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實勢어떤 특정 분야 또는 그 특정 직종에 있어서 실질적인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회사(직장)로 치면 주주에서 막강한 파워(영향력)를 행세하는 회장님 정도로 보면 된다. 실권(實權)이나 실권자(實權者)로 표현하기도 한다. 세력을 잃는다는 뜻의 실세(失勢)란 단어도 있지만, 잘 쓰이지 않는다. 과거에는 권신이라 불렀다. 실세와 반대되는 의미를 꼽자면 바지사장이나 명예직 혹은 한직이 있다.
2. 상세
쉽게 말해서 그 사람은 큰 소리 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한데 예를 들어 어떤 집단이나 조직은 목적을 두고 직제를 설정해 직무를 꾸리게 되는데, 이런 공식 직함 사이에서도 혹은 이런 직함과 상관없이 조직 내에서 더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흔히 실세라고 부른다. 다만 실세라는게 어떤 사람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 그 사람 자체가 아닌 그 사람이 맡고 있는 직책을 뜻하는 것일수도 있다. 상호복합적인 것일수도 있고. 보통의 조직 생활하에선 직책을 뜻하는 경우가 아무래도 많다. 사람 그 자체를 뜻하는 경우의 예론 이름난 명사나 아님 학교내에서 학생들 사이의 관계 정도를 떠올려 볼 수 있다. 간혹 큰 소리치면 장땡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거랑은 좀 다르다 단점은 회사나 그분야에서 뭔가 일이잘못되었다 하더라도 허수하비가 책무를 지는게 아니라 실권자(實權者)가 실질적 책임을 지게 마련이다.정치적인 의미에서 실세는 정치적인 수장에게 직접적으로 조언을 하고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인물들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낭으로 꼽힌 유시민 전 장관의 경우 장관에서 물러나기 전은 물론 물러난 이후에도 청와대를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대통령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인이 뽑은 실세의 조건은 청와대를 언제나 들락날락 거릴 수 있으며, 대통령이 고민하는 사안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고, 가장 중요한 건 대통령 본인이 실세의 말을 듣고 의사결정에 참고할 의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
또 이런 연장선상에서 장관보다 오히려 대통령과 물리적 거리는 더 가까운 청와대내 수석비서관들이나 비서실장이 정책에 더 큰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는데, 그래서 공식 직함과 그에 따른 업무 절차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이런 청와대내 직책들 자체를 없애야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이와 연관하여 청와대 비서나 참모면 직함이라도 있지, 조직내에서 아예 어떤 권한을 행사할 직책 자체를 맡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알게모르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언론에선 이를 비선 실세라 부르기도 한다. 당연히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인다.
그 외 좀 다른 의미로 정부수반과 국가원수가 다른 나라들의 경우, 나라의 으뜸은 국가원수지만 실세는 정부수반이 된다. 다만 이건 대놓고 국가원수를 명예직으로 못 박아놓은 거라서 정부수반을 사실상 정상(summit)으로 보기 때문에 실세의 용례와는 좀 거리가 있다. 또 간혹 실세를 실무자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다르다.
당연하지만 화무십일홍이라고 실세라고 그 권세가 영원하진 않다. 역사상 수많은 실세들이 또다른 실세에게 혹은 윗선의 불신임으로[1], 혹은 본인의 삽질로 많이들 권력에서 떨어져나갔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선 이런 오랜 권력장악과 이에 거의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부정부패의 고리를 차단하고자 여러 감시와 견제 조항들을 마련해내고 있다.
3. 실세로 거론되던 인물
3.1. 역대 한국 정부
3.1.1. 이승만 정부
- 곽영주 : 이승만의 눈에 들어 하루아침에 경사에서 경무관으로 승진하고 현재의 대통령경호처장에 해당하는 경무대경찰서장을 맡았지만 박정희 집권 이후 처형당했다.
- 이기붕 : 이승만 정부 때 막강한 권력실세였지만, 온갖 부정을 저지르다가 4.19 혁명으로 실각하였다.
- 최인규 : 이승만 정부 때 교통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냈고 권력실세로 군림했지만, 3.15 부정선거를 주도하고 4.19 혁명 당시에 시위하는 학생들을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렸다. 결국 이승만 정부가 붕괴한 뒤 실각하고 나중에 사형을 당했다.
- 장경근 : 이승만 정부 시기에 권력실세였으며, 내무부장관에 국회의원까지 했다. 자유당 내에서는 강경파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가 몰락한 후에 실각하면서 외국으로 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 홍진기 : 이승만 정부 시기에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내면서 권력실세로 군림했지만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부가 몰락하면서 실각하고 옥살이를 하게 된다. 석방 이후 언론인으로 변신해서 삼성그룹과 사돈을 맺고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창업한다.
- 이익흥 : 이승만 정부 시기에 경기도지사로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켰으며 이후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 한희석 : 이승만 정부 시기에 자유당 국회의원과 차관을 지냈고 정권의 실세였지만, 4.19 혁명 이후에 이승만 정부가 몰락하면서 실각, 이후 기업인으로 변신한다.
- 곽의영 : 이승만 정부 시기에 자유당 국회의원과 체신부장관을 지냈고 권력실세였지만 4.19 혁명 이후에 이승만 정부가 몰락하면서 역시 실각하였다. 이후 기업인으로 변신하였다.
- 최순주 : 이승만 정부 시기에 재무부장관을 지낸 바가 있고 국회부의장 시절에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켰다.
- 김현철 : 이승만 정부 시절에 재무부장관, 부흥부장관을 지냈고 5.16 군사정변 이후 경제기획원장관을 거쳐 내각수반으로서 박정희 정부 출범에도 기여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 핵심 경제관료였다.
- 강성태 : 이승만 정부 시절 재무부차관과 상공부장관을 지냈고 자유당 소속으로 국회의원까지 당선되면서 자유당 내의 경제실세로 군림했다.
- 인태식 : 이승만 정부 시절 자유당 국회의원에 재무부장관을 지낸 핵심 경제관료였다.
- 김일환 : 이승만 정부 시절에 상공부장관, 내무부장관, 교통부장관 등을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으며 4.19 혁명 이후에 몰락하지만 나중에 모범수로 석방되면서 박정희 정부 때는 재향군인회 회장을 하면서 기업인으로 변신하였다.
- 박용익 : 이승만 정부 시절에 자유당 실세였으며 자유당 원내총무, 국회 예결특위위원장 등을 지냈다.
- 이강학 : 이승만 정부 시절 치안국장을 지냈으며, 신 국가보안법 파동 당시 무술경관들을 동원해서 야당 의원들을 연금하는 데 공을 세우면서 이승만 정부 말에 실세로 군림했으나 3.15 부정선거를 은폐하다가 몰락하고 이후 수감되었다. 그러나 특사로 석방된 뒤 기업인으로 변신하였다.
- 김형근: 이승만 정부 시기에 내무부차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내면서 실세로 군림했다. 이후 야인으로 있다가 박정희 정부에서는 헌법위원회 상임위원이 되었다.
- 이근직 : 이승만 정부 시절에 관료였으며 경상북도지사 시절에 가짜 이강석 사건을 진압했다.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장관과 농림부장관을 지내면서 실세로 군림하였지만 3.15 부정선거로 이승만 정부가 몰락하면서 실각하였다.
- 송인상 : 이승만 정부에서 부흥부장관과 재무부장관을 지내면서 이승만 정부의 경제 실세로 군림했지만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으로 인해서 이승만 정부가 몰락하게 되면서 실각했다. 이후 기업인으로 변신하였다.
- 최재유 : 이승만 정부에서 보건사회부장관과 문교부장관을 하면서 교육계와 의료계에서 권력을 행사했으나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몰락하면서 덩달아 실각했으며, 이후 다시 교육계로 돌아갔고 기업인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 손창환 : 이승만 정부에서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냈지만 4.19 혁명으로 인해서 실각한다.
- 구용서 :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한은총재와 초대 한국산업은행 총재, 상공부장관 등을 하면서 이승만 정부의 경제 실세로 군림했다.
- 박희현 : 이승만 정부에서 재무부장관을 하면서 긴축재정을 유지했고 상공부장관으로도 임명되었지만 국회 불신임으로 물러났으며 이후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 김창룡 : 이승만 정부에서 특무부대장을 5년 가까이 역임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군부 최강의 실세로 군림하였으나, 지나친 월권행위 등으로 상관인 정일권, 백선엽등과 갈등을 빚다가 특무부대장 재임중인 1956년 1월 30일오전에 종로구 옥인동의 특무부대로 출근하던 중에 하급 군인들에게 암살당하였다.
- 장택상 :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미군정 때 수도경찰청장을 지내면서 정치공작을 주도했고 이승만 정부에서 외무부장관, 국무총리를 했으며 국무총리 시절에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나중에는 조봉암의 사형에 반대하면서 이승만과 사이가 멀어진다.
- 조병옥 :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미군정 때 경무부장을 지내면서 정치공작을 주도했으며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승만과 사이가 멀어지면서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 윤치영 : 이승만의 핵심 측근으로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내무부장관을 지내고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나중에 박정희 정부에서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전국구 국회의원을 했고 서울특별시장도 한다.
- 허정 :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이승만의 핵심 측근이며 이승만 정부에서 총무처장, 교통부장관, 사회부장관, 무임소장관, 국무총리 서리, 서울특별시장을 했고 한일회담 수석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으며 이승만이 하야한 후 다시 국무총리를 맡아서 대통령권한대행까지 맡아서 과도정부를 구성하기도 했다.
- 이범석 : 독립운동가 출신이며 이승만 정부 초기에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내무부장관을 지내면서 이승만의 핵심 측근으로 군림했지만 나중에는 이승만과 사이가 멀어진다.
- 장석윤 : 이승만 정부 시절에 내무부 치안국장, 내무부차관, 내무부장관을 지냈고 자유당 소속으로 제3,4대 국회의원도 지냈다.
- 이순용 :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이승만의 핵심 측근이며 내무부장관, 체신부장관, 외자청장을 했고 이승만의 퇴임 이후 이승만이 새 양자를 들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 최규남 : 물리학자 출신으로 이승만 정부에서 문교부차관, 서울대학교 총장, 문교부장관을 지냈고 자유당 소속으로 서대문구 을 지역구에서 제4대 국회의원도 지냈지만 이승만 정부 몰락 이후에 실각하였다. 이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다시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이후에는 다시 학계로 돌아갔다.
- 이선근 : 6.25 전쟁 당시에 국방부 정훈국장, 육군본부 정훈감을 하면서 대한학도의용대 총지휘관을 겸했고 이승만 정부에서 문교부장관을 하면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였고 조선왕조실록 영인작업을 맡기도 했으나 제3대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다가 민주당으로부터 고발을 당했고 불신임안이 통과되면서 불명예 퇴진을 하였다. 이후 학계로 돌아가서 여러 대학교의 총장과 대한상무회 회장, 문화재위원장, 문화재보호협회 회장, 한국교련 회장, 정신문화연구원 원장 등을 지냈다
- 문봉제 :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 치안국장과 교통부장관을 지냈고 자유당에서 여러 당직을 지냈으며 태양신문 발행인, 한국일보사 편집 및 발행인 등 언론인으로도 활약하였다.
- 이윤영 : 독립운동가 출신이며 이승만의 핵심 측근으로 국무총리 서리, 사회부장관, 무임소장관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정식으로 국무총리를 하지는 못했고 이후 연달아서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낙선을 하였다.
- 임병직 :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이승만의 핵심 측근이며 장택상의 뒤를 이어 외무부장관을 했고 UN 한국대표단 단장으로 다자외교를 이끌었다. 박정희 정부 때는 민주공화당 고문, 뉴델리 대한민국 총영사,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을 지냈다.
- 신성모 : 독립운동가 출신이자 항해사 출신으로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지냈다. 하지만 국방부장관 시절에 국방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여 6.25 전쟁 초반부에 병폐행각과 삽질을 여러차례 일으켰고 국민방위군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결국 해임되었다.
- 백두진 : 이승만 정부에서 재무부장관을 지내면서 조세범처벌법, 임시토지소득세법, 귀속재산처리법 등을 밀어붙였고 대한민국 정부의 세수확보에 앞장섰으며 한미경제협정조정도 이끌어 냈다. 국무총리가 되어서도 화폐개혁을 단행했고 초강력한 인플레이션 억제책도 실행하였으며 지지부진하던 미지금급 1억달러의 상환도 이루어냈다. 박정희 정부에서도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냈다.
3.1.2. 박정희 정부
- 김종필 : "통일, 외교, 국방, 중공업[2]만 빼고 나머진 모두 임자[3]가 알아서 하시게"라는 박정희의 신임으로 보기 드문 실세 총리로 군림했다. 대통령비서실에서 만든 경제개발계획을 국무총리실에서 마음대로 고치는 수준이었다고... 사실상의 이원집정부제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이 시기가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독재정권 시기였음을 고려하면 이 시기에 실세 총리라는 게 있었다는 게 더더욱 놀랍다. 다만 마냥 실세였던 것만은 아니고 총리 재임 후반기에는 박정희의 견제를 받았다.
- 이후락 :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으며 대통령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을 하면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고 7.4 남북 공동 성명에도 기여했으며 주일대사로 일본통이기도 했다.
- 박종규 :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고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이었으며 대통령경호실장을 지내면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고 하나회를 후원하기도 했다.
- 김형욱 :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면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횡포를 여러차례 저질렀고 3선 개헌에도 앞장을 서지만 결국 토사구팽을 당한다.
- 김정렴 : 박정희 정부 시기에 재무부장관과 상공부장관을 지냈고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면서 오랫동안 박정희 대통령을 보필했다.
- 신직수 : 박정희 정부에서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면서 권력실세로 군림했다. 공작정치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 장기영 : 박정희 정부에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과 여당 국회의원을 지내며 박정희 정부의 대표적인 경제관료로 군림했고 한국일보를 창업하기도 했다.
- 권오병 : 이승만 정부 시절 검사였으며 박정희 정부에서 법무부장관과 문교부장관을 했는데 문교부장관 시절에 국민교육헌장 제정, 중학교 무시험 진학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 황종률 : 5.16 군사정변 이후 재무부장관을 지냈고 박정희 정부에서 무임소 장관, 체신부 장관, 재무부 장관,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하면서 핵심 경제관료로 군림한다.
- 김학렬 : 박정희 정부 시기에 재무부장관, 경제수석, 정무수석,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지내면서 박정희 정부의 대표적인 경제관료로 군림했고 포항제철 건설 등으로 대한민국이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바뀌는데 이바지했다.
- 오원철 : 박정희 정부 시절에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내면서 박정희 정부 경제정책의 핵심축을 담당했고, 중화학공업, 방위산업의 건설계획을 총괄적으로 입안, 추진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으며 율곡사업으로 명명되는 방위력 증강 계획, 번개사업으로 알려진 국산무기 개발도 추진했고 박정희 정부의 핵무기 개발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임시 행정수도 장기계획도 총괄했다.
- 김성곤 : 쌍용그룹 창업주이자 동양통신 회장이기도 하며 이승만 정부 시절에도 자유당에서 국회의원을 했지만 박정희 정부에서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3선을 하면서 더욱 권력이 올랐고 4인방을 형성했으며 박정희 대통령과 각별한 친분을 형성했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3선 개헌에 앞장서면서 실세로 떠오르지만 10.2 항명 파동으로 인해서 몰락하게 된다.
- 김진만 : 6선 국회의원을 했으며, 김성곤, 백남억, 길재호 등과 4인방을 형성하면서 3선 개헌에 앞장섰고 실세로 떠올랐지만 역시 10.2 항명 파동으로 인해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국회부의장까지 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 백남억 : 법학자 출신이며, 5선 국회의원이었고 김성곤, 김진만, 길재호 등과 함께 4인방을 형성하면서 3선 개헌에 앞장서면서 실세로 떠올랐지만 10.2 항명 파동으로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국회의원을 했다.
- 길재호 : 5.16 군사정변에 앞장선 군인 출신으로 민주공화당에서 3선 국회의원을 하면서 김성곤, 김진만, 백남억과 4인방을 형성했고 3선 개헌에 앞장서면서 실세로 떠올랐지만 10.2 항명 파동을 주도했다가 몰락하였다.
- 오치성 : 5.16 군사정변에 앞장선 군인 출신이며 김종필계의 핵심 일원으로 민주공화당에서 4선 국회의원을 했고 박정희의 제7대 대통령 취임 이후에 내무부장관이 되어서 4인방계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4인방계 정부인사들과 지방관료들과 경찰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했지만 10.2 항명 파동으로 인해서 사퇴하였다.
- 김현옥 : 역시 5.16 군사정변에 참여한 군인 출신인 데다가, 박정희 정부에서 관선으로 부산직할시장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했다. 부산시장 시절 부산을 직할시로 승격시켰으며 서울특별시장 시절에는 원조 불도저 시장, 돌격시장으로서 서울특별시 개발에 공을 기울였고 세종대로, 명동 지하도 건설, 세운상가 건설, 강변북로 건설, 여의도 개발, 고가도로, 터널 건설, 시민아파트 건설사업을 주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인해서 경질되었고 실각하는 듯 했지만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어서 재기를 하는 데 성공, 그 뒤에 10월 유신에도 앞장섰다.
- 양택식 : 박정희 정부에서 서울특별시장을 하면서 서울 지하철 건설과 여의도 개발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고 도산공원도 조성하였다. 하지만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식 당일 날에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벌어지면서 서울특별시장에서 사임을 했고 이후 대한주택공사 사장을 하면서 잠실 주공아파트의 건설을 주도했다.
- 구자춘 : 5.16에 가담한 군인 출신이며, 이후 경찰로 근무하면서 서울특별시 경찰국장과 경찰전문학교장을 거쳐 제주도지사, 수산청장, 경상북도지사를 하다가 서울특별시장이 된 후 서울 지하철 2호선을 순환선으로 만들었고 강북 지역 명문고의 강남 이전, 반포동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립, 금화터널 건설과정에서의 독립문 이전, 한양도성 일부 복원, 도심부 주차장 확충을 추진했다. 이후 내무부장관이 되었으나 전두환 정권 때 정치규제를 당했다가 풀려난 이후 제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 김용환 : 박정희 정부에서 재무부장관을 지냈으며 후에 4선 국회의원을 했고 한 때는 친박 7인회에 속했다.
- 홍종철 :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고 박정희 정부를 만드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후 초대 경호실장에 문교부, 공보부-문화공보부의 장관을 지냈고 청와대 사정담당 특별보좌관까지 지냈다.
- 윤주영 : 박정희 정부에서 문화공보부 장관을 했으며, 유신 체제를 출범시키는 데 앞장을 섰다.
- 박경원 : 박정희 정부 때 내무부장관 세 번을 했고 체신부장관, 교통부장관까지 했다.
- 이원경 : 박정희 정부에서 문화공보부 장관을 했고 전두환 정부 때 체육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을 했는데 체육부 장관으로 있을 때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을 잘 수습했다.
- 김성진 : 박정희 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을 했고 나중에 문화공보부 장관도 했다.
- 남덕우 : 박정희 정부 시절 재무부 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각각 5년씩, 도합 10년을 하면서 경제 실세로서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작 국무총리 때는 힘이 없었다.
- 차지철 : 박정희 정부 대통령경호실장을 맡으면서 타 정부부처들의 업무에 사사건건 개입을 해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행적들에 의해 결국 10.26 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 전두환 : 박정희 정부의 군부 최강 실세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중장들이 소장인 전두환에게 굽신거리는 정도였다.[4]
- 김재규 : 박정희 정부 시절에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 차장, 교통부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으나 한참 후배인 차지철에게 밀려나며 점차 실세에서 멀어졌다. 이것이 발단이 돼 차지철에게 원한을 품고 결국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국가원수 살인 사건을 일으켰다.
- 윤필용 : 하나회의 후원자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박정희 정부 때 방첩부대장, 20사단장, 맹호부대장을 지내면서 박정희의 신임을 많이 받았고 수도경비사령관까지 오르지만 윤필용 사건으로 인해서 박정희의 진노를 사면서 숙청당하고 윤필용계 하나회들도 대거 숙청당한다. 나중에 전두환 정부 때 전두환의 배려로 한국도로공사 사장, 한국담배인삼공사 이사장을 지낸다.
- 진종채 : 하나회의 후원자이며 8사단장, 육군정보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 등을 거쳤고 육군보안사령관이 된 뒤 육군보안사령부를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 개편하였다. 이후 제2야전군사령관을 맡고 대장으로 진급한 뒤에 예편하였다. 이후 진해화학 사장을 지냈다.
- 강창성 : 5.16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박정희의 신임을 받아서 5사단장, 중앙정보부 차장보, 육군보안사령관 등을 지냈고 유신 선포 후에는 박정희의 명령으로 야당 국회의원들을 체포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민심의 반발을 우려하여 인원을 줄일 것을 주장했고 이후 윤필용 사건 당시에 하나회를 뿌리뽑으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6관구사령관으로 좌천되었으며 이후 해운항만청장을 지냈지만 전두환에 의해서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되어 고문당한 뒤에 해운항만청장 시절에 뇌물수수 혐의가 씌워지면서 감옥 살이를 하게 되었다. 출소 이후에 전국구 소속으로 재선 국회의원을 했다.
- 최영희 : 박정희 정부 때 국방부장관을 지내면서 향토예비군 창설을 주도했으며 이 외에도 4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 민관식 : 박정희 정부 때 문교부장관을 지내면서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을 추진했고 이외에 5선 국회의원을 하면서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 김치열 : 박정희 정부 때 중앙정보부 차장, 검찰총장,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을 했다.
- 김용태 : 박정희 정부 때 김종필계의 일원으로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에서 5선 국회의원을 했고 제1무임소장관도 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이 매우 깊었고 민주공화당의 직책도 두루 맡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에는 구속된 기업인들의 석방, 울산공업센터 건립, 전경련 창설에 기여하기도 했다.
- 이병희 : 5.16 군사정변 참여 이후에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이 되어서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했으며 이후 수원에서 제6~10대 국회의원을 계속 하면서 수원을 경기도 최대도시로 발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 때 정치규제를 당했다가 이후 풀린 뒤에 제13,15대 국회의원을 한다.
- 신현확 : 이승만 정부에서도 부흥부장관을 했고 박정희 정부에서는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9,10대 국회의원을 했으며 보건사회부장관, 경제기획원장관 겸 경제부총리를 하면서 의료보험 설계, 경제 안정화 정책 기획 등을 추진했다. 최규하 정부에서는 국무총리가 되었고 최규하 대통령 체제를 강력히 밀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퇴하였다. 이후 헌법개정심의위원장, 국정자문위원,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장을 했고 삼성물산 회장을 맡기도 했다.
- 장경순 : 현역 장성 신분으로 군사혁명위원과 농림부장관을 했으며 이후 박정희 정부에서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5선 국회의원을 했고 국회부의장까지 지냈으며 무임소제1장관도 역임했다.
- 유기춘 : 박정희 정부에서 문교부장관을 지내면서 학도호국단 건설을 추진했다.
3.1.3. 전두환 정부
- 김재익 : 전두환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하면서, 전두환 정부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인 물가안정을 달성하는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김재익 수석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말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금융실명제도 원래는 김재익 수석이 제일 먼저 추진을 했고 전두환도 이를 허락했으나 "이러면 합법적 돈세탁과 정치자금을 못 받는다"는 식으로 측근들이 참소하여 끝내 이기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어버렸다. 대신 전두환은 이걸 벼르고 있다가 나중에 이 말을 했던 측근들을 숙청한다.
- 강경식 : 전두환 정부에서 재무부장관을 역임했고, 이후 대통령비서실장도 지냈다. 이후 3선 국회의원을 하다가 김영삼 정부 말기에 경제기획원장관 겸 경제부총리에 임명되었지만 IMF 사태 수습에 실패하면서 구속되기에 이른다.
- 김만제 : 전두환 정부에서 재무부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하면서 한국경제를 흑자로 이끄는 데 큰 공헌을 한 경제 실세였으나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뒤에 부실 기업 처리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 허화평, 허삼수 : 전두환 정부를 출범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전두환 정부에서 청와대 수석을 지내면서 권력을 행사했고 이후 국회의원도 하지만 전두환의 불법 행위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허화평, 허삼수도 전두환의 불법 행위에 동조한 점이 확인되면서 구속되었고, 석방 후에 허화평은 시사평론가가 되었고, 허삼수는 체육계 쪽에서 활동하고 있다.
- 이광표 : 전두환 정부 초반기에 문공부장관을 지내면서 언론통폐합을 주도했다.
- 이원홍, 이진희, 허문도 : 전두환 정부 시절 언론계의 3중역이었다.
- 이웅희 : 전두환 정부 시절 MBC 사장과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냈고 이후 3선 국회의원을 했다.
- 박희도, 박준병, 박세직 : 전두환 정부 시절 3박으로 불렸음과 동시에 하나회의 핵심인물들로, 박희도는 육군참모총장을, 박준병은 국군보안사령관을 거쳐 3선 국회의원을, 박세직은 안기부 차장에 총무처장관과 체육부장관을 했다.
- 이종구: 전두환 정부 시절 하나회 중에서도 황태자로 불렸으며, 수도경비사령관, 국군보안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을 모두 거쳤고 노태우 정부 때도 국방부장관을 거치면서 실세로 군림했다.
- 정호용 : 전두환 정부 당시 국방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했으며 이후 제13, 14대 국회의원을 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때 역사바로세우기가 진행되면서 구속되었다가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 안무혁 : 전두환 정부 당시 하나회의 일원이었고 국세청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역임했다.
- 장세동 : 전두환 정부에서 대통령경호실장에 국가안전기획부장까지 역임했으며, 전두환에 대한 충성심이 엄청난 것으로 유명했다. 전두환 정부의 실질적인 2인자로, 그전에 박정희 정권에 인사로 대입하면 그 권세가 이후락+차지철이라 할 수 있을 정도라는 평가도 있다.
- 최세창 : 전두환 정부 때 하나회 13기로 승승장구하면서 20사단장, 수도경비사령관, 1군단장, 육군참모차장, 합동참모의장 등을 하면서 실세로 군림했다. 노태우 정부 때 쫓겨났지만 나중에 국방부장관으로 금의환향했다.
- 김진영 : 전두환 정부 당시 하나회 17기로 승승장구했고 수도방위사령관까지 올랐지만 좌천을 두 번이나 당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 때 결국 육군참모총장까지 되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때 하나회 숙청이 진행되면서 옷을 벗게 된다.
- 노태우 : 5공화국 초기 한정, 중반부터는 전두환의 견제를 받게 된다.
- 염보현 : 5공화국 시기에 서울시장을 지내면서 서울지하철 2,3,4호선을 완공했고 한강종합개발 추진,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개장, 목동신시가지 건설, 경희궁 복원, 보라매공원, 종묘공원, 석촌호수 개발계획을 추진했다.
- 최순달 : 과학자 출신으로 5공화국 시기에 체신부장관을 지냈으며 이후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를 쏘아올리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일해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내는 과정에서 국제그룹 해체와 관련이 있었다는 논란이 일었다.
- 노신영 : 외교관 출신이며 5공화국 시절에 외무부장관, 국가안전기획부장, 국무총리 등을 역임했고 전두환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
- 차규헌 : 5.16 군사정변과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군인 출신으로 전두환 정부 때 육군참모차장, 2군사령관을 거쳐서 예편 이후 비상기획위원회 위원장,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교통부장관 때의 비리로 인해 구속되었고 김영삼 정부 때도 역사바로세우기로 인해서 구속당했다가 풀려났다.
- 황영시 : 하나회의 후원자이며 12.12 군사반란에 가담했고 전두환 정부 때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예편 이후에 감사원장을 지냈다.
- 유학성 : 하나회의 후원자이자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사람으로 전두환 정부 때 국가안전기획부장, 반공연맹 이사장, 총력안보중앙협의회 회장을 하고 이후 3선 국회의원을 했지만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가 시행된 이후에 국회의원을 사퇴했고 이후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로 인해서 구속당했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집행정지로 석방된 뒤 지병으로 사망하여 공소기각 판정을 받았다.
- 고명승 : 하나회이자 12.12 군사반란에 가담했고 이후 수도경비사령관과 보안사령관을 거쳐 3군사령관까지 하지만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육군참모총장이 되지 못한 채 전역을 했고 민주자유당과 신한국당 소속으로 두 차례 총선에도 출마하지만 낙선을 했다. 이후 한나라당 전북도당 위원장을 하다가 물러난다.
3.1.4. 노태우 정부
- 박철언 : 노태우 정부 시절 권력실세였으며, 김옥숙의 고종사촌이자 노태우의 손아래 처남으로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다. 덕분에 6공 황태자로 불리기도 했다. 체육청소년부장관과 3선 국회의원을 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후 슬롯머신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다. 이때 이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하면서 대통령의 처남씩이나 되는 권력실세를 구속하고 감옥에 보낸 간 큰 검사가 다름아닌 홍준표였다.
- 김윤환 : 노태우의 경북고 동기로서 개인적으로도 매우 절친한 사이였으며,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킹메이커이기도 하다. 노태우 정부에서 무려 2차례나 정무제1장관을 역임했다.
- 박태준 : 포스코 창업주 겸 초대 회장으로,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으로 임명되어 노태우 대통령을 대리해 당 운영을 맡았고, 3당 합당 이후에는 민주자유당의 민정계 측 최고위원을 맡았다.
- 최병렬 :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 문화공보부-공보처장관, 노동부장관 등을 했으며 5공 청산을 주도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관선 서울시장을 지냈으며 4선 국회의원을 했고 나중에는 한나라당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 이상희 : 전두환 정부 때는 관선 대구시장을 지내면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이후 경상북도지사, 내무부차관, 내무부장관을 하다가 노태우 정부 때 건설부장관을 지냈는데 주택 200만호 건설, 1기 신도시 개발 사업, 자유로 조성 등을 지휘했다.
- 이상연 : 노태우 정부 때 국가보훈처장, 내무부장관, 청와대 민정수석, 국가안전기획부장을 했다.
- 이진삼
- 서동권 : 전두환 정부 때는 검찰총장을 지냈고 노태우 정부 때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내면서 북방외교를 주도하였고 한반도 평화무드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남북기본합의서를 발표하는 데 기여하였고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을 이뤄냈고 중국, 러시아, 동구권과 수교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3.1.5. 문민정부
- 최형우 : 김영삼 상도동계의 중간보스로, 문민정부에서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 김덕룡 : 상도동계의 또 다른 중간보스였던[5] 김동영이 암으로 사망한 이후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민주자유당 사무총장과 문민정부 제1 정무장관을 역임했다.
- 서석재 : 상도동계의 또 다른 중간보스로 5선 국회의원을 했고 문민정부에서 총무처장관을 지냈다.
- 김현철 : 김영삼의 차남으로, 주먹구구식 선거 전략이 횡행하던 시절, 자체 여론조사 팀인 동숭동팀을 꾸려 김영삼의 선거전략을 짜는 등 상도동계의 브레인으로서 활약했고, 덕분에 아버지 김영삼이 크게 신뢰했다고 한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국정운영과 인사권에 개입한 것은 물론, 대통령이 보고받는 수준의 고급정보까지도 청와대 각 수석이나 안기부로부터 보고받고, 차기정권 창출을 위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김영삼 임기 말에 한보 사태로 몰락했다.
- 김용태 : 민정계 출신으로 4선 국회의원을 했지만 김영삼을 지지한 신민주계 정치인으로 김영삼 정부에서 내무부장관과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 권영해 : 문민정부에서 국방부장관과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내면서 실세로 군림했다.
- 이원종 : 김영삼의 핵심 측근이며 김영삼 정부에서 공보처차관을 지내다가 청와대 정무수석이 되면서 실세로 군림하였다.
3.1.6. 국민의 정부
- 권노갑
- 한화갑
- 한광옥 : 다만 김대중 전 대통령 퇴임 이후 친박으로 전향했다.
- 김옥두 : 김대중의 가신이며 핵심 측근이었다.
- 박지원 : 국민의 정부 시절 문화체육관광부장관과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했다. 김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 전윤철
3.1.7. 참여정부
- 문재인 : 참여정부 시기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한 친노계의 2인자이자 친노의 후신인 친문의 수장. 국민의 정부 때 박지원이 있었다면 참여정부 때는 문재인이 있었다.
- 유시민 : 참여정부 시기 꽤 영향력이 있었다. 썰전에서는 자신이 비선실세가 아니라 대놓고 실세였다는 드립을 치기도 했다.
- 안희정 : 좌희정-우광재 라인 중 하나이며 노무현의 국회의원 시절 비서관 출신으로 친노계의 적장자로 불렸다.
- 이광재 : 좌희정-우광재 라인 중 하나이며 노무현의 국회의원 시절 비서관 출신으로 참여정부 당시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장이었다.
- 이해찬 : 참여정부 시절 실세 총리로 유명했다. 당 내 세력은 비교적 약했지만...
- 정동영 : 열린우리당 의장과 통일부장관[6]을 역임할 정도로 당시 정부여당의 실세였으나,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노무현과 손절하면서 친노 지지자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듣게 되었다.
3.1.8. 이명박 정부
- 강만수 : 747 공약 등 이명박 경제정책을 주도적으로 설계했으며, 이명박 정부 초대 기획재정부장관을 역임했다. 기재부장관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 대통령실 경제특별보좌관 등을 지내면서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이어갔다.
- 최시중 : 이명박 정부 시절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했으며, 방송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 박희태 : 6인회[7]의 일원으로서 친이계의 핵심 인물이고, 6선 국회의원을 하면서 이명박 정부 시절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에 국회의장까지 역임했다.
- 이상득 :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이며, 6선 국회의원을 했다. 이명박 정부에 직접 몸담지는 않았으나, 고용노동부장관을 역임한 임태희나 왕차관으로 불리면서 국무총리실 국무차장과 지식경제부 제2차관을 역임한 박영준을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 이재오 : 친이계의 좌장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과 특임장관을 역임하면서 실세로 군림했다. 또 다른 실세였던 이상득과는 갈등 관계를 맺기도 했다.
- 정동기 : 이명박 정부 출범에 큰 공을 세웠고 이후 이명박 정부의 두 번째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다. 그러다가 정부법무공단 이사장을 지낸 뒤에 감사원장 후보까지 올랐으나 청문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실각한다.
- 임태희 : 한나라당에서 3선 국회의원을 했고 이명박 정부 때 고용노동부장관과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면서 이상득의 측근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 고흥길 : 한나라당 3선 국회의원을 했으며 이명박 정부 때 특임장관을 지냈고 미디어법을 강행 통과시켰다.
- 류우익 :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과 통일부장관을 지냈다.
- 정정길 : 이명박 정부에서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3.1.9. 박근혜 정부
- 최순실 : 박근혜 정부의 비선실세로 언론에 알려지며 박근혜 정부가 남긴 최대의 오점으로 드러난 인물. 자세한 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문서로. 이 문서에 서술된 다른 실세들과의 차이점은, 1인자가 배후에 있는 게 아니라 1인자의 배후에 있었다는 점이다.
- 우병우 :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재직하면서 똥을 엄청나게 싸댔다.
- 김기춘 :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비서실장. 위에서 거론된 2명과 국정농단에 매우 크게 기여했다.
- 서청원 : 친박의 맏형이었으며, 상도동계의 중진이었고, 정무장관에 8선 국회의원을 했다.
- 최경환 : 친박의 좌장이고, 4선 국회의원에 지식경제장관과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하면서 초이노믹스를 주도했지만 그 과정에서 비판도 많이 받았고, 결국 박근혜 정부 몰락 이후에 국정원 특활비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수감되면서 의원직도 잃었다.
- 윤상현 : 현직 국회의원 신분에서도 박근혜 정부 대통령비서실 정무특별보좌관을 역임할 정도로 친박 핵심이었으며, 현재 5선 국회의원이다.
- 조윤선 : 박근혜 정부에서 여성가족부장관, 청와대 정무수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했다.
- 이정현 :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과 청와대 홍보수석을 했고 3선 국회의원에 새누리당 대표까지 했다.
- 이병기 : 박근혜 정부에서 주일대사, 국정원장,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했다.
3.1.10. 문재인 정부
- 이낙연: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다.
- 임종석: 문재인 정부의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이다.
- 조국: 문재인 정부의 민정수석이자 법무부장관이었으며,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었지만 조국 사태로 인해 사퇴했으며, 정권교체의 시발점이 되었다.
- 김경수: 문재인 정부의 경상남도지사이자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참여정부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휘하에서 대통령비서실 비서관이었다.
- 최재성: 문재인 정부 제4대 정무수석비서관이었으며 노영민 비서실장의 후임 비서실장으로도 거론됐다.
- 장하성: 문재인 정부의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이었지만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논란으로 사퇴했고, 주중대사로 하다가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물러났다.
- 김수현: 문재인 정부에서 사회수석을 하다가 두 번째로 청와대 정책실장이 되었다. 참여정부에 이어 또다시 부동산 정책 실패 및 정권교체에 일조했다.
- 김상조: 문재인 정부에서 공정거래위원장,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지내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 노영민: 문재인 정부 제2대 대통령비서실장.
- 김현미: 3선 국회의원을 했고 문재인 정부에서 국토교통부장관을 했지만 부동산 정책 논란으로 인해서 크게 비판받았다.
- 추미애: 문재인 정부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를 했고 세 번째 법무부장관을 하였다.
- 3철
- 유은혜: 재선 국회의원을 했고 문재인 정부에서 두 번째 교육부장관 겸 사회부총리를 했다.
3.1.11. 윤석열 정부
- 한동훈 : 윤석열 사단의 2인자로서, 윤석열 대통령과 검사 시절부터 각별하게 지내된 선후배 관계였다. 윤석열 정부의 초대 법무부장관을 지냈다.
- 이상민 : 윤석열 정부의 초대 행정안전부장관이며 경찰국 신설 등을 주도했다.
- 원희룡 : 3선 국회의원에 민선 재선 제주도지사를 역임했고 윤석열 정부에서 초대 국토교통부장관이 되었다.
- 박민식 : 재선 국회의원 출신이며 윤석열 정부 초대 국가보훈처장이 되었고 국가보훈부로 승격된 뒤에도 초대 국가보훈부장관이 되었다.
- 박진 : 4선 국회의원이며 윤석열 정부 초대 외교부장관이다.
- 권영세 : 5선 국회의원이며 윤석열 정부 초대 통일부장관을 지냈다.
- 추경호 : 3선 국회의원이며 윤석열 정부의 초대 기획재정부장관 겸 경제부총리를 지냈고 현재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지내고 있다.
- 김대기 : 윤석열 정부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원래는 대통령실 인사에 대한 그립을 잡지 못한다는 평이 있어 무늬만 비서실장인 바지사장으로 분류되었었다. 하지만 2022년 8월 윤석열 대통령의 대통령실 개편 이후 대통령실에서 완전한 실권을 잡으며 대통령실계의 수장으로 친윤 실세 중 한명으로 등극하였다.
- 이동관 : 윤석열 정부의 초대 방송통신위원장이다.
- 권성동, 장제원 : 국민의힘 친윤 핵심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 이철규 : 국민의힘 친윤 핵심 정치인이며 국민의힘의 사무총장을 지냈다.
- 정진석 : 국민의힘 친윤 핵심 정치인이며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윤석열 정부의 세 번째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
- 박수영 : 국민의힘 재선 국회의원이고 친윤의 핵심 정치인이며 여의도연구원장을 했다.
- 최상목 : 윤석열 정부 대통령실의 초대 경제수석을 지내면서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을 총괄했고 윤석열 정부의 두 번째 기획재정부장관 겸 경제부총리에 임명되었다.
- 이관섭 : 윤석열 정부 대통령실에서 국정기획수석과 정책실장을 지냈고 두 번째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 이진숙 : 윤석열 정부의 세 번째 방송통신위원장이다.
- 김홍일 : 강력부, 특수부 검사 출신이며 윤석열 정부에서 국민권익위원장과 방송통신위원장을 역임했다.
3.2. 외국
- 도널드 럼즈펠드 : 국방장관이었지만 그의 월권행위에 질린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공화당을 등지고 버락 후세인 오바마를 지지할 만큼 횡포를 저질렀다.
- 도조 히데키 : 내각총리대신이 되기 전부터 2.26 사건으로 황도파가 몰락한 덕에 통제파의 수장으로서 군부를 장악하였고, 이후 내각을 압박해 정부 실권자들을 거의 목줄을 잡다시피 하며 나라를 쥐락펴락했다. 이윽고 내각총리대신 자리까지 차지하며 나라를 송두리째 삼켰으며, 본인이 일으킨 전쟁의 패색이 짙어진 탓에 물러난 후에도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 딕 체니 : 미국의 43대 대통령은 조지 워커 부시가 아니라 그였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왜냐면 미국 부통령[8]인 그의 정책들을 조지 부시가 거의 입안해줬기 때문이다.
- 미국은 행정부 내 권력 서열이나 권한 구분이 상당히 모호하게 되어 있고, 그 모호한 부분은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누가 행정부의 2인자냐는 각 정권마다 달라진다. 국무장관, 국방장관, 국가안보보좌관, 부통령, (심지어) 영부인까지 가능하다.
- 블라디미르 푸틴 : 2020년 개정 전 러시아 연방 헌법에 따르면 "같은 인물은 계속해서 3번 대통령직을 맡을 수 없다"고 되어있어 중임제한 없이 2연임, 즉 3재임만을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푸틴은 8년 동안 대통령으로 재직하다가 최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게 잠깐 대통령직을 넘기고 자기는 총리이자 여당 당수로 잠깐 내려와 있었다.
- 장제스 : 국가원수로는 린썬을 바지사장으로 앉혀두고, 정부수반으로는 왕징웨이를 세워둔 후 철저히 억압하는 한편 장제스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앉아 군권으로 본인은 국가원수, 정부수반 직위에 오르지 않고도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이끌었다.
- 마오쩌둥 : 대약진운동 이후 일시적으로 실권을 잃어 당시 실권자는 국가원수인 국가주석 류사오치와 중국공산당 총서기 덩샤오핑 그리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들(저우언라이, 주더, 천윈 등)로 구성된 집단지도체제 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권을 통해 월권행위를 저지르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류사오치를 숙청시키고 덩샤모핑과 다른 상무위원들을 내쫒아 다시 정국 주도권을 쥔다.
- 덩샤오핑 :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영도인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같은 최고위급 직위를 맡지 않고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군권을 통해 실권을 잡았다. 그 후 중공 원로들(천윈, 보이보 등)과 함께 중앙고문위윈회를 구성하여 당과 정국을 운영했다.
- 장쩌민 :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내놓지 않는 동안은 사실상 실세였다.
- 에리히 루덴도르프 : 독일 제국 말기의 독재자이며 사실상의 최고 지도자이다. 독일 제국 패망의 원흉이다.
- 한스 폰 젝트 :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였던 1920~26년 육군부 총감으르 재직하면서 군권을 정부, 정치인들에게 영향받지 않게 노력하였으며 자신이 손에 쥐고 있던 육군을 통해 공화국 내 최고 실력자로 권력을 행사하였다.
4. 실세로 거론되는 직책[9]
4.1. 공직
- 조선
- 이조전랑(吏曹銓郞) : 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전형(銓衡)을 담당하기 때문에 전랑(銓郞)이라 이름하였다. 조선 시절 직급은 정랑이 정5품, 좌랑이 정6품 밖에 안 됐지만 이조판서를 견제하기 위해 인사권을 이조전랑에게 위임한 탓에 실세 자리가 되었다. 재상으로 올라가는 보직이었다. 이 이조전랑 자리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최초의 붕당인 동인과 서인이 출현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 대한민국
- 수석비서관 : 대통령실에서 근무하는 대통령의 참모격 직책.[10] 그중에서도 민정수석비서관이 영향력이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수석들 중 명목상의 의전서열 1위는 정무수석비서관이었다. 정무수석은 대다수가 낙선/공천탈락한 의원출신인데, 민정은 친정부적 법조계(특히 검찰) 고위인사가 맡는다는 차이점이 있다.)그리고 대통령비서실장이 이들의 대장격으로 수석비서관들을 관리하고 대통령을 보좌한다.
- 차관보, 국장 : 장관, 차관들이 대체로 외부영입이나 낙하산 인사로 올 때가 많기 때문에 업무를 챙기는데는 차관보나 국장들의 영향력이 커진다. 일본 방위성도 방위대신보다 내부의 사무국장 등이 실무를 총괄한다. 방위대신은 정책 기조라든가 정치인에 의한 문민통제를 상징하는 경우가 크고.
- 기무사령관 : 한동안은 대통령을 독대할 수 있었으나 김영삼 때 국방부장관과 상하관계가 명확해지고 독대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이명박 때 다시 부활했고 문재인 때 기무사령부 자체가 아예 폐지되었다.(...)
-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 예산실장 직급 자체는 1급 공무원이나 국가의 모든 예산을 총괄하기 때문에 권력부처 차관급, 검찰국장을 비롯한 초고위 검사, 심지어 어중간한 장관이나[11] 국회의원들도[12] 함부로 못하는 자리다. 이 때문에 차관이나 국세청장으로 승진하면[13] 권력이 오히려 더 줄어든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 북한
- 미국
- 통합전투사령관 : 미군에서 제복군인의 으뜸은 합동참모의장과 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등이지만 실제로 군을 돌리는 자리는 통합군사령관들이나 각종 합동부대 직위, 작전사령관, 함대사령관들이다.
- 국무장관 - 부통령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국무총리처럼 실권이 약한 편이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2인자로 취급된다.
-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이사들
- 중국
-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 일반적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이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이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최고권력자이다.
4.2. 공기업
4.3. 대기업
5. 관련 문서
[1] 다만 이 경우 반대로 윗선이 갈려나가기도 한다.(...)[2] 통일, 외교, 국방은 외치의 영역으로 대통령이 할 수밖에 없고 중공업은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분야였다.[3] 박정희는 주변 측근들을 '임자'라고 부르는 말버릇이 있었다.[4] 이는 전두환이 군부 내 박정희 친위 사조직인 하나회의 중심인물인 탓이 컸다. 대놓고 대통령이 비호해주는 인물에 대통령 친위세력의 중심이니 저런 것도 가능했던 것.[5] 좌동영 우형우로 불렸다.[6] 당시에는 남북관계에 대한 기대 때문에 통일부장관의 위상이 현재보다 높았다. 직급으로도 부총리급이었다.[7] 이명박, 이재오, 이상득, 최시중, 박희태, 김덕룡[8] 부통령은 명예직에 가깝다.[9] 직책 대비 상대적으로 영향력이나 권한이 크다는 것을 말한다. 보면 알겠지만 당연히 윗선은 더 있다.[10] 대통령실 내부 직책들은 명목상의 직제에 비해서 실권이 센 대표적인 직책이다. 예컨대 고위당정대 3인의 회동은 당(대표)-정(국무총리)-대(비서실장)을 축으로 하고 이들이 각 하급자들을(당: 원내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수석대변인 등 여당 고위당직자들 / 정: 각 부처 장차관들, 국무조정실장, 국무총리비서실장 등 / 대: 정부부처에 대응하는 각 분야 수석들, 비서관들) 데려오는 식으로 이루어지는데, 비서실장은 직제상으로는 장관급이라 여당 대표나 국무총리보다 급간이 확연히 낮지만 회동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수석은 직제상 차관급이지만 당정대 관계에서의 실질적인 격은 장관과 맞춘다.[11] 非 정관계 출신(교수, 연구원 등)이거나 파워 자체가 하위권인 부처 장관(환경부, 여성가족부 등)[12] 비례 초선 등.[13] 참고로 국세청장도 검찰총장과 쌍벽을 이루는 권력요직으로 취급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