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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30 08:24:26

조열후

파일:조(전국) 전서체.png
조(趙)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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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169E1> 조(趙)나라 초대 국군
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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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
적(籍)
아버지 조헌자(趙獻子) 조완(趙浣)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400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408년 ~ 기원전 400년

1. 개요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사건

[clearfix]

1. 개요

조(趙)나라의 초대 국군, 조씨 15대 종주. 조무후의 형. 조경후의 아버지.

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사건

조열후 원년(기원전 408년), 중산 무공(中山武公)이 삼진을 위협했는데, 그 당시 삼진 중 최약체인 조나라를 쳤다.[1][2] 이에 조열후는 위(魏)나라의 군주 위문후(魏文侯)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위문후는 장수 악양(樂羊)을 보내 조나라를 구원했고, 중산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했다.[3]

조열후 2년(기원전 407년), 위문후는 악양과 태자 위격(훗날 위무후)을 보내 중산국을 멸망시켰다. 그 땅은 위나라에서 멀었으므로 조나라에게 돌아갔다.

조열후 6년(기원전 403년), 위열왕은 위나라, 한(韓)나라, 조나라를 후작으로 봉해 진(晉)나라는 3개로 갈라지게 되었고 진晉에서 갈라져 나왔기에 위나라, 한나라, 조나라 3국은 삼진(三晉)이라고 불린다.[4] 조열후는 아버지 조완을 후작으로 추숭하여 조완을 달리 조헌후라고도 한다. 조열후는 가수에게 땅을 주려 하는데, 공중련이 말로만 그렇다고 하고 주지 않았다. 이때 파오군이 공중련에게 인재 추천을 권하니 공중련은 한동안 조회에 나서지 않다가 다시 참여했는데 가수들에게 줄 땅을 선정하고 있다고 했다. 우축, 순흔, 서월을 추천해 조나라는 강성해졌다.

조열후 9년(기원전 400년), 조열후가 죽었는데, 그 아들 조장(趙章)이 아직 어려 조열후의 동생이 뒤를 이었다. 그가 조무후이다.


[1] 최약체가 된 이유는 지백이 조양자가 농성하던 진양(晉陽)을 수공을 써서 개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진양, 장자(상당), 한단 3개의 거대한 읍을 가지고 있었는데 장자를 잃은데다가 위나라와 한나라는 자신의 영토가 피해를 입지 않았기에 전쟁의 피해를 입은데다가 땅까지 잃은 조나라가 가장 약할 수밖에 없었다.[2] 물론 최약체인 것도 있지만 중산국과 조나라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탓도 있다.[3] 악양은 연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의 조상이다.[4] 참고로 진나라가 3국으로 갈라진 기원전 403년부터 중국은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로 돌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