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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世賓
1717년(숙종 43) 9월 22일 ~ 1799년(정조 23) 1월 9일 (향년 81세)
1. 개요
조선 영조, 정조 시기의 고려 봉사손이다. 본관은 개성(開城)[1], 자는 사용(士用).선대 고려 봉사손이었던 숭의전 부사(崇義殿副使) 왕성원의 장손자이다.
2. 생애
1717년 9월 22일 아버지 왕탁(王濯, 1695. 11. 12 ~ 1721. 3. 24)[2]과 어머니 남양 홍씨(1694 ~ ?)[3]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왕세빈은 1738년 6월 20일[4]에 숭의전감(崇義殿監)으로 임명됐다. 1749년 2월 14일 숭의전령(崇義殿令)으로 승진했다. 이후 상을 당해 삼년상 중에 있었는데, 1757년 9월 19일 종제(終制, 삼년상을 마침)했다.
1790년 7월 7일에는 정3품 무관직인 첨지(僉知,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됐다. 이즈음 왕세빈의 나이는 80대에 이르렀고[5], 거동이 어려워 제향(祭享, 제사를 지냄)하거나 봉심(奉審, 왕명을 받고 묘소를 살핌)할 때 나와서 참여할 수 없었다. 1798년 9월 28일 경기관찰사 이제학의 요청에 따라 정3품 이상의 관직을 받은 왕세빈은 물러나고 왕세빈의 장남 왕경효(王景孝, 1742. 6. 4 ~ 1812. 10. 25)[6]가 직책을 받고 대신 봉심하게 됐다. 또 전부터 지적되던 숭의전 건물의 노후화 문제 해결을 위해, 마전군에 파견되는 경기도 지방관이 전관(殿官)과 함께 봉심하며 본전의 모습을 검사하고, 고쳐야 할 곳이 생기면 여러 읍(邑) 사이에서 이문(移文)해 수리하도록 하는 관례가 새로 만들어졌다.
1799년 1월 9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