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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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경왕(敬王) |
성 | 희(姬) |
휘 | 개(匄) |
아버지 | 24대 경왕(景王) |
생몰 기간 | 기원전 ???년 ~ 기원전 477년 |
재위 기간 | 기원전 519년 ~ 기원전 47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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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나라의 제26대 왕. 24대 경왕(景王)의 아들이며, 도왕의 동생이고, 원왕의 아버지다. 그는 이복형제인 희조(姬朝)를 물리쳐 주나라 왕위를 확고히 차지했고, 이 당시에는 오나라가 강성하여 중원을 진동하였다.2. 생애
2.1. 왕자 조를 완전히 물리치다.
경왕(敬王)의 아버지인 24대 경왕(景王)은 태자인 희맹 대신 서자인 희조(姬朝)를 총애했고, 그래서 희조에게도 세력이 생겨 훗날 분란의 씨앗이 된다. 그러자 형인 도왕은 낙읍에서 달아나 진경공(晉頃公)의 도움을 받아 희조(姬朝)를 물리쳐 낙읍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으나 희조의 세력이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도왕이 죽고, 그 동생인 희개가 왕이 되니 그가 바로 26대 경왕(敬王)이다. 그러나 희조의 세력은 여전히 컸기 때문에 경왕은 일단 세력을 길렀다.2.2. 오나라가 초나라를 물리치다
경왕 5년(기원전 515년), 오왕 제번의 아들인 공자 광이 오자서의 도움으로 찬탈을 꾀했다. 오자서(伍子胥)의 심복인 전제가 어장검을 생선구이 요리에 감추어 오왕 료를 척살하고, 공자 광이 오왕이 되니 그가 바로 오왕 합려다. 그 일로 합려는 오자서를 신뢰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오자서의 계략대로 요리를 시켜 공자 경기를 척살하고 오나라의 왕권은 안정된다.경왕 6년(기원전 514년,) 세력을 기른 경왕은 희조를 물리치고 왕위를 다시 회복하였다. 희조는 경왕 15년(기원전 505년)에 죽었다.
경왕 14년(기원전 506년), 합려는 오자서를 재상으로 삼고, 제나라의 이름난 병법가인 손무(孫武)[1] 즉 손자를 등용해 함께 장병을 거느리고 초나라의 수도인 영(郢)을 쳐서 함락시키고 약탈을 자행하자 초소왕은 달아났다. 그리하여 신포서는 진(秦)나라로 가서 7일 간 끈덕지게 구원을 요청하여 진나라의 구원병을 얻어 오군을 쳤다. 이때 오군에 내분이 일어나 합려의 아우 부개가 반란을 일으키자 초나라에게 공자 승을 잘 대우해준다는 조건으로 회군하였고, 오왕 합려는 부개를 제거한다. 그러나 초나라의 수도 영은 피폐해 있었다. 그래서 초소왕은 그 상황을 보다 못해 수도를 영에서 약(鄀) 땅으로 천도한다.[2]
2.3. 오나라와 월나라가 대립하다
경왕 24년(기원전 496년), 합려는 월나라에서 월왕 윤상이 죽고, 월왕 구천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빈틈을 노려 월나라를 치려했다. 오자서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간했으나 합려는 듣지 않았고, 결국 합려가 거기서 출전했는데, 월나라의 장수인 영고에게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고, 늙은 합려는 그 상처를 이기지 못해 결국 죽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인 부차(夫差)가 왕이 되었다. 그는 잘때마다 장작 더미에서 잤는데[臥薪], 그때 신하로 하여금 합려의 유언을 읊게 하여 월왕 구천을 물리치기 위해 국력을 키웠다.결국 경왕 26년(기원전 494년), 오왕 부차는 오자서를 대장으로 백비(伯嚭)를 부장으로 삼아 월나라를 쳤다. 당연히 국력에서 월나라가 밀려서 월왕 구천은 회계로 달아나다가 결국 힘이 다해 결국 오나라에 투항한다. 이때 오자서는 구천을 죽여 월나라를 멸하자고 했으나 패자가 될 뜻이 있었던 부차는 월왕 구천의 신하인 문종(文種)의 뇌물을 먹은 백비의 말을 들어 결국 월왕 구천을 살려주었다. 대신 부차도 생각은 있었던지라 그를 노예로 부려 감시하고 굴욕을 주었다. 바로 이때 월왕 구천은 범려의 책략대로 월나라의 이름난 미녀인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을 보내 오왕 부차의 마음을 샀다. 그런데, 오자서는 그들을 받지 말라 권했으나 부차가 듣지 않아서 결국 오자서와 부차의 사이가 갈라졌다.
경왕 35년(기원전 485년), 오자서는 부차의 미움을 사서 결국 오나라 땅인 고소에서 자결하였다.
경왕 38년(기원전 482년), 부차는 황구 땅에서 진(晉)나라, 노나라와 회맹했다.
경왕 42년(기원전 478년), 월왕 구천이 고소 땅을 두 차례나 치자 오왕 부차는 결국 회군하였다. 바로 이 당시에 위(衛)나라에서는 위경공이 백성들을 쥐어짜자 결국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위경공을 죽였다.
2.4. 유가의 정립
바로 경왕 때에 공자가 노나라에서 예의와 음악을 정리하여, 그 명성을 들은 계손씨가 그를 등용해 사구로 삼았다. 그러나 그 당시 제경공은 미인계를 써서 계손씨와 노정공에게 정무를 보지 못하게 해 결국 공자는 사표를 냈다. 그리고 공자는 천하를 주유하면서 《시경》, 《서경》, 《춘추》를 편찬해 유가를 정립하는데,[3] 기여하였고, 그 제자들은 여러 나라에서 활약하였다.2.5. 붕어
경왕 43년(기원전 477년), 경왕이 붕어하고 그 아들인 희인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원왕이다.[1] 이 사람이 바로 손자병법의 저자다.[2] 초나라 말로 서울을 영(郢)이라 부르는 까닭에 약영이라고 부른다.[3] 단 춘추는 공자 사후의 기록이 있으므로 그 제자 중 역사에 밝은 이가 마무리 지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