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운 尹勝雲[1] | |
출생 | 1943년 8월 25일 ([age(1943-08-25)]세) |
함경북도 종성군 | |
본관 | 파평 윤씨 |
직업 | 만화가 |
학력 | 효창국민학교 (졸업) 선린중학교 (졸업) 은광고등학교[2] (졸업) 연세대학교 농업개발원 (낙농과 / 수료) 성균관대학교 사회교육원 (한문연구과정 이수) |
종교 | 개신교 |
장르 | 역사, 명랑만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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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만화가.《맹꽁이 서당》에 등장한 오너캐.[3]
2. 생애와 경력
《맹꽁이 서당》의 만화가. 순천대학교 만화 예술학과 전임 강사 겸임.한국의 2세대 만화가로, 어릴 적 부친이 퇴근길에 사다 준 만화책 두 권이 계기가 되어 만화가가 될 꿈을 키웠으며, 안타깝게도 그의 아버지는 6.25 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가 불명이라고 한다. 이후 큰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년 시절 효창공원 주변에 살았는데 백범 김구의 사회장을 6살 때 목격했다고 한다.
1963년 《아리랑》 잡지에 《자선영감》을 게재해서 데뷔했다. 1970년대에는 아동용 명랑 만화를 주로 그렸으며, 1983년에 《보물섬》 잡지에 9년간 역사 만화인 《맹꽁이 서당》을 연재했고, 후에 만화책으로 출판되었다.
역사 만화를 그리게 된 계기가, 우연히 젊었을 적 친척 할아버지 집에 본 역사책을 읽고 흥미를 가져 역사 만화를 그려 지금까지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어수선한 듯하면서도 일견(一見) 정돈된 그림체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 데뷔해서 길창덕 화백 눈에 띄어 신문수, 오원석 화백과 젊은 시절 같은 화실을 쓰며 만화를 그렸다. 이때 만난 앞 두 화백과 더불어 박수동, 이정문 화백 등과도 친해 지금도 여행도 가고 같이 어울리는 사이라고.
윤화백의 만화책 《겨레의 인걸 100인》은 서울시 600년을 기념하는 타임 캡슐에 같이 묻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으며, 이 작품으로 문화부가 제정한 '한국 만화 문화상' 제1회 저작상 부분을 수상했다. 심사 위원들로부터 "독창적인 화법과 화기(畵技)를 지니고 있어 창작 만화로서 우수할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교육성을 겸비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만화를 학습 저해의 요소로 평가하는 한국 교육계에서도 그의 만화는 교육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디딤돌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화백의 필치로 재탄생시킨 만화가 실릴 정도다.
하고자하는 의지가 대단해, 서재에는 3천권이나 되는 고문서와 역사 자료들이 빼곡히 쌓여있으며[4], 한자에 대한 사랑도 대단해 성균관대학교에서 독학 끝에 한문 연수 과정을 수료했고, 유명한 역사 유적지를 직접 방문하는 열정도 보였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지극해서 시작한 것이 《맹꽁이 서당》이며, 어릴 적 목욕탕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에서 모티브를 얻어 연재한 것이 《꼴찌와 한심이》가 있다.
애견들이 상당히 많은데 주로 등장하는 개들은 지인이 준 개 두 마리, 해피와 설리번. 이들을 항상 표지 서두에 그리며, 보신탕을 못 먹겠다고 하소연(?)한 적이 있다….
역사 만화, 명랑 만화 외에도 종교(특히 불교)에 대한 지식도 매우 해박해, 항상 그의 만화에는 고승들의 얘기가 그려져 있고, 증산도나 천도교, 대종교나 갱정 유도 같은 민족 종교들도 만화로 다루었다. 또한 천주교 계열 잡지인 《소년-내 친구들》에도 장기간 연재를 했으며, 개신교 매체에서도 관련 만화를 그렸다.
매우 겸손하여, 만화에서 자주 자신을 환쟁이로 칭하거나 자신은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막상 만나본 사람들에 의하면 매우 아는 것이 많다고...[5] 아마도 만화를 그리면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연구해온 덕분인 것 같다.
만화 외적인 활동으로 2000년부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윤리 위원을 3년간 맡았다.
3. 역사관
3.1. 야사 위주의 기존 역사관 고수
역사를 보는 시각에서 어느 정도 비판의 소지가 있는데,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역사를 공부한 것이 아니라서 야사를 마치 진짜 역사처럼 묘사한다거나, 오류가 여러 군데 보인다.맹꽁이서당 같은 옛날에 나온 책들은 광해군을 별다른 근거 없이 폭군으로 묘사했는데 심지어 어떤 책에선 연산군보다 더한 충혜왕과 동급인 폭군으로 묘사했으며 인조를 미화해 놓았다. [6] 정조가 오래 살았으면 한국이 일본보다 먼저 개국(開國)했으리라는 말도 나왔고, 임금 몸에 쇠붙이인 침을 놓지 않아서 사망했다는 식으로 설명한 부분도 있다. 임오화변의 원인도 사도세자가 당쟁에 휘말려 영조가 판단을 잘못하여 살해당했다는 당쟁 희생설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리고 시조 문학에 큰 족적을 남겼어도 정치인으로서는 그냥 탐관오리였던 정철을 지나치게 띄워줬다는 평도 많다. 물론 해당 서적에서 정치인으로는 0점인데, 문인으로서는 100점이라는 말을 첨언했다.
또한 앞서 언급된 《겨레의 인걸 100인》에서도 그 유명한 허준의 이야기를 그릴 때, 대놓고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의 이야기를 따르겠다고 서두에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드라마와 소설로 이은성의 픽션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그것을 따른 것. 서두에 작가 본인이 분명히 언급했으므로, 이를 놓고 작가를 탓하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
거기다가 《삼국유사》를 만화화하면서, 정작 삼국유사의 내용 분량은 극히 소수이고, 대부분을 《환단고기》로 점철해버렸다. 그리고서는 그것을 참 역사라고 서술했다. 심지어 일연도 환빠로 묘사했다. 일연은 최소한 환빠는 아니다.(…)
비록 역사물은 아니지만, 《탐험대장 떡철이》에서는 조선 시대에는 중국과 일본 밖에 모른다고 오류가 나와 있다. 정확히 떡철이가 꿈에서 조상을 찾아가 신대륙을 찾아 우리가 거기 차지하자는 말했는데, 조상이 "바다 건너에는 왜(倭) 밖에 없지 않느냐?" 라고 말한다. 이는 오류인데, 일본 말고도 동남아 등에 대해는 조선 초부터 그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은 이미 고려나 신라 시대 때부터 아랍 및 동남아 나라들과 무역도 하고, 특정 구역에 이들이 머무르기도 했으니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세종 초기에 아랍 무슬림들이 조선에 와서 거주하거나 무역을 하던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다. 심지어 조선 초기에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도 만들어졌다.[7] 그리고 《징비록》을 보면, 명나라 군에 흑인 병사가 있는 걸 보고 조선 대신들이 처음 보는 인종이라고 놀라는데[8], 명나라 사람들이 양인(洋人)들이 있는 대륙 남쪽에 이런 흑인들이 많은 대륙이 있다고 하자, 양인(洋人)들에 대해서는 조선 측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데 저런 검은 사람은 처음 본다는 반응이 나온다. 16세기 ~ 17세기에는 선교 등을 위해 중국에 와서 머무르던 선교사나 양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 조상이 세계사를 잘 모르는 무지렁이라고 하면 어떻게 이해는 될거같으나 떡철이 말을 듣고 조상이 조정에 탐험을 보내 그 땅 차지하자는....떡철이 말대로 하다가 상부에서 그런 땅 없는데 무슨 헛소리냐며 조상이 조정에서 밉보여 벼슬에서 내쫓겨나 조선 조정이 아예 중국과 일본 밖에 모른다는 설정이다.
3.2. 역사관에 대한 변호
다만 이러한 단점들은 작가가 활동한 시기가 1980년대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윤승운 화백이 한창 현역으로 있을 때에는 사료(史料)로 인용할 만한 물건이 《연려실기술》 정도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거의 연구자들의 전유물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시대였으니, 자료 찾는 것부터가 어려운 현실 속에서, 사학자도 아닌 만화가에게 정확한 역사적 고증 및 사실 전달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부터가 너무 가혹한 처사다.게다가 당시 국풍81 등의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대두되고, 환 사관이 힘을 얻고 있었던 시기였다. 해동검도가 이 시류에 영합해 크게 흥했듯이,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그랬고, 결정적으로 국가적인 단체인 육군사관학교에서조차 '일만 년 역사 웅비하는 한민족' 같은 슬로건을 내세울 정도였으니, 이쯤 되면 윤승운 화백 본인의 역사관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기보다는 당시 시류에 따랐을 뿐이다.
더욱이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여러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미뤄 볼 때, 장희빈 건 같이 평가가 현대와 다르다는 것으로 작가를 비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작가가 묘사한 것이 당시 주류 사학계에서 인정하는 정론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당시 각종 교과서, 학술서 등도 다 마찬가지였다. 즉 작가의 역사관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집필할 당시의 사관(史觀)이나 시류를 따랐을 뿐이라는 게 맞다. 일단 이 분은 만화가이지 역사학자가 아니니 말이다. 적어도 낡은 사관을 고집하고 이를 지적하는 것조차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비난으로 받아들이는 유사역사학보다는 훨씬 낫다.
오히려 이 때문에 현대의 노론 음모론보다 더 나은 묘사도 여럿 등장한다. 가령 송시열을 대범하고 충성심 강한 큰 인물로 묘사하고, 임오화변의 원인도 이덕일 식의 노론 음모론과는 달리 단순히 신하들 간의 정쟁 자체에서 찾으며, 실질적으로 사도 세자를 죽게 한 것은 영조 본인의 행동으로 보고 있다. 이런 해석은 이덕일 이전부터 주류 학계에도 등장했던 학설이다.
또한 광해군 재평가에 부정적이었다는 것도 최근에는 오히려 재평가의 대상이다. 광해군 재평가론은 맹꽁이 서당이 연재되던 시절부터 존재하여[9] '중립 외교의 현군'으로 재평가하자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강했으며,[10] 특히 당시 노태우, 전두환 임기 시절에는 북방 및 동구와의 '중립 외교'에 지나치게 우호적인 이데올로기가 강했기에 광해군 역시 그 시류를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윤승운은 중립 외교는 좀 잘 했다고 인정했을 뿐[11] '광해군은 세자 시절에 겪은 불합리함으로 정신이 망가졌고,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게 된 혼군에 불과하다' 라는 기존의 평가를 철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오늘날 다시 광해군은 '역시 무능한 혼군이자 폭군에 불과했다' 라는 최종 결론이 돌고 돌아 원상태로 돌아왔고, 오히려 당시의 사관에서도 핵심을 잘 짚어낸 만화가로 재평가를 받았다.
또 윤승운의 역사물에서는, 당대의 다른 학습 만화나 역사 만화 등에서는 채 인식하지도 못한 부분을 제대로 잡아내 그려낸 경우도 여럿 있다. 작가가 즐겨 그린 암행어사 만화에서는 암행어사의 온갖 현시창적인 부분을 꽤 세세하게 묘사했다. 1980년대의 암행어사 만화에 탐관오리들이 암행어사가 비리를 눈치채지 못하게 별별 짓을 다 한다거나, 심지어 탐관오리가 먼저 암행어사를 제거하거나, 반대로 타락한 암행어사가 뇌물을 받아먹고 비리를 눈감아주거나,[12] 임지로 향하던 중 도적의 습격을 당하거나 호환을 당했다거나 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현실에서 암행어사가 암행 중 사고를 당하는 일은 거의 없긴 했지만, 어쨌건 대중들이 생각하는 암행어사 이미지가 박문수나 춘향전의 이몽룡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시절에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캐치하는 등 은근히 디테일이 살아 있다.[13]
야사 위주라고 까이는 《맹꽁이 서당》에서도, 세종 시대는 국가 기틀 잡느라 완전한 태평성대는 아니었고, 성종 시절이 태평성대였다는 식으로 당시 사회상을 정확히 묘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맹꽁이 서당》의 표지에서도 작가가 분명히 조선 왕조 500년 야사임을 분명히 표기해놓았다는 점이다. 이는 최초 《보물섬》 연재 당시에도 그랬다. 그러니 이 작품들을 야사 위주라고 비판한다는 것은, 마치 소설을 놓고 허구를 써놓았다고 비판,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1980년대에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다. 지금과 달리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자료가 떡하니 나오는 그런 시대가 아니였다. 이 때문에 윤승운의 부정확한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는 있어도 당시의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14]
다만 다른 것은 다 제치고도, 아직도 환단고기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은 바뀌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5] 또 경우에 따라서 우리도 어느 정도 국수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자는 의견을 내비추고 있다. 인터뷰 참조
4. 여담
- 그림체가 언뜻 그리기 어려우면서도 쉬워, 의외로 비슷하게 그리는 사람들이 많아 이런 패러디까지 존재한다.키라의 요술공책~ 악마의 요술공책과 키라 빨간안개 대소동원피스[16]
- 그림체 뿐만 아니라 역사 만화라는 소재까지 차용한 연재도 있다.
- 다만 그리기 쉽고 개성 있는 그림체인 대신에 캐릭터의 다양성이 거의 결여되어 있다. 수염과 복장과 주름을 제외하면 모두 거기서 거기기 때문에, 캐릭터 재활용이 어마어마하다. 애초에 캐릭터가 구분이 안 돼 있어, 그때그때 그리는 모양. 때문에 같은 인물이라도 나오는 책이 다르면 캐릭터도 달라진다.
- 캐릭터의 감정을 눈을 통해 표현하는 특유의 연출법을 사용한다. 눈은 항상 둥근 바탕인데 놀라면 눈에 8이 뜨고, 지치거나 몽롱하거나 하면 X이 뜨는 식이다.
- 작가의 성이 윤 씨라서인지 몰라도, 윤 씨 성을 가진 인물들[17]이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든가, 또는 그 수가 많다. 더불어 윤 씨 성 가진 이가 역사적으로 말아먹으면 오너캐가 나와서 부끄러워하거나, 윤 씨 성 가진 권력자의 악행에 지옥으로 가버렸다는 말로 분노했음을 보여준다. (윤원형이 그런 경우)
- 성인 만화를 한 번도 그린 적이 없는 만화가로 알려지긴 했지만, 완전히 안 그리진 않았다. 성인 만화 잡지 발간이 크게 유행했던 1990년대 초반에, 몇몇 성인 만화 잡지에 한국사의 여러 야담을 성인 취향으로 약간 야하게(?) 그려낸 것들이 좀 있다. 다만 라이벌 위치였던 박수동, 신문수 화백이 성인 만화에서 나름 크게 성공한 것에 비하면, 윤화백의 성인 만화 작품은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해 이후 별로 작업하지 않았다.
그림체를 봐. - YWCA에서 《맹꽁이 서당》이 80년대 유해 만화 도서로 뽑힌 황당한 일이 있다. 역사 만화인 이 작품이 유해 도서에 뽑힌 이유는 딱 하나! 그림체가 너무 이상해서 아이들 정서에 나쁘다고…. 그야말로 마음 내키는 대로 유해 도서에 올리던 YWCA의 칼춤이 돋보이는 증거[18]다. 웃긴 건 1994년에는 추천 도서 만화로 뽑아준 사실. 덕분에 박무직도 이런 사실을 가지고 여길 깠다. 또 다른 이유라면 맹꽁이 서당 학동들과 마당쇠가 저지른 말썽도 유해 도서가 된 원인으로 볼 수 있는데, 당시에는 애들이 만화를 보면서 말썽 부리는 것만 배우고 공부하기 싫어한다는 취지의 항의가 많이 있어서, 이때 연재 만화들은 이런 식의 항의를 받고 연재 방향을 급선회하거나 심지어 강제 종료까지 하는 일도 있었으니, 그 정도로 만화 출판물이 만만하게 보였던 시기였다.
- 만화 때문에 가출 청소년이 늘었다는 신문 기사 때문에 연재 작품이 조기 종료된 흑역사가 있다. 사실 윤승운의 작품이 직접 언급된 것도 아닌데, 당시 잡지 측에서 지레 겁먹고 종료시킨 것. 《소년생활》에 연재하던 《뱅뱅이 세계여행기》란 작품인데, 가출에 대해 훈계조를 띠면서 급히 마무리됐다. 줄거리는 애들끼리 가출해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인도에 도착, 세계 여행을 시작하는 이야기인데, 영국에 도착하자 갑자기 뜬금없이 영국에 유학 와있던 사촌 형이 나타나 부모님 걱정 끼쳤다고 엄청 혼나고 깨지면서 강제로 귀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비행기 안에서 다음 번에는 어느 어느 곳을 꼭 가봐야 겠다면서 아쉬워하는 컷도 있고, 분량도 비교적 적어서 다른 작품과 묶어 단행본으로 나왔다.
- 함경도 출신이라 그런지 동북 방언이 가끔 그의 만화에 섞이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아고야(=에고야)'와 '안ᄃᆦ(=안돼. '안돠'의 'ㅘ'에서 'ㅏ'를 'ㅑ'로 바꾼 것으로, 현대 한글로는 표기가 불가능하며, 굳이 쓰고 싶다면 옛한글로 써야 한다. 발음은 [ɐn.dwjɐ] 혹은 [j]로 인해 [w]의 전설화가 적용된 [ɐn.dɥɐ] 정도.)', '살콰주(=살려 줘)', '녬녜(=염려)', '낭구(=나무)'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만화 삼국유사》에는 '미치겠ᄄᅠ다'[19]('미치겠다'에서 '다'의 'ㄷ'을 세 개 겹쳐 표기)와 같은 표기도 등장한 바 있다.
- 사인을 하면 자신의 작품 속 캐릭터를 그리고(주로 맹꽁이 서당) 童心如仙(동심여선)이라는 글귀를 적는다. 이 말은 '아이 마음은 신선과 같다'는 뜻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의 묘비명이다.
- 실향민인데다가 전쟁 피해 세대다. 상술(上述)했듯, 아버지가 6.25 때 납북되어서 생사 불명이라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북한에 대해 유화적인 면모를 보인다. 북한 정권은 용서할 수 없지만, 가난한 동포를 돕는 것은 한민족으로 당연한 일이며 인도적으로 지원할 수 있으면 더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0][21] 다만 상술했듯이 북한 정권은 꽤 싫어하는데, 기독교 어린이 잡지인 《새벗》 1994년 크리스마스 특집 축전에, 김일성 사망이라고 크게 적어놓았고, 1980년대 국민 학교 시절에 팔던 반공 만화책도 신문수 같은 만화가랑 그린 바 있다. 작품 줄거리는 동네에서 망나니 짓만 해서 망난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던 또라이가 북한 가서 당간부가 되어, 6.25가 터지자 고향 마을로 돌아와 권력자처럼 행패를 부리다가, 주인공 꼬마 셋의 활약으로 연이어 망신당한 뒤 상부에게 찍혀 망난이는 북한군에게 끌려갔고, 마을에 한국군이 오면서 끝나는 단편이다.
- 일본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이러한 행보는 맹꽁이 서당에서 자주 보이는데, 일본이 조선 반도에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분노하는게 당연하나 과거와 현대 일본인 전체를 싸잡아서 교활하고 가증스러운 민족이라 표현하거나, 일본인(왜인)들을 묘사할때 돼지코에 간신배 같은 외모로 묘사한다. 특히 10권에서는 일본인을 혐오하는 단어인 쪽발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그대로 표출했다.
- 단어의 일부 글자를 발음이 같은 숫자나 로마자로 치환해 쓰곤 한다. 팔딱8딱[22]이라거나 'Aㅅ'(에잇=에이+ㅅ) 등.[23]
5. 저서들
- 《맹꽁이 서당》
- 《Hello! 만화로 보는 한국사》
- 《말썽도령 알봉이》
- 《돌이의 무전여행》 - 월간 보물섬 1983년 1월호에 게재되었고, 돈없이 전국 여행가면서 고생 실컷하는 국딩 돌이가 주인공, 단편.
- 《탐험대장 떡철이》 – 당시 《새소년》 연재
- 《겨레의 인걸 100인》 -
모 언론사의 잉걸과 관련 없다.한때 초기의 케텔에서도 만화 서비스에 이 만화가 일부 전재된 적이 있다. 물론 시절이 시절이라 그림이 뜨는 건 느렸지만. 이후 헬로! 만화로 보는 한국사로 변경된다. - 《꼴찌와 한심이》 - 이 한심이 캐릭터는 시리즈로 등장한다. 1980년대에 출간된 어떤 단행본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보면, 한심이가 크리스마스 연극에서 가롯 유다 역할을 맡았는데, 한심이의 할아버지는 이름이 왠지 간지 나게 들려서 손자가 훌륭한 사람 역할을 맡았다고 좋아하다가 가롯 유다의 실체를 알고는 실망한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어느 시골 마을 고등학교에서 가롯 유다 역할을 맡았던 학생은 훗날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을 탔다. - 《요철 발명왕》 - 공부는 형편없고 발명을 하겠다는 요철이와 약간 모자라는 듯한 그의 조수 맹물이가 벌이는 소동 이야기.
- 《나도 큰 인물이 될래요》
- 《아버지 떡 드이소》 - 조선의 효자들을 소개하는 만화.
- 《맹훈장과 꾸러기들》 - 본래 민서출판사에서 《맹꽁이 서당》의 일부 내용을 단행본으로 출간하여 제목만 변경하게 된 책.
- 《서당골 호랑이 훈장님》 - 맹훈장과 꾸러기들 처럼 일부내용을 단행본으로 출간하여 제목 변경.
- 《굼봉이》 - 어디서 왔는지 모를 굼봉이라는 초능력 소년이 말썽대장 좁쌀이와 같은 학교로 전학 오고, 둘이 친구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얼핏 《도라에몽》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는데, 웃기면서도 마치 동화를 그림으로 옮긴 듯 은근히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내용도 많다. 명랑 만화였음에도 마지막 회는 당시 국민학생들의 심금을 찡하게 울리기도 했다.
- 《날아다니는 바위의 전설》 - 맹꽁이서당 6권의 강심장 소금장수 강쇠가 이 스토리의 등장인물.
- 《천방지축 담봉이》 - 소년동아일보에 연재
- 《천재소년 달풍이》
- 《두심이 표류기》
- 《아슬아슬 발명왕》 요철발명왕 속편
- 《범말공소 할배》
- 《까막골 서당의 훈장님》
- 《갑골할배의 한자이야기》
- 《맹꽁이 인물열전》 - 초판은 '우리 겨레 위인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 《모험대장 칠갑이》 - 모험한답시고 설치다가 코가 뭉개진 꼬마 주인공이 나온다.
- 《서당개 누렁이》
- 《우리동네 왈식이》
- 《병길이 표류기》
- 《길동이와 오공이의 천방지축 모험기》
- 《고려 맹꽁이 서당》 - 맹꽁이 서당의 고려편.
- 《꼴찌와 한심이의 세계일주》
- 《날아다니는 바위의 전설》
- 《덤벙이 형제 만세》
- 《떴다 떴다 허풍호》
- 《말썽대장 김왈식》
- 《말썽도령과 덜렁쇠 하인》
- 《방랑시인 김삿갓》
- 《뱅뱅이의 세계일주》
- 《불가사리》
- 《서당개 누렁이》
- 《솔거 선생과 제자》
- 《암행어사 누렁이》
- 《우리동네 왈식이》
- 《철렁이》
- 《청개구리 글방》
- 《칠봉이 행진곡》
-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어떻게 살았을까》
- 《허풍이의 우주탐험》
- 《아찌야》 - 《새소년》 1965년 5월 ~ 11월호에 연재. 군인과 병마에 시달리는 어린이의 이야기로, 비극으로 끝나는, 흔치 않은 윤승운의 작품으로, 소설가 오영수의 동명의 작품을 만화로 각색했으며, 원전인 소설은 1965년 ~ 1982년, 국민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에 《아저씨》란 이름으로도 게재되었다.
[1] '승운'은 당나라 때 시인 왕발의 《등왕각서》 중 승우여운(勝友如雲)이란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뜻풀이하자면 '훌륭한 벗들이 구름처럼 모인다' 라는 뜻. 뜻은 저게 맞긴 한데, 작가의 만화인 《암행어사 한심이》란 만화에선 마당쇠가 '구름한테 이겨서 뭘 해?' 라고 까대는 셀프디스를 했다.(…)[2] 그가 재학할 당시 은광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이후 여고로 전환하면서 은광여자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3] 위 만화에서는 머리카락이 있지만, 근작에서는 대머리로 표현된다. 해당 그림은 맹꽁이 서당 6권으로, 서당 소풍으로 계곡에 놀러가서 물고기 매운탕을 했을 때의 장면. 이때의 소개 인물은 김수팽이다.[4] 상도를 쓴 작가 최인호와 둘이 사적으로 아는 사이였다. 최인호 생전 상도를 집필하기 위해 임상옥에 대한 자료를 찾던 중 윤승운의 서재에 관련 자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와 신세를 졌다고 한다.[5] 윤 화백은 연세대학교 농학과 출신이며, 정확히는 연세대학교 농업 개발원 낙농과. 평생 교육원 개념이니 일반적인 학부생은 아니지만, 당시 기준에서는 꽤 고학력이다. 별개로 한학을 배우기 위해 성균관 한림원에서 7년동안 수학하기도 했다. 사실 화백 본인이 회고한 바, 만화로는 먹고 살기 힘들고 평소 낙농에 꿈이 있어 그 쪽 관련 공부를 한 것이라고 한다. 일단 만화가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고 땅을 사 차차 귀농할 준비를 하려던 찰나 아버지같이 키워 준 평생 농부였던 큰아버지가 농사도 쉽진 않으니 이왕 한거 쭉 가라고 설득해 만화 쪽으로 못을 박았다고... 지금의 부인도 당시 농업 개발원 동기였다고 한다. 당시 만화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가득했을 때인데 대범하게 윤승운을 이 쪽 길로 이끌어준 큰아버지의 덕이 컸다.[6] 실록의 번역이 완료되고 관련 연구가 많아진 지금엔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광해군을 무턱대고 간신배 꾐에 넘어가 폭정을 휘두르는 암군으로 묘사했기 때문. 최근에 나온 Hello 만화로 보는 한국사에서는 조선을 다시 일으키려고 노력한 왕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반대파들을 죽인것과 궁궐공사로 재정파탄이 일어난건 여전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거 같다.[7] 물론 해당 지도에서 중국과 조선이 지나치게 크게 그려지긴 했으나, 유럽, 인도, 아프리카, 아랍 지역까지 묘사되어 있을 정도이다.[8] 명나라 측은 장난을 쳐서 이 흑인 병사가 총맞아도 웬만해선 안 죽고 물 속에서 숨도 한참 참고 잠수할 수 있으며 온갖 슈퍼병기인양 뻥을 쳤다.[9] 80년대 후반 방영하던 MBC 사극 드라마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편만 봐도 왜란 이후 조선을 지키자면 청을 편들어야 한다고 중립적으로 나서며 유배당한 광해군을 찾아온 강홍립(오지명이 연기)이 "전하의 안목이 맞았사옵니다! 전하를 폐한 자들이 망해가는 명나라를 편들었더니만 결국, 왕이 청 태종 앞에서 머리가 피나도록 절해야하지 않았습니까? 애당초, 청나라편을 들었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텐데!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당하고 이런 굴욕까지 당했사옵니다!"라고 한탄하는 게 나올 정도였다. 나중에 방영한 조선왕조실록-인현왕후에선 장희빈이 악랄하게 나와 비참하게 죽는 거와 대조적으로 적어도 광해군이 추구한 중립외교를 재평가해야 한다라고 내레이션도 나왔다.[10] 1990~2000년대 사이의 흑백 역사만화에서도 광해군이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인조에게 '나처럼 했으면 이럴 일은 없었지'라면서 조언하는 장면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비슷한 시기에 나온 웅진 애니메이션 한국의 역사에서는 이런 광해군의 중립외교보다는 임진왜란 시절의 분조가 강조되는데, 변태섭 교수가 감수했기 때문인 듯하다.[11] 사실 이나마도 광해군이 외교를 잘 했다고 칭찬하지 않았다. 인조가 정말 더럽게 못 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래도 광해군 때는 외교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라며 차라리 구관이 명관이다라고 했을 뿐이다.[12] 임술농민봉기에서도 암행어사 중에선 이렇게 탐관오리와 결탁한 부류가 있긴 있었다.[13] 우리 겨레 위인이야기 시리즈(現 맹꽁이 인물 열전 시리즈) 1권에 조심태가 술을 좋아하는 순안어사를 접대하다가, 그 행패를 참다못해 상소문을 올리고 관직을 반납했으나 정조가 이를 받아들여 순안어사는 파직되고 조심태는 복직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다만 이에 대한 당대 기록이 없고 도리어 조선왕조실록에 정조가 심기태에게 준 봉서의 내용이 공개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순안어사 이야기는 야사로 보인다.[14] 고우영 삼국지 역시 비슷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15] 당장 링크된 인터뷰 항목에도 강단 사학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16] 다만 굳이 그림 등에 안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해도, 윤승운 화백의 그림체가 아니라는 걸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 한계라면 한계이다.[17] 대표적으로 윤관. 근데 이분은 원래 중요한 분 맞다. 게다가 윤승운 화백 본인이 윤관을 조상으로 모시는 파평 윤씨의 후손이다.[18] 참고로 박수동 화백도 그림체가 이상해서 아이들 정서에 나쁘다는 같은 이유로 유해 만화에 올랐다.[19] [20] 탈북자들도 정치성향과 관계없이 절대다수가 북한지원에 동의한다. 자기 친족, 친지 등에게 조금이나마 이득이 되니까.[21] 사실 북한 정권을 증오하면서도 북한 주민들을 같은 민족으로서 동정하는 것은 기성세대들 절대다수가 공유하는 생각이다.[22] 한술 더떠서 팔딱팔딱 7딱9딱으로 쓴 적도 있다.(...)[23] 메밀꽃 필 무렵에는 노닥nodak도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