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 하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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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夏) 말대 국왕 걸왕 | 桀王 | ||
시호 | 걸왕(桀王) | |
왕호 | 이계왕(履癸王) | |
성 | 사(姒) | |
씨 | 하후(夏后), 하(夏) | |
휘 | 이계(履癸) | |
아내 | 말희(末喜) | |
아버지 | 발왕(發王) 사발(姒發)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1600년? |
재위 기간 | 기원전 1652년? ~ 기원전 1600년? (5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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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걸 때 공갑 이래로 제후들이 하를 많이 배반했는데 걸은 덕에 힘쓰지 않고 무력으로 백성들을 해치니 백성들은 견딜 수가 없었다.
《사기》 권2. <하본기>
《사기》 권2. <하본기>
중국 고대 국가로 알려진 하나라의 제17대 왕이자, 마지막 국왕. 하나라 제16대 왕 발왕의 아들이며, 성은 사(姒), 이름은 이계(履癸). 걸(桀)은 후에 폭군이라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기록에는 웅장한 궁전을 짓고 보화와 미녀를 모았으며 궁전 뒤뜰에 강을 만들어 그곳에 뱃놀이를 즐겼고, 장야궁(長夜宮)을 건설해 그곳에서 유흥에 빠졌다고 한다. 비(妃)는 말희였다.
《맹자》 <양혜왕장구 상>에는 《서경》 <탕서>편을 인용해, 걸왕이 자신의 통치를 한껏 자신만만해하면서 호언했다.
吾有天下, 如天之有日, 日亡吾乃亡耳
내가 천하를 다스림은 저 하늘에 해가 떠 있는 것과 같으니, 저 해가 끝날 때라야 내 다스림도 끝날 것이다.[1]
내가 천하를 다스림은 저 하늘에 해가 떠 있는 것과 같으니, 저 해가 끝날 때라야 내 다스림도 끝날 것이다.[1]
그의 폭정에 괴로워하던 백성들은 하늘의 해를 가리켜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고 한다.
時日害喪 저놈의 해는 대체 언제쯤 사라지느냐?
予及女偕亡 내 저놈과 같이 사라지고 말지.
予及女偕亡 내 저놈과 같이 사라지고 말지.
《사기》에는 국력이 쇠퇴하고 제후들이 배반했으며, 신하들의 충언을 무시하고 폭정을 일삼았다고 되어 있다. 걸왕은 자리를 불러 하대(夏臺)라는 감옥에 가두었으나 얼마 뒤에 풀어주었다. 이후 탕이 덕을 닦아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로 귀의했고, 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하걸을 정벌했다. 걸왕은 명조(鳴條)로 달아났다가 결국은 추방되어 죽었다.
처단당하기 직전, 걸왕은 사람들에게 “내가 하대에서 탕을 죽이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회스럽다.”라고 유언을 남겼다.[2] 걸왕이 죽은 뒤 탕은 천자가 되어 상 왕조를 열고 하 왕조의 천하를 대신했다. 하 왕조의 후손들은 상 왕조에서 제후에 봉해졌는데, 주(周)나라 때는 기(杞)에 봉해졌다고 《사기》는 전하고 있다.
2. 기타
상나라의 폭군인 주왕과 묶어 하걸은주라 부른다. 주로 두 글자로 줄여서 걸주로 칭하며 폭군의 대명사로 일컫기 때문에, 특히 유교 이념에 따라 세워진 중국과 한반도의 역대 왕조에서 임금이 실정을 저지르거나 하면 그를 섬기는 신하들이 '전하/폐하는 걸주나 다름없사옵니다' 운운하며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간언한다든가 역성혁명 혹은 반정의 명분으로 임금이 천의를 위배했으므로 폐한다고 할 때도 어김없이 걸주와 매한가지의 군주라는 혹평으로써 사용되는 것을 여러 사서는 물론이고 문학 작품 등의 창작물, 심지어는 TV 프로그램이나 영화 같은 영상 매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덕분에 기억조차 되지 않는 수많은 군주들과는 달리 어쨌거나 많이 인용되고, 뚜렷하게 기억되고 있으니 일단은 나름대로 족적을 남긴 군주인 셈이다.'군사부일체'라 논하는 유교 이론이지만 맹자는 걸주와 같은 군주는 의를 해친 잔이자 인을 해친 적 모두에 해당하는 잔적한 자들로 이들을 친 것은 감히 군주를 시해한 것이 아니라 악독한 필부를 마땅히 주살한 것이라며 혁명론의 요지를 논했다.
하걸은주의 상나라 주왕은 다소의 참작할 여지가 있었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은 멸망한 국가의 마지막 군주로서 주왕이 지나치게 과도한 오명을 뒤집어 쓴 점을 감안해야 한다며 옹호의 여지를 두었다. 실제로 이후에 고고학적인 성과를 통해 상나라가 실존한 역사상의 국가로 여겨지게 되면서 주왕 치세의 배경과 정치적인 입지 등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승자의 기록에 의한 피해자일 가능성도 논해지게 되었다. 반면에 여전히 신화의 범주에 머무르고 있는 하나라와 걸왕은 얄짤없다.
걸왕과 관련된 고사성어로 걸구폐요(桀狗吠堯)가 있다. 걸왕의 개가 요를 향해 짖는다는 뜻으로 어떤 사람이더라도 주인편을 든다는 뜻이다.
하나라 걸왕의 최후와 상나라 주왕의 최후가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3] 일각에선 하나라의 실존성 여부와도 연계해 걸왕도 실존 인물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정작 탕왕에 관련된 기록이 남은 현존하는 갑골문에도 하나라와 걸왕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기 때문에 더 의문을 증폭시키는 부분. 이에 대해 반대 측에선 갑골복사는 주로 신령에게 제사 지내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신경 쓴 기록이기 때문에 왕조 변천사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거나 이미 없어진[4] 갑골문에 있었을지 모른다고 보기도 한다.[5] 더 확실한 뭔가가 나오기 전엔 여전히 아리송한 영역.
'걸'이라는 시호는 잔인무도한 폭군에게 주어지는 악시로서, 후대에 걸이라는 시호를 받은 희대의 폭군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육조시대 유송의 폭군 유욱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를 비꼬는 의미, 혹은 그가 주지육림을 탐닉하던 호색한이라는 점을 들어 'girl'왕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고 있다.
[1] 걸왕이 말한 '해가 끝나는 때'는 단순히 날이 저무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라는 항성 자체가 소멸해 없어진다는 의미다. 태양이 적색거성으로 폭발해 지구를 삼키고 다시 쪼그라들어 백색왜성이 되어 소멸하기까지는 적어도 50억 년은 기다려야 한다.[2] 훗날 여진족 금나라의 폭군 해릉양왕도 금세종의 쿠데타로 쫓겨나게 되었을 때 걸왕과 비슷한 말을 했다.[3] 본인이 원한을 자초한 성탕과 서주 무왕에게 역성혁명으로 쫓겨난 점, 여색(말희, 달기. 사실 둘 다 일부러 군주를 타락시켰다는 식의 설도 있어 이것 역시 비슷하다.)에 빠져서 나라를 망친 점 등.[4] 오늘날 출토되는 갑골문들은 주로 은허에 있는 상나라 후기 갑골문들로, 상나라 초기에도 문자 체계는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나 아직 출토된 문자 유물은 거의 없다. 게다가 은허 갑골문들조차 본격적인 발굴 이전 훼손된 유물들이 제법 많았을 것이다.[5] 한편으론, '일주서'에 주 무왕이 새 성(낙읍)을 세우려 할때 이곳이 하나라의 옛 땅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실제 낙양(뤄양)은 하나라 도읍지로 추정되기도 하는 얼리터우 고성에서 20km밖에 안떨어져 있다. 다만 일주서는 상서 주서에 없는 내용도 많다 보니 한동안 위서로 간주되었다는 한계는 있다. 허나 현대에 들어 청동문, 죽간 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위서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재평가받는 흐름도 있다. 애초에 상서에서도 하나라 기록이 전해져오는데 하나라가 실존하지 않은 나라라면 상서부터가 그 신뢰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물론 위서냐 아니냐는 내용의 신뢰성과는 별개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