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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5 12:30:57

조효성왕

조(趙)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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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169E1> 조(趙)나라 3대 왕
효성왕
孝成王
영(嬴)
조(趙)
단(丹)
아버지 조혜문왕(趙惠文王) 조하(趙何)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245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265년 ~ 기원전 245년

1. 개요2. 즉위 후에 일어난 사건
2.1. 재위 초기2.2. 장평대전2.3. 모수의 도움으로 포위가 풀리다.2.4. 연나라와의 대립
3.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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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8대 국군, 3대 왕, 조씨 22대 종주. 이때까지는 조나라의 국력이 꽤나 유지되었지만, 장평대전에서 대패해 조나라의 45만 정병을 잃어 국력이 쇠퇴하였다.[1]

2. 즉위 후에 일어난 사건

2.1. 재위 초기

조 효성왕 원년(기원전 265년),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했다. 그리하여 3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그리하여 제나라에게 구원을 청했는데, 제나라는 장안군을 인질로 요구했다. 그러나 태후가 거절했다. 그러나 좌사 촉룡(觸龍)의 활약으로 장안군을 인질로 보내 제나라가 원병을 보내주었다.[2]

조 효성왕 2년(기원전 264년), 태후가 죽었다. 그리고 전단이 조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2.2. 장평대전

조 효성왕 4년(기원전 262년), 효성왕이 좌우가 다른 색의 옷을 입고 용을 타다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고, 그 땅에는 금으로 된 금산과 옥으로 된 옥산이 있었다. 이에 꿈 해몽을 잘하는 숙부 조숙과 서사 감을 불러 해몽을 하게 했다.
조숙: 좌우가 다른 옷을 입은 것은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이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영토를 얻는다는 뜻이며 금산과 옥산은 많은 재물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서사 감: 좌우가 다른 옷을 입은 것은 하나가 둘로 갈라진다는 뜻이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일이 중간에 그르치게 된다는 뜻이며 금산과 옥산은 보기는 좋으나 가져갈수 없으니 이는 흉몽입니다.

기원전 262년 한나라의 상당 군수 풍정(馮亭)이 조나라에게 상당을 바쳤는데, 그 이유는 진나라의 공격으로 상당군과 한나라간의 연락이 두절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 효성왕은 좋다고 받아들였으나 평양군 조표만이 반대했고,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과 조우는 찬성해 다수결로 풍정의 투항을 받아들여 상당군을 차지했으며, 그곳에 백전노장 염파(廉頗)를 보내 지키게 했다. 염파는 장평에 주둔했다. 진나라에서는 왕흘을 보내 장평을 공격했으나 그는 염파의 적수가 되지 못해 이득을 보지 못했다. 이에 진나라의 상국범수가 헛소문을 퍼뜨렸는데 염파는 두렵지 않고, 오직 조사(趙奢)의 아들인 조괄(趙括)만 두려워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조 효성왕은 염파가 계속 수비만 하는 것을 답답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 말을 믿고서는 염파의 자리를 조괄에게 맡기려고 했다. 이에 인상여와 조괄의 어머니가 말렸다. 그러나 효성왕은 교체를 끝내 강행하여, 7월에 조괄이 백기에게 싸워 대패해 죽고, 조나라의 45만 병사는 모두 생매장당했다. 그러나 범수는 백기가 자신의 상국 자리를 대신 차지할 것이 두려워 백기를 회군시켜 조나라의 멸망은 피할 수 있었다. 조 효성왕은 조표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2.3. 모수의 도움으로 포위가 풀리다.

조 효성왕 7년(기원전 259년), 진나라는 다시 왕흘을 보내 한단을 쳤으나 염파의 저항이 완강해 끝내 함락시키기 못했다.

조 효성왕 8년(기원전 258년), 평원군은 모수(毛遂)와 함께 초 고열왕을 알현해 조나라의 구원 약속을 받아내고, 위(魏)나라신릉군(信陵君) 또한 구원을 왔다.

조 효성왕 9년(기원전 257년), 초나라와 위나라 덕에 한단의 포위가 풀렸다.

2.4. 연나라와의 대립

조 효성왕 10년(기원전 256년), 연나라가 창정을 쳐서 5월에 점령했다. 조나라는 악승과 경사를 보내 진나라의 신량에서 이겼다.

조 효성왕 11년(기원전 255년), 원저에 성을 쌓고 상원현을 설치했다.

조 효성왕 12년(기원전 254년), 수도 한단의 창고에 불이 났다.

조 효성왕 15년(기원전 251년), 평원군이 죽었다. 이를 조문하러 온 연나라 사신을 푸대접하여 연왕의 분노를 샀다. 연왕 희가 조나라를 쳤으나 조군에게 율복을 잃고 경진이 포로로 잡혔다.

조 효성왕 16년(기원전 250년), 조나라가 연나라의 수도 계를 포위했다.

조 효성왕 17년(기원전 249년), 악승이 염파와 함께 연나라를 포위하니 연왕 희가 강화를 청했고 조나라는 그것을 받아들여 포위를 풀었다.

조 효성왕 18년(기원전 248년), 연릉의 균이 군대를 거느리고, 상국 신평군과 함께 위나라를 도와 연나라를 치니 이때 진나라가 침입해 조나라의 유차 등 37개 성이 함락되었다.

조 효성왕 19년(기원전 247년), 조나라와 연나라 땅을 바꿨는데, 연나라는 용태, 분문, 임락을, 조나라는 갈, 무양, 평시를 얻었다.

조 효성왕 20년(기원전 246년), 진시황이 즉위했고 진양을 빼앗겼다.[3][4]

조 효성왕 21년(기원전 245년), 효성왕이 죽고 그 아들 조언(趙偃)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 도양왕이다. 이때 염파가 위나라의 번양을 쳐서 차지했을 때 조왕이 악승(樂乘)을 보내 염파를 대신하게 하자 염파는 불복하고 악승을 공격했다. 악승은 싸움에서 져 도망치고 염파는 위나라로 망명했다. 

그래도 효성왕이 후대 왕들보다 나은 건 바로 자기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염파를 재등용해 전권을 맡긴 것이었다. 도양왕은 능력이 없지는 않았는지 효성왕처럼 연나라를 쥐어팼고 유목왕도 초기에는 이목을 신임해줬다. 그러나 도양왕은 이목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창후를 왕후로 세운 후 그 사이에서 난 유목왕을 후계자로 삼는 실책을 저질렀고, 즉위한 유목왕은 어려서 외척에게 휘둘렸고, 결정적으로 창후가 이목을 싫어한 까닭에 조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3. 미디어

킹 곤타가 그린 달인전 ~ 9만리를 바람에 타고 ~에선 조괄의 어머니나 인상여가 그리도 반대하던 조괄을 끝내 고집부리며 사령관으로 보내지만 그가 전사하고 45만 조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에 그냥 기절해버린다.

대진제국 시리즈 3부에서 진 소양왕과 맞서는 나라들의 대표 정도로 묘사된다. 역사대로 조괄을 총지휘관으로 임명해서 나라가 백척간두의 상황에 몰렸다가 범수의 민폐행각으로 백기가 철수하면서 위기를 벗어난다. 이 드라마에서는 조괄의 어머니가 조괄의 문제점을 설명하자 본인도 불안해졌는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곁에 있던 진나라의 간자가 '조괄의 평소 행실이 불량한 건 자신을 시기하는 자들을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조괄이 술에 취했을 때 말했습니다'라고 하자 그제서야 안심한다. 대진제국3부에서는 부드러운 인상의 젊은 왕으로 나오고 백기가 '조왕이 자세를 낮추고 신하를 후대하며 민심을 모으고 온 백성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어서 제가 다시 나서도 조나라를 멸망시키는 건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나름대로 띄워주고 백기의 부인에게 '무안군에게 전해 주시오, 우리 조나라에 와서 나라를 잘 지켜주신다면 과인이 왕위라도 주겠다고' 하며 대인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공성전이 벌어지는 한단 성 성벽 위에 몸소 나와서 백성과 군인들을 격려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모습도 나온다. 하지만, 4부부터는 날카로운 인상의 수염 달린 중년으로 나오며 약속이행을 안한 것에 대한 진나라의 항의서신을 가져온 사신을 성벽 밖으로 던져버리는[5] 거친 모습을 보여줘서 전작의 부드럽고 성실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작보다 좀 더 거칠고 고집이 강해진 성격이며 소양왕 사후 조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할 징조를 보이자 진나라가 여불위의 계략을 수용하여 요고를 연나라에 보내 연나라 조정을 끌어들여 조나라의 뒤를 치게 하자, 승상이었던 숙부가 전선을 두곳에 두는 건 무리라면서 염파에게 연나라를 막도록 하고 진나라에는 조문사절을 보내서 화친을 맺자고 제안할 때도 분한 모습을 보이다가 마지못해서 받아들인다. 조나라 군대도 3부에서는 조괄의 병크로 장정들이 씨가 말라서 코흘리개 소년[6]까지 포함된 소수의 군인들이 부상을 견디며 민간인, 부녀자까지 힘을 합쳐 처절하게 수도를 지키려고 싸우는 절박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같은 시기의 같은 사건을 다룬 4부의 에피소드 1화에서는 그런 절망적인 모습은 안드로메다로 가버리고 포스가 느껴지는 조나라 병사들이 절도있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줬다. 조나라 백성들도 3부에서는 군인들과 힘을 모아 용감하게 진군과 맞서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4부 1화에서는 성벽을 넘어온 화살을 피해 혼비백산하며 도망치다가 학살당하는 걸로 바뀌었다. 주인공 가족인 어린 시절의 진시황과 조희, 영이인은 날카로운 인상의 조나라 군인들에게서 처절하게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나중에 조나라 장군이 영이인을 상대로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잡고 협박하는 야비한 짓을 하고 영이인이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여줘서 3부의 조나라와 4부의 조나라 사람들 이미지 갭이 매우 크게 느껴진다.

3.1. 만화 킹덤

작중에서는 도양왕의 선왕으로만 언급된다.

장평대전 당시 대뜸 당시 조왕이 수성전을 펼치던 염파를 해직시키고 삼대천 조사의 아들 조괄을 임명시켜 전쟁을 말아먹게 한 장본인으로 언급된다. 그 영향인지 염파가 위나라로 망명할 당시 '선왕도 대단했지만 이번 왕(도양왕)은 도무지 못 참겠다'고 깠다.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진나라 육대장군과 곧 해체되지만 위나라 화룡칠장이 있던 당시 조나라 삼대천인 염파, 인상여, 조사를 임명한 게 효성왕으로 추정된다.


[1] 중국 특유의 과장법을 감안해도 생매장 사건으로 국력에 엄청난 손실이 있었다는 수사 정도로 해석해도 좋다.[2] 제나라가 인질을 요구한 이유는 조 혜문왕때 연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조나라를 믿을 수 없어서였다.[3] 이것은 큰 사건으로 조나라가 진양 땅에서 일어났는데, 그 땅을 빼앗겼으니 문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조나라의 멸망이 기정사실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4] 문학적 관점도 있지만 진양 자체가 군사적 측면에서 중국의 북서부 이민족들을 막는 요새라 이 땅을 상실하면 화북이 위험해진다. 당시 전통적 의미에서의 중원의 북서부에 해당하는 조나라의 경우 이 지역의 상실은 전 국토의 방어력 약화를 의미한다.[5] 원래 3부에서는 백기의 철군 조건으로 6개의 성을 바치기로 한 약속의 이행여부에 대해 신하들과 상담하며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어렵게 결정을 내렸는데, 4부에서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신경질적으로 진나라가 보낸 외교 죽간을 바닥에 팽게치고 사신을 성벽 밑으로 던져버리라며 성질을 부린다. 결국 그 사신은 밖으로 던져지고 바리케이드의 가시에 몸이 뚫려 죽었다. 그와 동시에 진나라 장수가 공격명령을 내리고 조나라 방난 장군과의 한단성 공성전이 시작된다.[6] 백기가 죽이지 않고 부인에게 인솔하게 해서 보냈던 장평 전투 생존병인데 외관상 15살도 안된 어린 아이고 고국에 돌아온 후 자기 엄마가 나라를 지켜야 하니 아직은 집에 돌아오지 말라며 다시 군대로 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