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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2-24 22:57:22

열녀


1. 개요2. 기원3. 한국사에서
3.1. 조선시대 이전3.2. 조선시대3.3. 문제점3.4. 삼강행실열녀도에 실린 열녀 목록 일부
4. 로마사에서

1. 개요



남편을 위하여 정성을 기울여 살아가는 아내를 일컫는 말. 뜻은 한평생 남편과 가문을 위해 열(烈)의 정신을 지키며 산 여인이다.

유교의 핵심윤리인 충효열에서 '열(烈)'을 가리키며 여성의 이상적인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2. 기원

열녀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중국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여기서 열녀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충신불사이군 열녀불경이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중국 전국시대 왕촉

이후 중국에서는 전한유학자 유향(劉向)이 편찬한 최초의『열녀전』이 있다. 이러한 열녀 담론은 중국을 넘어 유교의 보급과 함께 유교적 교화서로 한국에도 전래되었다.

3. 한국사에서

3.1. 조선시대 이전

삼국사기에서 등장하는 열녀에 대한 기록은 신라 진평왕 시기 설씨(薛氏)에 대한 이야기와 백제 개로왕 시기의 도미(都彌) 부인에 대한 기록이 있다.[1]

조선 초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고려 말 전란 속에서 정절을 지킨 열녀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열녀의 칭송과 사례 발굴이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을 볼 때, 고려 말~조선 초 신진사대부가 주도한 유교적 윤리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

3.2. 조선시대

한국사에서 국가가 정책적으로 공을 들여 열녀를 장려한 시기는 조선시대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는 과정에서, 부부 관계의 윤리와 가문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한 규범으로 아내의 정절과 수절이 강하게 강조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열녀는 개인의 미덕을 넘어 향촌 교화와 사회 질서 유지의 모범 사례로 활용되었다. 한 지역에서 열녀로 인정되는 인물이 나오면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홍살문 형태의 열녀문을 세워 널리 알리고 본보기로 삼았다.

태종 13년(1413)에 전국의 이름난 효부, 열녀 등을 추천하라 명하자 백성들은 수많은 열녀 관련 사연들을 올렸다. 자기 가문/고을에서 열녀가 나면 세금 혜택 등 많은 이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경상도 도관찰사가 추천한 한 사례가 있었는데 안동의 김씨부인이 남편을 구하기 위해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세종 16년(1434), 유교 윤리를 널리 보급하고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삼강행실도』를 편찬·간행하였다. 이 책은 충신·효자·열녀의 사례를 글과 그림으로 엮어 제시함으로써, 열녀를 비롯한 유교적 모범 행실을 전국적으로 알리고 확산시켰다. 또한 중앙에서 편찬한 교화서를 지방에 배포해 교육과 풍속 교정에 활용하게 함으로써, 사회 규범을 통일적으로 주지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태종과 세종 시기부터 여성의 재혼에 대한 불이익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성종 시기에 과부가 재혼하면 재혼한 여성의 자손들이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한다는 법을 경국대전에 실었다.[2]

초기에는 열녀담이 주로 양반층 같은 지배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담론은 평민층과 지방 사회로까지 일반화 되었다. 국가와 향촌이 유교 윤리를 더 촘촘히 적용하는 과정에서 열녀담은 향약·족보·읍지·열녀전 같은 매체를 통해 대량으로 생산·유통되며 더욱 제도화되었고, 동시에 가족과 마을이 열녀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압력도 커져 자발적 미덕의 이야기와 강제된 규범 사이의 긴장이 함께 확대되었다.

거기다 양반의 수 증가와 한정된 관직으로 인해 벼슬을 구하기 어렵기 되자 열녀나 효자로 인정될 시 나라에서 주는 미관말직이라도 받기 위해서 과부들에게 자결을 강요하는 사건이 있었고 이 때문에 열녀를 만들고자 자결을 강요한 주변인들을 처벌하는 경우도 있었다.

3.3. 문제점

광명한 햇빛을 스스로 꺼버리는 일인데 어찌 장려하는가?
연암 박지원, <열녀 함양 박씨전>
남편이 죽었을 때 처가 따라 죽는 것을 열(烈)이라 말하며 정표하는 문을 세우고 기둥을 붉게 칠하며 그 집의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고 그 아들과 손자의 요역(徭役)을 감면해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열이 아니라 소견이 좁은 것이다. 이것은 담당 관리가 살피지 못해서일 뿐이다.
다산 정약용, <열부론>
과부가 되더라도 재혼을 하지 않도록 강조했다는 점에서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개인의 인권 측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기는 하나, 그 외에 열녀문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었다.

어떠한 지역에 열녀가 나서 열녀문을 하사받으면 해당 지역에 요역이나 세금 면제, 또는 가문의 남성들에게 벼슬 내리기 같은 큰 혜택이 돌아가는 점을 이용하여 억지로 손가락을 끊는 경우도 있었지만 과부가 자결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자살로 꾸며 여성을 의도적으로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순조 시기에는 이런 사건도 있었다. 재혼한 과부의 자식들의 벼슬길이 차단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3.4. 삼강행실열녀도에 실린 열녀 목록 일부

4. 로마사에서

서양에서 고전적으로 유명한 사례는 고대 로마 시대에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라는 귀족 여성이 있었는데, 그의 아름다움과 정조의 명성이 자자했다. 어느 날 타르퀴니우스라는 남자가 그녀에게 자신과 하룻밤을 보낼 것을 요구했으나 루크레티아는 절개를 지켜야 한다며 거절한다. 타르퀴니우스는 점점 협박을 하게 되는데 그래도 통하지 않자 타르퀴니우스는 결국 "널 겁탈한 뒤에 남자 노예를 데려와서 둘 다 죽여놓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이는 미천한 노예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도중에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처형당한 것으로 위장시켜 노예와 붙어먹은 더러운 여자라고 극도로 명예를 실추시키겠다는 협박이다. 할 수 없이 루크레티아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타르퀴니우스에게 굴복하고 둘은 성관계를 한다. 루크레티아는 이에 극도의 수치심을 겪으며 살아갔다.

한편 전장에 나가 싸우고 있던 남편 콜라티누스가 얼마 후 돌아오자 루크레티아는 남편에게 울며, 당신이 없는 사이 다른 남자에게 더럽혀졌다고 고백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은 "벌을 받아야겠다. 복수를 해 달라"고 하며 수절을 지키려고 단검으로 자결한다. 이후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분노한 로마 시민들에게 맞아죽었다. 심지어 로마 시민들이 아예 왕정까지 폐지시켜 버리는 바람에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행위로 아버지의 왕위까지 잃게 만들었다.
"미래에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자들이 나 루크레티아를 예로 들며 변명하지 못할 것이오."
로마 역사학자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로마사 제1권
루크레티아의 열녀전은 서양에서 단골 주제여서 여러 회화나 조각품으로 만들어졌다. 허나 자결하는 장면이나 남편에게 고백하는 장면보다는 타르퀴니우스가 나체의 루크레티아를 겁탈하려는 선정적인 장면 위주다.
파일:열녀 Hans-Von-Aachen-The-Rape-of-Lucretia.jpg 파일:열녀 Tarquin Lucretia, Jacopo Robusti.jpg
Hans von Aachen 1600년 作
"루크레티아의 강간"
Jacopo Robusti 1578년 作 "타르퀸과 루크레티아"

[1] 설씨녀는 경주 민간의 여자로 약혼자와 혼인에 대한 약조를 지킨것, 도미 부인은 백제 왕의 유혹을 물리치고 부부간의 신의를 지킨것이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때 조선조의 열녀담에 비하면 굉장히 상식적이다.[2]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부의 재가가 허용되었다.[3] 아내를 미끼로 풀을 먹이다.[4] 최씨는 욕설을 퍼부었다.[5] 열부가 입강하다.[6] 임씨가 발을 끊다.[7] 김씨가 범을 잡다.[8] 김씨가 합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