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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오패(春秋五覇) 진(秦)나라 9대 국군 목공 穆公 | |||
성 | 영(嬴) | ||
씨 | 조(趙) | ||
휘 | 임호(任好) | ||
아버지 | 진덕공(秦德公)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621년 |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659년 ~ 기원전 6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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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 진나라(秦)의 9대 국군. 인재를 기용해 진 양공 때 동주 평왕으로부터 받았던 서융의 땅을 획득하고, 동쪽으로의 진출을 꾀해 춘추오패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된다.2. 생애
2.1. 초기 치세
진 목공 원년(기원전 659년), 목공은 군사를 이끌고 모진(茅津) 땅을 공격하여 승리했다.진 목공 4년(기원전 656년), 목공은 동쪽의 진(晉)나라(희성 진씨)의 군주인 헌공의 딸(태자 신생의 누이)과 결혼했다.
2.2. 백리해와 건숙을 등용하다
진 목공 5년(기원전 655년), 진(晉) 헌공이 결혼 예물로 진(晉)나라가 멸망시킨 우(虞)나라의[1] 신하인 백리해(百里奚)를 혼인 선물로 보냈다.우나라 사람 백리해는 재주가 뛰어났는데 몹시 가난하여 출세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결국 쓰이지 못하고 귀국해 작은 벼슬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70세가 넘은 나이에 예물로 보내지는 신세를 굴욕스럽게 생각한 백리해는 진(秦)나라에서 남쪽의 초나라로 도망쳐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
진 목공은 공손지(公孫枝)로부터 백리해가 인재라는 사실을 듣고서 등용하고 싶어했다. 그러자 공손지가 조언하길 '초나라 왕이 아직 백리해의 진가를 몰라 하찮은 일을 시키는 것인데, 지금 많은 선물을 주고서 넘겨달라 하면 초나라 왕이 순순히 내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추노를 구실로 아주 적은 몸값을 내주시지요.'라고 했고, 과연 고작 오고양피(五羖羊皮)[2]를 주고 백리해를 사올 수 있었다. 진 목공은 백리해와 대화를 나눠보고 몹시 흡족해하여 대부 자리를 주고 국정을 맡겼다. 이로 인해 백리해는 '오고대부(五羖大夫)'로도 불린다.
진 목공이 인재를 찾자 백리해는 옛날 건숙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가난을 견디다 못한 백리해가 제나라로 가려고 하자 건숙이 말려 가지 않았다. 이 무렵 제나라를 다스리던 양공은 여동생 문강과 근친상간을 하고 문강의 남편 노환공을 모살하는 희대의 패륜을 벌였으며, 이후 평소 처우에 불만을 품은 공손 무지가 제 양공을 시해하고 공위를 찬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뒤에 다시 공손 무지가 살해당하고 공위에 오른 인물이 춘추 5패의 첫 번째로 꼽히는 유명한 제 환공이었다.
가난을 견디다 못한 백리해가 주나라로 가려 하자, 건숙이 역시 말렸다. 이 무렵 동주의 왕은 왕자 퇴(頹)였는데, 동주 혜왕의 숙부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취미가 소 키우는 것이어서(...) 소나 말을 키우는 재주가 있었던 백리해가 이를 노렸던 것이다. 희퇴는 처우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조카인 혜왕을 몰아내고 천자가 된 찬탈자였다. 그 때문에 희퇴는 민심을 얻지 못했고, 마침 동주 왕실과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던 정나라의 여공이 군대를 일으켜 희퇴를 주살하고 혜왕을 복위시켰다.
가난을 견디다 못한 백리해가 우나라로 가려고 하자 건숙이 또 말렸다. 하지만 백리해가 이번만큼은 건숙의 말을 듣지 않고 우나라로 가서 신하가 되었다. 하지만 우나라는 얼마 못 가 진(晉)나라의 헌공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백리해의 말을 들은 진 목공은 건숙이 인재임을 알고 신하로 삼았다.
2.3. 진(秦)나라와 진(晉)나라의 항쟁
진 목공 9년(기원전 651년), 진(晉) 헌공이 죽고 군위 쟁탈전이 일어나자, 진(秦)나라에 인질로 와 있었던 진(晉) 혜공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영토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진(秦)나라를 떠나 진(晉)의 후작이 되었다. 하지만 진(晉) 혜공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하지만 진(秦) 목공은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진 목공 12년(기원전 648년), 진(晉)에 흉년이 들자 진(秦)에 곡식을 원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신하들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진(晉)나라에 양식을 보내지 말자고 주청했지만 목공은 '진(晉)의 백성은 죄가 없다.'라면서 양식을 보내주었다.
진 목공 14년(기원전 646년), 이번엔 진(秦)나라에 기근이 들자 진(晉)나라에 원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괵석(虢射)이라는 신하가 진(秦)나라의 기근을 틈타서 공격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다고 했고, 혜공은 그의 의견을 따랐다(...)
진 목공 15년(기원전 645년), 진(晉) 혜공은 배은망덕하게도 이 기회를 노려 진(秦)나라를 침략하여 한원(韓原)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때 목공은 혜공의 군대에 포위를 당해서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데 뜬금없이 300명의 군사가 나타나 목공을 구출했다. 과거 목공이 명마를 잃어버렸는데 도둑을 잡고보니 굶주린 야인들이 목공의 말을 잡아먹어 버린 상태였다. 관리는 즉각 처형하자고 주청했지만 목공은 짐승 때문에 사람을 해칠 수는 없다며 그들을 풀어주고 '고기만 먹으면 속을 버릴 테니 곁들여 먹으라.'라고 술까지 내려주었다. 이때 목숨을 구한 야인들이 목공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나타난 것이었다. 위기를 넘긴 목공은 혜공을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그는 배은망덕한 혜공을 대번에 죽이려 했으나 목공의 아내인 혜공의 누나가 동생을 살려달라고 간청했고, 천자인 동주 양왕도 한 번 봐주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해 죽일 생각을 접었다.
대신 같은 해 11월, 목공은 혜공을 진(晉)나라로 돌려보내주는 대신 태자 희어를 인질로 요구했고, 자신의 딸과 그를 결혼시켰다. 그리고 예전에 약속받은 하외의 성 다섯 곳을 가져갔다.
진 목공 22년(기원전 638년), 혜공이 병을 얻어서 위독해졌다. 태자 희어는 자신의 부인인 진(秦) 목공의 딸을 버리고, 군위를 계승하기 위해서 진(晉)나라로 도망갔다. 말도 없이 도망을 가버린데다가 자기 딸까지 내팽개치자 목공이 격노했다.
진 목공 23년(기원전 637년), 진(晉)나라로 돌아온 태자 어는 같은 해에 사망한 혜공의 뒤를 이어서 진(晉) 회공이 되었다.
진 목공 24년(기원전 636년) 봄, 화가 많이 난 목공은 진(晉)나라로 사신을 보내 전국을 유랑하던 공자 희중이를 귀국시킨다고 통보했다. 2월 공자 중이가 진(晉)나라의 국군으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晉) 문공이었다. 그 후 문공은 사람을 시켜서 조카인 회공을 죽였다.
같은 해 가을, 동주 양왕의 동생 대(帶)가 적(翟)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형인 양왕을 공격했고, 이에 양왕은 정나라로 도망갔다.
진 목공 25년(기원전 635년), 주 양왕이 진(秦)나라와 진(晉)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주나라에 난리가 일어난 것을 알렸다. 이에 응답한 목공은 문공을 도와서 양왕의 동생 희대를 죽이고, 양왕을 낙읍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진 목공 32년(기원전 626년) 겨울, 진(晉) 문공이 사망했다. 진(秦) 목공은 정나라를 얻기 위해 군대를 출격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정나라는 진(晉)나라를 넘어서 멀리 있었기 때문에 백리해와 건숙 등 여러 신하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목공은 기어이 백리해의 아들 맹명시(孟明視)[3], 건숙의 아들 서걸술(西乞術)과 백을병(白乙丙)[4]을 보내 정나라 정복을 추진했다. 이때 정나라의 상인인 현고가 진(秦)나라의 군대가 정나라를 침공하려는 걸 미리 알고는 꾀를 냈다. 현고는 진(秦)나라 장군들에게 가서 정나라는 이미 모든 전쟁 준비를 갖추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는 뜻으로 정 목공이 선물로 보낸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소를 줬다. 진(秦)나라 장군들은 정나라가 적군에게 선물까지 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것을 보니 정말 전쟁 대비를 확실히 했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정나라 공격을 포기하고, 그렇다고 빈 손으로 본국으로 귀환할 수 없으니 진(晉)나라의 속국을 대신 공격했다.
진(晉) 문공의 아들 진(晉) 양공은 자신의 아버지인 문공의 장례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진(秦)나라가 자신의 속국을 공격한 것에 분노하여 효산에 매복해있다가 돌아오는 진(秦)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그리고 포로로 잡은 진(秦)군의 세 장수들을 모두 처형하려 했지만 태후이자 양공의 적모였던 문영(文嬴)[5]이 계책을 써서 이들을 살렸다. 그 계책이란 것이 뭐냐면, 진(秦) 목공은 패전 때문에 세 장수에게 원한이 깊을 터이니, 세 장수를 진(秦)나라에 돌려보내 목공이 통쾌하게 삶아 죽일 수 있도록 하자는 간언이었다. 이 말을 따른 진(晉) 양공은 이들을 처형하지 않고 진(秦)나라로 돌려보냈다.
세 장수가 진(秦)나라로 돌아오자, 목공은 소복을 입고 교외까지 직접 나와 그들을 맞이하고는 울면서 "내가 백리해와 건숙의 말을 듣지 않아 그대들을 욕되게 했으니 그대들이 무슨 죄가 있겠소? 그대들은 이 치욕을 씻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나태히 하지 마시오."라고 말하며 이들을 벌하지 않고 더욱 후하게 대했다.
2.4. 유여를 등용하다
진 목공 34년(기원전 624년), 서융에서 신하로 온 유여(由餘)라는 사람이 있었다. 목공은 진(秦)나라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화려한 궁궐을 보여줬지만 유여는 '이 궁궐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피땀을 흘렸을 지' 한탄하면서 오히려 목공에게 창피를 줬다.그러자 목공은 유여가 인재임을 알아보고 그를 얻기 위해 계책을 썼다. 우선 유여가 서융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을 끌며 억류하는 한편 서융의 왕에게 16명의 미인을 보냈다. 가까스로 유여가 서융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서융의 왕은 진(秦)나라에 오랜 세월 머물렀던 유여를 의심하는 한편 미인들을 가까이 하느라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때 목공의 신하가 유여에게 접근하여 설득했고 결국 서융에 희망이 없음을 깨달은 유여는 목공의 신하가 되었다.
유여는 목공에게 서융을 정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목공은 이를 그대로 실행해 진 양공 때 동주 평왕으로부터 받았던 서융의 12개 땅을 얻을 수 있었다.
2.5. 진(晉)나라와 다시 전쟁하다
진 목공 36년(기원전 622년), 목공은 맹명시 등에게 다시 명령해 진(晉)나라를 공격했다. 강을 건너자 진(秦)나라의 군대는 배를 불질러 버리는 각오를 보여주며 진(晉)나라를 공격했는데 진(晉)의 조최가 진(秦)군의 사기에 눌려 피해만 다니다가 결국 진(秦)나라가 승리하여 과거의 패배를 설욕했다.2.6. 진목공의 사망과 순장
진 목공 37년(기원전 621년), 목공이 훙했다. 목공이 죽자 당시 진(秦)나라의 풍습에 따라 순장된 사람이 177명에 달하였고, 이로 인해 진나라는 목공 때의 강성함을 그대로 이어가지 못하였다.[6] 이 때문에 《사기》 등에서는 진 목공이 저평가되기도 한다.[7][8]이 순장에 대해선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까지 의견이 분분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자거씨(子車氏)[9]의 세 아들 엄식, 중항, 겸호의 순장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 세 사람은 매우 어질고 뛰어나 목공이 중용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우러름도 받았다. 그런 세 사람이 순장되자 진나라 백성들은 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나라를 원망하는 <황조>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고, 공자는 이를 《시경》에 수록했다. 그리고《춘추좌씨전》에는 군자는 이로 인해 진(秦)나라가 다시는 동쪽을 정벌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라고 나온다.[10]
반면 소동파는 이에 대해 "진 목공이 살아 생전 세 번 패배한 맹명시[11]도 죽이지 않고 용서했는데, 어찌 어진 세 사람을 순장시킬 수 있겠냐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세 사람은 누군가의 강요로 순장된 것이 아니라 진 목공에게 입은 은혜[12]를 갚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쳤다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응소가 《한서》에 남긴 각주에 있는데, 어느 한 번은 목공이 대신들과 술을 마시다가 '살아서 같이 즐거움을 누리고 죽어서 같이 슬퍼하자'고 말하자 엄식 등이 그리하겠다고 약속하였고, 목공 사후에 셋이 따랐다고 한다.
여하튼 순장 부분이 아무래도 목공 생전의 모습과 크게 대비되어서 생기는 논란이라고 할 수 있다.
3. 논란
춘추 5패로서 제 환공(齊 桓公), 진 문공(晉 文公), 두 사람은 논란 없이 들어가지만 초 장왕(楚 莊王), 진 목공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자세한 내용은 춘추오패 항목을 참고할 것.[1] 바로 이 이야기가 고사성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유래이자 병법 36계 가운데 하나인 '가도멸괵'(假道滅虢)이다. 즉 우나라의 길을 빌어 이웃한 괵나라를 친 뒤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까지 병합해 버렸다.[2] 검은 염소 다섯 마리의 가죽. 중국 고대 문헌에 나오는 羊은 원래 염소를 말한다.[3] 본명은 백리시(百里視)로 진 목공의 재상인 백리해의 아들이다. 자(字)가 맹명. 맹명시라고 한 것은 고대 중국에서는 누군가를 가리킬 때 자에 휘(諱)를 붙여 불렀기 때문. 대표적인 예가 '숙량흘'로 잘 알려진 공자의 아버지.[4] 건숙(蹇叔)의 아들들로 본명은 건술(蹇秫), 건병(蹇丙).[5] 바로 진(秦) 목공의 딸이자 진(晉) 문공의 정실이었던 회영(懷贏)이다. 적모라고 표현한 것은 진 양공이 그녀가 아니라 진 문공의 다른 부인인 핍길의 소생이었기 때문이다.[6] 훗날, 순장이 폐지되고 상앙이 등장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하자 진나라는 다시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7] 이에 대해 '순장은 진 목공 이전부터 내려오던 풍습이라서 목공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다'며 목공을 변호하는 의견도 있다. 진목공이 순장을 명령한 기록이 없다면 뒤를 이은 강공이 아버지의 뜻과 관계없이 순장한 것일수도 있다.[8] 근데 사실 순장은 일단 타국에서도 실행되기도 했다. 일례로 제환공의 장례가 끝난 후 수백명의 사람을 순장했다고 하며 진경공 역시도 그의 사후에 환관 강충이 순장되었다고 한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천수를 누리다 제대로 된 유언을 남기고 죽은 사람은 아니지만.[9] 이 경우에는 車를 '차'로 읽지 않고 '거'로 읽는다.[10] 이는 좌전의 예언 중 유일하게 틀린 것으로 좌전이 진나라의 통일 이전에 쓰여졌다는 사실을 알려준다.[11] 본명은 백리시로 위에 언급된 백리해의 아들이다. 앞에서 진(晉)나라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고 배를 불태우고 승리를 거두는 게 모두 맹명시의 지휘하에서 발생한 일이다.[12] 비록 천거받았다지만 이들을 중용한 사람은 진 목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