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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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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의 전경.[1]
파일:진시황 병마용갱1.jpg
진시황릉 주변에서 전시되고 있는 병마용갱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진시황릉
영어 Mausoleum of the First Qin Emperor
중국어 秦始皇陵及兵马俑坑
프랑스어 Mausolée de l'empereur Qin
국가·위치 중국 산시성 시안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6년
등재기준 (i)[2], (iii)[3], (iv)[4], (vi)[5]
지정번호 441
||<:><tablewidth=400px><table align=right><tablebgcolor=#FFFFFF,#191919><tablebordercolor=#CC0000><#CC0000><width=100> 파일: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_4.png ||<-2><:><#CC0000>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colbgcolor=#CCC,#333>명칭 한국어 진시황릉
간체 秦始皇陵
번체 秦始皇陵
영어 Mausoleum of the First Qin Emperor
분류 고묘장
(古墓葬)
시대
일련번호 1-0164-2-003
주소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시안시 린퉁구 친링베이루
西安市临潼区秦陵北路
등재 1961년
차수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AAAAA급


1. 개요2. 역사
2.1. 매장 기록2.2. 매장 이후2.3. 현대의 발굴
3. 부장품4. 대중매체에서5. 기타
5.1.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5.2. 후대 중국 황릉과의 비교

[clearfix]

1. 개요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중국산시성시안시 린퉁구에 소재한 진시황의 능이다. 능 주변에서 병사 등을 조각한 토용(테라코타 모형)인 병마용(兵馬俑)이 발굴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역사

2.1. 매장 기록

진시황릉의 조성과 관련하여 가장 신뢰성 높고 자세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은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에 기록된 진시황릉 관련 서술이다.
九月,葬始皇酈山. 始皇初即位, 穿治酈山, 及并天下, 天下徒送詣七十餘萬人, 穿三泉, 下銅而致槨. 宮觀百官奇器珍怪徙臧滿之. 令匠作機弩矢, 有所穿近者輒射之. 以水銀為百川江河大海, 機相灌輸. 上具天文, 下具地理. 以人魚膏為燭, 度不滅者久之. 二世曰 「先帝後宮非有子者, 出焉不宜.」 皆令從死, 死者甚眾. 葬既已下, 或言 「工匠為機, 臧皆知之, 臧重即泄.」 大事畢, 已臧, 閉中羨, 下外羨門, 盡閉工匠臧者, 無復出者. 樹草木以象山.

9월, 시황제를 여산(酈山)에 매장했다. 시황제가 처음 즉위했을 때에 여산을 공사했고,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죄수 70만여 명에게 지하수가 3번 돌 정도로 구덩이를 깊게 파게 하고 구리를 부어 외곽을 만들었다. 궁궐과 여러 관리[6], 진기한 보물들을 가득 매장하였다. 장인에게 기계 쇠뇌를 만들게 하여 (묘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쏘게 하였다. 수은으로 여러 개울,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하였다. 위로는 하늘의 모습을, 아래로는 땅의 형상을 갖추었다. 인어[7]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영구히 꺼지지 않게 하였다. 이세황제가 말하기를 "자식이 없는, 선제의 후궁을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매장을 끝내자 누군가 말하기를 "장인이 기계를 만들었고, 모든 노예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노예가 많아 (사실이) 누설될 것입니다."장례가 끝나고 (보물 등을) 이미 다 감추어 놓자, 묘의 가운데 통로를 폐쇄하고 바깥문도 폐쇄하여 장인과 노예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니, 다시는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능에) 풀과 나무를 심으니 (그 모습이) 마치 산과 같았다.
《사기》 <진시황본기> 중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기의 기록이 비교적 구체적인데, 사마천이 진시황릉 내부를 직접 탐험하여 서술했을 리 없고,[8] 기존 기록을 참고해서 썼을 것이다. 유방함양에 입성하자 소하가 진나라의 문서들을 수집하고 보관했다는 서술이 사기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 있는데, 그때 수집된 문서들 중 진시황릉에 대한 것도 있어서 사마천이 참고했으리라 추정한다.

기록에 따르면 시황제 즉위 직후부터 작업에 착수하여 통일 이후부터는 총인원 70만 명(추정)을 동원해서 지었다고 한다. 물론 호왈과 같이 70만 명이란 숫자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황릉의 규모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조숙한 근대 중앙 집권 국가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한 진나라의 행정력을 생각하면, 수십 만 규모의 인원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황릉은 즉위 35년이 넘어서도 완성하지 못하고 진시황이 먼저 죽었다. 이후 2세 황제 호해는 여러 동물과 진시황의 후궁과 그 자녀들, 그리고 인부들을 순장하여 무덤 공사를 끝냈다. <이사열전>에 따르면 호해가 자기 일가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공자 고(高)는 가족들이 연좌될까 두려워 호해에게 먼저 죽음을 청한 덕분에 호해가 은혜를 베풀어 자살을 허락했으나, 나머지 공자들은 시장에서 참수당하고 공녀들은 사지가 찢겨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실제 진시황릉의 배장품(陪葬品) 구덩이에서는 사람이 묻힌 무덤도 여러 곳 발굴되었다. 그중 남자 5명과 여자 2명이 묻힌 무덤에서는 도장[9]이 포함된 금, 은 비단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부장품이나 이 발굴되었지만, 유골은 나이도 젊고 건강상태도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두개골에 화살촉이 박혔거나 특히 여성들의 시신은 사지가 토막나는 등 잔혹한 처형을 당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2세황제 호해가 죽인 형제자매들, 진시황의 후궁들 등 순장된 사람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출처

사마천이 묘사한 진시황릉의 모습 가운데서도 '수은의 강과 바다'를 조성했다는 구절이 특히 유명한데, 상술하듯이 사마천이 직접 무덤 내부를 봤을 리가 없으니, 현대 학자들은 이 묘사를 허구적인 상징이나 전승 정도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사회과학원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황릉 봉토의 수은 함유량이 인근 지역 흙보다 무려 7배 이상 높다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어, 그 형태나 방법과는 상관없이 능의 조성에 있어 다량의 수은을 사용했음은 확실해 보인다.

한편, 황릉 조성에 동원된 죄수나 노예들이 완공 후 몰살됐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황자나 후궁의 유골로 추정되는 게 발견된 것과 달리 몰살된 노역자들의 대규모 시체가 묘비 속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장한이 여릉의 노역 중인 죄수들을 징병하여 진승, 오광의 반란 진압에 성공했다는 기록이 나온 것을 보면 위와 마찬가지로 과장, 와전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2.2. 매장 이후

진시황이 죽고 불과 4년 만에 진나라가 멸망해버렸다. 항우가 이끄는 군대는 함양(咸陽)에 입성하자 진나라 왕들의 무덤을 도굴했다. 당연히 가장 크고 6국의 원성도 가장 많이 들은 진시황의 무덤이 도굴 1순위였다. 비록 항우가 도굴했어도 항우조차 진시황릉의 엄청난 규모는 미처 파악하지 못하여 상당히 많은 묘실이 도굴되지 않고 남았다.

다만 사기의 항우본기(項羽本紀) 등에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고, 한고제본기(漢高帝本紀)에 광무 대치유방이 항우를 비난하고 항우의 죄 10가지를 나열하면서 진시황릉 도굴을 간접적으로 언급할 뿐이다. 진시황 본기[10]에서도 자영 살해, 함양 학살, 방화, 약탈 등 항우가 함양에서 저지른 오만 범죄를 다 나열했지만 진시황릉 도굴은 일언반구도 없다. 진시황릉을 발굴해봐야 알겠지만, 어쩌면 항우가 진시황의 무덤을 도굴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11]

청대 이후 고증학의 시대로 접어 들어서 사기를 비롯한 대부분 중국 고전들의 신빙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조가 생겨났기 때문에, 학자들은 사마천이 사기에서 진시황릉을 설명한 구절이 과연 진실인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사마천의 엄청난 기술이 고대인의 과장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겨난 것이다.

2.3. 현대의 발굴

1974년 3월 29일, 양신만(楊新滿)ㆍ양췐위ㆍ양츠파 등 리산(여산) 인근 시양 마을 청년 6명이 우물을 만들고자 땅을 파던 중[12] 도기 조각을 발견했다. 인형 모양 도기 조각과 쇠뇌, 청동 화살 등을 더 캐냈지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린퉁현의 옌자이공사에서 수도시설을 담당하던 팡수민이 우물 작업에 진척이 없자 확인하려고 리산 우물 공사장을 찾아왔다가 흙 속에서 나온 도기인형들을 보았다. 팡수민은 평소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진나라 시대 도기라고 알아보고는 박물관에 알린 덕에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얼마 뒤 도기제 병사 인형 수천 점이 묻힌 거대한 공간(병마용)이 발견되었다. 이후 동마차갱ㆍ기마갱ㆍ동물갱ㆍ개갑갱 등 부장품 구덩이 수십여 곳이 발견되어 진시황릉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시기는 문화대혁명이 슬슬 잠잠해지던 시기라 홍위병이 황릉을 파괴하는 일은 일어나지는 않았다. 발굴 당시 저우언라이는 후손들을 위해서 발굴 기술이 완벽해질 때까지[13] 무리하게 능 자체를 발굴하지 않기로 했다.[14]

최초 발견자 중 양신만은 인기스타가 됐다. 국내 모 프로에도 양신만의 당시 근황이 나왔는데, 나름 유명인사로 관련 책자도 팔고 기념 사인회까지 열 정도로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으며, 현지 기념품 판매소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발견 당시엔 중국 정부에서 보상으로 경운기 1대를 지급했다고 한다.[15] 진시황릉 발견 전만 해도 그 땅은 작황이 안 좋아 귀신 붙은 땅이라고 불리며 현지 주민들이 기피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진시황이 자기 무덤에 수은을 들이부은 탓에 무덤 부근 토양의 수은 함유량이 일반적인 토지의 20배에 달한다고 하니 작황이 좋을 리가 없다. #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진시황릉에서 병마용갱은 대규모 방화의 흔적이 발견됐지만 진시황릉 자체는 방화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내부에 빈 공간이 유지된 채로 아직도 남아있음이 확인됐고, 이 빈 공간을 무너트리지 않고 보존하면서 발굴할 기술이 아직 존재하지 않아서 진시황릉의 발굴은 무기한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현재 발굴중이면서 관광객들이 관광하는 건 정확히는 진시황릉 바로 옆에 있는 병마용갱이다.

2016년, 진시황릉 주변에서 부장갱 4백여 곳에서 실제 동물의 유골과 도기, 청동기로 제작된 동물 등 유물 수천 점이 출토되었다. #

3. 부장품

파일:진시황릉 모형.jpg
진시황릉의 내부를 상상해서 만든 모형.

진시황릉의 부장품은 아직 제대로 발굴을 시작하지도 않았음에도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다. 전세계에서 부장품이 가장 많은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토용(土俑, 사람 모양 흙인형)을 엄청나게 많이 만들었는데, 후술할 병용(병사 인형)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신하들이나 궁중 광대 등 다양한 사람들을 실제 사람 크기로, 사람과 흡사하게 잘 만들어 묻었다. 병마용으로 추정컨대 실제 진나라 궁정에 일하던 사람 수만큼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진시황릉의 주변부에 불과한 병마용갱만으로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판이니, 실제 묘 내부의 부장품은 대체 어떨지 상상조차 안 된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무덤 전체를 발굴하면 투탕카멘의 무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인류 역사상 최고•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이 될 것이 틀림없다.[16]

병마용은 레고처럼 여러 부분을 만들어 구운 뒤 조립하여 완성하였다는 설과, 도자기와 같이 긴 흙막대를 둥글게 쌓아 올리고 같이 만들기엔 크고 무겁고 복잡한 머리나 다리 부분 등만을 따로 붙였다는 설이 있다. 후자의 방식이 더 어렵고 힘들었겠지만 병마용의 크기나 무게를 지탱하고 서 있기 위한 사정상 이쪽이 정설로 통한다.

정부의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품질관리를 위해서 제작소들은 모든 제작된 물건에 그 이름을 새겨야 했는데, 이 덕분에 역사학자들은 어느 작업소가 병마용의 인형들을 제작하는 데 동원되었는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완성된 토용은 계급과 역할에 맞춰서 당시 진나라 군사 진형(陣形)을 정확하게 따른 형태로 구덩이 속에 배치되었다.
파일:Terracotta_Army_Pit_1_-_12.jpg
병마용 제1호갱의 중무장 보병대.

병용은 키가 184 cm에서 197 cm로 큰 편인데, 장군병사보다 크게 만들었다. 병마용은 경무장 보병ㆍ중무장 보병ㆍ궁병ㆍ전차병ㆍ기병장교 등 다양한 병과 군인들을 표현하였다. 얼굴은 약 8가지 복제 틀을 사용해 제작하였는데, 기본형에 수염 등 세부적인 변형을 가해 하나하나가 전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발굴된 갱도 4곳 중 3곳에 모두 병용 8천여 점, 전차 130기, 말 520점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발굴된 것보다 더 많은 수가 아직 흙 속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external/www.chinanews.com/U86P4T426D107340F16470DT20120609194426.jpg
파일:external/www.chinanews.com/U86P4T426D107347F16470DT20120609195518.jpg
아직 채색이 남아있는 토용들.

원래는 실제 사람과 말을 모델로 채색되었으나, 수천 년이 지나 발굴될 때 외부 공기와 접촉하자 순식간에 옻칠 코팅층이 바스라지거나 탈색되었다고 한다. 제작 당시 채색하고 옻칠로 마감했는데, 오랜 세월 습기를 머금은 토양 속에 보관되다가 발굴 후 건조한 공기와 접촉하자 옻칠 코팅층이 건조되어 채색층과 함께 작은 알갱이로 수축했고, 이 알갱이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색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때문에 학자들도 퇴색을 막기 위해 병마용갱 발굴을 미뤄두었다가, 요근래 기술이 개발되어 다시 발굴을 재개하였다. 그 외에도 병마용들은 원래 모두 실물 크기 청동제 무기로 무장하였는데, 오랜 세월 동안 많이 파손되어 무기는 병마용보다는 적게 발굴되었다. 그래도 진시황릉의 알칼리성 토양과 유기물 입자가 적은 환경 덕에 꽤 잘 보존되었다.[17]

한나라 시대 몇몇 묘들에서도 토용들이 발견되었으나, 규모도 작고 인형의 완성도도 진시황릉의 토용보다 훨씬 떨어진다. 크기도 진시황릉과는 달리 사람이 한 손으로 집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인형 정도로 작다. 발굴된 한나라 시대 묘들이 전부 황릉이 아니긴 하지만, 진시황릉의 병마용과 비견되는 병마용을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국가 예산을 퍼부어야 하고, 세밀하게 만들려면 시간까지 많이 들여야 함을 감안한다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한나라 시대에 이런 토용을 만들 기술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진시황이 무덤 짓다가 국고를 탕진하게 만든 진시황릉의 전례에서 교훈을 얻은 한나라 사람들이 어느 정도 만족하는 선에서 끝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토용 말고도 마차의 1/2 크기 청동제 모형(동마차갱),[18] 진시황이 기르던 말(기마갱), 학, 자이언트 판다 등 진기한 동물 수십 마리(동물갱), 부식되지 않도록 돌 조각을 엮어 만든 실물 크기 갑옷과 투구(개갑갱) 등이 현재까지 발굴되었다. 기마갱과 동물갱에는 동물들을 돌보던 하인의 실물 크기 모형까지 함께 묻혀 있었다.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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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5.1.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의 고조모라는 설도 있다. 재야 고고건축학자 천징위안(陳景元)은 <병마용의 진상>이라는 책에서 근거 60여 개를 제시하며, 병마용의 실제 주인은 진시황의 고조할머니이자 진 소양왕의 모후로서 강력한 섭정을 펼쳐 '2천 년 전의 서태후(西太后)'라고 불리는 '진나라 선태후(宣太后)'[22]라고 주장했다.

천징위안은 일반 사병들도 갖췄던 투구를 진시황의 친위군단이 착용하지 않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의상 역시 빨간색과 보라색이 주조를 이루는데, 진시황은 검은색을 숭상하도록 법령으로 공포할 만큼 검은색을 선호했으므로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뒤 곧바로 화폐와 문자, 도량형을 통일하면서 전술운용을 용이하게 하고자 전차의 너비도 통일했는데,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차량들의 바퀴 너비가 일정치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용맹무쌍하기로 이름났던 당시 진나라 병사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무사용들은 수염을 기른 늙은이 형상에 우울하고 기운 없는 표정이란 점도 의문이라고 했다.
파일:external/pic.pimg.tw/1420963309-1032564525_n.jpg
1호 용갱에서 발견된 상방여불위(相邦呂不韋)라고 새겨진 꺾창[23]

하지만 대부분 고고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위 사진처럼 병마용갱의 1호 용갱에서 발견된 꺾창여불위의 이름이나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뒤에 설치한 관청 이름이 새겨진 점, 병마용갱의 바닥에 깔린 벽돌이 진시황릉 곁에서 나온 다른 부장품 구덩이의 벽돌과 동일한 점, 병마용갱 말고도 위에서 설명한 많은 부장품 구덩이가 진시황릉 곁에 있다는 점 등이 병마용갱은 역시 진시황릉의 부속시설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 채색 문제도, 원래 병마용갱의 토용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채색되었는데, 발굴 과정에서 사라졌을 뿐 색이 남은 일부 인형은 검은색으로 칠한 것이 많다. 천징위안이 보라색이라 주장한 색도 땅 속에서 변색된 것이며, 고고학자들은 칠할 당시에는 검은색이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천징위안이 주장한 투구 문제는 두 가지 설명으로 반박된다. 먼저, 진시황릉의 다른 부장품 구덩이인 개갑갱에서는 돌조각으로 만든 모형 갑옷과 함께 투구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병마용들은 전투에 돌입하기 전 전투준비태세를 갖춘 모습을 모형화한 것이라, 투구를 아직 쓰지 않은 모습을 형상화했으리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진나라 이후 한나라 시기까지도 무기, 도구의 주류는 청동기였는데, 청동제 무기로 베면 날이 부러지기가 쉬워서 무기의 대부분이 창 같은 찌르는 것이었다. 이에 근거리에서 머리에 칼 등으로 가격을 당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찌르기 공격이 집중되는 가슴 부위에는 갑옷을 착용하여 방어를 단단히 하는 반면, 투구는 구태여 착용하지 않고 대신 관모를 쓰는 정도에 그쳤다는 설명이다.

천징위안이 선태후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병마용갱 바로 옆의 아직 발굴되지 않은 대형 무덤 또한 선태후 시대 무덤 구조와는 다르고, 오히려 위에 나온 진시황의 자녀 무덤으로 추정되는 배장묘와 구조가 거의 같다는 점도 천징위안의 주장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정황 증거다. 진시황릉 주변에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진한대(秦漢代) 왕릉이 아직도 무수히 있다.

5.2. 후대 중국 황릉과의 비교

중국 역사상에서 상나라 시대부터 청나라 시대까지 제왕릉들을 비교하면 진시황릉의 능원이 가장 크다고 한다. 서한(전한)시대 황릉도 능원에 도시를 설립하여 유지했을 정도로 거대했으나 진시황릉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했고, 동한(후한)~수나라 건국까지 제왕릉은 정치ㆍ사회ㆍ경제ㆍ군사적으로 거대하게 짓기가 무리였으나 짓는 경우는 있었다. 허나 신왕조 건국이나 도굴전쟁 등으로 파괴되는 능묘가 많았다.

수나라 때도 문제 양견의 태릉을 제외하면[24] 황릉을 건설하지 않았고, 양제는 황릉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죽어서 부인과 시종이 묻어주었는데, 크기는 일반 민가 수준이었으나 후대에 3 m 정도 높여 주었다고 한다. 이후 당나라 시대에는 다시 진, 한을 본받아서 초대 황제 고조 이연소종애제 등 말기 황제를 제외하면 주로 거대한 산을 봉분으로 삼아 내부에 굴을 파서 여러 통로와 함정이 있는 방들을 만들어 부장품을 넣었다. 가장 넒은 능원은 당태종 이세민과 문덕황후 장손씨가 묻힌 구종산 소릉인데, 부장된 황족 관료만 2백 명에 가까울 정도로 크다. 그러나 현재까지 온전한 당나라 황제릉은 고종측천무후가 합장된 건릉뿐이고(산의 서쪽 절반을 파도 안 나와서 무기한 중지), 다른 능은 당나라 말기에 온도(溫韜)가 모두 도굴하였다.

송나라 시대는 규모는 작지만 한나라 때처럼 평지에 봉분을 올렸다. 건국 후 시간이 흐르면서 능묘는 화려해지고, 장례식에 동원되는 인원도 많아졌다. 요ㆍ서하ㆍ금나라 때도 규모는 한나라ㆍ당나라 때보다는 작으나 화려했다. 원나라 때에는 시조 칭기즈 칸에서 토곤 테무르까지 몽골 초원의 풍습대로 봉분이나 석각ㆍ가옥 담벽을 만들지 않았고, 위치도 추정만 할 뿐이다.

명나라 시대는 웅장하고 규모가 크지만, 진시황릉이나 서한ㆍ당대 황릉보다는 작았다. 난징에 묻힌 태조를 제외한 나머지 황제들은 수도 베이징 인근에 명십삼릉이라는 황릉 단지를 조성했는데, 장릉ㆍ정릉ㆍ소릉을 제외하면 능은전(사당)은 터만 남거나 부서진 채로 관리를 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다. 청나라 시대는 청동릉(베이징 동쪽 황실묘지), 청서릉(베이징 서쪽 황실묘지), 만주심양황릉군 등에 명나라 시대보다는 작아도 황릉 하나 하나가 지하 자금성이라 할 정도로 조각이 섬세하고 부장품도 많다. 그러나 중화민국 초기 도굴장군이라 불리던 쑨뎬잉이 순치제의 효릉을 제외하고[25] 청동릉 지역을 모두 도굴하였다. 청대황실능침도 자세히 보면 손실된 곳이 많다.



[1] 기념비 뒤의 산 전체를 황릉으로 사용했다.[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6] 병마용을 가리킨다.[7] 여기서 말하는 인어는 당연히 진짜 인어가 아니며, 듀공이다. 이 동물이 종종 뭍으로 올라와서 쉴 때 머리에 해초를 뒤집어 쓰고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해질녘에 멀리서 바라보면 꼭 반인반어의 소녀 모습과 같아서 인어의 모티브가 되었다.[8] 진시황은 자기 무덤의 위치나 구조가 알려지지 않도록 건설에 참가한 사람들을 죽였다. 그 때문인지 진나라 멸망 이후 긴 세월 동안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유방은 항우가 지은 죄를 나열하며 진시황릉을 도굴했다고 주장했지만, 프로파간다일 확률이 높다. 게다가 전근대 중국에서도 남의 무덤을 함부로 헤집는 것은 매우 질 나쁜 범죄로 여겼는데, 도굴꾼도 아니고 긍지 높은 사대부인 사마천이 진시황릉 내부에 들어갔을 리가 없다.[9] 도장은 귀족사회에서 고위 계층을 상장하는 물건이다. 부장품 도장으로 추정컨대 남자 중 한명의 이름은 榮祿(영록), 여자 중 한 명의 이름은 阴嫚(음만)으로 추정된다.[10] 제목은 진시황 본기지만, 진나라 멸망까지 기록하고 있다.[11] 아무튼 여산 인근에 황제의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만 구전되었을 뿐, 진시황릉은 그 후 2천 년 가까이 잊혀졌다. 항우가 진시황릉을 이미 도굴하고 파괴했다는 소문이 진시황릉의 보존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12] 섬서성 지대(황토고원)는 물을 구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유명해서 지금도 우물을 파는 곳이 있다.[13] 수천 년간 밀봉된 무덤이 급히 열렸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병마용의 도색이 바랜 것도 발굴 과정에서 갑자기 외부공기와 접촉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발견 당시는 문화대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문혁 당시 공자곽거병만력제주원장이나 항우 등 유명인물의 묘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당했다가 후에 복원되었다. 홍위병의 반달 행위는 1969년을 끝으로 사그라들었기 때문에 만력제의 무덤처럼 대대적으로 발굴했다가 파괴될 여지는 적었지만, 당시 발굴에 동원될 만한 고고학 전문가들이 "지식반동분자"로 몰려 대부분 수용소에서 '교육'을 받는 중이었던 데다가, 이런 인력을 양성할 만한 대학은 전부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비전문가들이 발굴하는 것은 홍위병이 저지른 반달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14] 사실 중국의 이런 태도가 특별한 것은 아니며, 한국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경주시 대릉원에 많은 미발굴 고분이 있지만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이후로는 대규모 발굴 조사는 하지 않고 있다. 고고학의 태동기였던 일제강점기에 졸속으로 발굴한 곳들을 제외하면 대한민국이 본격적으로 발굴한 대릉원 고분은 천마총황남대총 정도인데, 여기서 이미 많은 데이터를 얻었으니 남아있는 많은 고분들은 후세에 발굴 기술이 더 발달될 때까지 남겨두었다. 예를 들어 최대 규모의 신라 고분 봉황대는 무덤 위에 얽힌 나무 때문에 지금으로선 원형 훼손 없이 조사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한국이나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1990년대 초반 다카마쓰 고분 발굴사업에서 내시경으로만 구조를 확인하고 그 이상 발굴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발굴을 중단했다.[15] 1970년대 중국은 자동차는커녕 자전거가 사회인의 상징이었고, 텔레비전은 그야말로 최상류층 일부나 가질 수 있는 물품이었으니 경운기 1대가 결코 작은 보상이 아니었다.[16] 농담이 아니라 투탕카멘은 어린 나이 때문에 권력이 빈약했고, 무덤 또한 권력에 맞게 다른 파라오에 비해 매우 소박하다. 그 소박한 무덤이 거의 도굴되지 않고 원형대로 발굴된 것이 세기의 발굴이 된 것이다. 당시 중국 역사상 최강의 권력자였던 진시황은 이미 발굴된 무덤 주변만으로도 세계 최대이고, 당연히 부장품도 엄청날 것이다.[17] 청동기에서 나온 크롬은 따로 처리를 한 게 아니라 옻칠하다 묻은 것#으로, 청동 부분이 아니라 나무 손잡이 등에서 훨씬 많이 검출되었다.[18] 동주시대 이래로 천자의 수레는 6필 말이 끌었으므로, 여기서 발굴된 수레 2대는 고위관리나 황족의 것으로 추정된다. 각종 금, 은 장식품과 톱니바퀴 따위 부품을 비롯해 조각 수천 개로 부서졌으나 수년간 작업하여 복원하였다.[19] 꼭 중국뿐이 아니라,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에서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전시품을 만질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 있다.[20] 유물을 전부 다 발굴한 뒤, 발굴된 수많은 유물의 뒷처리와 보존 문제 또한 큰 걸림돌이다. 게다가 사마천의 사기에 진시황릉에는 도굴을 막기 위한 각종 함정들이 설치되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무턱대고 파들어갔다가는 자칫하면 인명 피해 발생에 이어 유물까지 손실할 수도 있다. 물론 피라미드의 예를 보면 하도 오래된지라 자연 파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외에도 수천 년 간 밀폐된 공간이 산소와 접촉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내부에 대량의 수은까지 들이부어져 있어 무작정 발굴하기엔 여러 모로 문제가 많다.[21] 토하라인의 후손이 위구르인이다. 물론 현재는 튀르크인한족, 몽골인들과 혼혈을 이루면서 동아시아인의 형질도 섞였고, 언어적으로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위구르어를 쓰고 있다.[22] 이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중국 사극이 미월전이다.[23] 왼쪽이 위쪽이다.[24] 태릉은 부장품이 처음부터 거의 없었다고 한다.[25] 부채와 신발밖에 없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