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16대 왕에 대한 내용은 예종(고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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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국왕 | }}}}}}}}}}}}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초대 봉사손 귀의군 | 歸義君 | |||
출생 | 1345년 이후 | ||
사망 | 1397년 2월 24일 (향년 미상) | ||
묘소 | 미상 | ||
재위기간 | 고려 정양군 | ||
1389년 이전 ~ 1389년 | |||
고려 정양부원군 | |||
1389년 ~ 1392년 8월 7일 | |||
조선 귀의군 | |||
1392년 8월 8일 ~ 1397년 2월 2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 개성 왕씨 양양공파 | |
휘 | 우(瑀) | ||
부모 | 부왕 삼한국인효대공 모후 삼한국대비 | ||
형제자매 |
| ||
배우자 | 교하 노씨 | ||
자녀 | |||
종교 | 불교 | ||
봉호 | 정양군(定陽君) → 정양부원군(定陽府院君) → 귀의군(歸義君) | ||
시호 | 경희공(景禧公) | ||
영지 | 경기 마전군 (現 경기도 연천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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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왕자. 삼한국 인효대공 왕균과 국대비 왕씨의 아들로, 공양왕의 동복동생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는 혼맥으로 이어진 밀접한 관계였다.2. 생애
형 정창부원군 왕요가 왕위에 오른 1389년 겨울, 우왕과 창왕이 서인으로 강등되고 왕의 장인 이림(李琳)과 일가족이 유배보내질 때에 정양군 왕우는 군사를 이끌고 개성 인근의 장단에 주둔해 유사시에 대비했다. 형이 즉위한 해에 부원군 판문하를 거쳐 영삼사 종부시사의 관직에 오른다. 공양왕이 4대조를 추숭하자 형을 대신해 적경원에서 제사를 맡기도 했다. 1390년에는 공양왕 즉위 9공신의 일원인 지용기가 충선왕의 서증손 왕익부(王益富)를 집에 들이며 내통했다는 사실을 공양왕에게 알렸다. 1391년 영삼사사에 올랐다.왕우의 집안은 이성계 집안과 연이 깊어 왕우의 두 딸이 이성계의 장남 진안대군 이방우의 서자 순녕군 이덕근과 칠남 무안대군 이방번과 혼인했다. 그보다 많이 나중의 일이지만 왕우의 아버지 정원부원군 왕균의 딸, 왕우의 여동생은 이성계의 4남 회안대군 이방간의 아들 이맹종의 첫째 부인이 되었다. 이성계가 창왕을 폐한뒤 정창군 왕요를 왕위에 앉힌 것도 이런 밀접한 관계 덕분에 선양받기 쉬우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는 나라에 공이 있는 왕승(王昇)과 그 후손, 그리고 고려 왕조의 제사를 지낼 왕우와 그 후손은 섬에 보내지 않고 남겨두라고 명한다. 왕우는 귀의군(歸義君) 작위를 받고 경기도 마전군(麻田郡, 현재의 연천군 미산면 일대)의 앙암사(仰庵寺, 현재 연천 숭의전지)에서 왕씨의 제사를 지낸다. 태조는 왕우와 격구를 즐기면서 왕우를 마전군에 봉한 까닭을 설명하는데, 둘이 사돈 관계라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주나라에서 미자를 송나라에 봉한 것과 같다'고 한다. 왕우의 아들들은 외가 성인 노씨로 성을 갈았다.
1394년 왕씨의 역모 사건에 왕우도 표적이 됐다. 왕화와 박위 등의 국문에서 정양군, 즉 왕우의 이름이 오르내린 것이다. 여러 신하가 왕우와 두 아들을 섬으로 보내거나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태조는 매번 '고려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이유로 삼부자를 사면했다. 계속되는 탄핵 속에서 1397년에 죽으니 태조가 직접 제문을 써서 보내고 경희(景僖)의 시호를 하사했다.[1]
3. 여담
노조(盧珇)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노관(盧琯)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사람들은〉 왕우(王瑀)의 두 아들인데 외가(外家)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노조는 고려 왕조의 정강군(定康君)이다.
-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3일 기미 1번째기사 왕우 아들의 성을 외가를 따라 노씨로 하게 하다
-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3일 기미 1번째기사 왕우 아들의 성을 외가를 따라 노씨로 하게 하다
왕우의 두 아들들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뒤로 사돈 집안인 태조의 비호 덕분에 장남인 왕조는 상장군, 차남인 왕관(王琯)은 대장군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 두 아들들 모두 어머니의 성씨인 노씨로 성을 바꿨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들은 1차 왕자의 난 때 죽임을 당했다.
4. 가족관계
- 왕우
- 처: 노씨(盧氏)
4.1. 자녀
- 장남: 정강군(定康君) 왕조(王珇)
- 차남: 왕관(王琯)
- 여: 경녕옹주 왕씨
무안대군 이방번의 처. 삼한국대부인이라고도 한다. 태종으로부터 쌀을 받은 기록이 보인다. 경녕옹주는 태조실록 왕우의 졸기에서 보이는 유일한 딸이나,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보다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경녕옹주라는 작호는 제안대군의 손녀이자 노책의 처가 된 왕씨도 받은 작호이다. - 여: 개성 왕씨
청성백 심덕부의 7남이자 세종의 장인이 되는 심온의 아우 심정의 처. 단, 왕우의 딸이 심정과 혼인했다는 기록은 청송심씨 대동보의 기록이고 개성왕씨 성원록에는 왕우의 아버지 정원부원군 왕균의 딸이 심정과 혼인했다 기록하고 있다. - 여: 개성 왕씨
평양군(平陽君) 박석명(朴錫命)의 처. 박석명은 왕우의 사위였는데 고려가 망한 뒤에는 8년동안 관직에 공백이 있었다. 태종 시기부터 좌승지로 다시 관직 생활을 이어간다. - 여: 개성 왕씨 #
진안대군 이방우의 서자 순녕군(順寧君) 이덕근(李德根)의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