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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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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동화사
八公山 桐華寺 | Donghwasa
<colbgcolor=#B9A26A><colcolor=#fff> 위치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길 1 (도학동 35)
설립 493년 (신라 소지 마립간 15년)?/832년(흥덕왕 7년)[1]
창건자 극달(極達)?/심지(心地)
주지 능종
등급 제9교구의 교구본사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1. 개요2. 역사3. 주요 문화재
3.1. 보물
3.1.1. 마애여래좌상3.1.2.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3.1.3. 비로암 삼층석탑3.1.4.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3.1.5. 당간지주3.1.6. 도학동 승탑3.1.7. 사명당 유정 진영3.1.8. 대웅전3.1.9. 목조약사여래좌상 복장전적3.1.10. 아미타회상도3.1.11. 보조국사지눌진영3.1.12. 삼장보살도3.1.13. 지장시왕도3.1.14. 수마제전3.1.15. 극락전
3.2. 비석 목록3.3. 세계최대 동화사 통일약사대불
4. 교통5. 주변시설6.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동화사.jpg
동화사 전경
동화사 홍보영상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길 1 (도학동 35) 팔공산 내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의 본사이다.

경북 5대 본산 중의 하나이자 대구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찰이다.

대구광역시 관내의 일부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들(ex. 유가사, 용연사)은 동화사의 말사들이다.[2]

2. 역사

사찰의 전승에는 493년(신라 소지 마립간 15년) 극달 화상이 세운 유가사(瑜伽寺)[3]832년(흥덕왕 7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건하였는데 이때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여 있어 동화사라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에 속해 있지만 조선 초기 선교양종 통합 이전, 고려 말기까지만 해도 법상종에 속한 사찰이었다. 고려 후기의 법상종 고승인 홍진국사 혜영이 이곳에 머무르며 사찰을 크게 일으켰고, 경내에 '도학동 승탑'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승탑이 홍진국사의 부도로 동화사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다. 경내에는 홍진국사의 탑비도 있었지만 지금은 비석은 사라졌고 탑본만 일부분 남았다. 여기에서도 '고려국대유가동화사주지오교승통보자국존증시홍진비명(高麗國大瑜伽桐華寺住持五敎僧統普慈國尊贈諡弘眞碑銘)'이라고 해서 동화사를 '대유가동화사'라고 부르고 있다. '유가'는 주로 법상종 계열의 사찰에서 많이 사용한 이름이다.

동화사가 '유가'라 불리며 법상종 사찰이었다는 것은 동화사의 건립 연대가 9세기이고 심지 조사에 의해서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한국에 법상종이 들어온 것은 신라 효소왕 원년(691년) 원측의 제자 도증이 귀국하면서의 일이기 때문. 『삼국유사』에 실린 '심지계조'에 따르면 심지는 신라 헌덕왕의 아들로 갖은 고행 끝에 속리산의 영심(永深)이 금산사의 율사 진표(眞表)로부터 받은 미륵불의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수받아 팔공산으로 돌아왔고, 불골간자를 모실 절터를 찾기 위하여 간자를 던져 간자가 떨어진 곳에다 절을 지었다. 그 절이 동화사라는 것이다. 현재 동화사 홈페이지에서도 극달 화상이 아닌 심지 조사가 바로 동화사의 실질적인 창건주라고 소개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표가 미륵으로부터 받았다는 이 간자를 '부처의 뼈'라고 적어 놨지만, 진표 당시만 해도 이 점찰간자가 부처의 뼈라는 인식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시기엔가 점찰간자 가운데 제8, 제9간자만은 미륵의 손가락뼈라는 인식이 형성되었고, 고려 예종 때에는 이 간자를 ‘성간(聖簡)’ 즉 신성한 간자라 부르게 되는데, 이런 인식 변환은 유식학이나 미륵사상 같은 학문적 배경이나 사리 신앙의 성격 변화가 원인이다. 신라에는 9세기 후반 당으로부터 골아형 사리가 수용되어 유행하고, 또 계단(戒壇)에다 사리를 봉안하는 사례도 등장했는데, 도선에 의해 계단이 곧 불탑(佛塔)이라고 인식하게 되면서 고려 시대에는 불사리를 계단에 보관하게 되었다. 동화사는 고려 시대에 관단사원(官壇寺院)[4]으로 지정되었고, 『계단도경』에 의거한 계단을 건립했는데, 마침 사찰에서 자체적으로 보관하고 있던 점찰간자라는 '성물'까지 더해져서 아예 부처의 뼈라고 인식이 격상되기에 이른 것이다.

심지가 영심으로부터 전달받은 두 개의 간자는 제8, 제9간자로 고려 예종이 한번 개경의 대궐로 가져오게 해서 대궐에서 법회를 열어 공경했는데, 그때 두 개 중에 하나(제9간자)를 잃어버려서 상아로 모조품을 만들어서 동화사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무렵에는 색이 변해서 어느 것이 새 것이고 어느 것이 오래된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며, 지금은 전해지지도 않는다.

남북국 시대 말기 고려의 태조 왕건의 생애 최대의 패배로 유명한 공산 전투의 무대가 이 동화사였다. 고려사에는 왕건은 몸소 5천 기병을 거느리고 공산동수(公山棟藪) 즉 동화사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견훤과 충돌했고, 왕건의 군은 견훤에 대패했다. 신숭겸, 김락(金樂) 등의 무장들이 전사하고 왕건 자신은 목숨만 건져서 겨우 도망쳤다. 동화사와 파계사 올라가는 갈림길에 신숭겸의 동상이 서 있고, 그 지명을 파군재(破軍岾)라고 한다. [5] 동화사 서북쪽에 있는 염불암에는 일인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왕건이 팔공산 쪽으로 도망치다 이 바위에 앉아 퇴로를 궁리하는데 한 승려가 다가와 "이 자리는 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곳인데, 그대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니 왕건이 "내가 바로 왕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승려가 절을 하고 "북쪽으로 가면 견훤군이 기다리고 있으니 남쪽으로 되돌아가시오"고 했다고. 그래서 이 바위의 이름이 '일인석'이라 불렸더란다.

의외로 한국사의 네임드 고승들이 동화사를 거쳐갔다. 조계종에서 종조로 받드는 보조지눌이 명종 20년(1190년) 동화사를 중창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嶺南都摠攝)으로써 승병들을 지휘하게 되었을 때, 동화사를 영남 승병의 본영으로 삼아 승병을 지휘했다. 지금도 동화사 봉서루에 보면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라고 크게 써서 걸어놨는데, '치영'이란 승병의 본부라는 뜻이다. 현재 걸린 현판은 복제본이고 원판은 동화사 경내의 통일대불전 지하 승보박물관에 전시중인데, 모각한 현판 글씨를 누가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다만 조선 말기에서 일제 시대에 걸쳐 활약한 서예가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5)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영남일보에서 제기되었다. #
파일:동화사 전경3 국립중앙박물관.jpg
일제강점기에 찍은 동화사 전경 [6]

동화사는 조선 말기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으로도 쓰였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고 대구진위대 소속의 군인이었던 24세의 우재룡(禹在龍)이 7월 정용기(鄭鏞基)가 청송에서 일으킨 산남의진(山南義陳)을 찾아가 연습장(練習將)으로 산남의진 소속 의병들을 훈련시켰고, 7월 12일부터 전투를 시작했다. 산남의진은 7월 17일 청하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9월 1일 포항 죽전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하고 의병장 정용기도 이때 전사했다. 이후로도 산남의진은 경북 일원에서 유격 전술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고 우재룡은 산남의진의 선봉장(先鋒將)으로 활약했으나, 1907년 12월 7일 영암에서 의병장 정환직(鄭煥直)[7]이 전사했다. 이후 우재룡은 영천 서부 방면을 맡아, 동화사를 근거지로 팔공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듬해인 1908년 7월 산남의진의 의병장 최세윤(崔世允)과 선봉장 우재룡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산남의진의 의병활동도 끝났고, '내란죄'로 '종신형' 처분을 받아 복역하던 우재룡은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합방 특사'로 풀려나, 대한광복회에 합류해 활동하게 된다. #

1919년 3.1 운동 당시 동화사 주지였던 김남파(金南坡)가 1917년 대견사 폐찰을 조선총독부에 청원하는[8] 등 친일로 돌아선 것과 달리 동화사 지방학림[9] 소속의 학승 윤학조(25세), 김문옥(20세), 권청학(21세), 이성근(李成根, 19세), 김종만(金鍾萬, 21세), 김윤섭(金潤燮, 20세), 이기윤(李起胤, 21세), 박창호(朴昌鎬, 19세), 허선일(許善一, 23세), 이보식(李普湜, 20세) 등은 3월 28일 경내의 심검당에 모여서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하고, 덕산정시장[10] 장날인 30일을 하루 앞둔 29일 반월당 언덕에 있는 동화사 포교당[11]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고, 30일 오후 2시 덕산정시장에서 시장을 찾은 일반 민중들과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목청껏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이들 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승들은 10명 전원이 일경에 체포되었다. 서울 중앙학림 소속이었던 윤학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화사 지방학림 소속인데, 1919년 6월 10일 대구복심법원은 윤학조에게 “파고다 공원에서 한국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하였고 동화사 부속 지방학림생도들에게 독립만세시위운동을 할 것을 권유하고 선동하였다”는 이유로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옥고를 치른 이 가운데 김문옥은 1990년, 이기윤은 1992년건국훈장 애족장을 갂각 추서받았다. 동화사 지방학림은 1개월간 강제 휴교 조치를 당했다(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학승의 한 명인 김문옥의 판결문).[12]

대구에서는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사흘 뒤인 3월 4일 즈음에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도착했고, 학생과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3월 8일에 서문시장에서 1차, 10일에 덕산정시장에서 2차, 그리고 이날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주도한 3차(3.30 대구만세운동)였다. # 보현사는 동화사에서 대구 시내 포교당으로 세운 부속 사찰로, 이후 현대식 건물로 개축하고 기존의 법당을 영천의 용화사로 옮겨 지어서 지금은 그 절의 대웅전 건물로 쓰이고 있는데, 2021년에 영천 용화사 대웅전에서 승려들의 교재로 쓰던 선문염송(禪門拈頌) 사이에 끼워져 있던 '조선독립신문'과 '국민회보'가 발견되었다. 3.30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동화사 학승들이 독립만세운동하면서 등사한 것이라 여겨진다. # 지금도 보현사 벽에는 당시 3.30 대구만세운동을 주도한 승려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설치물이 그려져 있다. #

경내에는 1732년 8번째 중건한 대웅전, 극락전을 비롯하여 연경전, 천태각 등 20여 채의 큰 규모의 건물이 있다. 그 외에 당간지주 등의 문화재가 있다. 1992년에는 높이 30m[13][14]나 되는 석불인 약사대불(藥師大佛)이 조성되었는데 이것은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조성된 석불이다. 갓바위와 더불어 전국에서 많은 신자들과 관광객들이 몰려드는데 부속 암자로는 비로암, 금당암[15], 염불암 등이 있다.

부속 말사[16](末寺)로는 파계사, 부인사, 송림사(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유가사[17], 대견사[18], 운문사 등이 있다.

3. 주요 문화재

3.1. 보물

3.1.1. 마애여래좌상

파일:보물 대구 동화사 마애여래좌상 등 2건 정밀실측조사 용역 20.jpg
동화사 마애여래좌상
파일:보물 제243호 동화사 마애여래좌상.jpg파일:동화사 마애여래좌상 문화재청.jpg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불상으로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3.1.2.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3.1.3. 비로암 삼층석탑

파일: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남동측면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jpg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3.1.4.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파일: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북동측면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jpg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

3.1.5. 당간지주

파일:동화사 당간지주 문화재청.jpg
동화사 당간지주

3.1.6. 도학동 승탑

파일:도학동 승탑 문화재청.jpg
도학동 승탑

동화사 홈페이지에서는 고려 후기 법상종의 고승이었던 홍진국사 혜영(弘眞國師 惠永, 1228-1294)의 부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3.1.7. 사명당 유정 진영

3.1.8. 대웅전

파일:동화사 대웅전 전경 2015년 문화재청.jpg
동화사 대웅전

3.1.9. 목조약사여래좌상 복장전적

파일:동화사 목조약사여래좌상 복장전적 문화재청.jpg
동화사 목조약사여래좌상 복장전적

3.1.10. 아미타회상도

파일:동화사 아미타회상도 문화재청.jpg
동화사 아미타회상도

3.1.11. 보조국사지눌진영

3.1.12. 삼장보살도

3.1.13. 지장시왕도

파일:동화사 지장시왕도 문화재청.jpg
동화사 지장시왕도

3.1.14. 수마제전

수마제(須摩提)라는 건 극락이라는 뜻으로,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극락전을 다르게 불러서 '수마제전'이라고도 한다. 수마제전은 숙종 28년(1702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이다. 봉안된 아미타여래상은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인다고.

3.1.15. 극락전

파일:동화사 극락전 2015년 문화재청.jpg
동화사 극락전

3.2. 비석 목록

3.3. 세계최대 동화사 통일약사대불

파일:9982B3465DD5F93909.jpg약사여래대불(藥師如來大佛)은 칠천만 겨레의 숙원인 남북통일과 세계평화, 인류의 행복을 간절히 염원하며 조성한 팔공총림 동화사의 대표 불상이다. 전체 높이가 33m에 이르러 석조 불상으로는 세계최대의 규모이다. 1990년 10월 26일 착공하여 1992년 11월 27일 점안대법회를 봉행하였다. 팔공산은 신라시대부터 오악(五岳) 가운데 하나인 부악(父岳)으로 추앙받던 민족의 영산이자 약사신앙의 중심지로서, 팔공산 곳곳에는 수많은 약사여래상이 모셔져 있다. 약사여래는 보살도를 닦으면서 열두 가지 큰 원(十二大願)을 세워 성취하고, 중생의 고통과 일체 병자가 없는 이상세계를 완성하신 부처님이시며, 그 이상세계는 유리처럼 청정한 동방만월세계(東方滿月世界)이다. 우리 역사 속에는 불력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대규모 불사의 예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통일약사대불의 본원은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하루빨리 성취하고 분단의 아픔을 해소하여 민족 대화합을 이루어 내는 데 있다. 약사여래대불 앞에는 국내최대의 삼층석탑(높이 17m, 원석 2천톤) 2기, 석등(높이 7.6m) 2기가 있고, 뒤로는 호법신장과 금강역사가 병풍처럼 조성되어 있다. 앞에는 통일기원대전이 조성되어 있는데,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통유리를 통해 약사여래대불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약사여래대불 지하에는 불교문화관(국제관광선체험관)이 조성되어 있다.

4. 교통

급행1번, 팔공1번(동화사행)의 종점이며[19] 주말, 공휴일 한정으로 팔공3번이 경유한다. 하지만 동화사행 팔공1번은 10회밖에 들어오지 않고 팔공3번은 말 그대로 주말, 공휴일인데다가 11월부터 2월까지는 운행하지 않으니 이용할 노선은 사실상 급행1번뿐이다. 이렇다 보니 급행1번은 동화사를 찾는 승객들과 등산 승객 등으로 인해 급행 노선은 물론 다른 노선과 견주어 봐도 수요가 상당히 많아 탑승할 때마다 곤욕이다. 거기다 행사기간에는 감차가 아니라 되려 증차가 되는[20] 매우 희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21]

5. 주변시설

동화사 입구는 동화시설집단지구라는 위락지구로 지정되어 식당이 매우 많다. 식당 외에도 숙소가 밀집되어 있고 그 밖에도 동화지구캠프장, 자동차극장씨네80,[22]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 팔공산 케이블카 등이 있다. 씨네 80에서 매년 가을 팔공산 승시축제가 열린다.# 다만 2015년부터는 씨네 80이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축제의 주 무대가 동화사 경내로 옮겨졌다.

6. 여담

봉은사와 마찬가지로 지역의 유명 사찰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여러 번 땅밟기등을 당하거나 반달리즘에 가까운 문화재 훼손을 당하거나 하는 등 여러 번이나 수난을 당한 전력이 있다. 관련 기사.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동화사 뒤뜰에는 금괴가 묻혀있다고 한다. 탈북자 양아버지의 증언. 하지만 그 금괴가 인민군 약탈의 행위로 판단되어 한국은행도 나섰다. 관련 기사. 하지만 지금은 발굴이 잠정 보류된 상태. 몇백억 짜리라는데 절과 갈등때문에 진도가 안 나간다. 현재 주변에 CCTV천지.

2023년 11월 19일 오후 5시 50분경 동구 신용동 팔공산로 파계사에서 동화사로 가는 방면 내리막길에서 드라이브 중이던 i30 차량이 연석을 들이받고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낙엽에 미끄러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10대 여학생 1명이 현장에서 사망했으며 또다른 10대 여학생은 인근 대학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다. 20대 운전자도 심정지 상태로 대구파티마병원에 실려 갔으나 11월 20일 오전 결국 사망했다. 함께 동승한 10대 남학생 2명도 중상을 입고 인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이들은 각기 연인과 지인 사이로 확인됐다. #1 #2



[1] 동화사의 실질적인 역사는 사실상 심지가 동화사를 중창한 832년에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 성당으로 치자면 계산성당을 생각하면 된다.[3] 산스크리트어 yoga의 음역으로 주관ㆍ객관의 모든 사물이 서로 응하여 융합하는 일을 말한다. 참고로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양리의 비슬산 유가사와 한자는 같으나, 같은 절이 아니다. 다만 동화사의 말사 중 하나가 비슬산 유가사이다.[4] 승려가 본인이 출가한 사찰 외에 별도로 구족계를 받도록 한 사찰을 말한다. 승려들은 일단 출가한 뒤 계단이 설치된 사원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는 의식을 거치고, 여기서 각자 업으로 하는 불경과 계율 시험을 치러야 했다. 고려에서 관단사원 즉 국가가 계단을 세운 사찰은 개경의 영통사(靈通寺), 해미의 보원사(普願寺), 대구 동화사(桐華寺) 등이 있었다. 구족계를 받아야 정식 승려로 인정된다.[5] 견훤의 국서에는 공산 전투를 회상하면서 "(고려의) 좌상(左相) 김락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제 해골을 볕에 쬐였다"고 했는데, 파군재에서 동화사-파계사 갈림길 올라가는 길 사이에 왕산이라는 산이 있고, 미리사는 이 산기슭에 있었던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조선 시대까지는 있었던 것 같다. 왕산 밑에 신숭겸의 순절단과 표충단이 위치해 있는데 아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인듯. 왕산이 위치한 지역의 행정구역명인 '지묘동(智妙洞)'도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해 왕건으로 변장하고 나아가 싸우다 죽었다는 이른바 '위왕대사(爲王代死)'의 일화에서 그러한 신숭겸의 지혜가 참으로 교묘하였더라, 하는 찬사를 담은 이름이다.[6]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이 링크에서 사진 다운로드가 가능하다.[7] 정용기의 아들로 아버지가 전사한 뒤 의병장이 되었다.[8] 비슬산의 산세와 대견사의 지맥이 일본의 기운을 꺾는다는 이유였다.[9] 학림은 승려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 기관을 가리키며, 요즘은 보통 승가대학이라 부른다. 서울에 있는 학림을 중앙학림이라 불렀는데 이 서울의 중앙학림이 훗날 동국대학교로 발전했고, 그 외 지역별로 존재했던 학림은 지방학림이라 불렀다.[10] 지금은 염매시장으로 불린다.[11] 지금은 보현사라고 불린다. 지하철 반월당역 1번 출구로 나와서 신협 옆의 계단으로 올라가면 바로 오른쪽에 있다. 아니면 21번 출구로 나와서 앞의 언덕으로 올라가 왼쪽으로 꺾어지면 보현보살상이 나오고 거기가 보현사이다.[12] 여담으로 이 사건의 담당 검사는 나가오 가이조(長尾戒三)라고 되어 있다. 이 사람은 1873년(메이지 6년)생 히로시마 옛 사족 출신으로 1902년(메이지 35년)에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법과대학(法科大學) 법률학과(法律學科)를 졸업하고 2년 뒤에 검사로 임용되어 우쓰노미야 지방의 각 재판소에서 검사를 거쳤고, 조선으로 온 것은 메이지 41년/융희 2년(1908년)의 일이라고 본인이 동아일보 지면에서 직접 언급했다. 조선으로 와서 통감부(統監府) 검사로 시작해 평양, 공주의 재판소부터 조선총독부 검사가 되어 경성지방재판소,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 경성 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 인천지청(仁川支廳),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진주지청(晋州支廳), 함흥과 평양의 각 지방법원에서 검사 및 검사정(檢事正) 등을 지내고 1924년(다이쇼 14년)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이 되었다. # 김병로의 회고록에도 잠시 이름이 언급된다. #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나가오는 구한말 각지에서 벌어졌던 의병에 대해 "조선 사람이 의병이라고 부르는 폭도"라고 부르면서도 "한국군대의 장교로 있던 사람은 '강도가 무엇이냐'고 당당한 나라의 의병에 대하여 강도죄라니 무슨 말이냐'라며 완강히 반항한 사람도 있었다"며 "어쩔 수 없이 강도죄로 처벌을 하였습니다."라고 마치 의병들에 대한 처벌을 "위에서 처벌하라고 시켜서 내가 하긴 하는데 나도 그닥 내키지는 않았다"라는 묘한 투로 썼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차별감정이야 당연히 일본인으로서 가지고 있긴 해도, 이 사람이 히로시마 즉 규슈 지역의 옛 사족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 의병들에게 감정적으로는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13] 자료에 따라서는 31m라고 쓰인 곳도 있고, 33m라고 쓰인 곳도 있다.[14] 입상 석불 중에서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대불이지만 의외로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는 동화사의 소재지인 대구 시민들도 대부분 이 사실을 모른다.[15] 일반인 출입 엄금 지역. 이곳은 신도증이 있어야 출입 가능.[16] 대한불교조계종 본사의 관할 하에 있는 사찰이다.[17] 이게 진짜 비슬산 유가사이다. 2010년에 이 곳의 주지인 계성 스님이 음력 법회를 없애고 대신에 일요법회를 정례화했다.[18] 비슬산 대견봉 꼭대기에 있는 절로 1917년 일제에 의해 폐사가 되어 삼층석탑 외에는 터만 남아 있다가 2013년 복원 공사가 시작되어 2014년 3월 1일 중창되었다. 이전에는 터만 있어 대견사지라고 했었는데 달성군 유가읍 용리 산에 있다.[19] 대신 정문 입구에서 좌회전하여 시설지구 종점으로 가니 참고할 것.[20] 단, 동화사~동대구역 구간 증차 운행으로 전체 경로를 기준으로 하는 증차는 아니다.[21] 물론 급행1번 문서에서도 서술했지만 동화사 수요 외에도 중구, 서구, 달서구 성서 지역을 급행으로 연결 하다보니 이 수요 또한 상당히 혼잡하다. 그나마 급행5번이 도와주는 중이다.[22] 위탁받은 업체가 운영했는데 한 때 업체의 계약이 만료되어 없어졌다가 부활해 동화사가 직접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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