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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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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유물
만파식적 | 萬波息笛
파일:만파식적.jpg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 중인 옥피리 2개[1]
제작 시기 신문왕 재임 시기

1. 개요2. 만파식적 설화3. 신라 이후의 행보4. 미디어에서5. 기타

[clearfix]

1. 개요

만파식적이란 세상의 온갖 파란(萬波)을 없애고 평안하게(息) 하는 피리(笛)라는 뜻이다. '적'이 곧 피리이기 때문에 줄여서 '만파식'이라고도 불렀다. 통일신라기 왕실에서, 정치적 불안이나 국난이 진정되고 태평성대가 오기를 염원하는 제례(祭禮)에 사용했던 피리이다.

2. 만파식적 설화

삼국유사에 만파식적 관련 이야기가 꽤 나온다. 신라 신문왕이 즉위 후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와 가까운 곳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다. 신문왕 2년(682)에 해관이 동해안에 작은 산이 감은사로 향하여 온다고 하여 일관으로 하여금 점을 쳐 보니,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수성의 보배를 주려고 하니 나가서 받으라 하였다고 한다. 이에 이견대(利見臺)에 가서 보니, 바다 위에 떠오른 거북 머리 같은 섬에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풍우가 일어난 지 9일이 지나 왕이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黒玉帶)를 바쳤고, 왕에게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여 그것을 가지고 나와 피리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이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도 역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왕이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고 한다.

만파식적을 한 번 불면 몰려왔던 적군이 물러가고 앓던 병이 나으며 홍수가 나든 가뭄이 오든 해결해주어 신라의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특히 일본의 침략을 막는 효능이 있어 일본 사신이 1천 냥을 내고 한번 보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특이하게도 조령을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하여 신라 밖으로 넘어가지 않으려는 정절의 의미로도 해석되었다.[2]

효소왕 때 분실했다가 다시 찾고, 이 만파식적을 찾는 과정에서 말갈족[3]에게 납치화랑 부례랑을 되찾아오는 등의 이적을 보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격을 높여 업그레이드 된 이름을 고쳤다고 하며, 효양의 가문이 대대로 보관하다가 아들 김경신에 물려주었고 김경신이 원성왕으로 즉위한다. 원성왕 때 일본이 2차례 만파식적을 노려서 왕이 더 창고 깊은 곳에 숨기도록 명했다.

한편 삼국사기 악지에서도 대금의 원류에 관한 이야기로 만파식 설화를 간단히 소개하였으나 김부식의 사견으로, 이러한 설이 있으나 '괴이하여 믿지 못하겠다'고 부연했다.[4] 김부식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설화적 기록은 배제하려는 괴력난신 술이부작 원칙을 견지했기 때문에, 악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언급은 했지만 부연설명을 한 것이다.

3. 신라 이후의 행보

신라 멸망 후 고려 광종 때 경주객사에 동경관을 지으면서 여기에 보관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부터 다시 이 옥피리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 도중 화재로 인해 유실되어, 광해군 때 경주 부윤이 신묘한 옥피리가 없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해서 옛 모습을 상고해 새로 만들라는 명을 내린다. 이것이 맨 위 사진의 노란색 옥피리다.

그러다 조선 숙종 때인 1690년, 동경관에서 근무하던 향리 김승학이 폭우로 무너진 동경관의 담장을 보수하다가 전란 중에 누군가가 감추었던 것으로 보이는 문제의 옛 옥피리를 찾아냈다고 한다. 김승학은 피리를 집으로 가져가 죽을 때까지 보관했지만 그가 1707년 죽자 관아에 그 사실이 알려졌고 이것이 옛날 유실된 진품 옥피리로 추측하고 압수해 다시 경주 동경관에 보관했다. 이것이 맨 위 사진의 옥피리 유물이다.

조선 말에는 삼기팔괴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을 정도로 과거부터 인지도가 꽤 있었던 유물이었다.

이 두 옥피리는 1909년 일제 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경주 동경관에서 서울 창경원 어원박물관에 옮겨 보관하도록 명했고 서울에 있다가 국립경주박물관이 세워지자 다시 경주로 옮겨 수장고에 보관했다. 관람객에게는 오랫동안 비공개였다가 2011년 특별전시회에서 만파식적이라는 이름으로 임시로 진열됐고 특별전이 끝난 뒤 다시 수장고에 들어가 비공개 상태다. 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소개된 만파식적

도중에 잃어버리고 새로 되찾았다는 시점에서 이미 옛 신라 때 만파식적 진품일 가능성은 크게 줄었지만 현재 전해진 두 옥피리도 최소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유물은 확실하며,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것을 신라의 만파식적으로 생각하고 오랫동안 보물로 보관해왔기 때문에 설령 신라 진품이 아니라도 상징적 가치가 크고, 역사적 가치가 없는게 아니다. 일단 조선시대 일반적인 피리와는 그 형식이 좀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유물의 탄소측정법이나 형태를 자세히 연구하면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일 가능성도 없진 않다는 것.

4. 미디어에서

5. 기타

오색 빛깔 구름 속 용 한 마리 있다네
신령스런 대나무 피리 하나 만드니
피리 소리 들리면 신비한 일 생기네
만파식적 불어라 느르노 느르나 헤로노느
적군들이 떠나네 만파식적 이야기

동해 바다 깊은 곳 신라 땅을 지키는
오색빛깔 구름 속 용 한 마리 있다네
신령스런 대나무 피리 하나 만드니
피리 소리 들리면 신비한 일 생기네
만파식적 불어라 느르노 느르나 헤로노느
거센 파도 잠잠해 만파식적 이야기 ||

[1] 아래 노란색 피리는 조선시대 때 따라서 만든 것이고, 위쪽 피리는 한 번 잃어버리고 되찾았다는 점에서 신라시대 때 그 만파식적과 같은 유물일 가능성은 낮지만 최소한 조선시대부터는 수백년간 만파식적으로 여겨져 온 유물이다. # # #[2] 조선 시대의 실학자 정약용은 이러한 설에 대해서 신라옥적은 굵기가 통통하고 손가락 대는 부분 구멍이 좁은 것이 보통 피리와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며, 경주 사람들이야 이런 모양의 피리를 일상적으로 어려서부터 접해왔으니 익숙하게 잡고 연주할 수 있었겠지만 경주 외의 다른 지방 사람들은 신라옥적과 같은 모양의 피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연주가 서툴렀던 것 뿐이고, 덤으로 경주 사람들이 이런 형태의 피리에 익숙하다는 게 알려지면 경주를 떠나 다른 지방으로 불려올라가게 될 것이 귀찮아서(...)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해석했다.[3] 말갈 혹은 변방의 고구려 잔존 세력[4] 고기(古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신문왕(神文王) 때에 동해 안에서 홀연히 한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형상이 거북의 머리와 같았고, 그 위에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어서 낮에는 나뉘어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베어다가 적(笛)을 만들고 이름하여 만파식(萬波息)이라고 하였다.』비록 이러한 설이 있으나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