부터 1967년 5월 4일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으로 정식 인가를 받고 15명의 이사와 2명의 감사로 이사회를 구성하였으며 초대 이사장에는 백남조 장로가 선출되었다. 6월 12일에는 문교부로부터 대학령에 준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설립을 인가 받았으며 1969년에는 4년제 정규대학인 총회신학대학(신학과 50명)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2.3. 총신대학교

2.3.1. 1970-1980

총신대학교의 초대 학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에 이어 1972년 2월에는 김희보 박사가 제2대 학장에 취임했다. 이 때 신학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해외 유수 대학에서 학위를 마친 여러 신진 교수들이 1976년 신학원과 대학부에 많이 부임했다. 또 총신대학교 건설 7개년 계획에 따라 1973년에는 연건평 410평의 기숙사가 준공되었으며 1976년에는 연건평 1,800평의 제2교사인 신관이 준공되었다. 총신대학교의 학과증설도 계속되었다. 1973년 12월에는 문교부로부터 종교교육과 20명과 종교음악과 20명의 학과신설을 인가 받았으며, 1975년 12월 16일에는 문교부로부터 학교명을 총신대학교로 사용하는 인가를 받았다. 같은 해 종교교육과의 정원을 30명을 증원하는 인가를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종교음악과의 정원이 40명으로 증원되는 인가를 받았다. 1977년에는 총회의 결의를 따라 목회자 재교육을 위한 2년 4과정의 목회신학원이 설치되었다. 1978년 2월에는 문교부로부터 신학석사(Th.M.) 20명 기독교교육 석사(M.A.) 10명 총 정원 30명의 대학원 설치인가를 받았다.

이 시기에는 전국대학 입결 23등을 차지할 정도로의 명문학교였다.

2.3.2. 1980-

총신대학교는 1970년대 말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 발생한 교권 분쟁과 1980년대 신군부의 독재 상황 속에서 학교가 분열되고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는 등의 어려움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러나 이 어려움 속에서도 학교를 재정비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1980년 2월 대학부는 문교부로부터 역사교육과(40명), 영어교육과(40명), 보육과(50명) 학과 신설을 인가받았고 11월에는 신학대학원(정원 100명)의 설치를 인가받았다. 이로써 3년 과정의 목회학석사(M.Div.) 학위를 정식으로 수여할 수 있게 되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학문적 위상이 공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981년 신학대학원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목회자 양성을 위해 세워진 본교의 설립 취지를 살리기 위해 12명의 전임교수와 1명의 객원교수를 임명했으며 신학대학원의 학사와 행정을 정비하고 1982년부터 이를 실시했다. 1981년에는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제일면 산 41-1 소재 225,329평의 교지를 확보하고 1983년 신축 기공예배를 드린 후 이듬해 1984년 5월 15일 제1교사의 준공예배를 드렸다. 1981년에는 신학대학원에서 「총신원보」가 처음 발행되었으며 1982년에는 학생들의 선거를 통해 원우회가 발족했다. 1986년에는 양지캠퍼스에 연건평 1,477평의 생활관과 연건평 245평의 식당을 준공하여 학생들의 생활을 많이 개선했다. 1988년에는 황해노해가 양지캠퍼스에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복원하여 전시관 및 기도처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또 이듬해에는 연건평 1,987평의 양지도서관의 기공예배를 드리고 1994년에 준공했다.

1984년에는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 보육과의 학과 명칭의 유아교육과로 변경되었으며 1985년에는 대학부설 평생교육원이 개설되었고 총신대학교 부속유치원(정원 90명) 설립인가를 받았다. 1987년에는 문교부로부터 대학 신학과와 종교음악과 정원을 각 10명씩 증원받았으며 대학원 박사과정(Th.D. 정원 10명) 설치도 인가 받았다.

1990년대에도 학교의 발전은 계속되었다. 신학대학원의 정원은 1990년에는 20명, 1992년에는 10명, 1993년에는 20명, 1994년에는 80명, 1995년에는 173명의 증원하도록 인가 받았다. 1995년에는 초대 총장으로 김의환 박사가 취임했다. 김의환 박사는 양지캠퍼스와 사당캠퍼스의 교사를 건축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1996년에는 연건평 680평의 제2생활관을 준공했다. 사당캠퍼스에는 1994년 본관을 증축하고 여자생활관을 준공했으며 1995년에 종교음악과의 명칭을 교회음악과로 변경했고, 대학원은 17명 정원을 증원 인가 받았고 교육대학원(야간 정원 80명)의 설치도 교육부로부터 인가 받았다. 1996년에는 교육부로부터 선교대학원 (정원 65명) 설치인가를 받았고, 1998년에는 아동학과(야간, 정원 20명) 신설 인가를 받았으며 1995년에는 연건평 5,017평에 이르는 종합관 기공예배를 드리고 1998년 2월 13일 준공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총신대학교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바른 신학 위에서 바른 목회자와 기독교 인재 양성을 위해 계속 노력했다. 2001년에는 본교 개교 100주년을 감사하는 예배가 드려졌으며 『총신대학교 100년사』가 출간되었다. 같은 해에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사회복지학과(야간, 정원 40명) 신설을 인가받았으며 목회신학전문대학원 박사과정 (정원 20명)의 증원을 인가 받았다. 2002년에는 양지캠퍼스에 총신100주년 기념예배당(연건평 1,488평)의 준공예배를 드렸고 이듬해에는 양지캠퍼스 제3생활관을 준공했다. 2004년에는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위치를 양지캠퍼스로 변경하는 인가를 받았다. 2006년에는 양지캠퍼스에 본관 기공예배를 드리고 2007년 9월 20일 준공예배를 드렸다. 사당캠퍼스에서는 2006년 제2종합관이 기공되어 2007년 3월 26일 준공예배를 드렸다. 2014년에는 미국 갈보기신학교(CBTS) 도서관의 장서 7만권을 구입해 양지도서관에 설치했다. 2005년에는 총신 100만 기도후원회 중앙본부가 결성되어 전국적인 지역본부 발대식과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2000년대에는 본교의 국제 교류도 활발해 졌다. 2010년 미국 트리니티 기독대학교, 리디머 대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등과, 2012년에는 미국 고든콘웰신학대학원과 자매결연을 체결했다. 또 2016년 본교 양지캠퍼스에서 개최된 아시아신학연맹(ATA) 총회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의 국제 학술대회가 본교 주관으로 개최되었다.

총신대학교는 지난 120년 동안 밖으로부터 주어진 고난과 안에서부터 발생한 혼란 속에서 외형적 측면의 발전뿐 아니라 바른 신학 위에서 내실을 다질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해 왔다. 본교는 지금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의 직영 신학교로서 본 교단의 목회자 후보생 교육과 기독교 지도자 양성을 위해 본 교단의 신조와 헌법에 기초하여 개혁신학과 개혁신앙, 개혁실천을 목표로 삼고 교회와 이웃을 성경의 진리대로 섬기는 실천적 인재양성을 위한 학문과 인격의 훈련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총장인 이재서 교수는 시각장애인으로, 사회복지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대학 총장으로 알려졌다. 기사]


[1] 총신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의 개교기념일은 5월 15일로 두 학교 모두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모태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