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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17:10:28

유왕


주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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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유왕(幽王)
(姬)
궁녈(宮涅), 궁생(宮湦)
아버지 선왕
생몰 기간 기원전 ???년 ~ 기원전 771년
재위 기간 기원전 781년 ~ 기원전 771년

1. 개요2. 치세
2.1. 서주가 멸망하다
2.1.1. 사기의 기록2.1.2. 계년의 기록
3. 평가와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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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나라의 제12대 이자, 서주의 마지막 천자. 선왕의 아들이며 정환공의 조카이자 휴왕의 형이자 평왕의 아버지. 이 사람의 실정으로 인해 서주가 망했다. 쉽게 말해 암군이다. 이름은 사기에서는 희궁생(姬宮湦)이라고 전해진다.

2. 치세

유왕 원년(기원전 781년), 선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먼저 신후의 딸인 왕후 소생의 희의구를 태자로 봉했다.

유왕 2년(기원전 780년), 관중에서 지진이 일어나 주나라가 망할 징조를 보였다[1]. 그것도 경수, 위수, 낙수 등 주나라 천자 직할지의 농업 용지를 공급받는 곳에 타격이 갔다. 또한 기산(岐山)에 산사태가 일어났다[2]. 그리고 그는 숙부인 정 환공을 사도로 봉했다. 그리고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2.1. 서주가 멸망하다

2.1.1. 사기의 기록

유왕 3년(기원전 779년), 그는 포사라는 절세 미녀를 얻어 그녀를 총애해 오래지 않아 아이를 얻었다. 그래서 이름을 백복(伯服)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유왕은 그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사기에 의하면 포사는 지극히 아름다웠으나 그녀가 웃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유왕은 처음에는 비단을 찢는 소리가 좋다길래 비단을 찢어가며 웃게 했다. 그래서 포사가 웃기는 했지만, 문제는 비단이 예나 지금이나 여간 비싼 옷감이 아니라 왕실의 재정에 무리가 갔다는 거다. 게다가 포사도 비단 찢는 소리도 갈수록 지겨워해서 더 이상은 이 작전도 써 먹을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주유왕에게는 다른 특단의 조치뻘짓가 필요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만 봉화대 신호가 잘못 올라와 제후들이 갑자기 무슨 일이 발생했나 하고 우르르 몰려드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포사는 그것을 보고 아주 박장대소를 했다고 한다. 주유왕은 포사가 웃는다면 무슨 일이든 할 기세였는지라 봉화를 올리는 것을 남발했다. 그리고 제후들은 거기에 낚여 괜히 여러 번 왔다갔다하는 바람에 제후들과 장수와 병사들만 힘들었다. 이후에는 제후들도 또 속을 줄 아냐며 아무리 봉화를 피워도 절대 나타나지 않았다.

한편 이 무렵 유왕은 기존 왕비를 내쫓고 포사를 왕비로 임명했고, 이에 기존 왕비의 아버지 신후와 기존 왕비는 이것에 앙심을 품어 견융족에게 주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그리하여 유왕은 사태가 심각함을 깨닫고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3]. 양치기 소년이 생각나면 기분 탓이다. 이에 유왕은 아들과 포사와 함께 황급히 달아났으나, 도중에 여산에서 견융족을 만나 거기서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한편 포사의 최후는 여러 설들이 있지만, 진위 여부는 지금도 미스테리이다. 아무튼 그럼으로써 서주는 멸망하였다.

2.1.2. 계년의 기록

이상이 사기를 통해 흔히 알려진 이야기고, 청화간에서 발굴된 계년에서는 서주의 멸망 과정이 좀 다르게 기록되었다. 계년이 사기보다 기록이 이르고 내용이 상세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유왕은 원래 태자인 평왕을 폐하고 포사의 아들인 백복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평왕은 서신[4]으로 도망가고 유왕은 군대를 보내 서신으로 도망간 평왕을 끝장내려고 했다. 평왕과 평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서융을 끌여들여서 주유왕에게 반격했고 주유왕을 살해하는데 성공한다.

유왕이 죽었지만 주유왕과 포사를 지지하던 세력은 건재하여 유왕의 동생이던 휴왕이 괵나라 등의 지지로 등극하게 된다.

휴왕은 재위 21년(기원전 750년) 진문후에 의해 살해당하고 주나라의 내분은 끝이 났다.

양치기소년 이야기가 떠오르는 사기의 기록보단 더 리얼리티 드라마이긴 하지만, 이쪽도 여자에 홀려서 나라를 내전으로 몰고 간 개막장 이야기인 것은 마찬가지. 중국사에서는 이후로도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3. 평가와 후일담

그가 암군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봉화를 올렸는데도 제후들이 오지 않은 것은 단순히 포사 때문만은 아니다. 주 왕실은 이미 주여왕 때를 시발점으로 해서 여러 가지 실정 때문에 권위를 잃어갔는데, 그것이 포사의 봉화 사건을 계기로 해서 터진 것뿐이다.[5]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서주가 망하고 자신의 몸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견융족의 힘이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그 아들인 평왕진문후정무공의 도움을 받아 낙읍으로 천도하고, 호경 땅은 진(秦)나라에게 넘겨주었다.[6] 그렇게 되어 주나라는 직할지가 작아져 예전만큼 권위를 행사할 수 없었고,[7] 춘추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나라와 진(晉)나라의 도움으로 견융족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주유왕의 동생인 희여신(姬余臣)이 휴왕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문후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리고 평왕의 아들인 환왕정장공의 행패를 참지 못해 그를 쳤으나 그 부하 축담에게 화살을 맞는 등 권위는 날이 갈수록 떨어져갔다. 그 뒤 진(晉)나라곡옥과의 싸움에 개입해서 진을 도와주었지만 끝내는 곡옥의 강성함을 인정해 곡옥무공을 진후로 인정했다. 그 뒤로 주나라 천자는 패자에게 의지해[8] 권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1] 관중이 주나라의 기반이 되는 곳인데, 거기에 지진이 일어났으면 농지가 망가져 경제적 타격이 갔으리라고 해석이 가능하다.[2] 단, 이 기산은 제갈량이 중시한 기산(祁山)과는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기산은 주태왕이 적인(狄人)을 피해 옮겨갔다는 그 기산이다.[3] 일부 제후들은 진짜로 적이 침략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여자 하나에 미친 저런 정신나간 왕이라면 걍 죽게 내버려두는 게 낫다고 그냥 방치했다고도 한다.[4] 평왕의 외가이다.[5] 일각에서는 유왕이 봉화를 자주 올린 이유도 포사가 아닌 권위 때문이라 말하기도 한다. 저렇게 권위가 떨어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주나라의 권위가 아직 살아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행위가 봉화를 자주 올려 제후들의 군사들을 모이게 하여 그걸로 주나라의 권위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이려 했다는 것, 그리고 한편으로는 봉화 자체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주나라가 받은 침공을 주나라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제후들을 불러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은 그만큼 주나라의 힘이 약해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것. 이 해석대로라면 유왕 전부터 진작부터 주나라는 약해져 있어서 서주시대가 끝난 건 유왕 전대의 왕들도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6]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환공은 견융족을 막다가 죽었다.[7] 이게 시간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서 경왕 대에 이르면 장례 치를 돈이 없어 선왕의 장례를 2년이나 미루기도 했다.(...)[8] 정확히는 진(晉)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