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오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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準覇者
1. 개요
말 그대로 패자(覇者)에 준하는 군주.춘추시대 제환공, 진문공을 제외한 나머지 패업을 달성한 군주들을 일컫는 말로 흔히들 알려져 있다. 동의어로 소패자가 있다.
춘추오패를 가릴 때 위의 두 군주들은 반드시 들어가고 나머지 군주들이 여기에 끼워넣기가 되는데 다만 예외가 있다면 제경공은 준패자에 들어가지만 춘추오패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2. 준패자 목록
3. 준패자로 인정받는 이유
3.1. 진목공(秦穆公)
오고대부 백리해를 기용함으로써 서융지패를 달성하였으며, 진(晉)의 임금을 3번이나 정해주고, 진혜공 시절에는 범주지역(汎舟之役)을 통한 대인배적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 후 한원대전에서 진혜공을 사로잡기까지 했으며 진문공 사후에는 진(晉)과의 전투에서 2번 패배하였으나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 진(晉)의 도성 앞까지 쳐들어가는데 성공하여 주나라 왕실로부터 보물과 축하를 받았다. 그러나 왕실에서 후작으로 올리지 않았다는 점, 진문공과는 달리 정식으로 방백의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 직접 회맹을 주도한 역사가 없다는 점에 비추어 패자의 위치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중국학계의 이야기. 그러나 사실 공자도 진목공의 패업을 상당히 높게 쳤기 때문에 준패자들 중에서 으뜸임을 부인하는 부분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2]3.2. 오왕 합려
오삼의 후예인 오운(흔히 오자서로 알려져 있다)과 손무[3]를 등용해 춘추시대를 통틀어 유일무이하게 초나라의 수도인 영성(삼국지로 말하자면 강릉)을 점령하고 초소왕의 비빈들을 NTR하는데 성공했다.[4] 그 후에는 산동지패를 달성한 제나라를 압박하는 등[5] 합려시절의 군사력은 당시 최강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가는 별로 없다. 특히나 초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킨 사건은 제환공도, 진문공도 성공하지 못했던 춘추시대 유일무이한 업적. 또한 초나라에 이어서 두 번째로 칭왕을 한 나라가 오나라이기 때문에 그 임팩트가 너무나도 상당한 면이 있어 춘추오패에 넣는 사가도 있다. 그러나 월왕 윤상이 죽고 구천이 등극하자마자 상중에 전쟁을 일으킨 점과 진목공과 마찬가지로 회맹을 주도한 적이 없는 점 등 명분상으로 너무나도 약했기 때문에 패자보다는 준패자의 위치에 두는 의견이 더 많이 존재한다. 인간적으로도 너무 잔인한 면모도 많았기 때문에 빼는 사가들도 다수 존재하는 편.3.3. 오왕 부차
합려의 원수를 갚고 월나라를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는데 성공했고, 제후들과의 회맹을 주도하였으며, 진나라와 신경전을 벌일 정도로 중원 진출에 성공하였다. 사실상 오나라 최대의 전성기를 이룩한 인물이기 때문에 오패에 넣자는 의견도 있지만 아무래도 오나라 멸망의 원인이 다름 아닌 부차 본인에게 있었던 점[6]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3.4. 월왕 구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양자강 동쪽을 모두 지배하는데 성공한 점과 구천의 시대가 월나라 전성기였음을 감안해 오패에 넣는 사가가 있으나, 인간적으로 잔인했던 면이나 구천이 죽고나서 바로 월나라가 쇠약해진 점 때문에 오패에 넣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는 시각이 대부분. 특히 범려는 그의 관상을 두고 "어려울 때는 함께 할 수 있으나, 영광을 같이 누리기는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평했고, 복수가 끝나자마자 제나라로 도망갔다. 과연 그의 예견대로 대대적인 토사구팽이 벌어졌고[7], 결국 월이 훗날 쇠약해진 원인도 모두 이 때문이다.3.5. 송양공
송양지인, 이 고사성어에서 말하는 것처럼 송나라를 약소국으로 전락시키는 일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여러모로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소인배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너무나도 잦았다. 그러나 제환공 이후에 최초로 회맹을 주도한 점이 상당히 플러스 요소로 작용하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제환공 사후에 제나라의 군위계승 전쟁을 종식시킨 것도 송양공이 이룬 업적이다. 그러나 플러스 요소보다는 송나라를 약소국으로 내몰았다는 점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최근에는 준패자 정도로 보고 있다.3.6. 제경공(齊景公)
제환공 이후 제경공(齊頃公)이 진(晉), 노(魯), 위(衛), 조(曹)의 연합군에게 패망의 위기, 제장공의 간음에 따른 시해사건을 안영과 전양저(사마양저라고도 한다)를 기용함으로써 그간의 마이너스 요소들을 종식시키고 산동지패를 달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공자에게 제경공 자신이 "진목공의 패업을 자신이 따라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도 제경공의 업적을 공자가 높이 평가하기도 할 정도.[8] 그러나 하필이면 그가 제위하던 시절에 동시에 존재했던 군주가 당대 최강 세력이었던 오왕 합려(...). 안영과 전양저가 있었을 때는 별 탈이 없었지만 전양저가 죽고, 그 후에 안영마저 죽자 오나라에게 압박당하고 진(陳)에서 망명온 세력인 전(田)씨가 결국 제나라 공실을 장악해버리는 바람에 그 빛이 바랬다. 덕택에 소패업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춘추오패의 후보자 자리에도 끼지 못하는 비운의 군주.[1] 일단 사통이라는 기록에서 춘추오패로 나와있긴 하다.[2] 공자세가: "진나라는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진목공의 뜻이 컸고, 위치는 궁벽하였지만 그의 행동은 발랐습니다. 때문에 죄인으로 묶여 있는 백리해를 등용하여 사흘 동안 얘기해 본 끝에 그에게 정사를 맡겼던 것입니다. 이는 왕업을 이룰 정도이며, 패업을 이룬 것은 작은 일입니다.[3] 손빈의 선조로, 손자병법을 저술한 인물이다.[4] 심지어 합려를 따라온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훼손하고 합려는 이후에도 초나라를 공격해 결국 초나라는 천도하고 만다.[5] 아들인 부차도 여러번 제나라를 공격했다.[6] 원수이자 적인 월왕 구천을 살려주었고, 구천이 바친 서시를 총애하였으며, 오자서에게 자결하라고 촉루지검을 내리는 등, 국가 멸망 테크를 충실히 탔다. 결국 본인 대에 나라가 멸망해버리고 만다.[7] 특히 단순히 오나라를 멸했을 뿐, 천하통일을 한 것도 아닌데 공신 숙청부터 했으니 더 문제.[8] 당시 공자의 답변은 진목공에게 오고대부 백리해가 있었듯이 제경공에게는 관중의 화신이라 불리는 안영이 있으며 진목공이 뜻이 큰 만큼, 제경공의 뜻 역시 크다고 답변하였다. 즉,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