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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4:22:34

팽형

1. 개요2. 방법
2.1. 잔혹성
3. 시행 사례들4. 조선의 팽형
4.1. 개관4.2.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집행 방식과 취급4.3. 비슷한 사례4.4. 논란
4.4.1. 정말로 시행되었는가?4.4.2. 당사자 대우 관련
5. 가상매체에서의 등장
5.1. 사형5.2. 명예형

1. 개요

팽형()은 고대의 형벌 중 한 가지로, 죄인을 가마솥에 넣어 삶아(烹)버리는 형벌이다.

2. 방법

살아있는 인간을 이나 기름, 유지, 타르, 녹인 이 있는 가마솥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아 끓이거나, 끓고 있는 상태에서 강제로 밀어넣어 서서히 고통을 오랫동안 느끼게 하며 죽여버리기 때문에[1] 그 잔혹함이 화형에 버금가거나 넘어섰다. 실제 중국에서는 팽형에 사용되었다는 솥이 발굴된 적이 있다.

시행 전 미리 불을 지펴서 끓고 있는 상태로 만든 후 그 상태에서 넣는 방법과 그냥 보통의 상태에서 시작해 끓는 방법 모두 공존했다. 어느쪽이 더 고통스러운지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끓는 물 속의 개구리' 이야기처럼 바로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서서히 온도를 올리더라도 사람을 비롯한 생명체는 일정 온도 이상의 물체와 접촉하면 심한 통증이 느껴지게끔 진화가 되어있다. 그래서 개구리도 실제로는 일정 온도 이상의 뜨거운 물이 되었음을 눈치채면 알아서 탈출한다.영상

다른 말로 가마솥에 넣고 끓인다 하여 '정확()의 형벌'이라고도 불렸다. 그 때문에 엄청난 중죄인, 가령 대량의 재물을 수탈한 탐관오리역성혁명을 일으키려 했던 역적 등의 죄인들만이 이러한 형벌을 당했다.

워낙 끔찍한 형벌인 데다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며 내부에 있는 사람이 반항해도 열리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가마솥을 준비해야 하는 등[2] 형벌을 위해 준비해야 할 특수 도구가 필요하며, 가마솥에 기름이나 을 넣고 끓이는 등 미리 준비해야 하는 작업도 많고 더불어 기름을 사용할 경우 비용이 만만치 않다. 현대에는 기름이 흔하니까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기술이 미흡했던 고대엔 소금과 더불어 기름도 상당히 비싼 물건이었다.[3]

2.1. 잔혹성

이론상으로는 피부를 구성하는 단백질이 열로 인해 파괴되면서 신경세포도 파괴되고 이로 인해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뜨거운 물에 의한 고통은 꽤나 길다. 사람의 몸은 이 70% 가량이 차지하고, 물은 비열이 높아서 온도변화가 느린 편이다. 이러한 몸에 함유된 물 때문에 열이 피부심층까지 폭발적으로 전달되지 않으므로, 순식간에 3도 화상을 입을 정도의 엄청난 고열에 휘감겨 고통의 시간이라도 짧을 수 있는 건 물론 유독가스로 일찍 의식을 잃을 수 있는 경우가 있는 화형과 달리 팽형은 나오는 건 고통스러운 수증기뿐인데다가 열이 상대적으로 천천히 전해지면서 고통받는 시간이 보다 증가하기에 사형수가 죽어가면서 느끼는 고통의 끔찍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삶아진(또는 튀겨진) 시체 처리도 곤란해지는 등의 문제점이 있는 데다가 다른 형벌과는 달리 처리 속도까지 늦어지므로 후대로 갈수록 팽형에 처해질 죄의 기준을 상향해서 최대한 집행 횟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기피되거나 아예 다른 형벌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형을 가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상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여서 자백을 받아내거나 겁을 주어 외교적으로 이익을 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도 촉한의 사신으로서 오나라에 간 등지손권이 압박하기 위해 근위병을 둘러세우고 큰 솥에 기름을 끓이는 팽형 퍼포먼스로 압박하려 한 장면이 나온다.

따라서 굳이 팽형을 가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상술한 여러 문제점들을 감수하고서라도 죄인이 고통 속에 죽는 것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다고 해석되므로 이런 형벌이 자주 가해지면 폭군 소리를 듣게 되었다.

3. 시행 사례들

잔혹한 형벌로 악명높았던 상나라에서는 인신공양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데 별의별 방법을 다 사용했고, 이 과정에서 팽형도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을 멸망시키고 들어선 주나라에서도 이 형벌은 사라지지 않고 제애공이 참소를 받고 끌려와 팽형에 처해지는 등의 기록이 남아있다.

춘추전국시대초의 혼란기 때까지만 해도 상당히 흔하게 사용되었는지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송양공이 회맹에 늦은 증(鄫)나라의 제후를 삶아 죽인 일이라든가, 악양이 삶겨죽은 아들을 끓인 국물을 마셨다는 일화, 전국시대 의 경우 즉묵이란 지방을 다스리던 영주뇌물 받아 먹은 관리들을 세트로 전부 끓는 가마솥에 던져버렸다든가 하는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금의야행의 고사에서 항우를 가리켜 "초나라 놈들은 원숭이 새끼가 갓 쓴 거나 똑같다더니 진짜구나(楚人 沐猴而冠)"라고 비난한 한생이 기름에 튀겨져 죽은 일이 있고, 세객 역이기가 제왕을 설득시켜 무장해제시키고 항복 문서에 도장만 찍으면 되는 상황에서 공을 빼앗기게 됨을 시기한 한신이 제에 쳐들어가자 역이기는 정확히 이 형벌을 당했다.

이시카와 고에몽이 기름 끓는 가마솥에 던져져(釜茹で; カマユデ, 카마유데) 최후를 맞았다고 하는 기록을 시작으로 일본에서는 비교적 최근까지 시행했던 형벌로 보고 있다. 사츠마류큐 왕국을 침공하여 복속시킬 때, 끝까지 무릎을 꿇지 않았던 류큐의 대신 쟈나 웨카타 리잔(謝名親方利山)을 팽형에 처했다.

일본에서 직접적인 처형은 아니고 고문의 형태로 이뤄지기도 했다.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할 때 쓴 방법 중 하나가 끓는 온천수에 신자를 넣었다가 빼는 걸 반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지고쿠 세메'(地獄責)라고 부른다. 온천으로 유명한 나가사키현 운젠시에서 이런 고문이 많이 이뤄졌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3일을 버티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가혹한 고문이었다고.

몽골에서도 실시한 예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13익 전투 이후 자무카가 13익전투에서 테무친을 패주시킨 후 테무친의 편을 들었던 치노스족의 남성들을 솥에 삶아죽인 것이다. 하지만 치노스족은 몽골에서 권위있는 씨족이었던데다 처형방법 또한 상당히 잔인해서 이후 초원의 많은 부족들이 테무친 편으로 돌아서게 되었고, 결국 자무카는 테무친에 패배하게 된다.

영국에서도 헨리 8세 치세에 통과된 "독을 이용한 범죄에 대한 처벌법(An Acte for Poysoning)"에 따라 시행되었다. 첫 사형수는 리처드 루즈라는 이름의 요리사로 로체스터 주교 존 피셔와 그 가족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대역죄를 적용 받고 팽형에 처해졌다. 실제로 주교의 집에 온 손님과 하녀가 그가 요리한 음식을 먹고 죽었고, 주교는 입맛이 없다며 먹지 않아 살 수 있었다. 당시 피셔 주교는 아라곤의 캐서린의 지지자로 이미 헨리 8세의 눈밖에 난 상태였으나[4], 헨리 8세 본인이 평생 독살에 대한 병적인 공포에 시달려온터라 루즈를 가혹하게 처벌했다. 리처드 루즈에 이은 두 번째이자 마지막 희생양은 역시 독으로 사람을 죽인 마가렛 다비라는 여자였다. 이후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자 곧바로 폐지된다.

현대에 들어서도 공식적인 처벌은 아니지만 사례가 있다. 이디 아민 집권 시기의 우간다에서는 죄수들을 차가운 방에 놔뒀다가 물로 채운 방으로 옮긴 뒤 그 물을 전기로 가열하는 방식으로 팽형을 집행했다고 하며, 페루의 반군 빛나는 길도 잡은 사람을 물에 삶아 죽이기도 했다. 2002년우즈베키스탄의 무자파르 아바조프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라는 이유로 체포된 후 끓는 물에 담겨지는 고문을 받다가 숨졌다. 그의 사체는 온 몸에 화상을 입은 건 기본이고 머리 뒤에는 피투성이의 거대한 상처가 있었으며 손발톱은 모두 빠져 있었고 이마와 목은 멍들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에티오피아의 독재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멕시코마약 카르텔, ISIS는 사람을 끓는 기름에 넣어 죽이기도 했다. 또한 ISIS는 사람을 끓는 타르에 넣어 죽이기도 했다.

미국 뉴욕에는 팽살과 관련된 도시전설이 있다. 중국 삼합회이탈리아 마피아가 한창 세를 다투던 시절에 어느 아침 차이나타운과 이탈리아타운의 경계에 거대한 솥이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마피아들이 호기심에 열어보니 행방불명이 되었던 모 마피아 행동대원이 잘 삶아진 채 들어있었고 마피아가 삼합회에게 세를 넘겨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4. 조선의 팽형

4.1. 개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사료에 단 한 건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TV에서는 종종 "조선 시대탐관오리를 처벌할 목적으로 중국처럼 팽형을 했지만 조선의 팽형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닌 명예형의 개념"이라는 이야기가 방영이 되곤 했다. 그러나 근거가 되는 사료의 제시는 하지 못하고 있으며 유일하게 확인되는 사료는 조선총독부 관료가 정리한 조선의 형벌체계에 관한 짤막한 에세이 하나가 전부다. 자세한 건 아래 내용으로.

조선의 팽형에 대한 상상은 1980년대 윤승운 화백의 만화 '얄개서당 자고로 훈장님'에 실려서 널리 알려졌다. 방송에서는 스펀지[5]지식채널 e[6]에서 한 번씩 다뤄진 적이 있으며,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에피소드 하나를 할애해 따로 다룬 적이 있다. 여기서는 당한 사람이 정말 자신이 죽은 줄 알고 기절했다.[7] 무적핑크조선왕조실톡에서도 다룬 적 있고, 이규태[8] 역시 따로 언급한 적이 있다. 뇌섹시대 - 문제적 남자 157화에도 문제로 나왔다.

4.2.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집행 방식과 취급

지금까지 각종 미디어에서 소개되었던 조선식 팽형의 집행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포도청 앞의 혜정교에 커다란 가마솥을 설치하여 형을 준비한다. 죄인을 그 가마솥 앞에 앉혀놓고 팽형을 하겠다고 선고한 후, 가마솥을 내 오면 집행인들이 죄인을 가마솥에 넣고 잠깐 끓이는 척했다가 도로 꺼낸다.

이 부분에서 묘사가 많이 갈리는데, 장작을 넣고 불을 피우는 척한 뒤에 아무 것도 없는 빈 가마솥에 죄인을 잠깐 넣었다가 뺀다, 미지근한 물을 적당히 채우고 죄인을 잠깐 넣었다가 뺀다, 종이 한 장 넣고 태운 다음 그 재가 남아 있는 가마솥에 죄인을 잠깐 넣었다가 뺀다 등 다양한 변형이 존재한다.

악질 탐관오리에게 내리는 형벌이었으며, 다행히 당대의 조선에서는 끔찍한 형벌을 최대한 자제했기 때문에 실제로 죄인을 삶아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냥 목숨만 살려 주는 것일 뿐, 죄인이 가마솥에서 나온 시점부터 공식적으로 사망자로 취급했으므로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무시무시한 형벌이었다. 죄인의 유가족 또한 정말 상을 당한 것처럼 열심히 통곡하고 장사를 치러야 하는 것은 물론이요, 시묘살이제사까지 지내야 했다. 죄인에게 말도 붙일 수 없는 것은 덤.

당연히 죄인도 고인으로 간주되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해 밖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며 식사도 몰래 알아서 해결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자기 집의 방 한 칸에 사실상 감금되어 살면서 어떠한 편의도 받을 수가 없을뿐더러, 대놓고 주변 사람들의 놀림을 받으며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부인과 정을 통해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는 사생아가 되며, 조선 말기에는 몰래 돌아다니다가 놀림거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9] 게다가 공식적으론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범죄를 당하더라도 전혀 호소할 곳이 없었는데, 이 형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민초들의 원한을 잔뜩 산 탐관오리였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보복을 당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는 명예가 현대 이상으로 중요했기에 이 형벌을 받은 사람들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해도 거의 100%가 차라리 죽는 쪽이 나았을 거라며 후회했다고 하며, 팽형을 선고받았을 때 자살하면서 명예를 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4.3. 비슷한 사례

이러한 취급은 고대 중국에서 행해졌던 궁형과 비슷하다. 당시 이 형벌을 받은 죄인은 궁형과 대벽(참수) 중 어떤 형을 받을지 선택할 수 있었다. 전자는 고자가 되고 생은 포기하지 않는 대신 명예가 영원히 죽어버리는 형벌이었고 후자는 생을 포기하는 대신 명예를 지킬 수 있는 형벌이었다. 즉, 궁형과 마찬가지로 팽형도 죄인에게 "생명명예 중 하나 골라 포기해라"고 선택권을 주는 셈이다. 팽형은 죄인이 삶에 대한 애착으로 모든 명예를 포기함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퍼포먼스인 것이다. 다만, 사마천이 궁형을 받고도 사기를 써서 남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대우면에서 궁형은 그래도 팽형보다는 취급이 한참 낫다. 다만 궁형은 당하고도 감염으로 죽을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죽이진 않아도 사회적으로 매장시킨다는 점에서 파문하고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숙청 중에서도 죽이거나 형별을 주지 않는 단계의 가벼운 숙청도 이와 비슷하다. 일례로 소련이나 북한 등에서의 숙청은 죽이거나 교화소를 보내는 사례가 많지만, 숙청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죽이거나 형벌만 보내는 것은 아니고 강등 또는 좌천되거나 직위해제 당하는 수준도 포함해 숙청이라 한다.[10] 이렇게 살아서 숙청당하는 경우는 자신이 쌓아 온 영예를 모두 삭제당하는 기록말살형까지 같이 받는 경우가 많으므로, 죽지만 않는다 뿐이지 살아도 산 게 아닌지라 조선 시대의 팽형과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 별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신이 힘들게 쌓아 온 영예를 모두 말살당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참을 수 없는 치욕이며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4.4. 논란

4.4.1. 정말로 시행되었는가?

팽형에 처했다는 미디어 방영은 상당히 많은 데 비해 조선왕조실록에 실제 집행한 사례로 기록된 건수는 단 한 건도 없다. 실록에서 팽형과 관련된 기사는 춘추전국시대 당시 탐관오리를 팽형에 처했다는 고사를 들먹이며 부정한 관리를 처벌하라는 주청 정도가 대부분. 실록에 처음 팽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단종실록으로, 상벌에 대해 논하면서 제나라 위왕이 팽형을 시행했음을 예시로 드는 부분이 존재한다. 이후로도 팽형과 관련된 이야기는 대부분 이 패턴을 따른다.

연산군이 진짜 사람을 삶았다는 주장도 있으나 역시 연산군일기에는 팽형과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지 않으며, 엉뚱하게도 영조실록에 관련된 내용이 존재한다. 사간원의 사간 조태언이 상소문에 영조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을 해 대노한 영조가 팽형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 때는 미디어에서 말하는 명예형이 아닌 진짜로 삶아 죽일 것을 전제한 발언이었고 신하들의 계속된 상소로 유배 정도로 그쳤다.

애초에 이 팽형에 관랸된 자료와 일부 매체에서 말하고 있는 '조선말기 외국인의 목격담'은 모두 조선총독부 관료인 나카하시 마사요시(中橋政吉)가 집필하여 1937년에 조선총독부 법무국 치형협회(朝鮮總督府法務局內 治刑協會) 명의로 출판한 약 24쪽의 에세이인 '조선 옛 시절의 형벌 행정(朝鮮舊時の刑政)'[11]에 기록된 걸 근거로 하고 있다. 본문에 따르면 나카하시 마사요시는 직접 팽형을 목격하여 서술한게 아니며 단지 본문의 가장 말미에 '참고'로서 "생명형도 신체형도 아니고 오히려 웃긴 일에 비등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에세이는 조선 시대의 사형 방법을 가볍게 소개하는 글로, 구전과 각종 루머에 기반한 단순 에세이라 정확하지 않은 기술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목을 졸라 죽이는 액형을 설명하면서 태조 이성계고려의 신하를 처형하는 기록을 예시로 들고 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고문과 인권 탄압으로 악명 높았던 서대문 형무소 소장을 역임한 나카하시 마사요시가 명예형을 '신사적인 것'이라고 여겼을 근거 자체가 없다. 또한 팽형의 신사적인 모습을 일본이 의도적으로 은폐하였다면 반대로 흔히 알고 있는 잔인한 팽형이 실재했다고 기술한 동국여지승람이나 한경지략 같은 조선시대 사료의 신뢰성이 올라간다는 문제도 있다.

무엇보다도 포도대장까지 몸소 참관할 정도로 큰 이벤트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포도대장이 아무 이벤트에나 얼굴을 내밀지 않는 고관대작임을 감안하면 아무리 부실한 고종실록이라고 해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건 상당히 수상하다. 물론 일본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기름에 끓여 죽인 예가 많았으므로 조선의 팽형이 상대적으로 신사적인 명예형이란 걸 알고서 은폐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나, 위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명예형으로서의 팽형을 소개하는 사료는 오직 나카하시 마사요시의 기록 하나 뿐이며, 나카하시 마사요시는 팽형을 신사적이라고 소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웃긴 일"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조선왕조실록에는 실제 시행 사례가 없고 서대문 형무소장을 역임한 조선총독부 관료의 기록 하나에 의지한 카더라성 정보가 대한민국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꼴인데,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 역사학자들이 확실하게 진위 여부를 고증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이와 관련된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아서 이 문제가 해결될 기미는 도통 보이지 않는다. 가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전공 교수들이 터무니없는 일이라며 일축했다는 카더라도 많이 돌고 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이마저도 제대로 된 출처가 없으며 심지어는 어떤 학교인지조차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방송에도 자주 나왔고 만약 사실이라면 한반도의 법률 역사에 있어 꽤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 뻔한 컨텐츠인데도 불구하고, 관련 연구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인데다 잘못된 정보들이 대놓고 방송을 타는데도 별다른 해명 움직임이 전혀 없는데 그 이유조차 아무도 모른다는 해괴한 상황이 거의 10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전문가들도 기다 아니다 단정적으로 얘기하기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다. 역사학법학의 경계에 놓인 법사학의 영역이라[12] 조선시대 팽형 구전의 사실 여부를 판별하기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4.4.2. 당사자 대우 관련

현실적으로 정말 가족조차 죽은 사람 취급하는 극형이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다. 감시를 붙이지 않는 이상 이 형이 제대로 집행되고 있는지를 알 길이 없으며, 아무리 감시가 철저하더라도 허점이 너무나 많기 때문. 유형 문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듯이 외딴 곳에 유배된, 특히 극심한 죄를 지은 자일수록 격오지에서 거지처럼 시름시름 앓다 생을 마감하는 일이 허다했다. 유배보다도 못한 상황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팽형이라는 특이한 형벌에 대해 간단한 논의조차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부모나 자식이면 그 어떤 인간 말종이더라도 귀히 대접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인간이고, 특히나 효가 강조된 당시 사회에서 이를 더 강하게 인식하면 했지 모르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팽형을 받은 죄인을 공식적으로 죽은 것으로 취급하고 부모, 자식, 친인척들 모두 당사자를 투명인간 취급한다는 게 가능할지는 사실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서도 현대와 마찬가지로 가족간의 유대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고 이런 명예형을 받는 죄인은 대부분 평민도 아닌 양반들인지라 아무리 팽형을 받은 죄인이라 해도 집안의 하인들까지 당사자를 무시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양반의 아들이나 양자등 후계자들이 아랫것들이 팽형을 받았다고 한들 자신의 친부를 무시하는 것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게다가 진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연고가 없는 다른 지역으로 가기만 하면 사회적으로 멀쩡히 활동할 수 있으니 형을 집행한 의미가 전혀 없게 된다. 이를 해결하려면 그 죄인을 전담하는 관리가 붙는 방법밖엔 없는데, 문제는 '이미 죽은 사람한테 왜 관리가 붙어서 감시를 해야 하는가?'라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

애초에 이러한 형벌은 명예형으로 당사자의 사회적 지위, 법적 주체로서의 권한을 박탈함으로써 사건에 대한 처벌을 모두 끝내는 것이다.[13] 즉, 그 이상의 처벌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령 실제로 존재한 형벌이었다고 해도 현실적으로는 죄인을 관직에서 퇴출함과 동시에 가문의 재산권을 죄인의 친족들에게 강제로 승계하고, 당사자는 조용히 집안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평생 자숙 상태로 은거하는 영구 가택연금에 가까운 처분이었을 것이다.

5. 가상매체에서의 등장

5.1. 사형

5.2. 명예형



[1] 헨리 8세 시기에는 최대 2시간 동안 삶아지며 죽은 죄수도 있었다고 한다. #[2] 현실적으로는 그냥 가마솥 뚜껑을 손잡이와 같이 묶어놓기만 해도 되었다. 천연 섬유라고 할 수 있는 셀룰로오스의 발화점은 400도 이상으로 매우 높기에 불만 닿지 않게하면 의외로 잘 버틴다.[3] 조선시대 당시 어린아이들이 부르고 다니던 노랫말 중 가장 먹고싶은 것이 참기름에 말은 밥 한 숟갈이었다. 즉, 일반 서민들은 먹을 엄두도 못낼만큼 비싼 게 기름이었다는 것. 특히 전기가 없던 옛날에는 호롱불 빼면 불을 밝힐 수단이 없었으니 더욱 귀할 수 밖에 없었다.[4] 실제로 이후 헨리 8세에 의해 처형되고, 가톨릭 순교자시성된다.[5] 124화 분량.[6] 방영분량을 재편집한 자료에 나왔으며 이후 이때의 자료들을 손석희의 앵커브리핑에서 그대로 써먹었다.[7] 여기서 맨 마지막에 일본의 이시카와 고에몽의 삽화를 집어넣는 병크를 저질러 욕을 푸짐하게 얻어먹었다.[8] 단, 이 사람은 일제강점기 이후 세대고 전문적으로 민속학이나 사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었다. 해방 후 잠깐 퍼진 부분적인 악습을 마치 조선 시대 때부터 전해온 전통이라 포장한 경우는 물론, 굉장히 고증을 어기는 경우가 많으니 주의할 것. 씨받이 문서 등을 비롯하여 실제와 다른 서술이 많았다.[9] 이 같은 경우에는 탐관오리였던 아버지를 증오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강하여 독기를 품고 과거에 합격한 후 관직에 나아가서는 일체의 사리사욕과는 철저하게 담을 쌓는 관리들도 많았다고 한다.[10] 이렇게 좌천되는 방식의 숙청을 당한 사례 중 하나가 심영이라고 한다.[11] 中橋政吉, <朝鮮舊時の刑政>, 朝鮮總督府法務局內 治刑協會, 1936, 179-203면.[12] 게다가 현재 우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법 체계에 뿌리를 둔 법 체계로 갈아탄 지 오래라 조선시대 법 체계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이런 상황인지라, 조선시대에 대한 역사학적 이해, 법 체계 일반에 대한 법학적 이해, 게다가 한문이두에 대한 이해까지 갖춘 상태에서, 제한된 사료들을 가지고 잊혀진 법 체계와 실제 적용 사례들을 파악해야 하는데 이건 전문가라도 쉽지 않은 작업일 것이다.[13] 왕이 당사자를 증오해서 정말로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굳이 팽형과 같은 번거로운 방법 대신 처형하거나 사약을 내리면 그만이다.[14] 동탁은 실제로도 이연이민 등 원소를 따라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장수들을 붙잡아 끓는 기름으로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15] 효수, 팽형, 도모지, 투석형, 거열형[16] 만화판에서는 토막은 안 내고 기절시켜서 넣는 것으로 조금 순화시켰지만 삶아진 모습은 피부가 괴사한 건 둘째치고 머리는 더 하얗게 샜고 눈을 허옇게 뜬 채로 죽어 있는 등 꽤나 그로테스크하다. 만화판을 기반으로 한 애니판에선 너무 잔인했던지 애기가 되어버린 것으로 더 순화했다.[17] 이 때 메데이아가 사용했던 솥이 후에 컵자리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18] 발은 죄인이라 도주 방지를 위해 당연히 맨발이었고 그 상태로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걷다보니 자연스럽게 발은 피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19] 이마에 문신을 새기는 형벌이 존재하기 때문에 허구의 묘사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자자형은 애당초 다른 형과 복합적으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옳은 기술이 아니다. 하지만 본문의 팽형이 허구일 가능성이 부정되지는 않는다.[20] 이 작품에서 팽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제주도의 아전 '윤관영'으로, 사또와 결탁하여 자기가 팽형을 당하는 대신 돈을 받아서 육지로 나가려고 하였다. 제주도가 육지와 단절되어있어 제주도에서 죽은 사람 취급받는 대신 육지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전이 팽형을 당하는 이유가 흉년이 들었을때 육지에서 지원받은 횡령했기 때문이라 팽형을 당한 뒤 제주도 사람들에게 돌팔매를 맞고 죽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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