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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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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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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홍 · 하후시창 · 하후승 · 경방 · 익봉 · 이심 조광한 · 윤옹귀 · 한연수 · 장창 · 왕존 · 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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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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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耳
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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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상산왕(常山王)→조왕(趙王)
(張)
(耳)
생몰연도 ? ~ 기원전 202년
고향 대량(大梁)

1. 개요2. 생애
2.1. 위나라 시기2.2. 진나라 시기2.3. 거록대전 시기2.4. 초한전쟁 시기
3. 평가4. 창작물에서

1. 개요

초한쟁패기에 활약했던 중국의 인물. (秦)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에는 본래 (魏) 출신이었다. 태어난 곳은 위나라의 수도였던 대량. 훗날 앙숙이 된 진여와 동향이다.

장오의 아버지.

위나라가 멸망 당하기 전에는 그 유명한 전국사군자의 한 명인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의 문객으로 지내던 적도 있었다.

2. 생애

2.1. 위나라 시기

장이의 출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여기서 나이를 유추해볼 수 있다. 신릉군 위무기는 기원전 243년에 사망했다. 사마천(司馬遷)이 명성이 제후들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사실은 허전(虛傳)이 아니다라고 까지 표현한 신릉군의 문객이었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당시에 이십대 중반에서 삼십대는 되었을텐데, 게다가 신릉군은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趙)에 망명하여 보냈다.[1]

기원전 253년 이전에 스무살에서 서른살 정도의 나이였다면, 초한전쟁 기간 중에는 70세에서 80세 무렵이 된다. 그야말로 노익장 그 자체. 거창한 빈객이 아니라 대충 10대 무렵에 신릉군을 추종하여 쫄래쫄래 따라다닌 수준이었다고 해도, 초한쟁패기에는 상당한 나이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나이와는 달리 상당히 분주하게 활약했다.

젊은 시절에는 어떤 일로 죄를 지었는지, 현재 하남성(河南省) 지역인 외황(外黃)으로 숨어들어와 떠돌이처럼 살았다. 그렇게 살던 중 어떤 부자의 빈객이 되는 사람과 친분을 쌓는다. 이 인맥으로 인해 팔자를 바꾸게 된다.

빈객이 모시는 부자에게는 딸이 있었으며 그 미모가 상당하였다. 어떤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가 문제가 생겨서 도망쳐 나왔는데, 다시 돌아가기 싫어서 방법을 강구하던 중에 빈객이 은근슬쩍 장이를 추천한다. "괜찮은 남자 찾는다면, 장이만한 사람이 없다." 라고 설득한 끝에 딸은 전 남편과 이혼해버리고는 장이와 결혼한다.

떠돌이 신세에서 미모의 아내도 얻고, 또 부잣집 처가로 인해 생활도 여유로워진 장이는 덕분에 가까운 곳, 먼 곳 할 것 없이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두루 얻을 수 있었고, 인맥이 또 인맥을 불러 장이는 벼슬까지 얻어 외황의 수령이 되었다. 이렇게 사람 만나고 교류하는 일을 좋아한 탓에 장이의 이름도 꽤 유명해졌고 여기저기서 사람들도 찾아와 장이를 만났는데, 그런데 심지어 그런 사람 중에는 유방(劉邦)까지 있었다! 유방이 아직 시골 말단 공무원 자리도 얻지 못한 말 그대로 백수 시절의 일이었는데, 유방도 사람 만나고 교류하는걸 좋아하는 인물이라 몇 번 찾아와서 몇 달을 묵고 가기도 했을 정도다.

장이는 그런 많은 사람 중에서도 진여(陳餘)와 아주 사이가 좋았는데, 앞서 말했다시피 역시 장이의 나이가 많아 진여는 장이를 아버지처럼 모시다가 나중에는 문경지교(刎頸之交)의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2.2. 진나라 시기

그렇게 무탈하게 살기만 할 것 같았는데 위나라가 망해버렸다.

처음 몇년 동안은 그래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이후 진나라는 장이와 진여가 이름 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잡으려고 했는데, 장이에게는 천금의 현상금을 걸었고 진여에게는 오백금의 현상금을 걸었다. 장이와 진여는 성까지 갈아버리고 진성(陳城)으로 숨어 들어가 마을의 문지기 노릇을 하며 먹고 살았다.

진나라의 천하가 계속될 때는 철저하게 숨을 죽이고 살았는데, 그걸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마을 관리가 부당한 이유로 진여를 질책하자 화가 난 진여가 대들었다. 이때 장이는 진여의 발을 밟으며 그냥 조용히 있으라고 눈치를 줬다. 마을 관리는 진여를 괘씸하게 여겨 매질을 했고, 나중에 장이는 진여를 크게 꾸짖었다.
"내가 그대에게 참으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오늘 조그만 치욕을 끝내 견디지 못했다면 한낱 시골의 일개 관리 손에 죽었을 걸세!"

신중한 장이의 말에 진여도 수긍했다. 이토록 철저하게 정체를 숨겼으며, 심지어는 진나라가 장이와 진여를 찾는다는 수배서를 내걸자 그것을 자기들 손으로 마을 곳곳에 붙이고 다녔을 정도다.(...)

이후 진승·오광의 난이 발생하면서 드디어 두 사람은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진승(陳勝)이 세력을 키워 장이와 진여가 있던 진성까지 장악하자, 두 사람은 진승을 찾아가 본래의 신분을 밝히고 부하로 거둬줄 것을 청했다. 이름 높은 명사가 찾아왔으니 진승 역시 기뻐하며 두 사람을 매우 반겼다.

그런데 점차 세력이 커지고 나서 진승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고, 장이와 진여는 여기에 대해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이라며 반대하는 의견을 낸다. 그러나 진승은 이를 무시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둘은 실망하게 된다.

이때 진여는 하북을 평정할 것을 제안했는데, 진승은 이 계책은 옳다고 받아들여, 자신을 포함한 주력이 중원을 접수하는 동안 무신(武臣)에게 별동대를 내어주고 하북 평정을 명령했다. 무신에게 3천 명의 군사를 주었으며 장이와 진여는 좌우 교위(校尉)가 되어 무신을 보좌하도록 했다. 이후 3천의 군사를 이끌고 출정한 무신은 괴철(蒯徹)이라는 책사의 도움을 받아 하북을 평정하고 스스로 상당한 세력을 확보한다.

이렇게 일이 잘 풀리자 무신도 슬며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장이와 진여는 이를 눈치채고 무신에게 독립을 권한다. 두 사람도 진승에게 실망하고 있었기에 무신을 부추긴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 무신은 장이를 우승상, 진여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스스로 조왕(趙王)이 되어 장초로부터 독립한다.

소식을 전해들은 진승은 크게 노해 무신의 가족들을 잡아 죽이려고 했는데, 측근이었던 채사는 "큰 적 진나라와 싸우고 있기 때문에, 무신과 아예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으니 살살 구슬리자." 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그럴 듯 하다고 생각한 진승은 무신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 진나라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독립해나온 무신이 그런 명령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장이와 진여 역시 여기에 동의했으며, 연나라 땅을 확보해 세력을 더욱 늘릴 것을 권했다. 무신은 휘하 장수인 한광(韓廣)을 파견하여 연나라 땅을 평정하게 했는데, 연나라 땅을 확보한 한광은 무신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독립해서 연왕의 자리에 오른다(...) 진승의 심정을 너도 느껴봐라 무신은 이에 격분하여 연나라 땅으로 직접 쳐들어갔는데, 오히려 연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혀버린다. 시양졸이 연나라 장수를 설득한 끝에 겨우 풀려나 돌아온다.

당시 조나라 장수 이량(李良)은 정형에서 진나라와 대치 중이었는데, 군사를 더 청하기 위해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으로 향했다. 이때 장한, 혹은 장한 휘하의 장수는 호해의 칙서를 위조하여 '항복한다면 용서해주겠다'는 밀서를 보냈다. 이량은 당초엔 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우연히 만난 무신의 누이가 술에 취하여 이량을 박대하였다. 본래 신분이 높았던 이량은 부하들 앞이라 더욱 부끄러웠고, 마찬가지로 분개한 이량의 부하들 또한 시건방진 무신을 죽이자고 나서자 이량은 무신의 누이를 죽이고 한단성을 기습한다. 대비를 못하고 있던 무신은 비명횡사하고 한단은 쑥대밭이 되었으며, 장이와 진여는 측근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탈출한다.

이후 장이와 진여는 조헐(趙歇)[2]이라는 인물을 왕으로 세워 조나라 세력을 수습했고, 대장군 진여가 나가 싸워 이량을 격퇴한다. 하지만 이량은 도망친 끝에 진나라 장군 장한에게 귀순해버리고, 조나라 침공을 부추겼다. 그렇게 해서 당대 최강의 세력인 장한이 조나라로 북상한다.

2.3. 거록대전 시기

장이와 진여는 우선 거록으로 도주했고, 장한은 수하인 왕리(王離)[3]를 시켜 거록을 포위하도록 명했다. 진여는 성이 포위되기 전에 북쪽으로 가서 수만의 군사를 모으는데 성공했으나, 다시 돌아와보니 거록을 포위한 진나라의 군세가 워낙 기세등등했기 때문에 도저히 포위망을 뚫을 수가 없었다.

왕리가 이끄는 진나라 군은 그 기세도 드높았지만, 거록의 남쪽에 있는 땅 극원(棘原)에서 장한이 직접 주둔하며 용도(甬道)를 건설했기 때문에 꾸준하게 양식이 운반되고 있었다. 공격하는 군대의 가장 큰 문제가 보급선의 유지인데 그것에 대해 걱정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진나라의 사기는 드높았다. 그래서 거록을 포위한 진나라의 공세는 실로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반대로 거록성 안에서는 양식이 점점 바닥나고 있었고, 지키는 병사들의 숫자도 많지 않아 위급한 상황이었다.

성 안에서 지키기만 하다가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장이는 성 밖의 진여에게 수차례 사람을 보내 SOS 사인을 보냈지만, 그렇다고 진여한테 뾰족한 수가 생겨날 리 없었다. 몇 개월이 지나자 크게 실망한 장이는 장염(張黶)과 진택(陳澤) 두 사람을 보내 진여를 꾸짖었다.
"옛날 나와 장군은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어 죽음을 같이 하기로 맹세했소. 오늘날 조왕과 이 장이의 즉음이 조석지간에 달려 있는데 장군은 수만 명이나 되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우리를 구원하려는 움직임이 없으니,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자고 맹세한 의리는 어디에 있단 말이오? 장군에게 얼마간의 신의가 남아있다면 차라리 진나라의 병사들과 죽을 각오로 싸워봄이 어떻소? 제아무리 진나라의 군대가 용맹하다고는 하나, 열에 하나 둘은 살아남아 포위를 뚫을 수 있지 않겠소?"

한마디로 "니가 그러고도 친구냐?" 라는 내용이다. 진여도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장염과 진택에게 5천 명을 주어 돌격하게 해보았으나, 이들 5천 군사는 그야말로 녹아내리듯이 사라져버려서,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당시 거록성 밖에는 장이의 아들이었던 장오(張敖)도 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와 있었는데, 이런 처참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는 차마 나서지 못했다.

이후 항우가 도착하고 제후군 연합은 거록대전에서 승리한다. 조왕과 장이는 성 밖으로 나와 여러 제후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때 진여를 본 장이는 크게 화를 냈고, 장염과 진택은 어디 있느냐며 물어본다. 진여는 이렇게 대답했다.
"장염과 진택은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조왕과 장군을 구해야 한다며 나를 호되게 책망하였소.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5천 군사를 내주며 진군을 공격하도록 시켰으나 그들은 모두 전멸하고 살아돌아오지 못했소."

하지만 장이는 의심이 풀리지 않았고 오히려 진여가 두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했다. 계속 그게 정말이냐고 물으며 의심하는 장이한테 진여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장군의 인수를 내던진다.
"장군께서 나에 대한 원망이 이리도 깊은 줄은 몰랐소. 기어이 나를 책망하시려거든, 이 대장군 자리를 내려놓을테니 거두어가시오."

진여의 반응에 놀란 장이는 땅에 떨어진 대장군의 인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못했는데, 진여는 그대로 화장실로 가버렸다. 어쩔 줄 모르는 장이에게 빈객 중 한 명이 말했다.
"제가 듣기로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훗날 화가 미친다고 했습니다. 지금 대장군의 인수를 장군께서 받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가 되니 상서롭지 못합니다. 빨리 취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장이는 인수를 주워 챙기고는, 진여가 거느리고 온 군사들을 수습해 돌아갔다. 화장실에서 나온 진여는 장이가 정말로 대장군 인수를 거두어간 것을 보고 경악했으며, 이제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고 여겼다. 진여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하상(河上)으로 가서 낚시나 하며 세월을 보냈고, 이것으로 둘 사이는 완전히 멀어져 버렸다.

2.4. 초한전쟁 시기

이후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때 장이는 조나라 땅을 나누어 따로 상산왕(常山王)이 되었지만, 진여는 공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남피 주변의 3개 현을 조금 떼어주는 정도에서 끝나게 되었다. 이때문에 열이 받은 진여는 전영(田榮)이 항우에게 대항할때, 그 군사를 빌려 장이를 날려버렸다.

이 때문에 도망치게 된 장이는 당초에 항우에게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충고를 듣고 당시 상산의 상국이자 항우의 심복이었던 항영(項嬰)을 죽이고, 삼진을 평정 중이었던 유방에게 합류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유방과 보조를 맞추었다.

유방팽성대전에 앞서 진여의 도움을 구하려고 했지만, 진여는 장이를 죽이면 군사를 보내주겠다며 강짜를 부렸다. 자기에게 의탁한 사람을 죽일 수 없었던 유방은 장이와 비슷하게 생긴 죄수의 목을 보내 진여의 군사를 빌리는데 성공했는데, 팽성대전에서 대패하면서 이 사실이 진여에게 알려졌고, 진여는 유방을 적대하게 되었다. 장이 쪽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장이의 아들 장오는 이 일에 엄청나게 감격해서 원체 무례한 유방에게 온갖 수모를 겪고도 분통을 터뜨리는 신하들을 '지금 우리가 목숨 부지하고 복을 누리는게 다 누구 덕인데 감히 무슨 소릴 하는 거요?'라며 오히려 꾸짖기도 했다. 정작 유방은 이런 마음도 몰라주고 죽이네 살리네 했다[4]

이후 한신의 북벌에 조참(曹參) 등과 함께 같이 나서 대나라와 조나라 평정에 도움을 주었다. 결국 한신이 정형 전투에서 배수진을 이용해 진여의 군대를 격파함으로서, 진여는 참살되었고 장이는 원수를 갚게 되었다. 이후에는 한신이 유방에게 부탁하여 조나라 왕에 임명되었다.

2년 뒤에 장이는 사망했는데, 유방은 장이에게 경왕(景王)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이의 아들인 장오가 조왕을 이어받을 수 있게 하고는, 장녀인 노원공주(魯元公主)를 장오에게 시집 보냈다. 이후 유경이 흉노의 묵돌에게 황실의 공주를 시집보내서 유화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하필 그 후보가 이 노원공주였다. 유방은 유경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노원공주를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나 고황후 여씨가 강하게 반대하고 또 미혼도 아닌 이미 개국공신의 아들과 결혼한 딸을 다시 흉노에게 보내는 것도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라서 결국 유방은 이를 철회하고 일반 백성의 딸을 공주로 속여서 보냈다.

3. 평가

초한전쟁 시기 활약한 유방의 주요 인물들 중에는 역이기와 함께 대표적인 노익장. 다만 초한전쟁에 대해서는 보통 소설 초한지만 보는 경우가 많고, 이런 경우에 이야기의 중심을 위해 항우 vs 유방에만 큰 비중을 주는게 대부분이기에 약간 사이드 스토리인 장이와 진여는 주목을 받지 못해, 노장이라는 사실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당대에 대표적인 명사(名士)로서 상당한 명성을 날렸고, 이후 한신의 북벌 등에서도 큰 역할을 하며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진여와의 우정과 이후 대립 때문에 우스운 꼴이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의 사이는 우정의 덧없음의 사례가 되어, 괴철이 한신을 설득할때도 언급되었다. 당시 괴철의 언급에 따르면,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여러 창작물에서는 이 모든걸 진여의 책임으로 돌리거나 이처럼 자세한 묘사를 하지 않아서 마치 장이가 일방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되나 사실 이 책임은 장이가 먼저 있는게, 진여는 거록대전 당시 어쩔 수 없는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여를 비난하고, 또 진여의 군사들까지 거두어버린 것이다. 즉, 분쟁의 씨앗은 장이가 먼저 뿌렸다. 다만 그렇다고 대놓고 군사를 빌려 장이를 쫒아내고, 이후 목까지 요구한 진여도 나을 게 없다.

그래도 진여에 비해서는 이후 조왕이 되었으니 훨씬 나은 편. 아들인 장오는 이후 관고(貫高)의 유방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조왕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다른 공신들이 토사구팽 당한 것을 보면, 유방 암살시도라는 엄청난 사건에 연루되고도 무사하는 행운을 누렸다.[5]

사마천은 장이와 진여에 대해 이러한 평가를 남겼다.
장이와 진여는 현자라고 세상에 전해져 칭송받고 있다. 그의 빈객들과 심지어는 잡역부에 이르기까지 천하에 호걸이 아닌 자가 없었고 머물렀던 나라에 경상의 자리에 앉지 못한 자가 없었다. 그러나 장이와 진여가 처음에 뜻을 얻지 못하고 빈천할 때 서로 동생동사하자며 신의로써 결의를 맹세한 일은 추호도 후회하지 않는 의로운 행위였다고 할 수 있었다.

이윽고 그들이 나라를 차지하고 권력을 다투자 결국은 서로 공격하여 멸망하고 말았으니 어찌하여 처음에는 서로 사모하기를 지성으로 하더니 나중에는 서로 배신하기를 그리 심하게 했는가? 그들은 결국 권세와 이로써 서로 교제했음이 아니었는가? 명예가 비록 높고 찾아오는 문객들이 비록 성시를 이루었을지라도, 그들이 걸었던 길은 아마도 오나라의 태백(太白)이나 연릉계자(延陵季子)[6]가 행한 의와는 다르다고 하겠다.

4. 창작물에서

중국 드라마 초한전기에선 진여와의 허무한 우정은 그대로 나오지만 허수아비 의제를 대할때 예를 잃지 않으며 (대가를 요구하긴 했지만)의제의 항우 제거계획에 동참하는 등 의제를 막대하다 항우한테 붙어버리는 진여보다는 인간성이 나은 사람으로 나온다.

팽성전투 직후 항우에게 투항할 것을 권하는 부하를 직접 참하면서 끝까지 유방 옆에 남았고 이후론 감군이 되어 한신군에 종군한다. 정형 전투를 앞두곤 한신의 배수진을 못미더워하는 조참, 번쾌, 관영을 한의 장수로서 대장군을 믿어야 한다며 달랜다. 유방도 형님이라 부르며 잘 대해준 편.

파일:The Legend of Cao Cao Zhang Er.png

영걸전 시리즈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유방전 스토리에서 등장한다.

한신이 북쪽을 정벌하는 동안 유방이 항우와 싸우다가 형양을 탈출했는데, 유방이 한신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한신이 움직이지 않은 것에 대해 역이기와 함께 한신에게 항의하는 것으로 나온다. 장이는 우리가 무사히 대, 조, 연을 정벌한 것은 한왕께서 시간을 벌어줬기에 가능했다고 말하며, 역이기가 이 일에 대해 넘어갈 수 없다고 하자 장이도 감군으로서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면서 역이기와 함께 물러난다.

와이파이 초한지에서의 성우는 김진수. 진승·오광의 난 시점에서 첫 등장하며, 거록대전에서의 행적도 동일하고,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이후 삼진 평정과 제나라 부활 쯤에 귀순한다. 유방 진영에서 역이기와 더불어 최고참. 아들은 등장하지 않는다.(장오)

요코야마 미츠테루항우와 유방에서는 장이가 직접 진여의 목을 베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1] 정확히 말해서 그 후 다시 위나라에 돌아와 4년간 보내긴 했다.[2] 살아남은 조나라 왕족 중 한 명이다.[3] 왕전의 손자이자, 왕분의 아들이다.[4] 사실 이건 장오의 신하들이 유방의 암살을 획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원래 사위였던 장오를 죽일 생각은 한 적이 없었고 다만 아무래도 입장이 입장이라(앞서도 말했다시피 유방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이 부자에게 굉장히 잘 대해줬다.) 개인적인 만남이 있었을 때 장오에게 무례하게 대했던 것을 그 부하들이 선비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분노해서 일을 벌인 것이었다. 원래 유방이 선비를 무례하게 대하는 건 몰랐던 듯 이후로도 장오를 가두긴 했지만 이 일에 대해 장오는 관여하지 않았고 여후의 탄원도 있었으므로 금방 풀어줬고 왕 자리만 박탈했다.[5] 다만 연루만 된 거지 장오 본인이 획책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관고가 장오는 절대 관련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장모인 여후도 탄원했다.[6] 태백과 연릉계자는 각각 춘추시대 오나라의 시조인 태백과 그 먼 후손인 계찰을 가리킨다. 의를 위해 군주의 지위마저 포기한 인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