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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17:03:02

여불위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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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불위
呂不韋
파일:여불위.jpg
작위 <colbgcolor=#FFFFFF,#191919>장신후(長信侯)
(呂)
불위(不韋)
최종직위 상방(相邦)
고향 양적(陽翟)[1], 복양(濮陽)[2]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235년[3]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왕을 만들다2.3. 상방에 오르다2.4. 몰락과 최후
3. 여불위는 진시황의 아버지인가?4. 그 외5. 평가6. 대중문화 속의 여불위

[clearfix]

1. 개요

중국 전국시대상인이자 정치가다.

한(韓)나라거상이자 진(秦)나라상방이었다. 조나라볼모로 가 있었던 진나라의 떨거지 왕족인 영이인을 우연히 만나 자신이 그동안 장사를 하면서 모은 재산으로 영이인을 지원하여 끝내 그를 진나라의 왕으로 만들었으며, 훗날 시황제로 불리게 되는 영정에게 권력을 빼앗기기 전까지 진나라의 실세로 군림했던 권신이었다. 중국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통틀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킹메이커였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여불위의 출생지는 기록에 따라 다른데,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한나라 양적(陽翟) 출신이라고 했고, 유향의 《전국책》에서는 위나라 복양 출생으로 전했다. 여불위는 상인으로서의 수완이 뛰어나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 《사기》에서는 "여러 곳을 오가며 물건을 싸게 사들이고는 비싸게 팔아 집에 1,000금을 쌓아 두었다."고 전했다. 아마도 원거리 무역을 통해 한 지방의 특산품을 다른 곳으로 팔며 돈을 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4]

그는 후에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에 들어가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당시 한단에는 중원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진나라 소양왕의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5]의 아들 영이인(異人)[6]이 인질로 와 있었던 중이었는데, 여불위는 우연히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영이인은 비록 태자 안국군의 아들이었다고는 하나, 서자 출생인 데다가 왕위 계승 서열이 높은 형제들이 워낙 많았고 무엇보다도 이인의 어머니인 하씨가 안국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으므로 눈 밖에 난 처지였다.[7]

그러나, 이인을 한 번 만나본 여불위는 그의 잠재성을 꿰뚫어 보았고 가히 왕재라 여겼다. 곧바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상인이었던 아버지를 찾아가 물었다.
"농사를 지으면 몇 배를 남길 수 있습니까?"
"10배를 남길 수 있다."
"보석상을 하면 몇 배를 남길 수 있습니까?"
"100배는 남길 수 있다."
"그럼 한 나라의 왕을 만들면 몇 배를 남길 수 있습니까?"
"그건 차마 계산이 안 되는구나."[8]
"제가 그 일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천하를 수확할 씨를 뿌리겠습니다."

라고 답하고는 이인에게 대뜸 500금(五百金)이라는 막대한 재물을 나누어 주며 이인의 후원자를 자청하고 나섰다. 이 때 이인과 여불위가 남긴 대화가 의미심장하다. 이인을 만난 여불위가 "제가 공의 집을 성대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이인은 "그대의 집이나 성대하게 만드시오."라고 일갈했다. 그러자 여불위가 "저의 집은 공의 집이 성대해진 뒤에야 비로소 성대해질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고, 그의 말에 흥미가 생긴 이인은 비로소 여불위와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인 역시 여불위의 뜻에 응하여 자신을 진왕으로 만들어 주면 막대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여불위는 이인을 진왕(秦王)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엄청난 자산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한편, 자신의 이었던 미인 조희를 이인에게 바치는 등 갖은 정성으로 모셨다.[9]

2.2. 왕을 만들다

안국군(安國君)정실부인이었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이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안국군의 아들들은 모두 첩들에게서 얻은 서자였다. 이때문에 안국군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후 차기 태자가 될 이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여불위는 안국군의 정실부인이었던 화양부인을 지지자로 끌어들이라고 이인에게 조언했다. 이를 따른 이인은 화양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500금에[10] 달하는 많은 재물을 그녀의 언니에게 보내어 비위를 맞추고, 화양부인의 고향인 초나라를 위하는 것처럼 연극까지 했다.[11]

화양부인은 비록 슬하에 자식은 없었으나, 태자인 안국군의 정실부인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언젠가 안국군의 서자가 왕이 되면 모든 권력을 잃고 말 것을 두려워 했다. 그 와중에 자신을 지극히 위해주는 이인은 화양부인에게 유일한 희망과 같았다. 화양부인은 곧 이인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보호해주었고, “초나라의 자식”이라는 뜻의 자초(子楚)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12]

기원전 257년, 진나라 장수 왕흘이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공격해 오자 장평대전때도 참아줬던 조 효성왕은 인내심이 바닥났던지 자초를 살해하고자 병졸들을 보냈다. 여불위는 이 병사들에게 무려 황금 600근을[13][14] 뇌물로 뿌려 자초를 조나라에서 탈출시키고 그의 아내 조희와 아들 은 잠적시켰다. 효성왕은 자초의 처자식이라도 죽이려고 열심히 찾았지만 여불위가 잘 숨겨줘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조희와 영정은 조나라에서 지냈는데, 기원전 251년, 소양왕이 죽고 태자였던 효문왕이 즉위하면서 자초가 태자의 지위에 오르자 진나라로 왔다. 여담으로 왕흘의 군대는 염파가 격파했다.

자초의 할아버지인 소양왕은 무려 50년이나 왕위에 있던 중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태자 안국군이 즉위하여 효문왕이 되었으나, 그 역시 이미 상당히 고령이었던 까닭에 왕위에 오른지 얼마 안 되어 급사했다. 결국 효문왕의 태자였던 자초가 즉위하여 장양왕이 되었다.[15] 이리하여 여불위는 서자 출신인 데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의하여 조나라에 볼모로 보내졌던 떨거지 왕족[16]을 당시 중원 제일의 초강대국이었던 진나라의 왕으로 만드는 가히 기적적인 활약을 하였다.

장양왕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여불위에게 하남과 남양 땅의 10만 호를 하사하여 문신후에 봉했을 뿐 아니라, 진나라의 승상으로 임명함으로써 보답하였다. 승상의 직위에 오른 여불위는 덕분에 진나라 정계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한 순간에 중원의 정세를 좌지우지할만한 위치의 고관대작으로 거듭났다. 요약하면 당시 약소국이었던 위나라의 상인으로 태어나서 왕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던 왕족의 일원을 진왕으로 옹립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재상이 되어 막대한 명예와 부를 거머쥐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불위는 비록 상인 출신이었으나 비범한 통찰력과 수완을 지닌 인물이었다.

2.3. 상방에 오르다

파일:external/pic.pimg.tw/1420963309-1032564525_n.jpg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꺾창으로 상방 여불위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장양왕은 즉위한 지 약 3년 만에 죽었고, 여불위가 바쳤던 여인 조씨와 장양왕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17], 이 아이가 바로 훗날 중원 천하를 통일하여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시황제 영정(政)이었다.

아직 영정이 어렸기에 여불위는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승상보다도 높은 상방(相邦)의 자리에 올라 진나라의 실세를 거머쥐었으며, 왕의 아버지와 다름없다는 의미로 그 칭호를 '중보'(仲父)라 하였다. 이렇게 엄청난 위세를 떨치게 된 여불위는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며 국정 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나갔다.

한편, 남편인 장양왕을 잃은 진시황의 어머니인 조 태후는 본래 여불위의 첩이었기에 홀몸이 된 이후 자주 여불위를 찾았다. 여불위는 조태후와 자주 만나다가는 선왕의 정비와 간통했다는 혐의를 받을까 두려워서 자기 대신에 조태후를 만나줄 사람을 구했는데, 마침내 노애환관으로 위장시켜 조희에게 보냈다.[18] 노애는 양물이 컸고 정력이 대단하였기 때문에 조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 조희와 노애는 사실상 연인 관계가 되었다.

한편 진나라의 실권을 손에 쥔 여불위는 많은 신하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한편, 여러 학자들과 도인들을 아낌없이 후원해주었다. 덕분에 여불위는 당대의 석학들과 대신들로부터 높은 평판을 얻어 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2.4. 몰락과 최후

노애는 조태후와의 간통 끝에 아이를 둘이나 얻었는데, 그는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진나라의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진시황에게 이러한 사실이 곧 발각되었는데, 노애는 사병들을 동원하여 수도 함양 한복판에서 반란을 일으켜 항거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은 이에 침착히 대응하여 곧 반란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진시황은 노애를 비롯한 그의 삼족을 죽였으며, 노애의 가신들 또한 가산을 몰수당하고 땅으로 추방했다. 조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낳았던 아이들도 모두 살해당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진시황은 자신의 친어머니였던 조태후마저 진나라의 구도(舊都)였던 에 유폐시켜버렸다.[19]

여불위는 이 반란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진 않았지만[20] 애초에 노애를 조태후에게 소개해준게 자신이었으며 여불위의 권력 자체를 불편하게 여긴 영정은 이 명분을 절대 헛되게 버릴 생각이 없었다. 결국 가짜 환관을 궁 안에 넣었다는 빌미로 영정은 그를 파면 - 사형 순으로 집행하고자 했으나 여불위를 따르는 사람들 또한 많았기에 그들의 항소를 버티지 못하고 여불위를 상국에서 파면시킨 후, 문신후로 봉할 당시 하사받은 하남으로 쫓아내어 사실상 함양의 중앙정부와 단절시키는데서 처벌을 끝냈다.

다만 중앙 정부에서 축출되었다곤 해도 이때까지 여불위의 명성과 인맥이 어디간 건 아닌지라 그 후 약 1년 정도는 각국의 제후들이 빈객과 사신을 보내 여불위에게 인사를 하러 왔고 이 소식은 당연하게도 영정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 당시엔 여불위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힘을 무시할 정도로 강력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여불위를 하남으로 보내는 데서 그쳐야 했으나 그동안 중앙정부를 사실상 장악하는데 성공한 영정은 이 건을 다시 책잡아 그와 그의 가솔들에게 지방으로 파견가라고 명령했다.

여불위는 영정이 보낸 이 편지[21]를 받고 재기가 불가능하다는걸 깨달으며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여불위가 자살하기 전 평소 그를 충직하게 따르던 이사가 와서 그에게 여러 번 조정으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했다고 하며, 그는 자신은 죽어서 왕이 되고 싶으니 땅을 왕관삼아 머리가 아래로 향하도록 수직으로 몸을 세워 몸의 반만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훗날 한무제는 지금의 윈난 성 지역(운남성)을 정복하면서, 여불위가 추방된 이후에 촉 지역에 모여 살던 여씨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켰고, 현 이름에 여불위 이름까지 붙여주기도 하였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운남 태수였던 여개도 이런 여씨 일족 중의 한 명이었다.

3. 여불위는 진시황의 아버지인가?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여불위는 애첩을 자초에게 주었는데, 그녀는 훗날 진시황의 생모가 된 조희였다. 이 때문에 진시황의 친아버지가 여불위라는 설이 있다. 자신의 자식을 임신한 여성을 남에게 주는 일이 전국시대에 종종 있었기 때문에[22][23] 사마천 시기까지만 해도 정설로 받아들여진 듯 하지만, 카더라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까지 많은 창작물에서도 십중팔구 이 가설을 채용하고 있다.

<진시황 본기>에는 시황제가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24]

시황제의 본명이 영정(嬴政)이냐 여정(呂政)의 논란이라면 영정(嬴政)이 맞다. 만에 하나 그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가설이 맞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을 지어준것은 영자초(장양왕)이며, 여불위생부설이 맞다 해도 사실 상 영자초의 양자로 봐도 무방하다. 때문에 과거든 미래든 시황제의 혈통에 시비를 논해봐야 해도 대외적으로 시황제는 장양왕의 아들인 것이다.

4. 그 외

장양왕 원년(기원전 249년), 여불위는 장양왕의 명으로 군대를 이끌고 동주를 멸하여 중화의 천자국 주나라를 완전히 끝장냈다.[25]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현재로 비유하자면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유서여씨춘추》라는 책을 편찬했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수많은 석학들을 동원하여 지었는데, 무려 20여 만 개의 단어를 수록했다고 한다. 여불위는 이 《여씨춘추》에 큰 자부심을 가졌는지 책이 완성된 후 "그 책에서 한 자라도 더하거나 빼면 1,000금을 주겠다고 했다."고 전한다. 오늘날 일자천금(一字千金)이란 사자성어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조나라의 한단에서 이인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인 기화가거(奇貨可居)라는 사자성어도 유명하다. "진귀한 보물은 제 때 잡아야 한다."는 뜻.

성산, 함양, 성주 여씨 족보에서는 여불위를 자신들의 선조로 취급한다. 자세한 것은 여(성씨) 항목으로.

그리고 그가 자살을 위해 먹은 독이 짐새의 짐독이란 설이 있다.

5. 평가

그저 맨 손에 아무 것도 없었던 떨거지 왕족을 일국의 왕으로 만들고, 자신도 일개 상인에서 한 나라의 실세를 거머쥔 정치 거물로 성장했다는 점을 보면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주를 농락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하루 아침에 모든 권력과 명성을 잃고 추락한 끝에 자결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인격적으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예컨데 사마천은 《사기》<여불위 열전>에 여불위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의 허무한 몰락을 논하며 "소위 이름만 알려진 자(所謂聞者)"라 평하였다. 이는 그 대단한 명성과 지위와는 대조적으로 그 행동은 올바르지 못 한 간사한 자라는 말 정도로 해석된다.

다만, 이렇게 사후의 평이 박했던 것에 비해 생전의 평판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불위 자신이 권력을 손에 쥔 이후로도 학자나 선비, 도인 등을 후원해주며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는 꽤나 존경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여불위가 무려 진시황을 능멸하는 대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석학들과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여불위를 변호한 덕분에 일단은 관직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여불위가 당대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26][27]

여불위 개인의 능력은 부정할 길이 없다. 여불위가 킹메이커로 등극하던 시기, 진나라는 소양왕이 도합 40년에 걸친 외척위염과 그 세력이었던 백기 등을 쳐낸 여파로 거의 손에 들어왔던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기해야 하는 등, 확장에 제동이 걸리던 시기였다. 거기에 그 뒤를 이은 효문왕은 상을 치른 뒤 3일만에 죽음을 맞이했고, 여불위 자신이 왕으로 만들었던 장양왕 또한 3년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 때 그 뒤를 이은 게 겨우 12살의 진시황인데, 어린 진시황이 성장하여 친정을 할 시기가 될 때까지의 대략 10년 동안 진나라의 국정을 유지한 게 여불위다. 50년 이상 재위했던 왕이 죽음을 맞이하고 그 뒤 왕들이 3일 내지는 3년만에 줄줄이 줄초상을 맞이하는 가운데, 어린 왕의 섭정이 되어 정부를 혼란없이 장악하고 무난하게 국정을 이끌어갔다는 사실이 이미 재상으로는 합격임을 증명한다. 멀리 갈 것 없이 동시기의 바로 옆 조나라가 승상 곽개 때문에 망했고, 부강했던 진나라 역시 진시황 사후 실권을 잡은 간신 조고 때문에 불과 4년만에 망해버린걸 보면 여불위의 능력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불위 개인의 정치적인 정략이나 스탠스, 내지는 신묘한 정책 따위가 없었다는 이유로 그의 정치력을 폄훼할 수 없는 이유는 당시 진나라의 상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까놓고 말해서, 진나라의 국책은 범수 이후 줄곧 범수가 제창한 원교근공책을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기의 상황에서 진나라의 국책을 유지하고 그에 따른 국력 약화 하나없이 상황을 유지할 수 있었던 시점에서 여불위의 능력은 이미 검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그동안 진나라를 유지한 인재들 또한 여불위가 천거한 인원들이었으며, 개중에서는 시황제의 치세까지 도움이 된 인물들[28]도 있었다.

문제는 여불위 개인의 능력과는 별개로 상황이 능력 하나 있다고 수습될 정도가 아니었다는 점. 황태후노애와 멋대로 놀아나도록 둔 시점에서 여불위의 죽음은 사실상 확정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고, 이를 1년 이상 미룰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여불위의 정치력이 무시할 정도가 못 되었다는 방증이다. 점괘를 조작한 기군망상죄는 물론이요, 왕실의 족보를 꼬이게 한[29] 대죄는 여불위가 얼마나 능력이 있었든, 진나라에 얼마나 공헌했고 몇 명이나 되는 왕을 세웠든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부계 혈통 승계를 중시하고, 행여 시정잡배의 씨가 왕이 될까 두려워 고자들을 환관으로 삼던 당대의 기준으로는 대역죄 중의 대역죄를 저지른 것이다. 하물며 그런 비행이 노애의 반란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발각된 것에 더해 그 노애를 태후에게 추천한 게 여불위였으니 아무리 부왕을 잘 모셨다 해도 죽어 마땅한 것이었다. 귀족이나 왕족도 아닌 일개 상인 출신으로서 뛰어난 국정운영력을 보였지만 황태후와의 치정문제 때문에 결국 몰락하게 되고 평가를 깎아먹게 되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황태후의 치정사건은 진왕 영정의 혈통을 뒤흔드는 중요한 문제였다. "조희가 시집 온 후 12개월이 지나 영정을 낳았기에, 생물학적으로 영정은 여불위의 자식이 될 수 없다."라는 의견이 있으나, 사실 12개월 이상 임신하다 애를 낳은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며,[30] 사실 임신 기간은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왕실에서 이것이 문제가 안 되는 것은 구중궁궐 안에서 고자인 환관들과 궁녀들의 철통감시 속에 있기 때문에 궁에 있는 여성들이 바람을 피우는 것이 차단되기 때문인데, 황태후가 노애와 통정하여 아이까지 낳았고 그 과정에 섭정인 여불위가 적극 개입한 것은 그 믿음을 뿌리채 흔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표현하면 "구중궁궐 안에서도 애 낳을 정도로 놀아날 정도로 음탕한데, 심지어 다른 나라에 살던 때라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 아닌가?"라는 의심을 할 수 있게 된다.

반론하자면 그건 아무 때에 낳은 아이라면 그렇다는 말이고 영정이 태어났을 때 이미 조희는 영정의 아버지 자초에게 가 있던 상황이었고 당연히 자초는 멀쩡히 살아있었던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아무 근거 없는 소리[31]라고 하는데, 이 역시 조희 치정사건과 여불희 문제의 특징과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반론이다. 간단히 말해 진왕 영정(후일의 진시황)의 정통성을 공격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바로 윗 문단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일국의 태후라는 존귀한 신분에 올라서도 외간남자를 궁 안에 불러들여 사통하고 아이까지 낳을 정도인데, 하물며 자초(이인)이 타국(조나라)에 인질로 붙잡혀 있는 당시에 그의 처소에 누가 드나들었을지 어찌 알겠는가?" 라고 트집을 잡을 빌미가 생겨버렸다는 것이 문제이다. 영정이 태어난 시기가 조희가 자초에게 간 지 열두달이 지난 이후라는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데, 영이인이 여성의 임신기간도 모르는 바보가 아닌 한 만약 조희를 데려온지 아홉달이 되지 않았는데 자식이 태어났다면 당연히 그 아이는 여불위의 아이일 것이므로 태자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열두달만에 태어난 아이이므로 당연히 자기 자식으로 믿고 거리낌없이 태자로 삼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노애 사건이 터짐으로써 "노애를 몰래 태후에게 들여보낸 것처럼, 이전에도 여불위 자신이 몰래 조희와 정을 통했던 것이 아니냐?", 즉 혼인 후 사통을 의심할 빌미가 생긴 것이 문제의 핵심이고, 이것이 진왕으로써 영정의 정통성을 공격할 수 있는 꼬투리가 되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노애를 태후에게 붙여주기 전에도 태후와 여불위가 이미 사통하던 관계였다는 사실은 영정의 정통성을 더욱 흔드는 증거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조금 더 확대해석으로 나아가면, 노애가 자기 아이들을 왕위에 올리려고 반란을 일으킨 것 자체도 노애가 진시황을 선왕의 자식이 아닌 여불위의 자식으로 여겼기 때문에, 어차피 현 왕도 왕가의 핏줄이 아닌데 자기 자식이라고 왕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란이라는 대담한 수를 두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절대왕정 국가에서 왕가의 핏줄의 순수성은 왕위계승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그 핏줄에 의심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왕의 권위와 신하들의 충성심이 한꺼번에 흔들릴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다. 이미 즉위 중에도 생부가 여불위 아니냐는 의심을 공공연히 받고 있던 진시황으로서는 노애 사건을 계기로 여불위를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거대한 세력을 지닌 권신을 숙청하여 왕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는 생부이기 때문에 살려주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여불위를 죽여야 했을 것이다. 물론 실리와 일의 성공 가능성을 냉정히 저울질할 줄 알던 여불위가 진짜로 뻐꾸기짓을 하여 진시황의 생부가 되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을 것이고 그건 그 당시 사람들도 알고 있었을 터이나, 뻔한 거짓말도 자꾸 계속 들으면 진실로 믿게 되는게 사람의 심리인지라 진시황은 이런 심리적 이유 때문에 여불위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여불위라는 인물의 캐릭터가 2,300년 넘도록 진시황과 얽혀 계속적으로 후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회자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단순히 킹메이커로 성공하여 적당히 권세를 휘두르다가 조용히 말년을 마무리했다면 여불위는 세간에서 그리 대단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허나 진시황이라는 인물을 왕위에 올린 일등 공신이라는 점과 동시에 진시황의 출생에 커다란 의혹을 던져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여불위의 존재는 진시황의 다면적이고 복잡한 캐릭터에 한층 더 흥미와 깊이를 더해주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아닐 것임을 알면서도 여불위의 진시황 생부설을 믿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 둘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캐릭터적으로는 확실히 성공한 인생이었음이 틀림없다.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동양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좋아봐야 권모술수에 능하고 승부사 기질이 있었던 풍운아, 나쁘면 기만으로 인생을 일관한 사기꾼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의외로 서양 사학계에서 여불위를 사상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지목하고 있다. 전국시대철학자들은 깡패나 다름없었던 전국시대 군주들을 행정 일선에서 물러나 자기 수양으로써 자작농 사회의 생존을 위한 천지의 조화를 중재하는 의식의 집전자로 만들고 행정 실무는 자신들이 담당하는 체제를 꿈꾸었는데, 그 필두에 여불위가 있었다는 것이다.[32] 진한시대에 중국이 통일 제국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우주와 국가, 신체의 철학적 교리가 구축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교리로 (氣)와 음양오행을 체계화한 사상가의 계보를 여불위 - 회남자 - 동중서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여불위를 "우주를 코스모스로 인식한 제국의 설계자"라고까지 표현할 정도.[33]

6. 대중문화 속의 여불위

6.1. 게임

6.1.1.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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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13

삼국지 12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 능력치는 72/42/88/89 전법은 진시황과 같은 전공격강화

삼국지 13에서는 통솔만 조금 높은 문관A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능력치는 전작과 같고. 전법은 정보교란 특기는 상업9 / 농업5 / 문화8 / 교섭8 / 언변8 로. 내정 혹은 사신용으로 자주 활용하게 된다. 대상인으로 출세한 것을 고려하여 상업이 9로 측정된 것으로 보인다.

6.1.2.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파일:조온_여불위.png

고대무장으로 등장. 병종은 책사계고 성우는 홍후백이다. 성능면에서 평가는 좋지 않은 편.

6.2. 만화

6.2.1. 만화킹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여불위(킹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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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 만화 달인전 ~ 9만리를 바람에 타고 ~

진의 재상이 되기전 젊은 시절의 상인모습으로 등장한다. 조선시대 선비를 연상하게 하는 특이한 복장에 서역식 옷감을 입으며 망건을 착용하고 조선식 흑립을 쓰고 있다. 주인공 일행과 조우하여 짧지만 강한 인상을 보여주며 위기에 처한 주인공 일행을 구명 해주고 헤어지며 그를 목격한 점술가 그를 보고 차갑고 푸른뱀이 늑대항문으로 파고들어 뱃속에 들어가 입으로 뚫고 나오며 을 태어나게 하는 환상을 보게 된다.

초기에는 정말 상인에 불과했지만, 인상여와의 만남 이후 자신의 욕망을 생각하게 되며 점차 상인을 뛰어넘는 정치가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역사대로 진 태자를 지원하며 조금씩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지원하는 와중에도 진 태자가 여불위의 애첩인 조희를 요구한다거나 예전 지원하기 전 거렁뱅이 시절을 기억못하고 하대하듯 여불위를 대하자 순간순간 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조희를 요구할때는 낮은 목소리로 "기어오르지 마라"며 지원은 지원이지 자신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듯한 분노를 내보이기도 하나, 이내 진정하고 조희가 임신한 아이가 자신의 아이니, 이대로면 자신의 아이가 진 왕이 될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는 순순히 조희를 넘긴다. 진시황제가 여불위의 아들 아니냐는 출생 논란에 대해 이 만화에서는 그 방향으로 잡은 셈. 아예 직접적으로 조희가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를 애매하게 만드려는 것이냐며 이 부분을 언급하기도 한다.

조에서 평원군과 모종의 거래를 통해 자초(이인)을 지키며 지내지만, 평원군이 삼천 결사대를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자 이런 행동에 의심을 품은 일반 관리들에 의해 자초가 죽을 위기에 처한다. 상황이 긴박해지자 여불위는 그 즉시 자신과 자초의 몸만 챙겨 탈출을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이 만화에서의 여불위가 가진 욕망의 크기가 드러나는데, 분명히 조희와 그 아들 정을 살리면 자신의 자식을 왕으로 만들수 있을테지만 그것은 어쩔수 없다며 자초를 살리는 것에 집중한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본작에서 여불위는 자신대에서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게 하기보다는 자초를 왕으로 만들어 그 이득을 얻는것에 만족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때문에 조희와 정이 죽더라도 어쩔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초를 살리는 것에 집중한 것.

이후 소양왕이 죽고, 효문왕과 장양왕이 연달아 사망하는 과정에서 점차 멘탈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들일 정은 자신이 감당못할 정도의 크기로 성장하고 나름대로 오래 지내온 장양왕이 사망하는데다[34] 애첩이었던 조희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매달려 흔들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장양왕을 지원해 거기서 나오는 이득을 보는 정도를 노렸고, 실제로도 그게 최상이었을테지만 자신의 아들일 정이 왕이 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너무 빨리온데다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위치를 넘어서 압도적인 품격의 왕으로 성장한 정을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상인 출신이라 하늘도, 누구도 믿지 않지만 최소한 누군가 자신의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독백하는 장면은 많은 매체에서 냉철하면서도 얼음같은 성격으로 그려지던 여불위와 달리 아주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 장면.

이후에 자초가 죽기 직전에 그를 만나 태자를 바꿨으면 한다고, 태자인 정의 깊숙한 곳에는 차가운 어둠이 있다며 진을 위해서 태자를 바꿔주기를 간청하려 한다. 많은 매체에서 정을 통해 자신이 권력을 잡으려하던 모습이 아닌, 진의 승상으로서 정의 위험성을 알아보고 경계하는 나름대로 새로운 장면. 하지만 자초가 자신은 이미 이런 끝이 예견되어있었다며, 왕의 품격을 지닌 정을 친아버지처럼 보필해달라는 말에 차마 얘기를 꺼내지 못한다.

자초가 죽은 뒤 잠시 한탄하지만, 자신은 자초와 정에게 얽힌 천명에 항거하겠다며 어떻게든 맞서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이러한 전개 방식을 보면 역사에서 여불위와 정의 대립을 상당히 일찍이 깔아두고 있다. 권력을 잡고말고가 아닌, 여불위는 진정으로 정이 가진 위험성을 염려하여 정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보이고, 반대로 정은 이러한 여불위를 제압하려고 하니 마치 천명에 맞서는 사람과 같은 전개가 되는 것이다. 결국은 여불위가 패하고 정이 권력을 쥔다는 점에서 천명을 믿지 않는 여불위가 천명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

장양왕의 죽음을 신하들에게 알리며 아직까지 서고에 틀어박혀 즉위식에 나오지 않은 정을 오만방자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갑자기 왕의 복장으로 나타난 정에게 놀라고, 이후 자신이 생각한 몽오를 내정으로 돌리고 위위를 군으로 돌리는 방안을 얘기하자 즉시 기각당하고 몽오는 현상 유지, 표공을 새로 장군으로 임명하며 육국 전부를 멸망시키겠다는 포부를 그저 바라만 보게 된다. 이를 지켜본 이사는 여불위쪽이 아닌 진시황 쪽을 따라야겠다고 다짐하는데 여불위가 실각하는 순간까지 여불위를 따르던 킹덤의 이사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 덤으로 장군으로 임명된 표공은 새 왕과 승상의 눈매가 닮지 않았냐며 왕전에게 묻고, 옆에 있던 신하가 모두가 그것을 알지만 일부러 꺼내지 않는 얘기라며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작중 설정을 또 보여주었다.

장양왕이 죽고 중보로 임명되는 것도, 여불위의 계획 끝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여불위가 친아버지임을 알지만 자신을 죽음의 위기로 버리고 갔던 증오심에서 발현된, 그가 분명히 자신을 왕의 자리까지 끌고오긴 했지만 친아버지는 아니라며 어찌보면 절연과 같은 선언으로 그려지고 있다. 신하들 역시도 사실상 여불위가 진시황의 아버지라고 추측하기에 이러한 행위에 기겁하고, 여불위 본인에게 얼마나 지독하게 들릴지에 경악한다. 여불위 역시 이것은 존경이 아닌 멸칭이며 증오가 담긴 말이라고 파악한다.

이후에도 진의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이 계속 나온다. 천하통일이라는 말에 위화감을 느끼고 자신 이외의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인상여의 말을 떠올리며 그 성향 자체가 진이라는 나라에 공통되는 성향이라 생각한다. 그와 반대편에 위치하는 붉은 삼협을 위시로 한 사람과의 관계, 관계가 만드는 의, 그것이 진이라는 나라의 장벽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며 고심한다. 이후 다가오는 진시황을 만나며 그러한 자신만을 믿는 사람의 극치라고 독백하는데 진시황은 하인을 구하라는 둥 별궁으로 옮기려는 태후를 돌봐줘도 된다는 둥 그를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들을 한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면 매우 사소한 잡무인데 그런걸 명백히 최고 권력자인 여불위에게 시킨다는 것은 그를 사실상 쓰지 않겠다는 발언이나 다름 없었던 것.

6.3. 드라마

6.3.1. 대진제국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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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제국 시리즈 4편 대진부에서 진시황 영정과 더불어 또 다른 주인공으로 봐도 될 정도로 가장 비중이 큰 인물로 등장한다. 진장양왕 영이인을 데리고 탈출시키는 모습으로 첫등장. 이후 효문왕의 왕비인 화양태후와 담판을 지어 영이인을 진나라 태자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이후 영정조희 모자가 조나라에서 돌아와서 영성교를 지지했던 화양태후와 진나라 종친들로부터 굴러들어온 돌 취급을 받을 때 이들 모자의 든든한 후원군이 되어주어 사실상 영정의 실질적인 아버지 역할까지 해줬을 정도. 이 때문에 초중반까지 영정은 이러한 여불위를 자기 친아버지보다 더 아버지처럼 따랐다. 또한 영정의 어머니 조희와도 노애가 장신후로 봉해지기 전까진 거의 부부급 케미를 선보이며[35][36] 정치적 동맹도 구축한다. 하지만 주변의 제후국들을 싸그리 멸망시켜 어떻게해서든 천하통일을 이룩하고 싶어하는 영정과 달리, 여불위는 장사꾼 출신이다보니 비교적 체제의 안정을 추구했던지라 천하통일 사업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면서[37] 점점 이 둘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생겨나게 되며, 극 중 여불위가 본인의 권력유지를 위해 영정과 영성교 사이를 이간질해서 영성교를 제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다, 영정의 관례 의식과 친정 선포날도 멋대로 연기해버리는 등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주변의 적들이 늘어나자 결국 영정은 이러한 여불위를 견제하고자하는 차원에서 본래 본인의 적과도 같았던 영씨 종친들과 손을 잡게 되고 역으로 어그로를 끄는 노애를 이용해서 여불위도 세트로 제거할 기회를 옅보게 된다.

게다가 본인이 꽂았던 노애가 점차 본인못지 않은 권력을 갖게 되면서 자신의 충고도 듣지않고 어그로를 끌게 되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껴 독단적으로 노애를 죽이려고 했지만[38] 자신의 애인이었던 조희는 역정을 내면서 노골적으로 노애를 비호하고 심지어 같이 노애를 싫어하던 영정마저 싸늘한 반응을 보이자 눈물을 흘리면서 본인이 사실상 이들 모자에게 토사구팽당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나중에 노애가 함양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관례 의식을 치루기 위해 옹성에 가있던 영정이 파발을 보내 지금 당장 노애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내려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기여한다. 하지만 노애조희에게 꽂았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피하지 못하고 결국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떠난다. 이 소식을 들은 조나라 진영에서 몰래 여불위를 포섭하는 데 시도하지만, 이러한 조나라의 포섭시도를 보면서 조나라와 내통했다는 오해를 사게 되고 자신이 살아있으면 영정과 진나라의 앞날에 방해만 될 거라고 깨달으면서 결국 자살하는 걸로 생을 마감한다.

기본적으로 노련한 거상 출신답게 주변 인물들을 다루는 솜씨가 능하며 정적들에게도 품위를 유지하며 필요에 따라 손을 잡는 인물로 묘사된다. 주로 능글맞은 표정을 지을 때가 많고 필요에 따라서는 은근히 애교(...)도 부릴 정도. 게다가 거물 정치인답게 멘탈도 강하고 임기응변에도 능한 편인데, 자신을 위해 큰 공을 세운 감라영정에게 개죽음을 당하자 그 시신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는 당황한 눈치를 보였으나 곧바로 멘탈을 다잡고 “감라는 오만방자하여 대왕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죽음으로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은 옳은 줄로 압니다.”라고 말하여 영정의 불편한 심기를 겨우 갈아앉힌다. 사실 영정이 감라를 제멋대로 죽인 건 단순히 꼴리는대로 행동한 게 아니라 자신과 상의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벌리지 말라고 여불위에게 보내는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자기보다 훨씬 어린 영정을 너무 애취급한 게 나중에 본인의 발목을 잡게 되는 요소로 작용하는데, 생각보다 영정은 여불위의 생각 이상으로 야심과 권력욕이 장난 아닌 인물이었기 때문. 하지만 영정도 여불위와 미운 정 고운 정 다 주고받은 사이라 헤어질 때도 최대한 예를 갖추면서 헤어지고[39], 나중에 여불위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역정을 내면서 진심으로 슬퍼하기는 했다.

연기한 배우는 초한전기한신으로 유명한 단혁굉(段奕宏).

6.3.2. 심진기

자신의 친자 영정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장양왕독살했다. 진왕 영정이 자신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여불위는 영성교를 사주해 반란을 일으켰다. "부덕한 왕을 폐하고, 덕있는 자를 왕으로 추대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담긴 여씨춘추를 편찬해 진왕을 압박했고, "옳지 않은 부분을 지적하면 상금으로 천금을 주겠다."고 하며 세를 과시했다.

2018년 리메이크작에선 여씨춘추를 막 편찬한 시점에서 처음 등장한다. 여불위의 딸이 역병의 치료제를 만들었지만 딸이 역병에 걸린 소양왕을 치료하려고 할 때, 여불위가 치료제를 독약으로 바꿔치기 했고 소양왕은 사망했다.

6.3.3. 호란전

여불위와 조희가 연인이었으나 영정은 장양왕의 친자이다. 상인으로는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장양왕 사후에 조희와 다시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1] 《사기》의 기록[2] 《전국책》의 기록[3] 혹은 기원전 292년 ~ 기원전 235년까지 살았다고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4]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는 것은 현대에는 매우 기초적인 상식이지만 여러 지방의 시세나 시장 상황을 확인할 방법이 어렵고 물류와 유통이 발달하지 않은 기원전에 상인으로 큰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보통 장사 수완이 아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5] 참고로 이름은 영주(柱)고, 안국군은 봉호다.[6] 훗날 이름을 자초(子楚)로 바꾸었다.[7] 사실, 당시 초강대국인 진나라가 조나라에 인질을 보낸 것도 그저 조나라를 안심시켰다가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렇게 조나라를 기만한 것이 밝혀지면 조나라에 인질로 간 영이인이 보복 처형을 당했을 것이다. 이는 이인이 죽든 말든 소양왕이나 안국군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당시 영이인은 그 정도로 존재감도 영향력도 없는 처지였다.[8] 이 말은 "너무 이익이 커서 계산할 수 없다."는 의미였을 것이다.[9] 다만 조희가 실제로 무희였고, 여불위의 첩이었을 것이라는 내용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여불위 열전>에서는 조희가 조나라 부잣집의 딸이었으며 그 덕분에 자초가 진나라로 달아났을 때에도 숨어서 살 수 있었다고 전하는데, 아마도 제법 부유하고 세력있는 집안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를 조합해보면 "여불위가 자신의 첩을 자초에게 심기 위해 일개 무희로 속였다."가 된다.[10] 《사기》 <여불위 열전>에 기록된 바로는 五百金[11] 여불위의 사람 보는 비범한 능력을 알 수 있는 부분으로, 보통 사람이 사람을 판단할 때에는 그 사람 개인의 자질만을 보고 판단하지만, 여불위는 그 사람의 자질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 어떤 이득을 창출해낼지 간파하여 이인을 지목한 것이었다. 즉, 이인이 아닌 안국군의 다른 아들을 골라서 진왕으로 만들어도 상관이 없었던 것인데 저런 볼모로 잡힌 상황까지 이용해서 이인을 왕으로 만든 뒤에 자신의 입지까지 도모한 것이다.[12] 참고로 화양부인은 후일 자초가 왕이 된 뒤에도 또 그 자초가 죽은 후 자초의 아들인 영정, 즉 진시황이 즉위했을때도 살아있었는데 진시황은 어머니와 꽤나 사이가 안 좋아서 할머니 격인 화양부인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13] 한나라 때의 1근은 233g인데, 전국시대에도 같았다면 황금 600근은 오늘날의 kg단위로 환산하면 황금 139.8kg에 달한다. 참고로 지금처럼 1근이 600그램이 된 건 송나라 때다.[14] 2011년 4월의 금 시세로 환산해서 약 29,585,203,200(295억 8520만)원에 달하는 가치가 있는 양이었다. 이 정도의 뇌물이면 영이인을 죽이러 온 조나라 병사가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원을 매수하고도 남는 금액이다. - 출처:《전쟁의 역사 3》, 남문희 저, 휴머니스트[15] 나중에 장양왕의 아들인 진시황은 장양왕을 태상황으로 추증했는데, 그의 휘인 자초(子楚)초나라초(楚)와 같다는 이유로 피휘하기 위해서 초나라를 뜻이 같은 한자로 형(荊)나라로 바꿔 부르게 했다. 그래서 《사기》에는 초나라가 형나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초나라의 별칭으로 형나라를 쓰기도 한다.[16] 오죽했으면 장평대전에서 조괄이 큰 실수를 저질러 백기한테 크게 당하고 수많은 병사가 생매장당했을 때도 조 효성왕은 영이인을 화풀이로 삼아 죽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았다.[17] 이를 두고 여불위가 나이가 어린 영정을 빨리 왕으로 세워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선대의 두 왕을 독살했다는 설도 나돌았다. 야사에서는 영정이 실제로는 여불위의 아이라서 그랬다는 설이 있다.[18] 이렇게 환관으로 위장한채 궁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험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후 환관이 승진을 하려면 자신이 고자가 되기 전에 달고 있었던 양물을 방부처리해서 보관하다가 상관에게 보여줘야 했다. 그냥 1번 까고 클리어받는게 더 쉽지 않나[19] 그러나 후에 신하들이 뜯어말린 덕분에 어머니에게 더 이상 해를 가하지는 않았고, 다시 함양의 궁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20] 여불위는 그냥 에 빠져버린 조태후가 자신한테 엉겨붙는 게 귀찮아서 적당히 밤일이나 즐기며 살라고 노애를 소개시켜줬을 뿐이지 반란 일으키라고 소개해준건 '절대' 아니었다.[21] 이 때 편지 내용이 그 당시 시대상으론 매우 모욕적이었는데, 영정 본인의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는 것 빼곤 아무 것도 못한 주제에 니가 뭔데 나에게 '상보'라 불리냐며 비난했다. 말그대로 왕을 세운 것만으로도 큰 공이고, 영정의 킹메이커가 되어준 것까지 고려하면 노애 건 하나때문에 책잡혀 이렇게 밀려버린 여불위 입장에선 울화가 터질 수준이었을 것이다. 물론 여불위와 노애 사건은 여불위가 분통 좀 터진다고 항의할 수 있는 수준의 사건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22] 대표적으로 춘신군의 몰락. 춘신군은 이원의 여동생을 임신시킨 후 그녀를 초나라 고열왕에게 바쳤다. 후사가 없던 고열왕은 이원의 여동생을 왕후로 세웠는데, 그녀가 쌍둥이 형제를 낳자 매우 기뻐했다. 이 형제는 초나라 고열왕이 죽자 유왕애왕으로 각각 즉위했는데, 유왕은 요절했고 그의 동생 애왕은 그의 이복형인 부추(초나라 마지막 왕)에게 피살되었다. 근데 갑자기 이복형이 등장하는 걸 보면 고열왕에게 다른 친자식이 있었던 듯하다.[23] 당연하지만 왕의 아들이라도 어미의 출신이 미천하면 왕이 되는 데는 애로사항이 꽃피는 경우가 많고 당연히 적통과 서얼이 있으면 적통을 우선 순위로 두게 마련이다. 이원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들은 혈통 문제는 있지만 그걸 아는 놈은 없고 엄연히 왕후에게서 나온 아들이므로 부추보다 적통으로서는 훨씬 낫다.[24] 만약 그가 혈통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호적 상 장양왕의 아들임은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다. <진시황 본기>에서 나온 이 첫 문장은 글의 문맥상으로 볼 때 시황제의 생부에 대한 논란을 말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황실의 정통성에 대한 의미로 해석한다.[25] 그러나 주나라는 사실상 망했었다. 당시 주나라서주동주로 분리되어 있었고, 주 왕실은 서주에 빌붙어 명맥만 이어가고 있었다. 명맥을 이어가려 했으나 결국 서주는 진나라의 소양왕에게 망했고, 이때 구정을 빼앗김과 함께 주 왕실과 서주 공실은 소멸하였다. 보기에 따라선 주나라는 소양왕 때 망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주 공실은 존속하였으나 더 이상 주나라천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26] 이는 그가 전국사군자를 따라하면서 많은 식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식객들과 자신의 부를 통해 만든 것이 바로 《여씨춘추》라는 책으로 여불위가 이 책을 만든 뒤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빼는 자에게는 1,000금을 주겠다고 한 것으로 유명하다.[27] 사실 여불위 본인의 능력과 별개로 이렇게 많은 이들의 변호를 받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데, 당장 영이인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화양부인을 구워삶고, 이인에게 조나라의 명사들을 섭외하라고 조언한게 여불위이다. 즉,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방법과 인맥의 힘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었던 것. 당연히 재상 시절에도 이런 인맥 관리를 철저히 했을테니 그에게 신세를 진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변호했을 것이다. 사실 말이 상인이지 저 정도 규모의 상인이면 요즘으로 치면 재벌급 거물 사업가인데, 오늘날 한국에서도 재벌 회장이 횡령이나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되면 친(親) 재벌 성향의 언론과 학자들이 나서서 경제 위기나 취업난을 거론하며 회장님을 석방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고 이것이 실제 사면이나 가석방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흔하다. 같은 맥락에서 생각하면 될 듯.[28] 대표적으로 이사. 이사는 본디 여불위가 천거한 정치가였다.[29] 노애가 영정의 새아버지가 된 꼴이다.[30] 'Beulah Hunter'라는 사람이 375일 임신한 공식 기록이 있다 무려 12개월 10일. 타임지.[31] 애시당초 12개월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전에 있었던 초나라의 이화접목 이야기가 진시황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32] 그러나 현실에서는 전한 선제 정도를 제외하면 학자들의 이상을 순순히 따라준 황제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33] Geoffrey Lloyd & Nathan Sivin (2008) The Way and the Word , "5. The Fundamental Issues of the Chinese Sciences"[34] 장양왕과 그가 왕위를 받기까지의 모든 것을 소용돌이로 취급하는데, 장양왕이 사망하자 그 소용돌이가 사라졌다며 앞길을 알수없다며 혼란해 한다.[35] 영정이 진왕으로 즉위한 후 조희 역시 태후가 되는데 본인은 한단 출신이라 함양에 지인이 없어 적적하다는 핑계로 여불위를 심심하면 불러서 술과 밥을 먹이고 담소를 나눈다. 조태후는 매우 음흉한 표정으로 여불위를 그윽하게 응시하고 여불위는 이를 매우 부담스러워하는데 노애처럼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사실상 여불위와 조태후가 사통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36] 본방송에서는 편집되었지만 촬영 비하인드 영상을 보면 둘이 아예 사랑의 술래잡기까지 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너무 보기에 낯뜨거운 데다가 광전총국의 제제 때문에 통편집당한 듯하다.[37] 극 중 영정은 들뜬 목소리로 여불위에게 “저는 천하통일을 어떻게 해서든 이뤄내고 싶어요! 중보(仲父)께서도 저랑 같이 통일에 힘써주실꺼죠?”라고 물어볼 때 여불위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정치는 신에게 맡기시고 대왕께선 공부에 힘쓰십시오.”라고 돌려서 사실상 거절한다. 하지만 정작 영정은 이러한 여불위의 말을 자신의 의견을 동의했단 식으로 자기멋대로 해석한다.[38] 원래 최대한 중립을 지키며 관망만 하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노애가 영씨 왕족들을 상대로 어그로를 끌어버리다 영씨 종친들의 수장인 관내후까지 죽어버리는 대형사고가 일어나 영씨 종친들이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들고 일어서게 되자 나서게 된 것[39] 다만 정작 함양을 떠날 때 배웅나가지는 않고 대신에 자신의 갓난아기 아들 부소를 보내 마지막으로 인사를 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