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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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3대 국군 太王 태왕 | |
성 | 희(姬) |
휘 | 단보(亶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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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공단보(古公亶父)[1]는 주족의 지도자이다. 성은 희(姬), 이름은 단보이다. 고공은 벼슬 이름.주문왕의 할아버지로, 주나라가 세워진 이후 태왕(太王)으로 추존되었다. 사실상 주나라(서주)의 추존 시조쯤 되는 셈.
희성 주족의 시조인 후직(后稷)의 12대 손이다. 또 전설상의 군주인 황제(黃帝)의 35대손이라는 말도 있다.[2]
2. 상세
공숙조류가 죽자 아들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자리에 올랐다. 고공단보가 후직과 공유(공류)의 사업을 다시 다스려 덕을 쌓고 의를 행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받들었다. 훈육(薰育)과 융적이 고공단보를 공격하여 재물을 얻으려 하자, 그들에게 내주었다. 얼마 안 있어 다시 쳐들어와 땅과 백성을 차지하려고 하자 백성들은 모두 분개하여 싸우고자 했다. 그러자 고공이 말했다.
"백성들이 군주를 옹립하는 것은 장차 자신들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오. 지금 융적이 공격한 까닭은 우리의 땅과 백성 때문이오. 백성이 나에게 속하든 저들에게 속하든 무슨 차이가 있겠소? 백성들이 나 때문에 싸우고자 한다면 이는 백성들의 아버지나 아들을 죽여 가면서 그들의 군주 노릇을 하는 격이니, 나는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소."[3]
이에 데리고 있던 하인들과 함께 마침내 빈 땅을 떠나 칠수와 저수를 건너고 양산을 넘어 기산 아래에 이르렀다. 빈에 살던 백성들이 모두 늙은이는 부축하고 어린아이는 손을 잡아끌고 다시 기산 아래 고공에게 몰려갔다. 또 이웃 나라의 많은 백성들도 고공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몰려갔다.
-사마천 사기 주본기 (김원중 역)
주족을 이끌다 야만 적인(狄人)에게 위협을 받자[4] 기산(岐山)[5]으로 희성 일족과 주민 천 가구를 이끌고 본거지를 옮겼는데, 마침 서쪽 지역 확장과 관리를 원하던 상나라에 의해서 이곳의 제후로 봉해졌고, 이곳은 희성의 본거지가 된다."백성들이 군주를 옹립하는 것은 장차 자신들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오. 지금 융적이 공격한 까닭은 우리의 땅과 백성 때문이오. 백성이 나에게 속하든 저들에게 속하든 무슨 차이가 있겠소? 백성들이 나 때문에 싸우고자 한다면 이는 백성들의 아버지나 아들을 죽여 가면서 그들의 군주 노릇을 하는 격이니, 나는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소."[3]
이에 데리고 있던 하인들과 함께 마침내 빈 땅을 떠나 칠수와 저수를 건너고 양산을 넘어 기산 아래에 이르렀다. 빈에 살던 백성들이 모두 늙은이는 부축하고 어린아이는 손을 잡아끌고 다시 기산 아래 고공에게 몰려갔다. 또 이웃 나라의 많은 백성들도 고공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몰려갔다.
-사마천 사기 주본기 (김원중 역)
쉽게 말해 북방 산악 지대에 살던 희성 주족을 관중 평야 지대로 다시 내려오게 해 상나라 속국 주나라로 재출발시킨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6] 본거지를 옮길 무렵 이미 고령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기에, 고공단보의 후계자는 삼남 계력(季歷)이 되는데, 이 계력의 아들이 주문왕이고, 문왕의 차남 무왕대에 가서는 기어코 상나라를 무너뜨리게 된다. 상나라 입장에선 호랑이 새끼를 들인 셈.
단보의 장남 태백과 차남 중옹은 아버지가 삼남 계력한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는 것을 알고, 남쪽으로 내려가 오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3. 여담
용비어천가에 이성계의 조상 목조 이안사는 여진족 땅에서 살다가 여진족에 쫓겨서 덕원으로 옮겨가는데, 이것이 고공단보가 적인에 쫓겨 기산으로 간 것에 비유된다. 이 장은 1990년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나온지라 고공단보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1] 마지막의 글자 父는 "부"라고 읽지 않고 "보"라고 읽는다. 父는 나이 많은 남자(男子)에 대한 경칭(敬稱)으로 읽을때는 "보"라고 읽는다. 上父가 상부가 아닌 상보로 읽는 것과 같은 이치.[2] 물론 후대의 미화가 첨가되었을 확률이 높다.[3] 有民立君, 將以利之. 今戎狄所爲攻戰, 以吾地與民. 民之在我, 與其在彼, 何異. 民欲以我故戰, 殺人父子而君之, 予不忍爲.[4] 다만 고고학적으론 선주시대 유적에 딱히 침입을 당한 흔적은 보이지 않아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이후 우연찮게 토벌이 된거거나 아니면 애초에 상나라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게 더 이득이라고 봐 이주했다고 보기도 한다.[5] 현 섬서성 바오지시 차산현(岐山县). 현재는 주원유지(周原遗址)란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으며, 근처에 주태왕릉(周太王陵)이라 알려진 무덤이 있다.[6] 그래서 후대 사서에선 주나라의 상나라 정벌 계획이 고공단보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뻥카를 치기도 했으나, 당시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주나라 후손들이 조상 띄울려고 무리수를 뒀다고 보는게 더 합리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