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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19:24:11

전국사군자

전국사군자(戰國四君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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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상군 평원군 신릉군 춘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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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 Lords of the Warring States)

1. 개요2. 사군자3. 평가4. 대중매체에서5. 같이보기

1. 개요

중국 전국시대 후기때 활약한 제나라, 조나라, 위나라, 초나라의 정치가들을 통칭해 이르는 단어.[1]

제나라 맹상군 전문(? ~ 기원전 279년), 조나라 평원군 조승(? ~ 기원전 250년), 위나라 신릉군 위무기(? ~ 기원전 244년), 초나라 춘신군 황헐(? ~ 기원전 238년), 이렇게 4명을 전국사군자라고 칭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문하에 다수의 식객을 두고 각 나라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부국강병을 꾀한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이들 중에서 가장 추앙받는 것은 맹상군으로,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거의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2] 그러나 맹상군을 제외하면 순위를 두는 데 이견이 많다. 하지만 전국사군자를 중점적으로 다룬 사마천사기에서는 신릉군을 제외하고는 평이 좋지 않다.

2. 사군자

사군자의 순위를 결정하는 요인은 첫 번째로 각 문하에 두고 있던 식객들의 수와 그 질이다. 그 다음으로 각 군자들의 자질과 인격을 두는데 기실 자질과 인격에 따라서 그 문하들의 수와 질이 결정되었으므로 이건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3]

맹상군이 제일 순위로 꼽히는 이유도 바로 이 식객들에 관련된 일화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나라에서 탈출할 때 생겨난 계명구도조나라에 들렀을 때의 일화,[4] 특히나 식객 중에서도 먼치킨으로 추앙받는 풍환. 풍환은 이게 사람인지 귀신인지 할 정도로 맹상군에게 없어서는 안 될 먼치킨이었다. 진나라와 제나라를 농락해 맹상군을 복위시킨 것이 최대 공적.

평원군에게도 모수라는 사람이 있어 조나라, 위나라, 초나라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는 일화가 있어 여기에서 파생된 고사성어낭중지추와 모수자천이 있다.

신릉군에게는 주해의 일이 있고, 한고조 유방이 아예 대놓고 하악거렸었다.[5] 신릉군과 관련된 일이라면 유방은 무조건 하악거렸고, 이 버릇은 제위에 올라도 고쳐지지 않았다. 후세에 황제오타쿠가 된 일 때문에 후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경우가 많다.

춘신군은 뭔가 책략가스러운 이미지인 데다 자잘한 일화가 적고, 열국지에서 합종연합군을 와해시킨 주범으로 왜곡된 탓인지 인기가 많지는 않으나, 실제로는 강대국인 초나라의 재상이었던 데다가 진나라와 초나라의 동맹을 성사시키고 합종군의 총지휘를 맡는 등 그가 행했던 일들은 전국시대의 전황을 결정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과 연관이 있다.

이들이 동시대에 모두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춘신군과 맹상군은 서로 만난 적도 없을뿐더러, 황헐이 정식으로 춘신군에 봉해지기 전에 맹상군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6] 그러나 춘신군을 제외하면 나머지 군자들은 모두 안면도 있었고 또 교류도 제법 잦았었다.[7]

그럼에도 진이 기타 6국을 사정없이 몰아치는 판국에 계속되는 합종 연횡책으로 국가 간의 책략이 판을 치고, 약육강식인 시대 상황에 따른 왕족과 군주 간의 갈등 등으로 인해[8] 너무 뛰어난 능력치를 가진 이들의 말로는 참으로 불행하다. 물론 춘신군의 경우에는 왕위 계승 문제에 관여한 것이 원인이라 어느 정도는 자업자득이지만.

그리고 맹상군, 평원군, 신릉군의 셋은 확실하게 왕족이며, 춘신군의 경우에는 의견이 갈린다. 춘신군은 왕족 출신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9] 춘신군 역시 왕족 출신이라는 주장도 강하다.[10]

3. 평가

어떤 역사가에 따르면 이들이 있었기에 에 비해서 중앙집권화가 제대로 안 됐다면서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는데, 왕을 능가하거나 버금가는 세력자가 있는 건 왕조에 좋은 현상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국사군자만이 아니라 이런 문제는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진나라에서 이런 예시가 많았다.

하지만 진나라는 적어도 이들이 국가의 운명까지 좌지우지하지는 않았다. 진나라에도 여러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고 여불위 같은 이도 물론 나왔다. 하지만 다른 나라로 튀지도, 국가 안보에 영향을 끼칠 반역행위도 안 했다. 반면 전국사군자를 보면 맹상군은 제나라 위왕의 손자로 왕족임에도 위, 진, 제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으며 신릉군도 위나라 소왕의 아들이지만 그저 처남 나라인 조나라를 구하겠다고 불법으로 군권을 탈취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고향을 특별히 생각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올시다 애초에 이나라 저나라 간본것 부터가 딱 싹수가 보이는데 기록에서도 맹상군이 위나라 재상으로 있을적에 5국 연합군이 제나라를 공격해 멸망 직전까지 밀어붙였고 신릉군이 조나라에 있던 시기 진나라가 위나라를 침공하자 안리왕이 신릉군을 부르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어쨌거나 불법을 저질러 조나라로 옮겨살게 되었지만 그래도 감정이 좋지 않았던지 가지 않으려고 하다가 모공과 설공이 "지금 조나라가 당신을 이렇게 대접해주는게 위나라가 있기 때문인데(=당신이 위나라 왕족이기 때문인데) 위나라가 망하면 당신이 지금처럼 대우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라고 할 수 있는 말을 하자 그제서야 아차 싶던 신릉군이 위나라로 돌아와 여러 제후국들의 지원을 받아 진군을 박살냈다. 여기까지가 전국사군자만의 행적이다. 그 외의 인물들을 보면 더 많다.

물론 이들이 모두 나쁜 영향만 끼쳤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개개인 입장으로서는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재능을 알아주는 쪽에 가는게 이득이고 때문에 인재가 가는걸 아쉬워하는게 아니라 인재가 안 가게끔 해야 했는데 진을 제외한 육국은 그게 상대적으로 부족했고, 이 중 특히 위나라가 가장 심해서 상앙, 손빈, 범수, 악의 등은 모두 위나라를 거쳐갔지만 위나라에서 쓰이지 못해 상앙과 범수는 진나라로 손빈은 제나라로 악의는 연나라로 가서 성공했다. 그리고 이들은 상당수가 위나라 몰락에 기여한다. 자연히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는 이를 찾기 위해 이나라 저나라 떠돌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인재가 등용되었다 하면 그나라를 확 바꿔버리고 반대로 떠나면 확 주저앉게 되는거다. 당장에 염파만 봐도 군주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다른 나라로 떠났는데 반대로 진나라에서 나온 인재는 상당히 진나라에서 쓰여졌다. 결국 전국사군자의 존재는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깝다.

또한 이 타국들을 압도한 건 하루아침도 아니고 한가지 요소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전국사군자만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쓸 필요는 없으며,[11] 실제로 여불위 이전에 외척인 양후 위염이 대단한 권력을 가지거나 상앙범수, 저리질도 좌서장(진나라 최고 재상)에 있었을 때 그 권력이 가히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양후 위염은 소양왕의 어머니인 선태후가 정사를 맡길 정도였으며 상앙은 말이 필요없는 레벨이었다. 범수는 그의 말 한마디에 전국사군자들을 쩔쩔매게 했으며, 저리질은 진소양왕의 팔랑귀를 이용해 일인지하만인지상의 권력을 휘둘렀으니, 딱히 중앙집권의 문제라고 보기가 어려운 데다가 중국식 중앙집권의 핵심인 군현제가 도입되지도 않았으니 억지라는 이야기도 있다.[12]

다만 6국과 진나라의 대조점이 있다면 진나라는 권신들이나 선태후 같은 이들이 있었어도 이들이 결코 국가를 뛰어넘진 못했다. 그러니까 진나라의 인물들은 진왕과 진나라 왕실과 연이 없으면 절대로 진나라에서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다. 상앙, 장의, 범수, 여불위, 이사 모두 왕에게 버림받으면 그대로 끝장이었고 위염 또한 선태후가 죽자마자 몰락했다. 그러나 전국사군자의 경우 그래도 평원군, 춘신군은 자기 조국에 끝까지 충성했지만[13] 신릉군과 맹상군은 자기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전혀 없었다. 즉 국가 밖의 존재들이다.

거기다가 진나라쪽을 보면 왕족들의 전횡이 상당히 적다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맹상군, 신릉군이 하던 것과 비교해보면 양호한 수준. 달리 말하면 진나라는 6국과는 달리 내부단속이 잘 되었다.

6국들은 진나라가 강성해진 것이 각 국의 인재를 잘 등용하고 요소에 잘 썼던 점을 벤치마킹해서 이들에게 인재를 긁어 모으라고 직접 명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가 강성해진 건 상앙의 변법과 같이 나라의 기존 시스템을 아예 엎어버린 대개혁을 왕이 직접 솔선수범을 해나간 반면 나머지 6국들은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겉으로만의 인재 등용으로 진나라를 벤치마킹하려 했으니 이들의 인재 등용은 시간이 흐를수록 실패로 가게 됐다.[14]

4. 대중매체에서

삼국지 12 파워업키트에서 사군자들이 등장했다. 이름은 모두 본명으로 나온다. 아쉽게도 이들의 식객들[15]은 나오지 않는다.

대만 만화가 채지충이 그린 만화 <사기>는 사기의 사군자열전을 만화한 것이다.

창천항로의 작가 킹곤타가 그린 달인전 ~ 9만리를 바람에 타고 ~에도 전국사군자가 모두 등장한다. 다만 맹상군은 초반에 병사해서 작중에서 일찍 퇴장한다.

만화 킹덤에서는 유일하게 춘신군이 생존해 등장한다.

5. 같이보기



[1] 다만 이들을 통칭하는 표현은 한중일이 조금씩 다르다. 한국어권에서는 주로 '전국사군자'라고 부르지만, 중국어권에서는 '전국사공자', 일본어권에서는 '전국사군'이라고 부르는 편.[2] 당대에도 인정받았는지 조나라에서는 평원군을 두고, 제나라에 맹상군이 있다면 조나라에는 평원군이 있다는 노래가 있었다고 한다. 즉 소위 나 먼저 원리를 어기고 자국의 공자 대신 타국의 공자를 앞에 둔 것이다.[3] 다만 부수적이라 하더라도 자질과 인격 혹은 문하들의 질은 기준이 애매모호하지만[16] 수는 어느 정도는 척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가령 평원군이 인망을 잃어서 평원군의 식객 절반이 평원군을 떠나 그만큼 신릉군에게 갔다는 기록이 있다. 전국사군자 중 하나일테니 평원군의 식객은 엄청날텐데 그 평원군의 식객의 무려 절반이나 떠나 신릉군에게 갔으니 인망이 얼마나 평원군에게 떠나 신릉군에게 몰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4] 맹상군을 모욕한 조나라 사람들을 맹상군의 식객들이 간밤에 몰살시켜버렸다.[5] 어느 정도얐냐면 유방과 유씨 집안은 초나라 출신인데, 유방 본인은 위나라 집안이었는데 이사 와서 패현에 살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을 정도이다. 다만 유방이 살던 패현이 원래 송나라 영토였다가 송나라 멸망 후 위, 제, 초 3국의 각축장이 된걸 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주장은 아니다. 특히 유방이 젊은 시절 장이를 찾아와 몇달 장이의 집에서 머물다 가기도 했는데 당시 장이는 위나라 영토인 외황의 수령이었다.[6] 춘신군으로 정식으로 봉해지기 전에는 태자와 함께 진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 그러니 실제로 볼 수 있었던 겨를이 없었다.[7] 평원군은 신릉군과 처남매부 관계였으며 신릉군에게 맹상군과 친분을 맺게 해 주었다.[8] 각각 제나라 민왕은 맹상군을, 위나라 안희왕은 신릉군을 경계했다. 맹상군은 이 후 축출당해 망명해 타지에서 죽었고, 신릉군 또한 기껏 조나라를 멸망에서 구하는 공을 세워놓고도 말년에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 했다.[9] 명나라 시기 진직(陳直) 등의 견해. 춘신군이 황(黄)씨이고 사기 춘신군열전에 딱히 왕족 출신이라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귀족 출신이라는 것. 춘추시대인 기원전 648년 무렵 소국인 황(黄)나라가 초나라에 흡수당했는데, 이 때 같이 초나라 귀족사회에 편입된 황나라 공족의 먼 후손이 춘신군 황헐이라는 추측이다.[10] 사기 춘신군열전에는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지만, 사기 유협열전을 보면 '근세의 연릉(延陵 = 오왕 수몽의 아들이자 오왕 합려의 숙부 계찰), 맹상(孟嘗), 춘신(春申), 평원(平原), 신릉(信陵) 같은 사람들은 모두 왕의 친족들'이라는 언급이 존재한다. 또한『한비자』의 간겁시신(姦劫弑臣) 편을 보면 '초장왕의 동생 춘신군(楚莊王之弟春申君)'이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물론 초장왕(楚莊王)은 춘추시대 인물로 춘신군과는 수백년 차이가 나므로 그대로는 도저히 말이 안 되지만, 춘신군 왕족설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이게 '초양왕(楚襄王)의 동생 춘신군'의 오타라고 본다.[11] 중앙집권도 쉬운 일이 아니라서 진나라의 중앙집권은 무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도 했던 일이지만 프랑스 왕국은 18세기 끝날 무렵까지도 완벽한 중앙집권국가로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대에도 중앙집권이든 지방분권이든 둘 중 하나도 못 된 채 나라가 개박살난 국가들이 많은데 이는 결국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발전하는 것만으로는 평탄한 정치체제를 세우는게 어렵다는 말이다. 즉 전국사군자가 모두 책임지기에는 지나치다.[12] 물론 이런 권력자들이 있어도 결국은 왕에게 갈려갔다. 상앙은 결국 진혜문왕에게 아작났고 저리질은 일찍 죽었으며 위염은 소양왕에게 박살났고 범수는 알아서 물러났다. 흔히 조선을 군약신강이라 하며 왕이 신하들에게 쩌리신세였다는 생각을 많이들 하는데 조선에서 권세가 큰 대신들은 물론 많이 나왔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은 왕에게 박살이 났고 제2차 여요전쟁 당시 현종의 몽진과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몽진을 비교해 보면 선조는 차라리 나아보일 정도로 현종이 당한 굴욕이 대단했고 하다못해 왕권이 땅에 떨어진 세도정치 시기에서조차 고려의 경우는 최충헌이 왕을 두 번이나 갈아치운 반면 조선조 사상 최강의 권신 김안로는 중종이 단 하룻밤만에 숙청하는 데 성공했고 안동 김씨들은 헌종이 대놓고 자기네들을 향해 견제를 하는데도 아무 손도 못 썼다. 그리고 이 조선은 당시로서는 높은 수준의 중앙집권 체제를 만들어낸 국가였다.[13] 다만 춘신군의 경우 어디까지나 고열왕의 총애가 있어서 가능했고 고열왕의 총애가 줄어들면서 춘신군의 권세도 저물기 시작한다.[14] 사실 이는 이미 위나라부터가 발생했던 문제로 위나라도 위문후 시절에는 각지에서 인재들을 받아들이며 성공적으로 개혁하여 칠웅 중에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았지만 그 인재들의 후손들이 기득권자가 되어가자 이젠 이들을 쳐내고 새 인재들을 받아내야 했는데 이들을 놔두면서도 새 인재들을 맞아들이려는 애매한 선택지를 택하다 보니 공손앙, 손빈 같은 그들에게 안 맞는(심지어 때로는 방연-손빈처럼 같은 신진 인사들끼리도 자신의 성공을 위해 쳐내기도 했다.) 인재들이 다 외국으로 유출되어 결국 위나라의 전성기를 끝내는데 일조했다.[15] 특히도 풍환, 모수 기타 식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