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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1:54:16

중서령

1. 개요2. 중국의 중서령3. 고려의 중서령

1. 개요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정립된 3성 6부제에서 중서성의 장관을 지칭한다.

2. 중국의 중서령

중국 한나라 시기를 거치며 승상(사도)의 권력이 약해지고 황제 측근인 내조(內朝)의 권력이 강해졌다. 황제의 문서를 관리하는 상서의 비중이 커졌고, 이를 지휘하는 녹상서사가 생겨났고 이것이 상서령으로 이어진다. 중서령은 황제의 비서실장격으로, 비서기구의 수장이 재상화된 것이었다.

당나라 시기 중서령은 시중, 상서령과 함께 3성의 장관으로, 명실상부한 재상이었다. 다만 가장 지위가 높은 상서령은 당 태종이 맡은 적 있기에 기피되어 그 아래 상서복야가 상서성의 실질적 장관이었다.

당제(唐制)에서 중서성은 정책을 입안하거나 황제의 명령을 기초하는 역할이었고, 문하성은 그것을 심사하고 봉박할 권한을 가졌기에 비효율적인 문제로 정사당에 모여 합동회의를 했다. 재상회의인 정사당을 주로 이끄는 건 중서령과 문하시중이었는데, 점차 중서성과 문하성이 통합되며 문하시중이 주도가 되기도 하였다.

중서령은 송제(宋制)에서는 법률상으로 존재할 뿐 실직이 아니었다. 즉, 송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당제였으나 실질 운용에서는 일치하지 않았다. 중서령이 법률상 중서성의 장관이었으나, 실제 송대의 재상은 당대 이래 재상의 권한을 의미하는 동중서문하평장사였다.

원나라 때 중서성의 장관으로 중서령을 두긴 했으나 황태자가 맡는 자리였고 명예직이다보니, 그 아래의 우승상, 좌승상이 실질적 장관이었다. 명나라 때는 중서령을 두지않고 좌승상이 장관이었으나, 홍무제가 재상제도를 폐지하며 사라졌다.

3. 고려의 중서령

고려에선 정부중서문하성의 종1품 관직으로 명목상 기관장이다.

같은 기관의 실질적 기관장인 문하시중과 같은 품계이지만 명예직에 해당한다. 같은 품계의 상서령(尙書令)이 왕족에게만 수여되는 명예직이었다면, 중서령은 관료에게도 수여되었다. 상서령과 중서령을 아울러 영공(令公)이라고도 한다.

본래는 내의령(內議令), 내사령(內史令)이었다. 원 간섭기에 관직의 명칭이 영(令)에서 영사(領事)로 바뀌었다. 공민왕 때 중서령으로 잠깐 되돌아 갔다가, 최종적으로 문하부[1]의 영문하부사(판문하부사)로 바뀌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말 최고의 권신이자 간신인 이인임이 있다.

이 영문하부사가 조선 초기에 영의정부사로 이어져서 영의정으로 명칭이 바뀐다.


[1] 문하부는 중서문하성의 후신으로 충렬왕때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친 첨의부→도첨의사사→도첨의부에서 고려 후기인 1369년(고려 공민왕 18년)에 문하부로 이름이 바뀌었고 조선 초기에 의정부에 통합돼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