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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06:18:08

대승기신론소

파일:대승기신론소.jpg

1. 개요2. 내용3. 외부 링크4. 보물 제1713호

1. 개요

大乘起信論疏. 조선 세조 3년(1457)에 초주갑인자로 복원한 신라시대의 불경. 현재 대구광역시 남구의 김병구(개인)가 소장 중이고, 보물 제1713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중국 불교계에서는 해동소(海東疏)라고도 부른다.

당나라로부터 수입된, 1~2세기 마명보살[1]이 저술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2]신라의 고승 원효(元曉, 617~686)가 해석과 주를 붙인 것이다. 이후 대승기신론의 주석서 가운데 최고로 여겨져 규봉종밀(圭峰宗密)[3]이 중국으로 수입하였고, 이후 중국일본동아시아 불교학계 전체에 '해동소'라는 이름으로 널리 유통되었으며, 당대 최고의 대승불교 불경으로 통했다. 한국에서는 원효가 창건한 해동종(海東宗)[4]세종대에 조선 정부의 선교양종 통합정책으로 인해 완전 사멸할 때까지 가장 많이 읽힌 불서였다.

중국이나 일본, 거란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원효의 명성과 함께 대승기신론소가 허다하게 유통되어 남은 유물도 많은 반면, 정작 원효의 고국인 우리나라에는 오직 보물로 지정된 이 한 권만이 현존한다. 원래는 고려 전기의 대표 고승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고려속장경(高麗續藏經), 즉 교장(敎藏)을 제작할 때 수록한 교장본인데 몽골의 침입 시기에 불타 사라졌다. 훗날 조선 세조의 명으로 과거 소실된 고려 불경들을 복원 및 언역[5]하던 도중 의천이 직접 수록하였던 교장본 대승기신론소 한 권이 발견되어 이를 그대로 간경도감에서 복원하였다.

책에는 신라의 원효가 600년대에 완성한 대승기신론에 다시 법장[6]이 소를 붙이고, 종밀이 주해를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이 고려속장경에 이를 수록하며 붙인 간기가 붙어있다. 책의 끝에는 세조가 죽은 아들 의경세자의 명복을 빌며 1457년에 직접 지은 친필 어제발문이 수록되었다.

600년대부터 1400년대까지 신라ㆍ고려ㆍ조선을 거치며 이어진 원효의 불교 사상에 대한 다양한 모습과 한국의 고전 인쇄술, 기타 한국 불교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일본 등 타국에는 비록 원효의 유명세로 인해 대승기신론소 유물 자체는 많이 남아 있으나 대표적인 일본의 고간본 대승기신론소가 에도 시대인 겐로쿠 9년(1696)[7] 인쇄본 등 대부분 유물들이 한국의 보물 제1713호보다 연대적으로 크게 뒤쳐진 것들이기 때문에 1400년대에 왕명으로 고려전기 교장본(1090년)을 그대로 복원한 이 책은 연대사적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3. 외부 링크

4. 보물 제1713호

중국 당나라 법장이 마명(馬鳴)이 지었다는『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대해 주석한 교장의 일종으로 조선시대 1457년에 금속활자(초주갑인자)로 간인한 불서 3권 1책이다. 본래 『대승기신론』은 마명의 저작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중국에서 찬술한 위경이란 주장도 있다. 이『기신론』은 서분, 정종분, 유통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종분(正宗分)은 그 아래에 인연분(因綠分), 입의분(立義分), 해석분(解釋分), 수행선심분(修行善心分),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으로 편성되어 있다.

이러한『기신론』은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서 대승불교의 중심적인 사상을 요약한 것으로서 단편에 불과 하지만 불교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일찍이 법장의「소」와 원효(元曉)·혜원(慧遠)이 각각 「소」를 부친 것을 ‘기신론삼소’라 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법장의 「소」는 원효의 주석서인『기신론소』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법장의「의기(義記)」와는 내용과 편장이 약간 다르다.

이『대승기신론소』는 대각국사 의천의『교장총록』에 법장이 찬자로 되어 있는 것은 ‘소 3권’으로 기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래되고 있는 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책은 권수제 다음 행에 ‘서대원사사문 법장 술(西大原寺沙門 法藏 述)'이란 저자표시가 기입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 주해자인 종밀(宗密)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이 책은 권상지이(卷上之二), 권하지일(卷下之一), 권하지이(卷下之二) 등 3권 1책이다. 권상지일(卷上之一) 은 결본상태이어서 아쉽다. 권말에는 세조가 죽은 아들을 위해 1457년에 지은 어제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본래 원효의 주석서인 『기신론소』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법장의 「소」에 종밀이 주해를 가한 주석서로서 조선 세종 연간에 초주갑인자로 간행된 교학 불서이다. 일본에서는 수차례 간행되어 널리 유통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이 책이 유일한 원간본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약간의 상권의 일부가 결실되어 유감스러우나, 국내 유일의 원간본이라는 점에서 불교학 및 조선 초기 고활자본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1] 이름은 아슈바고샤이며 북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저술활동을 한 승려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행적을 읊은 찬미시 불소행찬(佛所行讚)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2] 대승기신론은 현재 산스크리트어본이나 티베트어본은 존재하지 않고, 한역본으로 진제(眞諦)가 553년에 번역한 1권본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695∼704년 사이에 번역한 2권본만이 전해지고 있어서 위경 논란도 심심찮게 일고 있기도 하다. 한국의 자현 비구는 마명의 이름에 가탁한 진제의 저술이라고 확신하고 있다.[3] 780~841. 화엄종 제5조이면서도 선종에도 뛰어났다.[4] 또는 법성종(法性宗)이라고도 한다.[5] 언문 즉 한글 번역.[6] 643~712. 서역의 강거국(康居國) 출신으로 할아버지 때부터 장안에서 살았다. 화엄종 제3조로 신라의 의상(義湘)과 함께 화엄종 제2조 지엄(智儼)에게서 화엄종의 교학을 배웠고, 당대 화엄학의 최고 권위자였으며 특히 그를 중용했던 인물이 측천무후. 서역 출신이라는 점을 살려서 의정이나 현장의 산스크리트어 불경 한역도 도왔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법장이 원효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실려 있다. 최치원은 그의 전기인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짓기도 했는데, 이 법장화상전은 다이쇼 신수대장경에 포함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7] 조선 숙종 30년. 안용복이 일본으로 건너갔던 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