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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한국어 | 막고굴 | |
중국어 | 莫高窟 | ||
영어 | Mogao Caves | ||
프랑스어 | Grottes de Mogao | ||
국가·위치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간쑤성 둔황시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지정번호 | 440 | ||
등재연도 | 1987년 | ||
등재기준 | (ⅰ)[1], (ⅱ)[2], (ⅲ)[3], (ⅳ)[4], (ⅵ)[5] |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
<colbgcolor=#CCC,#666><colcolor=#000,#FFF> 명칭 | 한국어 | 막고굴 | |
간체 | 莫高窟 | ||
번체 | 莫高窟 | ||
영어 | Mogao Cave | ||
분류 | 석굴사 및 석각 (石窟寺及石刻) | ||
시대 | 북위~원 | ||
일련번호 | 1-0034-4-002 | ||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 AAAAA급~AAAA급 | ||
등재 | 1961년 | ||
차수 |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 ||
주소 | 중화인민공화국 간쑤성 주취안시 둔황시217성도 甘肃省酒泉市敦煌市217省道 | }}} |
<colbgcolor=#CC0000> 막고굴을 대표하는 제96호굴[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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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간쑤성 둔황에 있는 불교 유적 석굴사원.중국에서는 윈강석굴, 룽먼석굴, 맥적산 석굴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4대 석굴 사원으로 손꼽힌다.
한국에서는 주로 둔황ㆍ돈황 석굴이라는 명칭이 유명하다. 둔황 천불동이라고도 하며, 보통 '막고굴'이라는 명칭으로 이 일대의 석굴 전체를 통틀어서 일컫는다. 오호십육국 시대인 전진(前秦) 시대부터 원나라 시대에 걸쳐 1000여 년 세월 동안 세워지고 만들어진 동굴, 유물이 많이 모여있는 불교 유적이다. 동굴 735개, 벽화 총 연장길이 45km, 각종 불상 2,415좌가 있는 거대한 유적으로, 현존하는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유물도 가장 풍부한 불교 미술 유적이다. 1961년에 중국 국무원(國務院)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에 지정되었고,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으며 동굴 개수는 큰 굴 안에 속해있는 부속 동굴도 다 다른 동굴로 일련번호를 부여해 세는 것이므로 외부로 뚫려있는 굴 개수를 세면 200여 개쯤 된다.
2. 내용
막고굴은 북조(北朝) 시기부터 원나라 시대에 걸친 세월 동안 만든 동굴 735개로 이루어진다. 전체 석굴은 남쪽과 북쪽의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남쪽 구역이 막고굴의 중심이다. 과거 승려들이 종교 활동을 행하던 장소로 동굴 487개가 있는데, 모두 벽화 또는 불상이 있다. 북쪽 구역에는 동굴 248개가 있는데 이 중 단 5개만 벽화나 불상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승려들이 수행, 거주하거나, 죽은 뒤 매장된 장소이다. 거주 구역에는 중국식 온돌(土炕), 아궁이, 굴뚝, 벽감(壁龕), 등잔 등 생활시설을 갖추었다. 막고굴 전체로 따져보면 총 492개 동굴에 벽화와 불상이 있다. 아울러, 암벽에 세워진 당ㆍ송시대 목조 처마 지붕 구조물이 5개 남아있다.막고굴이 최초로 만들어진 시기는 오호십육국 시대 전진 시대인 366년으로 추정된다. 승려 낙준(樂僔)이 이 곳 암벽에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한 것을 시작으로, 그 후 법량선사(法良禪師) 등이 계속 동굴을 파고 수련하게 되면서 이곳은 막고굴(漠高窟), 즉 '사막(沙漠)의 높은[高] 곳의 굴'이라 불리게 되었다. 후대에 들어 한자 '막(漠)'과 '막(莫)'을 통용하게 되면서 이름도 막고굴(莫高窟)로 바뀌게 된다. 오호십육국 시대부터 북조(北朝) 시기사이의 기간에 만든 동굴은 모두 36개인데,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제268호굴, 제272호굴, 제275호굴은 아마도 북량(北涼; 397년 또는 401년 ~ 439년) 시대에 세워진 듯하다.
석굴의 벽화, 불상의 양식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오호십육국 시대인 북량, 북위 시대에는 서역(西域) 불교의 미술적 영향이 강하며 부처의 일생, 부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本生譚), 천불(千佛) 등이 주로 그려졌다. 서위 시대 이후로는 표현 양식에서 중국풍의 영향이 눈에 띄게 커진다. 수ㆍ당 시기는 막고굴의 전성기로, 시대가 가장 긴 당나라 때에 만들어진 석굴이 225개로 추정되어 역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이 수나라 시대의 석굴로 97개를 차지한다. 이 시기의 불상은 중국풍이 더욱 강해지고, 전에 없던 대형 불상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또한 불화(佛畵)도 주제가 더욱 풍부해지고, 화면구성도 대담, 웅장해지며, 색채도 화려해 지는 등 미술적 기교의 수준이 최고조에 다다른다.
북송 시대를 거쳐 둔황 일대가 서하의 지배에 들어가면서 새로 만들어지는 석굴의 수는 점차 줄어들게 된다. 기존의 석굴만 보수하고 새로 만드는 석굴은 상대적으로 거의 없다시피하여, 서하 때 만들어진 석굴은 20개, 원나라 때 만들어진 석굴은 7개라고 추측된다. 그 후 몽골의 쇠퇴과 중앙 아시아에서 건너오는 이슬람 세력의 진출, 그리고 결정적으로 원나라 제국의 멸망으로 실크로드 무역이 크게 쇠퇴하면서 둔황도 이와 더불어 같이 쇠락하게 된다. 이후 오랫동안 막고굴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지게 되었다. 청나라 강희(康熙) 40년(1701) 이후에야 다시금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천불동(千佛洞)'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또 세월이 흘러, 막고굴이 다시 한번 크게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1900년, 이른바 '둔황 문서'가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둔황 문서가 발견되었음에도 정작 막고굴 자체의 보존, 보호 노력은 별로 없었고, 그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손상을 입었다. 둔황 문서는 아래 장경동 단락에서 자세히 설명된 것처럼 영국, 프랑스, 일본 등 다양한 나라에 약탈을 당했고, 미국의 랭던 워너는 벽화를 통째로 뜯어갔고,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적백내전의 백군 패잔병들이 막고굴에 들어가 살면서 낙서나 취사 그을음 등에 의해 또 많이 훼손되었다. 막고굴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되고 본격적으로 보호되기 시작된 것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의 일이었다. 막고굴에 관심이 남달랐던 저우언라이가 보호하라고 지시하여 196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 덕분에, 1966년 발발한 문화대혁명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수많은 굴 중 한국과 관련이 있는 굴로는 제61굴과 제355굴이 있다. 제61굴의 벽면에 새겨진 오대산도(五臺山圖) 그림에는 신라송공사가 그려져 있다. 신라 사신단은 사신, 관원 2명, 통역관, 마부까지 총 5명이며 이들이 남북국시대에 중원을 넘어 실크로드의 둔황까지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막고굴 중 제355굴 벽화에도 조우관을 쓴 신라인 2명이 그려져 있다. 아래에 설명할 장경동에서도 한국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다.
3. 장경동
대한민국의 목사에 대한 내용은 장경동 문서 참고하십시오.
장경동은 막고굴의 여러 굴 중 일련번호로 제17호굴을 말한다. 따로 독립된 굴이 아니라 상당히 큰 편인 제16호굴 한 켠에 딸려있는 작은 굴이었다. 원래 당나라 후기(만당 시대)에 당나라의 고승 홍변(洪辯)을 기리기 위해 만든 동굴이다. 그러다 200여년이 지난 서기 1,100년 무렵 누군가 훗날 돈황 문서라 불릴 30,000여점의 문서를 제17호굴에 가득 채워놓고는 입구를 막아 감추었다. 그리고 막은 입구 위에 벽화를 그려놓아 막은 위치를 자연스럽게 숨기려 했다. 지금도 장경동 입구 사진을 보면 제16호굴 벽 한 쪽을 뚫은 모양으로 돼 있다.
1900년, 돈황 석굴에 살고 있던 도사 왕위안루(王圓籙; 왕원록)[7]가 새로 도교 사원을 지을 목적으로 대규모 청소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조수 양(楊) 아무개가 제16호굴 벽에 대고 담뱃대를 털었는데, 뭔가 울림 소리를 듣고 왕위안루에게 알렸다. 벽을 두드려본 결과 속이 빈 공간이 있음을 깨닫고 벽을 헐어내자, 북쪽 통로 벽에 있는 작은 문 하나가 있었다. 문을 열고 다시 길이 2.5m, 너비 2.5m, 높이 3m인 석굴이 있었는데, 이 굴 안에서 약 50,000여 점에 달하는 불경과 관련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유명한 돈황유물의 정수인 제17호굴 장경동(藏經洞)은 이렇게 발견되었다.
왜 장경동에 고서들을 감춰두었는지는 아직도 논란이지만 크게 2가지 설이 있다. 바로 폐기설과 피난설이다. 스타인은 폐기설을 주장했다. 즉 당시 기준에는 이미 쓸모없어저 버린 문서들이었지만 그렇다고 불경과 고서들을 파기하거나 태워버릴 수는 없으니 한 곳에 넣고 폐기해버렸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펠리오의 주장으로, 당시 서하 군대의 침략을 피하려던 승려들이 문서, 유물들이 파손될까 두려워 몰래 숨겨놓고 도망가버렸다는 피난설이다. 피난설을 회의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장경동의 유물들은 석굴 속에 수장되기 전에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고, 석굴 입구도 밀봉하고 채색벽화를 그 위에 그려두는 등, 아주 신경 써서 은폐 조치를 취한 점에 주목한다.
최근 피난설을 주장하는 측에서 기존의 서하 침공설 대신 1006년 카라한 칸국의 침공으로 호탄 왕국이 멸망한 것을 원인으로 제시했다. 카라한 칸국은 곧바로 동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경을 숨길 시간이 충분했다는 것이 기존 비판에 대한 반박이다.
당시 청나라 정부는 유물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최초 발견자인 왕위안루는 막고굴과 장경동을 지키기 위해 장경동의 발견을 수 차례 보고했으나 관리들은 시큰둥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서태후에게까지도 직접 상소를 올렸으나 역시 소식이 없었다. 정부의 안이한 반응에는 당시의 혼란한 중국 상황도 한몫 했었다. 막상 유물에 먼저 반응한 것은 청 조정이 아닌 서구인들이었다. 유물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은 서방 탐험가들이 하나 둘 둔황을 찾아왔다. 대표적으로 1907년에 영국의 오렐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 1908년에는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년-1945)가 있다. 이들은 왕위인루와 흥정 끝에 수많은 희귀 고서, 유물들을 사들여 중국 국외로 반출시켰다. 역설적으로 이는 중앙 아시아 역사 연구, 불경 연구 등과 둔황학(敦煌學)이라는 학문의 탄생에도 이바지했다.
폴 펠리오는 언어에 뛰어난 소질이 있어 중국어 등 13개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머무르는 도시마다 현지인들 틈에 섞여 며칠만에 해당 언어를 습득할 정도였다. 1906년 이미 신장(新疆)지역을 탐험 중이었던 펠리오는 1908년, 둔황에서 고문서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우루무치를 떠나 막고굴 도착한 뒤, 그 곳에서 3주 동안 머물며 가치 있는 문서 약 2,000점을 꼼꼼히 추려내서 은 500냥에 구입했다고 한다. 이때 그 입수한 문서들 중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있었다. 반면 스타인은 은 200냥을 들여서 문서 24상자, 기타 유물 5상자를 사갔으나 한문, 중국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가 반출한 물건 중엔 별 쓸모 없는 것들이 많았다.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도 영국에서 유학하다가 스타인이 둔황 문서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방 탐험가들의 행렬에 끼어들어 실크로드를 통한 불교 전래 경로를 탐사했다. 오타니는 나중에 교토 니시혼간지의 주지승려가 되어 직접 해외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대신 3차례탐험단을 조직, 후원하며 중국 서역(西域) 각지에서 손에 넣은 유물 약 5,000점을 일본으로 유출했다. 이것이 이른바 오타니 컬렉션으로서, 이 중 베제클리크 천불동(Bezeklik Thousand Buddha Caves)(영어 위키백과) 관련 유물이 가장 유명하다. 이렇게 유물 획득을 후원하는 과정에서 재정 관리를 방만하게 한 탓에 오타니는 자금난에 빠져 회계부정 등을 저질렀다가 니시혼간지 주지 자리에서 쫓겨났다. 오타니 컬렉션도 세 토막이 나서 1/3은 일본에 남았고, 1/3은 현재 오타니가 은퇴후 머물렀던 뤼순에 있으며, 1/3은 일본의 광산업계 재벌인 쿠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에게 넘어갔다. 쿠하라는 조선 땅의 광산과 관련된 이권을 얻을 목적으로 위하여 이를 다시 조선총독부에 기증하였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가 철수하면서 이를 그대로 한국 땅에 두고 갔고, 이리하여 오늘날 막고굴의 둔황 문서 중 일부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았다. 독일의 고고학자 알버트 폰 르 콕(Albert von Le Coq 1860-1930)도 베제클리크 천불동에 찾아와 벽화를 뜯어 베를린에 보냈고,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 Museum)에 소장하였다. 이 벽화는 대부분이 제2차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한편 청나라 정부는 뒤늦게 이 문서와 유물들의 가치를 인식하고 1910년 남아 있는 유물들을 베이징으로 옮기도록 했다. 당초 발견된 문서, 유물 50,000여 점 중 막고굴에 아직 9,000여 점이 남아있음을 확인했지만 막상 베이징에 옮기고 다시 확인해보니 남은 것은 8,757점에 불과했다. 문서들을 싣고 나르는 수레 위를 짚으로만 덮는 등 운송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고, 운반을 담당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가치 높은 문서들을 개인 소장하고 혹시라도 발각될까 봐 그 문서를 찢어버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왕위안루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중간중간에 문서들을 빼돌리기도 했다.[8] 이렇게 베이징으로 옮긴 문서는 현재 베이징의 중국국가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현재 돈황 문서는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기메 박물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중국국가박물관, 대만 국가도서관, 홍콩중문대학 문물관, 대한민국의 국립중앙박물관 등 전세계 각지의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중 프랑스가 알짜배기로 많이 가지고 있다. 비교적 초반에 접근했고, 폴 펠리오가 중국어에 능통하고 관련 지식이 많아 가치가 높은 것 위주로 반출했기 때문이다.
도사 왕위안루는 이후로도 계속 막고굴을 지키다가 1931년 사망했다. 그는 천 년 동안 잊혀져 있던 장경동을 처음 발견했고, 서구열강 탐험가들이 장경동 고서를 무차별로 쓸어가지 못하도록 되도록 지키도록 노력은 했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재물이나 언변에 휘둘려 많은 고서를 팔았었다. 이런 면에서 한계는 있었지만, 청나라 정부가 아예 제역할을 못하던 시대에 왕위안루가 세운 공이 커서 지금도 막고굴 앞에 그의 사리탑이 세워져 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여기서 발견한 금강경 한역본 돈황사본에 상당수 오류가 있었다. 단어의 생략, 첨삭, 오기, 반복, 필사시 빠뜨린 단어, 혹은 문장을 오른쪽 옆 빈 行에 기록한 경우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은 예들로 보아 금강경 돈황사본은 신앙과 기원을 위하여 필사한 것이다.[9]
4. 기타
막고굴에서 유명한 동굴 중 하나인 제285호굴
상공에서 본 막고굴의 전경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다른 기준과 함께 적용 권장)[6] 높이 43m인 9층 누각 내부에 높이 35.5m에 달하는 거대한 미륵불 좌상이 있다. 또 제130호굴에도 높이 29m인 미륵불 좌상이 있는데 편의상 제96호굴의 불상을 북대불, 제130호굴의 불상을 남대불이라고 한다. 북대불은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후대에 보수가 많이 이루어졌으나 남대불은 초기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7] 승려가 아닌 일개 도사가 석굴에 살았다는 것은 이미 이 지역에서 불교의 영향력이 많이 쇠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8] 중국 CCTV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아시아'의 둔황 1편에서 다룬 내용이다.[9] 최종남, "범(梵), 장(藏), 돈황본 『금강경』 대조 연구", 인도철학 2009년, 제27권 247~282쪽
[7] 승려가 아닌 일개 도사가 석굴에 살았다는 것은 이미 이 지역에서 불교의 영향력이 많이 쇠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8] 중국 CCTV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아시아'의 둔황 1편에서 다룬 내용이다.[9] 최종남, "범(梵), 장(藏), 돈황본 『금강경』 대조 연구", 인도철학 2009년, 제27권 247~2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