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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패자(準覇者) 제(齊)나라 26대 국군 경공 景公 | |||
성 | 강(姜) | ||
씨 | 여(呂) | ||
휘 | 저구(杵臼) | ||
아버지 | 제영공(齊靈公) 강환(姜環)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490년 |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547년 ~ 기원전 4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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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나라의 제26대 군주. 제경공(齊頃公)의 손자이자, 제영공의 아들이며, 제장공의 동생이다. 안유자, 제도공의 아버지. 제장공이 최저의 아내와 간통을 하는 등 원한을 사 최저와 경봉에게 시해당하고, 이들은 경공을 국군으로 옹립한다.즉위 초기에는 권신들이 전횡을 일삼고 유력 세경가끼리 내전이 일어 서로 죽고 죽이는 등 매우 어지러웠으나 이후에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하고 국력을 신장시켜 중후반기에는 제환공의 패업을 상당 부분 회복한다. 다만 이는 거의 전적으로 명신 안영에게 의지한 바였기에 안영이 죽은 뒤에는 다시 나라가 혼란해진다. 이 제경공과 안영의 관계는 가히 제환공과 관중의 관계를 연상시킨다.[1] 진(晉)나라가 강할 때는 협력했으나 약해지자 수차례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노나라도 견제했다.
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
2.1. 경봉이 최저를 몰아내고 권력을 쥐다
제경공 원년(기원전 547년), 제경공이 최저를 우상, 경봉을 좌상에 임명했다. 이때 경봉은 안영이 차후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 여겨 최저에게 안영을 죽이자고 했으나 안영의 명망을 두려워 한 최저는 감히 실행하지 못한다.[2] 대신 최저는 자신이 제 장공을 시해한 일을 기록한 태사(太史), 즉 사관을 죽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태사의 동생이 형과 마찬가지로 사실을 기록하자 그도 죽여 버린다. 그런데 자리를 물려 받은 태사의 작은 동생이 또 같은 행동을 반복하니 결국 이들 형제의 의지에 질린 최저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둔다.[3]최저는 후처인 동곽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최명(崔明)을 낳았는데, 이미 전처에게서 최성(崔成), 최강(崔彊)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따운 동곽녀에게 마음이 끌린데다 적장자 최성에게 장애가 있었기에 그를 빌미로 최명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이에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챈 최성이 스스로, 최읍(崔邑)을 떼어 주신다면 자리에서 물러나 그곳에서 조용히 남은 세월을 보내겠노라 청한다. 하지만 동곽녀의 오빠인 동곽언과 최명의 형 당무지[4]가 최읍은 최씨의 종읍(宗邑, 조상의 사당이 있는 고을)이니 응당 종주가 될 자가 물려 받아야 한다고 강하게 반대해 결국 후계자 자리만 뺏긴 채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당연히 최성과 최강은 분개했고[5] 아버지의 동료이자 세력가인 경봉을 만나 조언을 구한다. 실질적인 제나라의 1인자로 자기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는 최저가 은근히 마음에 들지 않던 경봉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 형제를 이용해 최저를 해할 마음을 품는다.[6] 경봉은 최성, 최강을 부추기고 그 꾀임에 넘어간 형제는 무리를 이끌고 본가로 쳐들어가 당무지와 동곽언을 살해한다. 뜻밖의 사태에 대로한 최저는 가솔들을 모아 응전하려 하지만 이미 인심을 잃은지 오래라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고 간신히 수레를 타고 달아나 경봉에게 도움을 청한다. 경봉은 측근인 노포별을 시켜 최저의 집을 치게 하니 경봉의 병사들에 의해 최성, 최강은 물론, 최씨 일족이 모조리 도륙을 당한다. 경봉에게 대접을 받다가 뒤늦게 집에 도착해 그 참상을 본 최저는 경봉에게 속았음을 깨닫고 비통과 분노,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다. 그리하여 경봉이 권력을 독점한다.
2.2. 경봉의 최후
최저를 속여 제거한 경봉도 오래 권력을 누릴 수 없었다. 그 배경은 바로 이러했다.제경공 2년(기원전 546년), 경봉은 사냥을 나갈 때 공손조, 공손만이 전무우(陳無宇)와 함께 경봉의 일가를 살해하려 했다. 이때 아들 경사(慶舍)가 전권을 잡은 틈을 타[7] 전무우가 경사를 죽여 버렸다. 이에 경봉은 위기에 빠졌다. 바로 이 때를 노리고 포씨[8], 고씨[9], 난씨[10] 등이 가세하니 경봉은 결국 노나라로 달아났다. 그러나 제나라의 실권자들이 노나라를 압박하니 노나라는 제나라보다 국력이 약해서 결국 경봉을 축출했다. 그리하여 강력한 오나라로 달아났다. 그리하여 경봉은 거기서 부귀 영화를 누렸다.[11] 그러나 그것도 오래 누리지 못했는데, 초영왕(楚靈王)이 아우인 웅기질 즉 훗날 초평왕(楚平王)을 보내 경봉을 살해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을 버려 사람들은 매우 기뻐했다.
2.3. 진(晉)나라에 협력하다
제경공 9년(기원전 539년), 제경공은 안영을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안영이 숙향에게 실권이 전씨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했다.[12]제경공 12년(기원전 536년), 제경공이 진평공(晉平公)을 만났는데, 그것은 연나라 정벌을 위해서였다.
제경공 14년(기원전 534년), 공손조와 공손만이 죽자 둘의 뒤는 난시와 고강이 이었다.[13] 이에 전무우가 그들을 이간질하자 사람들은 전무우에게 실망했다.
제경공 16년(기원전 532년), 전무우는 포견과 함께 난시와 고강을 치니 그들은 달아났고, 전씨의 권력은 더욱 커졌다. 만약 이때 제경공이나 안영이 이를 막았더라면 전씨가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제경공 18년(기원전 530년), 제경공은 진소공(晉昭公)의 즉위를 축하했다.
제경공 19년(기원전 529년), 초영왕이 죽고 초평왕이 즉위했고, 진나라의 군주는 육경한테 흔들렸다.[14] 그것이 회맹을 통해 드러났다.
제경공 22년(기원전 526년), 서나라, 담나라, 거나라와 회맹할 때 진 소공은 죽고, 진경공(晉頃公)이 즉위했는데, 그가 매우 어렸기 때문에 실권이 육경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2.4. 노나라와의 관계
제경공 26년(기원전 522년), 위나라(衛)에서 난이 발생해 위영공(衛靈公)이 교외로 달아났다. 같은 시기에 오나라가 송나라를 치자 제나라가 그것을 구해 주어 사실상 패자가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안영과 함께 노나라에 들르게 되어 노나라에서 예법을 물었다.이때 공자와 만나게 된 사실이 논어에 적혀있다.
제경공 31년(기원전 517년), 노소공(魯昭公)이 계씨의 난을 피해 오자 그가 노나라를 치려고 해서 제경공은 은읍을 차지해 거기에 노 소공을 머물게 했다.[15]
제경공 32년(기원전 516년), 혜성이 떨어지자 안영은 제경공의 사치와 폭정을 간했다.[16]
제경공 45년(기원전 503년) 가을, 제경공은 정헌공(鄭獻公)과 정식으로 회맹했다.
제경공 47년(기원전 501년),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계씨에게 쫓겨나자 제경공이 포견의 말을 듣고 그를 구금하려 했다. 그러자 그걸 눈치챈 양호는 진(晉)나라로 달아났다.
제경공 48년(기원전 500년), 노정공(魯定公)과 협곡에서 회맹하자 이서는 잔치에서 내나라 사람[17]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해 그 틈을 타 노 정공을 잡고자 했다. 그런데 그 음악의 내용도 노나라 입장에서 참 고약했던게 노 환공이 자신의 부인인 문강이 제 양공에게 NTR 당한 것을 까는 내용이라 공자(孔子)는 그 속 뜻을 완전히 파악해 그들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노나라 땅을 돌려달라고 요청하니 제경공은 공자의 기백에 눌려 결국 들어주고 말았다. 이 해에 안영이 죽었다.
2.5. 진(晉)나라를 치다
제경공 51년(기원전 497년), 제경공이 위(衛)나라와 함께 진나라의 하내를 쳤다. 진나라의 분열을 틈타 공격한 것이다.[18]제경공 55년(기원전 493년), 범씨와 중항씨가 반란을 일으키자 전걸(田乞)이 이를 구하라고 해 제경공이 이들을 도왔으나 이기지 못했다.
제경공 57년(기원전 491년) 7월, 전걸에게 명령해 위나라의 대부 영규와 함께 진나라를 쳤다.
2.6. 최후
제경공 58년(기원전 490년), 제경공은 예희의 아들 도를 세우려 했으나 말하지 않았다가 가을에 병이 들어 국혜자와 고소자에게 말해 그를 태자로 세웠다. 9월 계유일[19]에 제경공은 죽었고, 그해 겨울 태자 도의 이복 형들이 위나라와 노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태자 도가 그 뒤를 이어 안유자가 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전걸과 포목이 정변을 일으켜 국혜자와 고소자를 죽여 권력투쟁에 승리하며 안유자를 폐위시키고, 공자 양생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제도공(齊悼公)이다.2.7. 사후
제도공은 사이가 나쁜 포목[20]에게 죽었고, 제나라 사람들은 제간공(齊簡公)을 세웠다. 그러나 전걸의 뒤를 이은 전항[21]은 그도 죽이고 제평공(齊平公)을 세우고, 그 뒤 제선공(齊宣公), 제강공(齊康公) 대에 이르러서는 전항의 현손자 전화(田和)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리고 제 강공이 수명이 다해서 죽으니 강제는 결국 명목상으로도 완전히 망해버렸다.3. 평가
제나라의 중흥 군주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나라를 전씨에게 넘겨준거나 다름 없는 암군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안영이 살아있었을 적에는 그의 말을 듣고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 그 뒤에는 전씨를 견제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방치해 뒀기 때문에 그 후계자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거나 실권이 없이 지내다가 결국 강제가 멸망하는 원인을 만들기도 했다.[1] 아닌 게 아니라 안영은 관중의 화신으로 불렸다.[2] 이것으로 보아 최저의 권력이 경봉보다 컸음을 알 수 있다.[3] 동호직필(董狐直筆)에 이은, 역사가가 반드시 가져야 할 소명 의식을 나타내는 유명한 일화다.[4] 동곽녀와 그녀의 전 남편 당공의 자식.[5] 최성 입장에선 진짜 격분할 만도 한 것이 그가 불구가 된 것은 최저가 제 장공을 제거할 때 제 장공의 호위와 싸우다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최저가 제 장공을 죽인 것은 그가 아내인 동곽녀를 범해서인데, 최성이 장애 때문에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도대체 그 장애가 누구 때문에 생겼다는 말인가? 더더구나 자기가 아버지와 계모를 위해 그렇게 애썼음에도 그냥 고을을 떼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날 테니 사정 좀 봐달라고 부탁을 한 것인데 이를 거부당했으니....[6] 안 그래도 최저를 제거할 생각이 있었는데, 최저와 자식들 사이에 틈이 벌어졌으니 일이 한층 더 쉬워졌기 때문.[7] 경봉은 실권은 자기에게 있어서 안전하다고 믿고 아들 경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사냥가거나 주색 잡기에 빠져 지냈다.[8] 포숙의 후손.[9] 제환공 시대에 활약한 고혜의 후손인 고씨가 아니라 제혜공의 후손인 고씨이다.[10] 진(晉)나라에서 망명한 난영(欒盈)의 자손이 아니다. 제혜공의 후손으로 진나라의 난씨와는 관계없다.[11] 일단 제나라의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니 그로부터 얻을게 있을거라 여긴 오나라의 조치였다. 멀리 갈 거 없이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망한 뒤 일본으로 달아난 백제 지배층이 대우를 잘 받은 것도 이러한 이유다.[12] 훗날 그 예상은 맞게 되었다. 전화(田和)가 제강공을 몰아내고 자신이 제나라의 군주가 되는 것으로.[13] 이 둘은 제혜공의 후손인 난씨와 고씨이다.[14] 지씨(순수의 후손), 중항씨(순림보의 후손), 범씨(사회의 후손), 조씨(조최의 후손), 위씨(위주의 후손), 한씨(한궐의 후손). 이들 중 조씨, 위씨, 한씨가 살아남아 진나라를 삼분해 그들의 나라를 묶어 삼진이라 한다.[15] 아마도 이 무렵의 일로서,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물었더니 공자가 했다는 대답("君君臣臣父父子子")이 유명하다. '당신네 나라를 보면,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라고 에둘러 디스한 말이었으나, 제경공은 그저 '좋은 말씀이오'라고 대꾸하고 만다.[16] 제경공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저 안영의 말을 전적으로 따랐기 때문이다. 사실 제나라는 전무우의 사례로 보면 알 수 있듯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17] 정확히는 내나라 유민이다. 내나라는 제 영공 때 이미 망했기 때문이다.[18] 육경 사이의 내분이 심화되고 있었다.[19] 좌전에 따름[20] 포숙의 후손[21] 사기에는 전상이라 나오는데 이는 한문제의 휘인 '항'을 피휘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