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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13:27:05

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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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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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연왕(燕王) → 노왕(盧王)
작위 장안후(長安侯)
성씨 노(盧)
관(綰)
생몰 기간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2년
재위 기간 연왕: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
노왕: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92년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1. 개요

말기와 초한쟁패기, 한나라 초기의 인물이자 한나라 창립 개국공신 중 한 명이다. 유방 덕분에 연왕(燕王)이라는 제후왕이 되기도 했지만 자신을 죽일까 의심을 품어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흉노에 투항했다.

2. 생애

사마천의《사기》<열전>에 이르길, 유방의 아버지와 노관의 아버지는 매우 친한 사이였다 하며 유방과 노관은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불알친구 수준으로 친했다고 한다.[1] 유방이 거병하고 패공이 되자 노관은 그의 (客)으로써 유방을 따랐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유방은 항우에게 한왕(漢王)으로 임명되어 파(巴)·촉(蜀)·한중(漢中)을 다스리게 되었지만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뒤떨어진 변방 지역이었으며 가는 길도 험난한 오지 중의 오지였다. 고향 땅이 그리운 병사들이 대거 탈영하기도 했다. 사실상 이건 좌천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노관은 유방의 곁을 지켰으며 장군(將軍)이 되어서도 그의 시중을 들기도 했다. 유방이 천하패권을 두고 항우와 싸우고 있을 때, 노관을 태위(太尉)에 임명하였다. 노관은 언제나 유방을 늘 따랐는데, 유일하게 유방의 침실까지도 드나들며 시중을 들기도 했다.[2][3][4] 비록 소하조참 등이 남다른 예우를 받았다고 하지만, 총애를 받는 것에 있어서는 노관을 따를 수 없었다. 노관은 봉작되어 장안후(長安侯)가 되었다.[5]

항우의 패망 이후 공을 인정받아 장안후(長安侯)에서 연왕(燕王)으로 봉해진다. 원래 유방은 처음부터 노관을 왕으로 봉하려 했는데, 차마 그 공이 제후왕의 지위에 이르지 못해 친한 사이임에도 봉하지 못했다. 때마침 연왕 장도가 반란을 일으켜서 패사하고, 왕의 자리가 공석이 되자 유방의 마음을 알아차린 신하들이 노관을 추천하며 왕이 된 것이다.

공로만 따지면 고조공신후자연표의 말석에도 끼지 못할 정도였다.[6] 말그대로 인맥빨, 친구빨로 노릇 하게 된 것이다. 일단 노관은 육국 왕실의 후예도 아니었다. 공적은 혁혁했지만 왕 시켜달라고 조르다가 신세를 망친 한신팽월을 떠올려보자.[7] 유방이 가장 신임했던 장량소하도 왕은 안 시켜줬다. 노관에 대한 유방의 친분이 얼마나 깊었는지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8] 심지어 어디 구석진 벽지의 왕도 아니고, 전국 7웅의 하나였던 연나라의 왕이다.[9]

당시 이성(異姓)왕으로 책봉되기 위해서는 연왕 장도, 장사왕 오예, 한왕 신처럼 자신의 세력을 유방에게 바치는 정도의 공적이 필요했다. 그게 아니면 각지에서 실질적으로 세력을 이끌었던 장오, 한신, 팽월, 영포 등의 군벌이어야만 이성왕에 오르는 것이 가능했다. 공신들을 살펴보면 초한쟁패에 있어 가장 으뜸가는 공적을 인정받은 소하도 왕이 되지 못했고, 유방의 목숨을 구했던 번쾌도 왕이 되지 못했고, 한신과 함께 북벌을 수행하여 큰 전과를 올린 조참도 왕이 되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후에 봉해졌다.

그런데 능력도 그릇도 안 되는 인물이 연왕 자리에 올라앉았으니, 유방이 얼마나 노관을 각별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유방은 자신과 어릴 적부터 친했고 언제나 곁을 함께한 노관이 높은 지위를 가지지 못해서 아쉬워하다가, 마침내 노관이 연왕에 오르자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유방의 마음도 모르고, 훗날 노관은 뒷통수를 친다.

한신과 함께 반란을 획책한 진희는 유방에게 대패하자 흉노에게 손을 벌리려 했다. 진희의 속셈을 알게 된 노관은 장승이란 사람을 보내 진희를 방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장승은 거기 있던 구(舊) 연왕 장도의 아들 장연이 '한나라가 계속 위험해야 연나라가 평안할 것임을 어찌 모르는가?'라고 하는 말에 넘어가서 오히려 진희와 함께 흉노와의 화친을 추진한다. 노관은 이 사실을 알고 분개해서 유방에게 장승의 가족을 모조리 죽이라고 청했는데, 돌아온 장승의 말재주에 자기도 혹하고 말았다. 노관은 장승과 그 가족을 몰래 흉노로 망명시키고는 진희에게 부하를 보내서 '최대한 오래 버텨라'라는 말까지 하기에 이른다. 흉노를 일부러 연나라 변경에서 얼쩡거리게 하며 분쟁상태를 연출하는 자작극도 벌인 듯. 사실 이때부터 반란분자나 다름없었던 셈. 진희와 붙어먹고 있는 와중에 태연하게 유방의 4남 유항[10]을 대나라 왕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이건 잘한 일이지만

그러나 진희가 결국 번쾌에게 잡혀 죽어버렸고(BC 196), 진희를 수행하던 측근들에게서 '노관이 진희랑 붙어먹었다'는 진술이 나온다. 유방이 어이없어 하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노관이 장승을 죽인 척 하고 흉노로 망명시켰다는 사실까지 폭로된다.[11] 화가 난 유방은 사람을 보내 노관을 질책하고 소환령을 내린다.

이를 알고 노관은 여씨를 두려워하며 소환에 응하지 않는다. "한신과 팽월 같은 이성왕이 죽은 것은 여후의 모략 때문이었다. 지금은 황제께서 나와 장사왕 오예를 인정해주셨기 때문에 목숨이 붙어 있지만, 황제가 병으로 쓰러진 다음에는 여후가 국정을 맡게 될테니 나도 숙청 대상이 될 것이다." 라면서, 여후의 머리 속에는 이성왕과 공신을 모조리 제거하려는 생각 밖에 없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사실 노관이 진희와 붙어먹은 것은 한신과 팽월의 처형보다 이전이므로[12] 변명으로서는 궁색한 면이 없지 않지만 분석 자체는 상당히 정확했다. 실제로 여후는 유방이 죽고 난 후 대숙청을 계획했다. 무모하다는 말에 그만두긴 했지만, 그 뒤로도 제후왕들을 철저히 겨냥하고 견제했기 때문에 노관도 그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특별한 능력이 없는 노관이므로 1순위 제거대상까지야 아닐지언정 온전히 살아남기야 힘들었을 것이다.

외척으로 수렴청정을 이용해 국정을 장악한 여후의 수법은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는 선구자적 발상이었기 때문에, 장량을 포함한 날고 기던 한나라 중신들조차 눈뜨고 당했다는 걸 생각하면[13][14] 노관은 여후의 속셈을 제대로 간파했던 것이다. 능력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통찰력은 발군이였던 것. 하긴 소꿉친구 부인이니까 거병 이전부터 잘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더 잘 알아봤을 확률이 높다. 단지 노관에게는 여후의 위험함을 눈치채고도 뭘 해볼 만한 지혜와 행동력이 없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15]

그러나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부름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방은 분노한다. 노관의 태도를 본 유방은 '오해인 줄 알았는데, 무서워서 오질 않는 걸 보니 이놈이 정말로 일을 꾸미긴 한 모양이다.' 라고 여겼으며 반란을 확신했다. 이윽고 토벌군이 파견되었고, 노관은 토벌군에 저항하며 전투를 벌인다. 그렇게 해서 노관은 정말로 반란군이 되었다.

즉위 후 계속해서 반란에 시달리던 유방은, 어릴 적부터 가장 가까이 지낸 친구마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크게 노했다고 한다. 반란 초기에는 번쾌의 군대가, 후기에는 주발의 군대가[16] 찾아와서 노관과 반란군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된 노관은 사람들과 함께 직접 성 밖으로 나와 빌었고, 유방의 병이 나으면 입조해서 사죄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유방의 병은 낫지 않았고, 나중에 유방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노관은 바로 흉노로 도망쳐서 노왕(盧王)으로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사실 노관이 두려워한 사람은 여후였다. 유방의 병이 나으면 직접 입조해서 진희와 장승의 일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며 사죄할 생각이었고, 유방이라면 자신을 용서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유방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결국 여후를 두려워해 흉노로 도망친 것이었다. 거 타이밍 한번 참 예술이네 노왕에 봉해졌으니 허울은 좋아보이지만 실제로는 흉노 토박이들의 텃세가 지독했기 때문에 노관을 따라온 사람들은 모두 한나라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노관도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 곳에서 죽었다. 아내와 자식은 노관 사후에 한나라로 도망쳐 돌아왔는데, 남편 대신에 직접 사죄하고자 했으나 하필 그때 또 여후가 드러누워 죽는 바람에 사죄도 못했다고 한다. 이후 노관의 아내도 병에 걸려 생을 마감했다. 한효제 시절에는 노관의 손자가 귀순해왔고, 그는 왕으로 임명되어 잘 살았다고 한다. 반역자의 가족과 후손이 왜 이럴 수 있었느냐면 혜제의 죽음으로 상심한 여후가 그가 생전에 목표로 삼았던 삼족죄 폐지를 실행한 덕에 법적으로는 사면되어 있었기 때문.

3. 평가

이렇다 할 능력도 특징도 없는 인물이었지만, 친구를 잘 둔 탓에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 이름을 올렸고, 결국 그 이름을 역사에 남겼다. 사마천이 평하기를 "파리떼가 준마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가듯, 건달 무리들은 유방을 따라다니며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라고 했다. 그래도 풍패의 건달 무리들은 다들 뭔가 한가닥씩 하며 자신의 능력을 뽐냈는데,[17] 노관은 별로 보여준 것이 없으니 사마천의 평가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일 듯.

유방과 적당히 친했으면 오히려 동향 인물들처럼 적당히 높은 자리에서 천수를 누렸거나 여씨 축출 과정에서 한숟가락 얹고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르는 인물이 앞뒤 없이 능력에 비해 너무 과분한 왕까지 안겨줄 만큼 친했던 것이 불행한 인생 말로를 낳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오히려 후작 정도에서 멈췄더라면 눈에 안 띄고 천수를 누릴 수도 있었을텐데 유방도 노관도 너무 공사 구분을 못했다.

4. 여담

한국사와도 관계가 있는데 노관이 흉노로 망명했을 때, 노관의 연나라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유민이 발생했는데, 여기서 고조선으로 망명해간 위만이라는 자가 군사정변을 일으켜 준왕을 남쪽으로 쫓아내 고조선 땅을 차지하고 위만조선을 세우게 된다. 사기에는 위만에 대해 옛 연나라 사람이라고만 적고 있을 뿐 노관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적혀 있지 않아서 위만이 노관의 부하였는지는 불명이다.

같은 시기에 나라를 떠나 망명했지만 흉노로 간 노관은 타지에서 핍박을 받으며 쓸쓸이 죽어갈 때, 고조선으로 간 위만은 왕위까지 차지하며 출세했으니. 위기에 처해도 대처하기에 따라서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좋은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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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권 「서역전(西域傳)」
선선국 · 저말국 · 소완국 · 정절국 · 융로국 · 서미국 · 거륵국 · 우전국 · 피산국 · 아타국 · 서야국 · 포리국 · 의내국 · 무뢰국 · 난두국 · 계빈국
아익산리국 · 대월지국 · 강거국 · 대완국 · 동저미국 · 도괴국 · 효순국 · 언독국 · 사거국 · 소륵국 · 울두국 · 오손국 · 고묵국 · 온숙국 · 구자국
울리국 · 위수국 · 언기국 · 아탐자리국 · 비륙국 · 비륙후국 · 욱립사국 · 선환국 · 포류국 · 포류후국 · 서저미국 · 동저미국 · 겁국 · 호호국 · 산국
차사전국 · 차사후국 · 차사도위국 · 차사후성장국
97권 「외척전(外戚傳)」
효혜황후 · 효문태후 · 두의방 · 효경황후 · 왕지 · 진아교 · 무사황후 · 효소태후 · 효소황후 · 사양제 · 왕부인 · 허평군 · 곽성군 · 효선황후 · 효성황후
반염 · 조비연 · 소의 부씨 · 정도정희 · 효애황후 · 효원소의 · 중산위희 · 효평황후
98권 「원후전(元后傳)」 99권 「왕망전(王莽傳)」
왕정군 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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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 유방이 기원전 256년생이라 보면 노관보다 9살이나 많은 것이다. 당시에는 나이 차가 좀 많이 나도 친구 먹는 건 흔했지만. 이것 때문에 유방의 생년이 명확치는 않은데 노관처럼 기원전 247년생일 가능성이 조금 더 크다는게 현재 정설이라고 한다.[2] 그만큼 유방은 노관을 적극적으로 신뢰를 했고, 믿을만한 친구였다는 것이다.[3] 같은 고향에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였던지라 유방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알고 있었고, 가까운 책사들도 모르는 유방의 은밀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을 수도 있다.[4] 삼국지 유비간옹의 관계와 비슷하다.[5] 장안은 옛 함양(咸陽)으로, 진나라의 옛 수도다.[6] 패현에서부터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유방을 따라 다녀 끝까지 모신 공이 있었지만 장량처럼 뛰어난 지혜를 가진 것도 아니고 한신처럼 훌륭한 전술가도 아니었으며 장수로서도 관영, 주발, 번쾌, 조참, 하후영 등에 밀렸기 때문이다.[7] 물론 이들도 공적이나 세력이나 충분히 왕을 할만한 당위성은 충분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처세를 못했던게 명을 단축해서 그렇지.[8] 다만 노관이 무능했기 때문에 들고 일어날 염려가 적으므로 선물 삼아서 왕으로 만들어줬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9] 유방의 형제들조차 육국의 왕으로 봉해진 사람은 초왕 유교 한 명밖에 없다. 그나마도 큰 형인 유백은 일찍 사망해서 사후에 왕으로 추증되기는 했으나 시호가 일자왕도 아니고, 유백의 아들이자 유방의 조카인 유신은 ‘국그릇 긁는 제후’라는 의미의 갱갈후(...)로 임명되어 후작에 그쳤다. 유중의 경우 전국시대소국이었던 대나라의 왕이었다.[10] 이후 한문제가 된다.[11] 이 사실을 폭로한 사람은 여후의 오른팔 격이었던 심이기였다. 여씨 세력의 개입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12] 노관이 진희와 결탁한 것은 진희가 한단에서 유방에게 패배했을 때인데, 이때가 기원전 197년의 가을 혹은 겨울이고, 한신이 죽은 것은 196년 봄이다.[13] 당시 한나라 중신들은 혜제가 성품이 곧고 어질기 때문에 성품이 곧고 어질다고 했지 멘탈이 쎄다곤 안 했다 사실 이런 일을 겪고도 멘탈이 제정신인게 대단한거다 여후에 대해서는 낙관하고 있었다. 오히려 척부인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었다.[14] 아랫사람으로 윗사람의 안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과 동등한 친구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의 편향 차이가 낳은 결과일지도 모른다.[15] 그런데 노관 진압 도중 모함당한 번쾌를 죽이려고 파견된 진평과 주발에 대해 여후가 지레짐작하는 바람에 정권을 탈취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또한 이 일로 진평여수가 원수가 되는 기묘한 나비효과를 통해 어떻게 보면 여씨 몰살에 기여한 셈이 되기는 했다.[16] 번쾌가 유여의 사건으로 모함을 당하고, 진평에 의해 끌려갔기 때문에 교대했다.[17] 중화제국의 사실상의 창시자로서 중국 황제의 대명사가 된 유방과 그를 보좌한 명재상의 대명사 소하는 동향 출신이며 그 외에 왕릉, 번쾌, 조참, 하후영 등 역시 자신의 공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날린 인물들이다. 특히 하후영은 이후 명장의 대명사가 된 한신을 발굴한 (그것도 처형당하기 직전에 구하면서!) 인물이다. 유방은 고향 친구 복이 참 많았던 셈.[18] 유방 휘하의 인물들 중 유일하게 조고와 대면한 인물이다. 장량이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창해역사와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쳤을 때 얼굴을 보긴 했지만, 대화를 나눈건 노관이 유일하다.[19] 장한을 잡아내고 유방이 한신과 술을 마시면서 자기 밑에 있는 장군들의 군사적 능력을 물어보았는데, 노관은 그 중에서 가장 낮은 평가를 받았다(조참은 1만 5천, 번쾌와 주발은 2만은 거느릴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유방이 노관에 대해 묻자, 한신은 크게 웃으면서 손사레를 쳤다). 그래서 그런지 군사 훈련이나 군대 지휘도 하긴 하지만, 첩보나 보좌, 외교 업무를 더 많이 맡는 편이다.[20] 중간중간 계속해서 유방과 마찰을 일으키던 한신과 비교하면, 노관은 잘 지내다가 갑자기 반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려진다.[21]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모두까기 인형 기신이 틱틱대며 태클을 건다. 노관은 버럭버럭 윽박지르면서 응수했고, 기신은 못 이기는 척 입을 다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