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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왕조
|
제 齊 | ||
서기전 11세기 ~ 서기전 391년[1] | ||
위치 | 중국 산둥 | |
수도 | 임치 | |
국성 | 강성(姜姓) 여씨(呂氏) | |
국가원수 | 후작 | |
주요 군주 | 환공 강소백, 강공 강대 | |
주요 재상 | 관중, 안영 | |
언어 | 상고 중국어 | |
문자 | 금문 → 전서 (대전체) | |
종교 | 중국 토속 종교 | |
종족 | 화하족 | |
통화 | 도폐 | |
성립 전 | 주나라 | |
멸망 후 | 전제 | |
현재 국가 | 중국 |
[clearfix]
1. 개요
중국사의 서주, 춘추시대의 제후국. 지금의 산둥 반도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춘추오패 중 하나다. 왕성은 강(姜)성 여(呂)씨였으며, 작위는 후작이었다.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 중 춘추시대의 제 왕조는 춘추제(春秋齊), 혹은 왕조의 성을 붙여 흔히 '강제(姜齊)'로 칭해 전국시대의 제 왕조(전제)와 구분한다.
수도는 임치, 현재의 산동성 쯔보 시이다.
왕조의 창시자였던 주나라의 개국공신 태공망(강태공) 강상(여상) 및 춘추오패의 일원인 제환공 강소백으로 유명하다.
2. 역사
2.1. 서주, 춘추시대 초기
[2]초기에는 태공망이 영구 땅에 봉해졌으며 나중에 이 영구가 임치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리적인 위치도 무척 좋아 비옥한 황하의 하류 지역, 낭야 - 즉묵 등의 농업 지대, 태산이라는 천혜의 방어선 등 강대국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초기에 잠시 혼란기가 있었는데 기(紀)나라[3]의 양후가 서주의 이왕에게 제나라의 애공이 반란을 꾸민다는 거짓 보고를 하자 이왕은 확인도 하지 않고 애공을 주나라로 끌고 왔다. 애공은 여러 제후들이 보는 앞에서 산 채로 끓는 가마솥에 넣어 죽임을 당하는 팽형을 선고받고 끔살당했다. 이왕은 애공의 이복동생이었던 호공을 세웠지만 호공은 천도 문제로 애공의 동생인 헌공에게 살해당했고 호공의 일족은 모두 국외로 추방되었다. 헌공이 죽자 그의 아들인 무공이 이었다가 무공이 죽자 그의 아들 여공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여공은 포악해서 제나라의 민심을 잃었고 이 틈을 타 추방당했던 호공의 아들이 일족 및 백성들과 함께 여공을 쳐서 그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본인도 전사하는 바람에 군주가 되지 못했고 백성들은 여공의 아들 문공을 세움으로써 혼란을 잠재웠다.
그리고 성공, 장공을 지나 희공이 즉위하자 제나라는 강대해졌지만 희공이 죽고 나서 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희공의 아들인 양공은 그의 사촌인 공손무지에게 죽었고 다시 무지가 죽자 양공의 두 아우들인 규와 소백이 서로 싸우다가 소백의 승리로 끝나니 그가 춘추시대의 첫 번째 패자로 유명한 환공이었다.
2.2. 춘추오패의 전성시대에서 중흥기까지
환공 치세때의 명재상이었던 관중의 정치로 제나라의 국력이 급상승해 주요 강대국이 되면서 명실상부한 춘추오패 최초의 패자국이 되었다.하지만 관중, 포숙아 등의 명신들이 죽고 환공이 승하하자 그의 다섯 공자들 사이에서 후위 쟁탈전이 벌어졌고 수초[4], 역아[5], 위개방[6] 등의 간신들의 발호[7]로 정치가 불안정해져서 국력이 크게 쇠락했다.
일단 환공의 아들인 무궤가 뒤를 이었다가 송나라의 군주인 양공의 지원으로 효공 소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효공이 죽자 그의 아들을 죽이고 효공의 아우인 소공이 뒤를 이었다가 소공이 죽자 그의 아들 사를 죽이고 소공의 아우인 의공[8]이 즉위했다. 의공은 포악한 정치를 일삼다가 깊은 원한을 품은 병원과 염직에게 살해되었다.[9] 이에 의공의 형이었던 혜공[10]이 뒤를 이었는데 비록 환공 사후 내분으로 패자의 자리는 잃었으나, 제나라는 여전히 무시못할 경제력과 국력이 상당한 나라였다.
이후 혜공의 아들이었던 경공(頃公)이 정치를 잘해서 제나라는 안정되었으나, 경공의 아들 영공을 이은 장공은 최저와 경봉에게 시해당했다. 원래 장공을 세운 공로가 있었던 최저는 경봉과 짜고 장공을 시해했는데 이는 장공이 최저의 첩과 간통했기 때문이었다. 최저는 장공의 아우인 저구를 군주로 옹립하니 그가 경공(景公)이었다. 하지만 권력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경봉의 계략에 의해 최저와 그의 아들들 사이에는 분란이 생겼고, 결국 아들들은 모두 죽고 최저와 그의 첩은 자살했다. 하지만 경봉도 곧 그의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망명다니다가 오나라로 갔는데 결국 거기서 초나라의 공격을 받아 사로잡히고 일족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11]
경공(景公)의 치세때가 패자 환공 이후 제나라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였다. 경공이 안영을 재상으로 중용하여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젊어서 즉위해 늙을 때까지 약 50여 년을 재위한 경공은 노망 때문인지 장성한 아들 대신 어린 아들인 안유자 도를 세우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2.3. 규성 전씨의 집권에서 멸망까지
이때부터 규성 전(田)씨의 세력이 강해져 실권을 쥐게 되었다.[12] 초대 공정 전완 이후 전완의 후손이자 규성 전씨의 가주였던 전상(田常)[13]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며 신뢰를 얻었다. 그가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줄 때는 제나라의 강성 여씨 후실보다 많이 빌려줬으나, 받을 때는 후실보다 적게 받았으며 물고기와 나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상은 이를 통해 민심을 얻었는데 경공의 어린 아들인 안유자 도가 즉위하자 위기를 느껴 망명한 도의 형 양생을 꼬셨다. 그리하여 전상은 도를 죽이고 양생을 후위에 옹립하니 그가 도공이다.[14]도공을 세운 전상은 권력이 막강해졌는데 도공이 사이가 나쁜 포목(포숙아의 현손)에게 시해당하자 도공의 아들이었던 임을 세우니 그가 간공이었다. 간공은 감지와 전상을 각각 좌상과 우상으로 삼았는데 사이가 나빴던 전상은 감지와 대립하다가 그를 죽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간공은 도망치다가 서주에서 생포되었고 피살되었다. 전상은 간공의 아우인 오를 세우니 그가 평공이다. 전상은 단독 재상이 되었는데 이때
"덕을 베푸는 것은 군주(평공)께서 하시고, 벌을 내리는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실권을 완전히 손에 쥔 전상은 자신의 일족들을 제나라의 주요 지역에 봉했으며 제나라의 유력 씨족이었던 감씨, 고씨, 국씨, 안씨, 포씨 등을 모두 주살하거나 몰아내어 세력을 확고하게 굳혔다. 이후 평공이 죽자 그의 아들인 적을 세우니 그가 선공이었는데 선공의 기나긴 51년의 재위기간 동안 전상 - 전반 - 전백 - 전화가 대를 이어 선공 치세 때의 재상직을 세습했다. 선공이 죽자 전상의 고손자였던 전화가 선공의 아들이었던 대를 옹립하니 그가 강제의 마지막 후작이었던 강공이었다. 강공은 아예 자포자기했는지 술과 여자에만 빠져 살았다. 이에 전화는 강공을 몰아내고 해상에 있었던 섬을 식읍으로 주어 제사만 지내게 한 후, 동주의 위열왕으로부터 제후로 인정받으니 그가 전제의 초대 군주인 태공이었다. 7년 후에 강공이 죽자 강성 여씨에서 규성 전씨로 제나라가 완전히 넘어가게 되어 강제는 멸망했다.[15]3. 역대 군주
강제(姜齊) 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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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는 시호, 뒤에는 이름이다.[16] 또 시호가 없는 군주도 있다.
- 태공(太公) 상(尙): 기원전 1000년경 이전. 서주의 개국공신.
- 정공(丁公) 급(伋, 級): 태공의 아들
- 을공(乙公) 득(得): 정공의 아들
- 계공(癸公) 자모(慈母): 을공의 아들
- 애공(哀公) 불신(不辰): ? ~ 기원전 863년. 계공의 아들. 기나라 양후의 참소로 서주로 잡혀가 이왕의 명령으로 팽형에 처해져 사망했다.
- 호공(胡公) 정(靜): 기원전 862년 ~ 기원전 860년. 애공의 동생, 수도를 영구에서 박고로 옮겼다.
- 헌공(獻公) 산(山): 기원전 859년 ~ 기원전 851년. 호공의 동생으로 형인 호공에게 원망을 품고 옛 수도였던 영구 사람들과 함께 호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군위를 찬탈했다. 이후 호공의 아들들을 쫓아내고 수도를 박고에서 영구로 다시 옮긴 후 이름을 임치로 바꿨다.
- 무공(武公) 수(壽): 기원전 850년 ~ 기원전 825년. 헌공의 아들,
- 여공(厲公) 무기(無忌): 기원전 824년 ~ 기원전 816년. 무공의 아들로 포악했으므로 제나라 사람들은 여공의 할아버지인 헌공이 국외로 쫓아낸 호공의 아들을 모셔와 제후로 옹립하려고 여공을 공격해 죽였다. 그러나 이때 호공의 아들도 전사했으므로 여공의 아들 적이 뒤를 이었다.
- 문공(文公) 적(赤): 기원전 815년 ~ 기원전 804년. 여공의 아들. 아버지 여공을 시해한 70여 명을 처형함으로써 애공의 팽형 이후 생긴 내분을 끝냈다.
- 성공(成公) 탈(脫): 기원전 803년 ~ 기원전 795년. 문공의 아들
- 장공(莊公) 속(贖): 기원전 794년 ~ 기원전 731년. 성공의 아들
- 희공(僖公)[17] 녹(祿): 기원전 730년 ~ 기원전 698년. 장공의 아들로, 아우 이중년의 아들이자 조카인 무지를 총애하여 태자 제아와 동등한 대우를 했다. 강제의 원수인 기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송, 위, 연 연합군과 함께 싸웠으나 노, 정이 기나라를 도와주면서 대패하고 분사했다.
- 양공(襄公) 제아(諸兒): 기원전 697년 ~ 기원전 686년. 희공의 아들. 원수인 기나라를 멸했으나, 황음무도하여 노환공의 아내이자 자신의 이복여동생이었던 문강과 근친상간하고, 불만을 품고 있었던 사촌 동생 무지의 특권을 빼앗았다. 문강과의 사통이 드러나자 공자 팽생을 시켜 노환공을 때려 죽였으나 연칭, 관지보의 난으로 피살되었다.
- 공손 무지(無知): 기원전 686년. 희공의 조카로 희공의 동생 이중년의 아들이었으며, 양공 제아의 사촌동생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연칭 및 관지보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대부 옹음에 의해 연칭, 관지보와 함께 피살되었다.
- 환공(桓公) 소백(小白): 기원전 685년 ~ 기원전 643년. 양공의 동생으로 형 규를 죽이고, 관중과 포숙아의 도움으로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춘추오패 중 첫 번째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말년에 관중과 포숙아가 죽자 간신들인 수초, 역아, 개방을 중용하여 제나라를 망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공자 무궤(無詭) 또는 무휴(無虧): 기원전 643년 ~ 기원전 642년. 환공의 아들. 송양공이 공자 소를 세우러 오자 제나라 사람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 효공(孝公) 소(昭): 기원전 642년 ~ 기원전 633년. 무궤의 동생
- 소공(昭公) 반(潘): 기원전 632년 ~ 기원전 613년. 효공의 동생. 효공의 아들을 죽인 개방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다.
- 공자 사(舍): 기원전 612년. 소공의 아들. 숙부인 상인에게 피살되었다.
- 의공(懿公) 상인(商人): 기원전 612년 ~ 기원전 609년. 소공의 아우. 황음무도하게 날뛰다가 대나무 숲에서 자는 사이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었던 측근들인 병촉과 염직에게 피살되었다.
- 혜공(惠公) 원(元): 기원전 608년 ~ 기원전 599년. 의공의 형
- 경공(頃公) 무야(無野): 기원전 598년 ~ 기원전 582년. 혜공의 아들. 부세를 경감하고 고아를 구제했으며 병자를 위로하고, 창고에 쌓아둔 것을 헐어 빈민을 구제하니 민중들이 기뻐했다. 또 제후들을 우대하니 경공이 죽을 때까지 백성들이 경공에게 귀부했고 제후들은 제나라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았다.
- 영공(靈公) 환(環): 기원전 581년 ~ 기원전 554년. 경공의 아들. 영공 14년 내(萊)나라를 멸했다.
- 장공(莊公) 광(光): 기원전 553년 ~ 기원전 548년. 영공의 아들. 최저의 후처인 당강과 사통하다가 최저와 경봉에게 피살되었다.
- 경공(景公) 저구(杵臼): 기원전 547년 ~ 기원전 490년. 장공의 동생. 반역자들인 최저와 경봉에게 옹립되었는데 경봉이 최저를 죽였다. 이후 경봉은 오나라로 도망갔다가 초영왕에게 잡혀 죽었다. 안영을 중용하여 환공 이후 가장 부강한 시대를 만들었으나, 경공 자신은 사치를 즐기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암군이었다. 그래도 재상 안영의 간언에는 귀를 기울였고 대개 그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는 군주였으나, 말년에 후계자를 잘못 세워 강제 멸망의 단초가 되었다. 준패자로 불린다.
- 안유자(安孺子) 도(荼): 재위 기원전 489년. 경공(景公)의 아들. 양생이 보낸 주모에게 피살되었다.
- 도공(悼公) 양생(陽生): 기원전 489년 ~ 기원전 485년. 안유자의 형. 사이가 나쁜 포목에게 피살되었다.
- 간공(簡公) 임(壬): 기원전 484년 ~ 기원전 481년. 도공의 아들. 전상(전항)이 감지를 죽이자 불안한 나머지 도망치다가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 평공(平公) 오(驁): 기원전 480년 ~ 기원전 456년. 간공의 동생. 전상을 단독 재상으로 삼았다.
- 선공(宣公) 적(積): 또는 취잡(就匝) 기원전 455년 ~ 기원전 405년. 평공의 아들. 전상과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재상직을 세습했다.
- 강공(康公) 대(貸): 기원전 404년 ~ 기원전 379년. 선공의 아들. 전상의 현손[18]이었던 전화에 의해 폐위되어 섬으로 추방되었다가 죽었다.
4. 유력 세경가
- 최(崔)씨: 제2대 국군 제 정공의 아들 계자의 자손. 최저 등이 있다.
- 고(高)씨: 제10대 국군 제 문공의 아들 공자 고의 자손. 고혜 등이 있다. 국씨와 함께 천자이수(天子二守)로 불린다.
- 국(國)씨: 공족이나 조상은 불명이다. 국의중 등이 있다. 위의 고씨와 함께 천자이수(天子二守)로 불린다.
- 습(隰)씨: 제12대 국군 제 장공의 아들 공자 요의 자손. 습붕 등이 있다.
- 동곽(東郭)씨: 제16대 국군 제 환공의 아들 동곽대부의 자손. 동곽아 등이 있다.
- 경(慶)씨: 제17대 국군 공자 무궤의 아들 경극의 자손. 경봉 등이 있다. 훗날 진나라의 시황제를 암살하려 한 형가도 이 집안 사람이었다.
- 고(高)씨: 위의 고씨와는 다른 집안으로 제22대 국군 제 혜공의 아들 공자 고의 자손. 고채 등이 있다.
- 난(欒)씨: 역시 제22대 국군 제 혜공의 아들 공자 난의 자손. 난조 등이 있다. 고씨와 난씨는 모두 제 혜공의 자손이라 혜(惠)씨라고도 한다. 진(晉)나라의 난씨와는 다른 집안이다. 진나라의 난씨가 제나라로 망명온 적이 있어 더 헷갈리지만 전혀 관련이 없는 가문들이다.
- 관(管)씨: 서주시대 초기 삼감의 난의 주역이었던 관숙이 시조라 하나 불확실하다. 관중의 자손.
- 포(鮑)씨: 기(杞)나라의 공족 출신으로, 포숙아의 자손.
- 안(晏)씨: 안약의 집안. 안약의 아들 안영이 유명하다.
- 전(田)·진(陳)씨: 규성 진씨가 국성인 진(陳)나라의 공자 진완의 자손. 강제를 뒤엎고 전제를 세웠다.
5. 같이보기
[1] 주왕의 승인으로 인한 공식 멸망은 서기전 386년[2] 춘추시대 전반기까지만 하더라도 산동반도 일대를 전부 지배하지 못했다. 이 지역에는 내이라고 볼리는 종족들이 성읍국가를 이루고 있었지만 산동성 서부 일대의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하여 기원전 6세기를 기점으로 내이족들을 흡수해 산동반도 일대를 석권했다.[3] '기우(杞憂)'로 유명한 그 기(杞)나라가 아니다.[4] 환공이 총애하던 미소년으로 그를 모시기 위해 스스로 거세(!)했다.[5] 환공의 주방장으로 인육을 먹고 싶다던 그에게 아들을 죽여 바쳤다(!).[6] 위(衛)나라 의공의 큰 아들.[7] 일전에 관중은 이들이 간신임을 알고 제환공에게 벼슬을 줘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가 있었지만 묵살되었고, 관중 사후 후위 쟁탈전을 일으켜 와병 중이던 제환중은 간신들의 협잡으로 감금된 후 비참하게 굶어죽었다.[8] 제환공의 다른 아들이다.[9] 의공은 환공이 살아있을 때 땅 문제로 병촉과 다투었는데 당시 재상이었던 관중은 병촉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처럼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의공은 병촉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발을 잘라버렸고(월형) 염직의 아내가 미녀라는 소문에 그의 아내를 뺏아버렸다. 병촉의 아들 병원과 염직은 의공의 측근이었는데 두 사람은 신지라는 연못에서 목욕을 하다가 아버지 다리 짤린 놈, 마누라 뺏긴 놈이라고 서로 떠들어대다가 뜻을 맞추고 자고 있었던 의공을 쳐죽인 후 그 시체를 대나무 숲에 감췄다.[10] 이 사람 또한 제환공의 다른 아들이었다. 즉 효공 - 소공 - 의공 - 혜공 모두 제환공의 아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후위 다툼으로 제나라의 내부가 시끄러웠던 것을 알 수 있다.[11] 경봉의 살아남은 일족들은 여기저기 흩어졌고, 나중에 시황제를 암살하려던 형가가 이 경봉의 후손이었다고 한다.[12] 전씨의 시조는 진(陳)나라 여공의 아들이었던 완이었다. 완은 태어날 때 그의 후손이 다른 나라의 군주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 진완은 부친인 여공이 죽은 후 진나라의 내란을 피해 제환공의 치세 때 제나라로 망명했는데 대부의 벼슬을 거절하고 대신 공정이 되어 진씨에서 전씨가 되었다. 수공품이 뛰어나고 자원이 많았던 제나라의 특성상 직위는 낮았지만 경제력을 쥐고 있었던 공정은 굉장한 실용직이었다. 전완의 후손들은 대대로 공정을 세습하면서 도자기, 물고기, 나무, 쌀 등의 이권과 그로 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점점 강성해졌다.[13] 시호는 전성자(田成子)이며, 본명은 전항(田恒)이다. 본명이 전항이지만 전상으로 유명한 이유는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 한문제의 이름인 유항(劉恒)을 피휘하고자 바꿨기 때문이었다.[14] 《장자》의 외편인 <거협>편에는 이 사건을 일컬어, "전상이 나라를 훔치고서 성인의 지혜까지 훔친 나머지 요순처럼 편안히 지냈다"고 까고 있다. 나아가 소위 '성인'이란 큰 도적을 지켜주는 사람일 뿐이라고 극딜했다.[15] 전제와 진을 멸망시킨 삼진(조, 위, 한)의 역성혁명을 기점으로 역사는 춘추전국시대를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이행하는 기준으로 한다.[16] 예 : 정공 급. '정'이라는 시호를 받은 공작 강급(여급)[17] 《사기》에서 저자인 사마천이 할아버지 사마희를 피휘하여 희공(釐公)으로 기록했다.[18] 손자의 손자를 뜻한다. 고조부에 대응되기에 고손이란 말을 쓰는 사람이 많지만 현손이라고 해야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