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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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 현재 |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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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0년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
과거 서울에 존재했던 사립 종합대학교. 전라북도 완주군에 위치한 우석대학교와 전혀 관계 없는 학교이며, 학교의 교명은 한자도 다르다. 현존하는 우석대학교는 우석(又石), 본 항목은 벗 우의 우석(友石).[1] 1971년에 고려대학교에 인수되어 흡수합병되었으며, 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고려대학교 간호대학,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의 전신이다.
2. 역사
2.1.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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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시절 | 고려대학교 혜화병원 시절 |
1890년부터 조선에서 의료활동을 하며 의학교육을 통해 후학을 양성하던 여성 서양 의사 로제타 홀[2](Rosetta Sherwood Hall)은 당시 유교적 관습으로 인해 여성이 남성의사에게 몸을 보이는 것을 기피해 의료에서 소외되는 현실을 보고 여의사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2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이곳은 조선 최초의 여성을 위한 의학교육기관이었다. 1933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개칭되었다.
이후 1938년 4월 순천시의 거부 우석(友石) 김종익(1886~1937)이 유언으로 거액의 재산을 기부하여 재단법인 우석학원(友石學園)을 조직, 의학전문학교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개교하였다. 이는 김종익의 딸이 고등학교 재학 중에 병으로 숨을 거두자, 여자 의사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을 실천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3]
구제전문학교로 인가를 받는 과정에서 기존의 강습소가 승격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전문학교를 설립하는 것으로 되었는데, 형식적으로는 새로운 학교가 설립되는 형태였고, 실질적으로는 경성여자의학강습소 재학생이 새로이 설립되는 의학전문학교에 편입되는 등 경성여의강이 경성여의전으로 승격하는 형태이기도 했다.[4] 전문학교 개교 이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영향으로 교장이 일본인으로 바뀌었고, 학생도 새로 뽑았다. 그렇지만 교수진이나 학생의 인적 구성이 이어지는 부분이 많았고, 어쨌거나 경성여자의학강습소에서 전문학교 인가를 위한 노력의 결과로 전문학교가 생긴 것이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물론이고 현 고려대 의과대학 측에서도 경성여의전을 경성여의강의 후신으로 본다.[5]
경성여의전의 설립 작업은 1921년 오사카의과대학을 졸업한 정구충 박사가 주도했는데, 교수진의 대부분을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한국인들로 구성했다고 한다. 정구충 박사의 회고 및 <제59화> 함춘원 시절 참조. 1938년 5월에 경성의학전문학교[6]의 병리학교실을 빌려 개교하였다가 1940년 경성고등상업학교[7]의 교사를 인수하여 이전하였다. 1941년 부속병원이 준공되어 의료교육기관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이 전개되었으며, 1942년 9월 제1회 졸업생 47명을 배출하였다.
경성여자의학강습소는 근대적 의학교육기관으로서 여의사만을 양성하는 최초의 교육기관이며, 특히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당시 교수진이 대부분 한국인 의학자로 충당되었을 뿐만 아니라, 순수한 한국인 자산으로 설립, 운영된 유일한 의료교육기관으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광복 후인 1948년 일본식 구제 의학전문학교에서 미국식 신제대학으로 개편되며 서울여자의과대학이 되었으며, 1957년에는 남녀공학이 되면서 수도의과대학으로 개칭했다. 1966년에 국학대학(國學大學)을 인수합병하여 종합대학이 되면서 우석 김종익의 호를 따 '우석대학교'로 개칭되었다.
1967년 우석대학교 병원 |
2.2. 고려대학교로 흡수합병
1960년대 말에 재단 이사장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우석학원은 거액의 빚[8]과 경영난에 부딪혔다. 결국 1971년 12월 고려중앙학원이 우석학원을 인수, 합병했다. 이에 따라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우석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우석병원이 되었다.당시 고려대학교는 의대 신설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서울 중심부인 종로구에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을 보유한 우석대학교의 인수에 나서 성공한 것이다. 우석대학교 교수진과 학생은 그대로 고려대학교에 편입되었고, 학생들은 1972년 졸업생부터 고려대학교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 상당한 진통이 있었고 기존 고려대 동문들은 우석대 출신을 동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의 전신인 수도의과대학-우석대학교 의과대학 및 동대학 부속간호학교의 졸업생은 고려대 동문으로 인정되는 반면 우석대학교의 다른 단과대학 졸업생은 고려대 동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합병 당시에는 심지어 의대 출신도 고대 동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당시엔 의대 입결이 오늘날처럼 높지 않았기에 우석대 의대라 하더라도 고려대보다 입결이 높지 않았기 때문. 우석대 의대가 고려대 의대가 된 후에도 1972학년도를 기준으로 고려대 출신이냐, 우석대 출신이냐에 따라 상당한 차별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우석병원은 1976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개칭했고, 1983년에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부속 혜화병원으로 개칭했다. 1991년 현재의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자리로 신축 이전했다.
3. 캠퍼스
명륜동 캠퍼스(제 1캠퍼스)
정릉동 캠퍼스(제 2캠퍼스)
우석대학교는 종로구 명륜2가와 성북구 정릉동에 캠퍼스를 두고 있었다. 명륜동 캠퍼스에는 옛 수도의과대학과 그 부속병원이 있었으며, 정릉동 캠퍼스에는 옛 국학대학이 있었다. 그렇다보니 수도의과대학이 국학대학을 합병하여 우석대학교가 출범한 이후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의예/의학과, 간호학과) 그리고 의과기술초급대학을 제외한 단과대는 정릉동에 있었다.
우석대학교가 고려대학교로 인수합병된 이후로도 명륜2가에 있던 우석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그대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쓰이다가 시설의 열악함과 협소한 부지 등을 이유로 1991년 안암캠퍼스에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을 지어 이전하였으며 지금은 그 부지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명륜2가 아남아파트 자리가 당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및 부속병원이 있던 곳.
정릉동 캠퍼스에는 인수합병된 이후 대학 자리에 1975년 우석대 의과기술초급대학의 후신인 고려대학교병설보건전문대학이 이전해왔었다. 이후 고려대병설보건대가 2006년 이후 본교로 통합되어 4년제 단과대학 고려대 보건과학대가 되고 2015년 안암동 자연계캠퍼스 하나과학관으로 이전했다.
정릉동 캠퍼스에 있던 과거 우석학원의 우석중학교/우석고등학교는 고려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고려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여 그 자리에 계속 있다. 정확히 말하면 고등학교는 원래 교명이 우석상업고등학교였고 고려중앙학원에 흡수되면서 고려상업고등학교가 되었다가 1973년에 고려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현재의 교명인 '고려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96년부터.(중학교도 동일)
2015년부터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이 안암캠퍼스 자연계지역 하나과학관을 쓰게 되면서 정릉캠퍼스 인근에 위치한 국민대학교에게 부지 매각을 추진하였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현재 정릉캠퍼스는 고려대학교 메디사이언스파크 및 고려대학교 출판문화원 자리로 사용되고 있다.
4. 기타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인 이명박 전 대통령이 한때 이 우석대 출신이라는 의문이 인터넷상에서 제기된 바가 있지만, 당장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옛 신문기사를 검색해보면 명백한 허위사실임을 알 수 있다. 거기 가보면 한일협정 반대 관련 기사에 고려대 학생이라는 설명이 나올 뿐만 아니라 심지어 1961년도 신문에 실린 고대 합격생 명단에도 실려 있었다.경향신문 1961년 3월 14일 석간 3면에 실린 고려대학교 합격자 명단이다. 붉은 동그라미 표시가 이명박. 이때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고 대학교 수도 적었기 때문에 대학교 합격자 명단을 신문 기사로 공개하는게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이명박이 고려대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입사한 것은 1965년의 일인데, 이 때는 우석대가 고려대에 흡수되기 몇 년 전이다.
5. 동문
- 김응용 - 야구인
- 송재익 - 스포츠 캐스터
- 박두진 - 시인
- 윤정희 - 배우
- 강병철 - 야구인
- 이팔호 - 경찰
- 전우창 - 정치인
- 이의관 - 정치인
- 장기만 - 정치인
- 장기천 - 정치인
- 한원주 - 의사. 입학할 때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였다.
6. 관련 문서
[1] 두 우석대학교는 존재시기부터 전혀 다르다. 전라북도 완주군의 우석대학교가 설립되었을 때는 서울의 우석대학교가 이미 고려대학교에 통합된 후의 일이다. 참고로 현재의 우석대학교는 1995년에 지금의 교명으로 바뀌었다.[2] 의료 선교사, 교육자. 1865년에 태어나 1951년에 세상을 떴다. 1850년에 설립된 세계 최초의 여자의과대학인 필라델피아 드렉셀 대학교 의과대학(구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을 1889년 3월에 졸업하였다.[3] 우석대학교 졸업앨범에 "장녀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고 서술되어있다.[4] 1938년 1월 1일 기사, 조선일보[5] 1938년 1월 4일 기사, 동아일보[6] 훗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된다.[7] 훗날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이 된다.[8] 당시 돈으로 3억 8,000만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라면 1상자가 800~900원인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