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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3:08:47

시황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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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과 어린 시절2. 재위기
2.1. 왕위를 잇다2.2. 실권을 되찾다2.3. 통일전쟁을 위한 체제 정비2.4. 천하통일을 이루다2.5. 백월정벌2.6. 제국의 통치2.7. 황제로서의 업적
3. 말년
3.1. 수은 중독?3.2. 미신 집착
4. 죽음과 사구정변

1. 출생과 어린 시절

기원전 259년 정월(음력 1월 15일), 조나라의 수도 한단에서 영이인[1]조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황제의 아버지 영이인은 진나라의 태자[2]가 된 안국군 영주(嬴柱)의 아들이었지만, 서자라서 보잘 것 없는 대접을 받고 장평대전 이전에 조나라의 인질로 끌려갔다.[3] 그러던 중 당시 사업차 한단에 와 있었던 거상 여불위의 주목을 끌어 후원을 받으며, 안국군의 정부인인 화양부인을 포섭해 안국군의 후계자로 삼는다는 약속을 받았다. 얼마 뒤 영이인은 여불위의 집에서 조희를 만나게 되었고, 여불위에게 부탁해 조희를 얻었다. 그리고 영이인과 조희 사이에서 자녀가 생기게 되었고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훗날의 시황제인 '정'이었다.

기원전 257년, 정이 3살 때 증조부이자 진나라의 명군이었던 소양왕 영직이 장군 왕의(王齮)를 보내 장평대전 때 함락시키지 못했던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조나라의 효성왕은 진나라의 인질인 영이인을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나, 여불위가 600금을 뇌물로 써가며 영이인만 간신히 구출했다. 정과 조희 모자는 한단에서 탈출하지 못했지만, 조희가 조나라의 호족 집안 출신이라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한편 어린 시절, 정은 연나라에서 볼모로 온 세자 연단과 친하게 지냈는데[4] 이때 친분을 계기로 연단은 정이 진왕이 된 후 진나라의 볼모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사이가 틀어져서 탈출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251년 정이 9살 때 증조부 소양왕이 승하하고, 조부인 안국군이 효문왕으로 즉위하자, 아버지 영자초[5]도 과거 약조대로 태자가 되었고, 조나라도 태자에 오른 영자초를 두려워해서 그의 가족인 조희와 정을 진나라로 보냈다. 그리고 효문왕이 즉위한 지 3일 만에 병사하고, 태자인 영자초가 진나라의 장양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정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나라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초의 후원자였던 여불위는 승상이 되어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1.1. 출생의 비밀?

呂不韋取邯鄲諸姬絕好善舞者與居,知有身。子楚從不韋飲,見而說之,因起為壽,請之。呂不韋怒,念業已破家為子楚,欲以釣奇,乃遂獻其姬。姬自匿有身,至大期時,生子政。
여불위는 한단 땅의 여자 중에 매우 아름다우며, 춤을 잘 추는 여자를 얻어 함께 살다가 임신한 것을 알았다.
영자초는 여불위와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보고 반하여 일어나 장수를 기원하며 그녀를 청했다. 여불위는 처음에는 노했으나
이미 영자초를 위해 집안이 무너져도 진기함을 낚으려는 일을 생각해 마침내 첩을 자초에게 바쳤다.
그녀는 스스로 임신을 숨기고 만삭이 될 때에 이르러 아들 정(政)을 낳았다.
《사기》 <여불위열전>
시황제의 어머니인 조씨[6]는 원래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던 여자인데, 이후 여불위가 진나라 승상까지 된 것을 보고 원래 시황제는 조씨가 임신했던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주요 역사서에서도 이러한 것들을 반영하는 부분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사기》<진시황본기>에서는 시황제가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적었으나 장양왕이 생부라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또한, 반고의 《한서》, 배사의 《사기집해》, 사마광의 《자치통감》등에서 모두 진시황을 '여정'(呂政)이라고 적고 있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진시황 여씨설에 대해 진나라의 권위를 깎아내리기 위해 한나라측에서 지어냈다고 보기도 한다. 일단 이 근거는 모두 한나라 시절 펴낸 사서인 <사기>와 <한서> 가 출처이며, 이 당시 진나라에 대한 반감이 이렇게 진나라 왕통에 대한 폄하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란들은 완전한 증거를 확인할 수가 없으니 역사가 존재하는 한 논쟁은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황제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든 역사에서 바뀔 것은 하나도 없다.

2. 재위기

2.1. 왕위를 잇다

영자초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당시 진나라 왕이자 시황제의 증조부였던 소양왕이 승하했다. 효문왕(=안국군)이 그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불과 3일만에 승하하고 말았고[7] 이를 이어 영자초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장양왕이었다. 그러나 장양왕도 3년 만에 승하하는 바람에 정이 13살에 진나라의 왕이 되었다.

2.2. 실권을 되찾다

아직 진왕 정의 나이가 어렸던 탓에 당시 장양왕의 후원자로서 막대한 권력을 누렸던 승상 여불위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상방(相邦)[8]의 직위에 올랐으며, 왕으로부터 아버지와 같다는 '상보'(尙父)[9]의 칭호까지 얻었다. 이토록 강력한 권세를 얻은 여불위는 아직 나이가 어린 시황제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섭정이 되었다. 때문에 진나라의 실권은 사실상 여불위의 손 안에 들어갔다.

여불위가 상방의 지위를 얻은 이후부터 과거에 자신의 첩이었던 정(시황제)의 어머니 조태후와 간통을 했다고 한다. 여불위는 이 사실이 들통날까봐 두려워했으나 조태후가 여불위를 사랑하여 늘 불러 정을 나누려 했으므로, 결국 가짜 환관인 노애(嫪毐)를 조태후 옆에 붙여 시중들게 했다. 노애는 정력이 출중해서 조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로 조태후는 과연 여불위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간통이 길어지면서 조태후는 노애의 아이를 두 명이나 낳고 말았는데, 여기에 더하여 노애와 조태후는 아이들을 감추어놓고 키우면서 정을 몰아내고, 그들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모략을 꾸몄다.

그러나 정이 성인이 되었을 쯤에 이들의 행각은 곧 발각되었다. 당시 노애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던 덕택에 그의 성격은 점점 더 거만해졌다. 하루는 연회에서 술주정을 하다가 어느 신하가 그의 거만한 태도를 꾸짖자 도리어
"내가 왕의 계부인데 두려울 게 뭐냐?"
는 말까지 듣고 말았다. 모욕을 당한 그 신하가 화를 터트리며 나가는 것을 본 진왕 정이 그의 분개한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야기를 들은 정은 노애를 몰래 조사하여 모든 진상을 파악하고 말았다.

노애는 조태후와의 불륜이 드러나자 최후의 발악을 하여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정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를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정이 곧 창문군창평군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반격에 나서게 되니, 함양 내에서 교전까지 벌인 끝에 노애가 패배하여 달아났다.(노애의 난) 승리한 정은 조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낳은 아이들, 즉 이부동생들을 자루에 넣고 때려 죽였으며, 달아난 노애를 붙잡아 사지를 찢는 거열형에 처한 뒤 그 삼족을 멸했다. 이후 모후인 조태후를 싫어하게 되어 그녀를 유폐시켰다. 하지만 신하들의 간청으로 조태후를 다시 함양의 왕궁으로 불러와 모셨다.[10]

한편 정은 실권자인 여불위도 노애와 조태후의 스캔들을 들어 처벌하려 했으나, 여불위를 따르는 신하들과 식객들이 많았기 때문에 벼슬을 빼앗고 낙양으로 유배보내는 정도로 그쳤다. 그리하여 한때 왕과 견줄 만한 세력을 지녔던 여불위의 권세는 무참히 꺾여버렸고, 실의에 빠진 여불위는 곧 자살했다. 결국 정은 노애와 조태후 그리고 여불위까지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짓누른 후, 나이 22세에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비로소 친정 체제를 굳혔다.

2.3. 통일전쟁을 위한 체제 정비

진(秦)나라는 진목공 치세에는 춘추오패의 하나로 잠시 패업을 이루긴 했으나, 춘추시대 대부분을 서방에 치우친 변방국으로 간주되었다. 실제 주민의 반 이상이 강족 같은 오랑캐였다는 연구도 있다. 하지만 진목공이 승하후 바로 동쪽에 있는 진(晋)나라가 진문공의 치하에서 엄청난 국력으로 확장하여 그 이후 200년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진(秦)나라는 지지부진했다. 마침내, 진효공(재위 기원전 361-338)의 치세에 상앙을 재상으로 기용하여 법가사상을 공식적으로 도입하였고, 그 이후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며 무섭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때 진나라의 동부에 있던 초강대국 진(晋)나라가 춘추시대 말기에 삼진(조, 한, 위)으로 분할되면서, 비로소 진(秦)나라는 전국시대 최강국으로 발돋움한다.
효공의 아들 진혜문왕은 왕을 칭하기 시작했고 명재상 장의를 기용하여 나머지 6국의 합종(동맹)을 방해하는 한편, 진령산맥을 넘어가 이민족이 지배하던 파촉(현재의 쓰촨성-충칭시)을 정복하여 영역을 배가하여 천하통일의 초석을 놓았다. 하지만 진나라의 국력에도 불구하고 내부사정은 복잡했으며, 귀족세력이 연합하여 왕권에 계속 저항했다. 그리하여 천하통일을 위한 전쟁을 할 수 있을 만큼 내부적으로 안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개별 6국의 국력은 진나라에 미치지 못했으나 진나라가 서진을 시작하면 이들은 뭉쳐 진나라에 대항했기 때문에 천하통일은 불가능해보였다.

진왕 영정은 이런 끊없는 전란의 시대를 완전히 청산할 것을 결심했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국력이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10년간 큰 전쟁을 자제하고 아래와 같은 조치로 국력의 내실을 기한다. 영정이 금수저이고 진나라가 전국시대 최강국이기는 하지만, 아래와 같이 진나라의 체제를 통일전쟁에 적합하도록 변모시킨 공은 분명히 영정에서 비롯되었으며, 흔히 잘못 알려진 것처럼 선대에서 물려받은 군사력으로 통일을 이룩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렇게 12세에 즉위하여 약 10년간 진나라의 국력을 배가시킨 영정은 23세가 되는 기원전 236년부터 본격적인 통일전쟁을 시작한다. 자세한 사항은 진(영성)/통일 과정 참조.

2.4. 천하통일을 이루다

정은 상방 여불위마저 제거하면서 마침내 진나라 최고의 실세로 떠올랐으며, 잠시나마 실추되었던 왕권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신을 평생토록 보좌할 이사를 만났고, 그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조부 소양왕이 쌓은 기반으로 나머지 6국을 통일할 계획을 세웠다. 우선 정은 모사인 울료의 주장대로 6국의 대신들을 미리 매수하고, 6국 사이를 이간질했는데, 이는 실제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조나라의 간신 곽개 등이 명장 이목의 활동을 저지하여 진군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싸울 수 있었고, 6국이 서로를 믿지 않아서 도우려 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대대적인 원정을 벌일 수 있도록 군비를 꾸준히 증강하여 함양 일대에 정국거(鄭國渠)라는 운하를 파고, 촉 지방에는 도강언을 건설했다. 이로 인하여 안 그래도 부강했던 진나라는 6국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과 병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정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여 진나라와 인접했던 국가들, 즉 삼진(한•위•조)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기원전 230년한나라를 장군 이 멸망시켰고, 그 다음에는 삼진 중에 가장 강했기에 동방 진출을 위해 반드시 무너뜨려야 했던 조나라기원전 228년 장군 왕전이 수도 한단을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기원전 225년에는 왕전의 아들 왕분위나라를 수공으로 쳐서 대량을 함락시키고 멸망시켰다.

그 뒤 이신의 주장대로 200,000명의 군사로 초나라를 공격했으나 초나라의 명장 항연에게 격파당했다. 이후 노장 왕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진나라의 총병력인 600,000명으로 다시 공격해 기원전 223년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궁지에 몰린 항연은 결국 자결로서 생을 마감했다. 《사기》에 의하면 당시 초나라의 군사도 400,000명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로 보인다. 다만 진나라만큼의 중앙집권체제가 없었고, 각 귀족들의 사병이라는 성격이 강했기에 진나라에게 패배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정의 조나라 볼모 시절 친구였고, 진나라의 볼모였다가 탈출한 연나라의 태자 단(丹)은 진나라의 이런 정복 활동을 우려해서 형가를 보내 정의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이 암살 미수 사건으로 격노한 정은 이를 빌미로 연나라를 맹공했다. 동북 변경인 요동까지 도망간 연나라 왕 연희는 아들 연단의 목을 잘라서 바치면서까지 용서를 빌었으나, 정은 거부하고 집요하게 추격해서 왕분이 연나라 왕을 사로잡아 서주 창건 때부터 이어져 온 연나라는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했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제나라를 쳐서 왕분이 제왕 전건의 항복을 받아내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재위 27년인 39세때, 정복을 시작한 지 약 10년 만에 정은 광활한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엄청난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시황제의 6국 정복 과정)

그런데 시황제가 중국의 모든 영토를 완전히 병합한 것은 아니었다. 전국시대가 끝난 후에도 엄연히 위(衛)나라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시황제는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12], 스스로 위(衛)를 야왕(野王)으로 옮겨놓고도 끝까지 멸망시키지 않았고, 2세 황제인 호해가 위나라의 마지막 군주였던 각을 서민으로 만들면서 완전히 멸망시켰다. 다만, 이 시기 위(衛)는 작은 고을 하나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진시황의 통일이 완전한 통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는 없다.

2.5. 백월정벌

진시황의 또다른 업적이지만, 천하통일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만약 진나라의 백월정벌이 없었다면 장강이남의 현재의 남중국은 현재의 동남아와 마찬가지로 중국 문화권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천하(당시는 장강이북)를 통일한 진나라는 장강 이남의 영토획득을 목표로 대규모 원정을 실시했다. 이곳은 초나라가 건설했던 장강변의 몇몇 도시를 제외하면 거의 개척이 안된데다가 밀림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영역 안에는 여러 이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을 통칭해 백월(百越)이라고 하는데, 이는 특정 민족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고 百이라는 말이 붙어 있듯이 여러 남방민족을 통칭해서 말하는 것이다. 월은 원래 장강 하류(현재의 절강성지역)에 있던 남방민족을 뜻하는 고유명사였지만 이후에는 남방민족을 통칭하는 명사가 된다. 즉 현대의 베트남인들의 조상들도 있지만, 이후 2000년 후인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까지 한족과 별개의 정체성을 지니던 여러 남방민족의 조상(묘족, 이족, 투자족 등등..)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황제는 제나라를 멸하고 전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 도수(屠睢), 조타 등의 장수들에게 명해 50만의 병력으로 장강을 건너가 백월을 토벌하라고 명했다. 원정군 대부분은 항복한 6국출신의 병사로 북방인들이었다. 이것은 후대에 진나라의 지배에 반항할 수 있는 병력을 유용하게 소모시키려는 계책이기도 했다.

이들은 5개부대로 나뉘어 남방으로 쳐들어가 현재의 푸젠성, 광둥성, 광시성까지 진출하여 중국인들의 영역이 처음으로 남중국해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백월족의 저항도 만만찮았고, 거기에 북방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남방의 전염병까지 돌아서 원정군 50만명중에 30만이 전사하거나 혹은 병으로 죽었다. 진나라군은 이렇게 엄청난 피해를 보면서도 현재의 베트남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원정군 장수들은 병사들이 정착하는데는 같이 살 여인이 필요하다고 북방에서 여인을 보내달라고 진시황에게 상주했지만 진시황은 매우 적은 수의 여인만 보냈고, 원정군 상당수는 백월 여성과 결혼하게 된다.

이 원정군은 계속 남진하는 도중에 진시황은 붕어하게 된다. 그러자 원정군 총사령관이던 조타는 현지에서 독립하여 현재의 하노이에서 남월을 세웠다. 이 나라는 진나라가 곧 망하고 중원에서 초한대전이 벌어지자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 현재의 광동성까지 진출한다. 하지만 곧 대륙을 통일한 한나라에게 칭신하면서 책봉을 받지만, 실제로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가 93년간 지속되었으나 이를 고깝게 보던 한무제의 원정으로 고조선처럼 멸망한다. 한나라는 이곳에 교주를 설치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개척이 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계속되다가 500년후인 오나라가 개척을 시작하게 되며, 북방 오랑캐에 서진이 망하고 동진이 이곳으로 대피해오고 300년이 지난 남북조시대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완전하게 개척이 되어 이후 중국의 경제중심지가 된다.

2.6. 제국의 통치

천하통일 이후 정은 기존의 전국시대 군주의 호칭인 진왕(秦王)을 대체할 호칭을 찾았다. 이에 신하들은 '태황'이라는 호칭을 주장했으나 시황제는 그 주장을 물리고, 태황에서 '황'만을 남긴 뒤 신을 뜻하던 상고의 호칭인 '제'를 붙여 황제란 칭호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진나라의 첫 번째 황제, 즉 진 시황제가 되었다.

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의 명령을 '교'(敎)가 아니라 (詔)로 바꾸고[13], 천자의 자칭을 종전의 '고'(孤)나 '과인'(寡人) 대신 (朕)으로 바꾸었다. 이전까지 '짐'은 고대 중국어의 1인칭 대명사 중 하나였는데[14] 시황제가 '짐'을 천자의 전유물로 바꾼 것이었다. 이때 시황제가 확립한 '황제'의 칭호와 '조'와 '짐'의 용법은 후대 왕조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또 시황제는 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것을 금지했다. 시황제가 천자의 시호를 올리는 것을 금지한 이유는 시호라는 것이 군주가 사망한 후에 후대 왕이나 신하들이 생전의 공과 과를 평가하여 정하는 것이라서, 천자에게 시호를 올릴 경우 '감히 아들(새로 즉위한 군주)이 아버지(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고, 감히 (살아 있는)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시황제는 이것을 굉장히 무엄하다고 생각해서 폐지했던 것이다.[15] 그래서 진나라의 황제는 다른 왕조와 달리 시황제(첫 번째 황제), 2세 황제(제2대 황제) 이런 식으로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관습은 시황제의 아들 이후 두 번째 통일 왕조인 한나라때 바로 부활했다. 진시황이 죽은지 고작 15년 후에 한고조 유방이 죽으면서 시호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시황제라는 칭호는 마치 패왕처럼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2.7. 황제로서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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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시황제는 본격적인 제국 통치 사업에 몰두하면서 갖가지 개혁정책을 내놓았다. 전체적으로는, 춘추전국시대 550년 내내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었던 정체성과 체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우선 군현제를 실시했는데, 이전에 서주가 사용한 봉건제와는 그 근본이 달랐다. 봉건제는 국가 수장인 왕이 중앙을 통치하되, 다른 부분은 쪼개어서 동성인 희성 왕족이나 이성 공신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형식으로써 중앙 권력에 비해 지방 정권이 비대해질 수 있는 구조였다. 시황제는 이러한 봉건제를 폐지하고, 나라를 의 행정 지역으로 나눈 후, 함양의 중앙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하게 다졌다. 이 군현제는 진나라의 멸망과 초한전쟁을 거치면서 사라졌지만 전한고조 유방의 치세때 군국제로 반쯤 부활했고, 개국공신인 숙청(고조), 외척 여씨의 난 진압(제5대 한문제), 근친인 유씨 황족들이 일으킨 오초7국의 난 진압(제6대 한경제) 등을 거쳐 제7대 한무제의 치세때 정식으로 부활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좀 더 세분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는지 주-군-현 3단 체계로 개편되어, 원나라 이전까지 그러니까 남송 시기까지 약 1,300년 가까이 중국의 행정제도가 되었다.

이러한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었던 법가 사상을 중국 전역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등 사상 개혁도 시도했다. 이때 서적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여 진나라의 역사책과 법령집, 농사, 천문, 점술, 의학 등 실용 지식에 관련된 서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서들을 없앨 것을 명령했다.(분서) 이 과정에서 유학자들과 충돌했고, 이로 말미암아 갱유와 같은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분서갱유)[16][17] 게다가, 이러한 급진적인 사상 개혁은 부작용이 컸는데, 법가의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이 중국 전역의 통치에 쓰이게 되자, 지역적으로도 맞지 않은 법률과 형벌에 익숙하지 못했던데다가 혹법이어서, 6국의 유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결국 이는 진나라에 대한 증오로 이어져 진시황 사후 각지에서 반진 반란이 들불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그 외에도 시황제는 옛 6국의 정체성을 지우고, 통일된 중국을 만들기 위해 여러 정책을 펼쳤다. 옛 6국이 각자 만들었던 장성과 요새를 부수라고 명령했으며, 하천의 제방을 터서 험준한 지형들을 평평하게 만들어 만에 하나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방어하기 어렵게 했다. 또한 격렬했던 전국시대를 거치며 쌓여있었던 무기를 녹여 없애게 했고, 수도 함양으로 6국의 부호와 유력자를 이주시키는 등 지방 세력의 약화를 추구했다.

천하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각지의 나라마다 화폐와 서체가 달라 서로 간에 교류하는 데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여겨 천하의 화폐반량전으로, 서체소전체로 통일했다. 이후 물건의 치수나 길이를 재는 도량형과 수레바퀴의 폭 등도 하나로 통일했다. 이 모두가 통일된 광대한 중국 전역의 통치를 원활히 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특히 서체의 통일은 단순히 교류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문서에 기반한 중앙집권적인 행정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보고를 오직 문서로만 하도록 하고, 황제의 명령이 관료제의 피라미드를 따라 전국에 전달되도록 하는데 있어 공문서의 서체 통일은 필수였다.

또한 시황제는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수차례 벌였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아방궁[18]여산릉을 건설하여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는 한편, 운하를 파서 수로를 통한 교역과 물품의 운송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황제의 명령을 지방 곳곳에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직도[19]를 건설했다. 특히 언제나 중국에 위협이 되어온 흉노의 침략을 방어하고자 기존 7국의 성벽들을 보수해서 긴 성벽을 건설했고, 진나라의 멸망 이후에도 여러 나라들이 이 성벽을 보수, 증축, 신축하여 만리장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민심이 크게 악화되었다.

3. 말년

이런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들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또 폭압적으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부작용이 심했고 진나라 이외에 옛 6국 출신 백성들의 불만이 대단했다. 우선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었던 법가 사상에 기초한 가혹하고 무거운 통치는 원래 진나라였던 지역 외에 나머지 정복당한 6국의 백성들에게는 지옥이었고, 이러한 까다로운 법률과 가혹한 형벌 때문에 민심은 피폐해져만 갔다. 당시 진나라의 신분제는 20등작이었는데, 전장에서는 수급 하나마다 한 계급씩을 올려줬고, 죄인은 계급에 따라 감형이나 형벌을 계급 강등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진나라의 백성들이야 지난 정복전쟁에서 획득했던 군공과 계급이 있었지만, 정복당한 6국의 백성들은 진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바가 없었기에 당연히 작위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6국의 백성들은 안 그래도 가혹한 제도와 형벌에 피지배민으로 그대로 노출되면서 차별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산릉 건설, 흉노 정벌, 만리장성 건설 등등에 수십만 명의 인력을 동원시켜 국력을 낭비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잦은 인력 동원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진승, 오광이나 유방의 경우처럼 민중의 엄청난 반발을 샀고, 이러한 점들이 진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는 농민 반란의 씨앗이 되었다. 이 때문에 황태자인 장남 부소마저 보다 못해 과도한 사업들을 중단하고 민생을 돌보라는 간언을 했지만 시황제는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부소에게 화를 내며 그를 몽염이 있는 만리장성 건설 현장으로 추방해버리는 등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후대에 패업을 이룬 군주들 가운데 명군이라 불린 이들이 전란 직후 민심을 수습하고자 조세와 부역을 경감하고, 무리한 사업을 줄여 국고를 절약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 것과 대비되는 것이었다.

3.1. 수은 중독?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시황제 치세 말년의 기행과 폭정, 난치의 행태는 그가 중장년부터 꾸준히 복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수은 중독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있다.

수은에 장기간 노출될 시 우울증, 의욕 상실, 졸음 등 정신 장애를 동반하며, 심할 경우 환각, 정신착란, 기억 상실로 지능이 극도로 떨어진다. 즉 뇌가 망가진다.

따라서 '의욕적인 개혁군주, 유능한 정복군주'의 모습을 보이던 치세 전반부와는 달리, 암군의 모습을 보여 황릉 건설에 천문학적인 국가 예산을 쏟아붓고, 불로초를 찾아 다니느라 국고를 탕진하며[20], 각종 미신에 빠져 돈과 시간을 탕진하는 치세 후반부는, 시황제가 이미 중증 수은 중독의 증세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황제가 붕어할 때의 나이인 50세는 당시 성인 남성의 평균 수명(40세 근처) 으로 보면 오히려 장수한 나이로, 딱히 요절이라고 보기 힘들다. 또한 여산릉의 건축은 진시황이 즉위 시작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수은중독설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만리장성이나 아방궁의 건축도 당시 사정을 보면 아주 비이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21] 또한 진시황은 사망할 때까지 계속 수많은 문서를 결재하고 전국을 순행하면서 다녔기 때문에 수은중독에 의한 정신문제를 겪었다는 설 자체가 신빙성이 의심된다. 이는 진시황릉을 완전히 발굴해서 그의 유해를 부검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문제다.

3.2. 미신 집착

(중략) “진인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습니다. 구름을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합니다. 지금 주상께서 천하를 다스리시지만 욕심 없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셨습니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머무시는 궁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불사약을 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에 시황은 “짐이 진인을 흠모해왔다. 이제부터 짐이라 하지 않고 ‘진인’이라 부르겠다”라고 했다. 바로 명을 내려 함양 부근 200리 안에 있는 궁관 207곳을 구름 다리와 회랑으로 연결하고, 휘장, 종, 북, 미인들로 채우되 모두 등록된 각자의 부서에서 함부로 옮기지 못하도록 했다. 황제가 행차하여 거처하는 곳을 발설하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사기》 <진시황본기>

말년에 들어 시황제는 미신에 집착하여 대규모 국책 사업으로 국력을 낭비했다. 대표적인 것이 여산릉으로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즉위 직후부터 짓기 시작해서 천하통일 이후에는 700,000명(총인원으로 추정)을 동원해 수십년 동안 제국에는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 초대형 무덤을 만들었고, 결국 죽을 때까지 완성시키지 못했다. 그 외에도 시황제는 '호' 때문에 망한다는
망진자호야
(亡秦者胡也)
라는 점쟁이의 점괘[22]를 믿고 수십만 명을 동원해서 흉노를 정벌하고, 만리장성을 쌓아 국력을 낭비했다. 또한 불로불사에 집착해 사기꾼들에게 잡초를 사들이거나, 고가인 경면주사[23]수은을 사는 등 국고를 낭비하고, 최후에는 홍의동자 꿈을 꾸고, 꿈속의 홍의동자가 자신의 나라를 빼앗을 거라는 해몽을 믿으며 순행길에 올랐다가 사구에서 병사하는 등 미신에 푹 빠져 버렸다.

시황제의 미신에 대한 집착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불로초다. 점차 나이가 들어가던 시황제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불로불사에 집착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갖은 사기를 당하며 재정을 낭비했다. 특히 서복이라는 사기꾼이 동해 바다에 살고 있는 신선으로부터 불로초를 구해오겠다며 뻔히 보이는 사기를 쳤는데도 시황제는 그대로 속아 넘아가 서복에게 엄청난 양의 재물과 동남동녀들을 딸려보내 주었던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제주도 서귀포시의 이름도 시황제의 불로초를 찾아 온 서불의 전설에서 나온 지명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사기꾼들이 돈을 노리고 불로불사의 약을 구해오겠다면서 시황제에게 돈을 뜯어 달아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시황제는 늘 속아넘어갔다.[24]

시황제는 암살의 위험을 두려워해[25] 환관 조고가 없이는 누구도 자신을 만날 수 없게 했고, 그 탓에 조고의 권력이 비대해져, 통일에 큰 공을 세우고 법률 체계를 만든 이사마저도 조고에게 아첨해야 할 정도였다.

4. 죽음과 사구정변

말년에 불로초 찾기 대모험과 같은 삽질을 하던 시황제는 자신이 제패한 중국의 천하를 둘러보고자 여러 차례에 걸쳐 전국 순행을 단행했으나, 제5차 순행 도중에 병에 걸려 회복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기원전 210년 7월 사구[26]에서 병사하면서 약 50년 동안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야사에 따르면, 평소에 미신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시황제가 낮잠을 자던 도중, 하늘에서 해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곧바로 홍의동자청의동자가 나타나 서로 그 태양을 가지기 위해 싸웠는데, 홍의동자는 청의동자에게 수 차례 두들겨 맞아 쓰러져도 일어나 단 한 번의 일격으로 기어이 청의동자를 물리쳤다. 시황제가 홍의동자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자,
"나는 백제[27]의 아들이며, 이후 400년 왕조의 기틀을 다질 자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사구에서 시황제가 붕어한 이후, 그의 유서로 인해 멀쩡한 장남 부소몽염과 함께 처형되었고,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호해가 제위를 차지하는 바람에 영성 조씨 황족들이 학살당하고, 진나라가 단명하고 말았다.(사구정변) 이 때문인지 호해가 이사조고 등과 짜고 유서를 위조했다는 소문이 호해의 즉위 직후부터 돌아서, 진승·오광의 난 등 장자 부소를 사칭한 반란이 일어났고, 한나라의 건국 이후 공식화되어서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해 정설이 되었다.

그러나 측근들이 정말로 유서를 위조했다고 하더라도 대체 그들이 유서를 위조했는지의 여부를 사마천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점이 남는다. 2세 황제의 바보짓 때문에 시황제 같은 사람이 정말 2세 황제를 후계로 삼았을 리가 없다고 여긴 사마천이 떠돌던 낭설을 믿어 버렸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사마천이 이 기사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또다른 설로는, 사마천이 《사기》를 쓰던 시기에는 모두가 저 밀담에 대해서 당연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이라 따로 출전을 적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고, 혹은 이사가 형을 받으면서 모든 걸 불었다는 의견도 있다. 단지 사마천이 따로 적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들 호해와 관련되어 한 가지 민간 설화가 전해지는데 위에서 언급한
"진나라는 호에게 멸망할 것이다."
(亡秦者胡也)[28]
라는 점괘가 사실은 이민족(胡)이 아니라 호해 때문에 진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다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오랑캐에게 멸망할 줄 알아서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되려 나라는 돌보지 않고 놀기만 하는 무능한 아들인 호해 때문에 진나라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1] 훗날의 장양왕[2] 왕위 계승자[3] 다만 안국군의 정처인 화양부인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안국군의 자식들은 전부 서자였다. 즉 이인은 그의 어머니가 안국군의 총애를 얻지 못해서 대접이 별로였던 것이다.[4] 출처 - 사마천, 《사기》 <자객열전>[5] 자초(子楚)는 '초나라의 아들'이란 뜻이었다. 영이인은 진나라로 돌아간 뒤 화양부인의 권유로 이름을 자초로 개명했는데, 화양부인은 초나라 출신이었다. 여불위의 책략으로 영이인은 화양부인을 어머니 모시듯 끔찍이 아꼈고, 이에 감동한 화양부인이 이름을 새로 내려 준 것이었다.[6] 훗날 왕후가 되면서 조희라고 불린다.[7] 소양왕이 죽은 지 3일 뒤에 바로 승하한 건 아니고, 정식으로 즉위하기 전 그 사이에 추모 기간이 몇 달 있었다.[8]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무기에는 '상방'(相邦)으로 표기되어 있다. 후대에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한고제 유방의 이름인 방(邦)의 피휘를 하기 위해서 '상국'(相國)이라고 표기했다.[9] 여기서는 父를 '보'라고 읽는다.[10] 여담으로 이 사건 때문에 시황제는 어머니보다 할머니인 화양부인과 더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11] 이런 세부병과의 군장과 복식은 병마용에 모두 나타나 있다.[12] 주나라의 대를 잇게 한다는 의미로 존속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13] 황제의 명령을 가리키는 또다른 글자 중 하나인 '칙'(勅 또는 敕)은 이때 도입되지 않았고 후대에 추가되었다.[14] 그래서 시황제 이전 시대의 글을 인용한 것을 보면 보통 사람이 스스로를 '짐'이라고 부르는 예들을 자주 찾아 볼 수 있다.[15] 전부 《사기》 <진시황본기>에 나오는 얘기이다.[16] 시황제는 분서갱유로 악명을 떨쳤는데, 이후 중국 역대 왕조에서도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사상과 서적에 대한 탄압은 자주 벌어졌다. 특히 청나라만주족에 대한 비판을 엄중히 다스린 문자의 옥이 유명하다. 한편 진나라 시절의 기록이 전해져오지 않는 것은 분서갱유보다는 오히려 함양을 불태운 항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17] 아무튼 이렇게 기록들이 사라지자 한나라 건국 이후 이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문제는 이것이 과거의 기록과 얼마나 일치하는가? 였다. 그래서 이를 연구하는 학문 풍토인 훈고학이 나타났고, 주희가 확립한 성리학이 나타나는 남송때까지 유학의 주류가 되었다.[18] 단, 고고학적 발굴 결과 추정 터만 있고, 건물의 흔적이 없어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류 의견이다. 《사기》에 언급된 규모도 500*100m로 황궁치고는 매우 작다.[19] 진직도(秦直道)라고 불리는 이 군사용 도로는 총길이가 700㎞를 넘고, 폭은 대체로 23~27m지만 가장 넓은 곳은 47m나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 끝은 만리장성이 위치한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바오터우(包頭)시 주위안(九原)이었고, 남쪽 끝은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咸陽) 부근의 산시성 춘화(淳化)현 베이간취안궁(北甘泉宮)이었다. 직도는 진시황의 지시에 따라 몽염의 지휘하에 300,000명의 군인이 동원되어 2년 6개월 만에 완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도로는 당시 군사용은 물론 무역로 및 문화 전파로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으며 한나라와 삼국시대때의 조위, 통일제국인 서진 이후까지 주요 교통로로 쓰였다고 한다.[20] 장성 건설과 흉노 정벌은 그나마 외적을 막는다는 명분이라도 있지, 황릉 건설에 대규모 예산을 쏟아부은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다.[21] 바로 다음 왕조인 한나라가 한무제의 대원정 전까지 흉노에 계속 털린 것을 보면 만리장성 건축은 당연히 필요했을 것이고, 아방궁의 경우도 단순히 황제의 거처가 아니라 관공서까지 딸린 것으로 통일제국에 걸맞게 궁전의 크기를 늘릴 필요는 분명이 있었다.[22] 이 '호' 자를 오랑캐 말고 제2대 황제였던 호해라고 해석한다면 적중한 예언이 되는데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선 진시황이 저 '호' 자가 호해를 뜻하는 줄 몰랐으니 다행이라고 했다.[23] 수은 화합물로, 도장의 인주와 부적을 그릴 때 사용한다. 현재 시세로는 20g에 약 15,000원 정도 한다. 참고로 황금은 순금 기준 한 돈(3.75g)에 대략 300,000원 선에서 거래된다.[24] 당시를 다루는 소설에서는, 무덤을 만든 이유가 불로불사와 연관된 또 다른 미신의 일환이라는 설정을 쓰기도 한다.[25] 실제로 기록에 남은 암살 시도만 세 번이었다. 즉 형가, 고점리, 장량창해 역사였다.[26] 沙丘 :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평향현(平鄕縣) 부근이다.[27] 百帝, 서쪽의 방위신[28] 망진자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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