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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무신 집권자 李義方 | 이의방 | |
출생 | 미상 |
고려 전주 (現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 |
사망 | 1174년 (향년 불명) |
고려 개경 나성 선의문(宣義門) 앞 (現 개성시) | |
재임기간 | 1170년 ~ 1174년 (4년) |
본관 | 전주 이씨 (全州 李氏) |
이름 | 이의방(李義方) |
딸 | 사평왕후(思平王后) |
형제 | 이준의, 이린(李隣), 이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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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무신 (武臣). 100년 동안 이어질 무신정권의 실질적인 첫 번째 집권자이다.2. 생애
2.1. 무신정변을 주도하다
본관과 출신지 모두 전주인 전주 이씨 출신이다. 또한 그의 동생인 이린은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의 6대조이다. 이의방이 몰락한 후 후대에 반역자로 규정된 이의방과 혈연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걸렸는지 《전주 이씨 족보》에는 이의방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1] 족보에 의하면 전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에서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2]이다. 그의 15대 후손이며, 아버지는 대장군 직위를 가졌던 이용부(李勇夫)이고, 어머니는 정승 이형(李珩)의 딸 이씨로 부계는 무신 집안이고, 모계는 문신 집안이었다. 숙부 이단신(李端信)은 문하시중, 사촌 이작산(李作山)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으며, 형으로는 이준의, 동생으로는 이린과 이거, 여동생이 있었다.정변 당시의 직위 | ||
직위 | 견룡행수(牽龍行首) | 친위대인 견룡군의 친위대장 직위. |
"문신의 관을 쓴 놈들은 한낱 서리(胥吏)일지라도 죽여서 씨를 남겨 두지 마라!" (凡戴文冠者, 雖胥吏, 殺無遺種!)
《고려사》 <정중부 열전>
면서 문신들을 철저히 색출한 뒤 싸그리 쓸어버리는 냉혹한 면모를 보인다.[5][6]《고려사》 <정중부 열전>
정변 후 의종에게 받은 직위 | ||
직위 | 응양군(鷹揚軍) - 용호군(龍虎軍) 중랑장(中郞將) | 고려 2군 6위 중 2군인 응양군과 용호군의 4번째로 높은 직위.[7] |
정변 후 명종에게 받은 직위 | ||
공신호 | 벽상공신(壁上功臣) | 신흥사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려진 신하는 삼한공신(三韓功臣)이라 한다. 초상화는 공신당의 벽 위에다 붙혔기 때문에 이의방 때부터 벽상공신이라는 별칭으로 불렸고, 이후 두 명칭이 합쳐져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
직위 | 대장군(大將軍) - 전중감(殿中監) 兼 집주(執奏) | 대장군은 두 번째로 높은 무관직, 전중감은 궁궐 내의 업무를 총괄하는 직위, 집주는 신하가 왕에게 올린 문서를 감독하는 직위. |
10월에는 외가 쪽 고향인 금구를 현으로 승격시켰으며 정중부, 이고와 함께 벽상공신(璧上功臣)으로 책봉되었다. 1171년 1월에는 자신을 살해하려고 대장군 한순과 장군이었던 한공, 신대예, 사직재, 차중규 등이 모의하자 차중규를 유배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의종의 사저 3채를 이의방, 정중부, 이고가 나누어 가졌다. 이의방은 천동댁(泉洞宅), 정중부는 관북댁(館北宅), 이고는 곽정동댁(藿井洞宅)을 각각 나누어 가졌다.[9]
이의방이 중방에 기녀들을 데려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마음껏 마시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대궐 안까지 들렸으나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2.2. 정권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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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시기의 직위 | ||
직위 | 흥위위(興威衛) 섭대장군(攝大將軍) - 위위경(衛尉卿) - 지병부사(知兵部事) | 흥위위 섭대장군은 2군 6위 중 6위인 흥위위 소속의 섭대장군이다. 섭대장군의 섭은 오늘날의 (진)과 비슷하며 녹봉 대우는 한 단계 아래인 장군과 같다. 지병부사는 지금의 국방부 차관급 직위이다. |
좌승선(左承宣) | 위 직위에서 승진. 선지(宣旨)를 조정에 알리거나, 조정의 의견을 왕에게 올릴 때 검사하는 직위다. |
그리고 이때 중방의 수장이며, 원로 무신들의 리더인 정중부와 연합해 중방의 지지를 얻어냈다. 《고려사》 <정중부 열전>에는 이고, 채원이 연이어 제거되자 이의방 형제를 의심하여 조정에 나가지 않고 있던 정중부를 이의방이 술을 들고 찾아가 대화를 나누니 부자 관계를 맺고 서로 연합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방의 수장이었기에 중방의 지지를 얻고 있었으나 일선에서 직접 지휘하는 하급 무관들의 지지가 필요한 정중부와는 반대로 하급 무관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본인도 하급 무관 출신이다보니 중방의 지지가 필요한 이의방이 처한 정반대의 상황을 보여준다.
2.3. 의종 시해와 계속되는 전횡
1173년 8월에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과 살아남은 일부 문신들이 의종 복위를 내세우고 한달 후 난을 일으켰는데, 이에 이의방은 군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10월에 이의민을 경주로 보내 유폐되어 있던 의종을 시해하면서 대대적인 역풍 크리를 맞게 된다.[11] 이로 인해 조정 여론 등이 악화되었고, 개경 승도의 난, 조위총의 난이 연달아 터지며 이의방 정권에 위기가 찾아온다.1174년 1월에 귀법사의 승려 100명이 성 북문을 침입하자 이에 반격을 가해 그들을 모조리 죽여 진압했고, 귀법사, 중광사, 홍호사, 홍화사 등 여러 절의 승려들 2,000명이 모여서 성문을 공격하자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승려들을 죽이면서 절들까지 모두 전소시켜 버린 것도 모자라 절의 재산들도 다 압수했다. 귀법사는 광종(제4대), 홍호사는 선종(제13대)이 각각 창건했던 절들이다. 이 절들은 개성 부근에 위치한 근왕 사찰들로서 근왕의 의도로 이의방을 공격한 것으로 추측된다.[12]
이를 말리는 형 이준의와 말다툼하다가 이준의가 이의방이 저지른 악행을 말하며 질책하자[13] 격분하여 이준의를 죽이려고 했지만, 문극겸과 정중부의 만류로 넘어갔다. 여담으로, 이때 이준의를 죽이려다가 그가 달아나서 실패하자 화를 참지 못했는지 칼로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쓰러졌다고 한다. 사실 정중부 역시 이준의를 체포해 죽이려 했으나, 정중부의 부인이 굳이 다른 집의 형제 싸움에 관여할 필요는 없다며 만류했고, 정중부 본인도 부인의 말을 받아들여서 이준의는 무사히 넘어갔다.[14] 이 살벌한 형제 싸움은 나중에 둘이 조용히 화해해서 해결했다고 한다.
2.4. 갑오정변: 처참한 말로
고려시대의 정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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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적들을 없애며 권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정중부의 연합으로 중방에게까지 지지를 받아내면서 정치적으로 세가 커진 이의방은 아예 좌승선에 오른 후, 태자비를 쫓아내고 자신의 딸[15]을 왕태자비로 왕태자[16]와 정략 결혼까지 시키는 행보를 걸었다. 하지만 명문가라 해도 문관 출신도 아니고, 하급 무관 출신인 이의방이 태자비를 쫓아낸 것도 모자라 딸을 태자비로 들인 것은 도가 넘은 처사였기에 신하들이 반발하였다. 특히 이의방을 경계하던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은 이의방의 계속된 전횡으로 말미암아 더는 묵과하지 않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1174년 북계 40개 성이 가담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서북면으로 향하던 도원수 윤인첨[17]이 대패하고, 동북면으로 향하던 도지휘사 최균[18][19][20]이 죽자, 다시 동북면으로는 두경승을 보내어 진압했으나, 서북면에서는 조위총의 군대가 개경 턱밑까지 도착한다. 대노한 이의방은 내통을 의심하여 서경 사람인 상서 윤인미, 대장군 김덕신, 장군 김덕재 등 100여명을 북문 앞으로 불러 모은 후 이들을 모두 참살하고, 이들의 수급을 저자에 효수하였다. 이후 이의방 자신이 직접 출정해 예성강을 넘어 최숙을 선발대로 보내 적을 혼란에 빠뜨린 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대동강까지 이르렀으나, 조위총의 군대가 성 안으로 들어가서 공성전을 펼치며 추위로 인해 전황이 어려워지자 조위총의 아들을 포로로 삼아 귀환했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재출정을 준비하던[21] 1174년 12월에 선의문 밖에서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과 그의 사주를 받은 승려 종참 등(僧宗旵等)에 의해 살해된다.[22] 결국 조위총의 난이 한창인 어수선한 정국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때 이의방은 정중부 세력이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아무런 호위도 거느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건을 갑오정변(甲午政變)이라 부른다.
결국 그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고, 딸 또한 역적의 자식으로 몰려 태자비에서 폐출당했다.[23] 무신들은 처음에는 문신들이 승군을 사주하여 일어난 일로 여기고, 문신으로서 원정군 지휘관인 윤인첨을 죽이려 했으나, 정중부가 설득하여 겨우 막았다. 이후에도 직속 부하들인 장군 이영령, 별장 고득시, 대정 돈장도 이의방의 복수를 하려다 발각되어 모두 붙잡혀 귀양가게 된다. 반면에 정중부는 문하시중에 임명되며 동시에 무신 집정에 오른다. 이의방의 죽음을 계기로 그 동안 이의방의 무력에 눌려 있던 중방의 원로 무신들이 실질적인 권력자로 등장하며, 정중부는 그들을 중용하면서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문신들을 우대하여 문신들과의 관계도 비로소 원만해진다.[24][25]
3. 여담
- 일설에는 <십팔자위왕> [26]의 도참설을 신봉하여 왕이 되고자 했는데 자신은 왕이 되지 못했지만 이의방이 척살당한 후 이린은 전주로 내려가 전주 이씨 가문을 존속시켰고, 이린의 집안에서 이성계가 탄생해 고려 왕실을 무너뜨리면서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 벽상공신(璧上功臣)에 정중부, 이고와 함께 나란히 이름을 올렸으니 이들 3명이 무신정변의 주동자이다. 일반적으로 무신정권의 첫번째 집권자로 본다. 이고가 부각되던 시기가 잠시 있었으나 그 기간이 짧은데다 이고가 절대권력을 휘두른 것도 아니고 이고, 이의방, 정중부 3명이 서로 눈치보며 견제하는 상황이었다. 이의방의 집권기를 정중부의 집권기에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무신정변 당시부터 집권 이후에도 정중부가 더 높은 자리에 있었고 대외적으로 무신들을 대표하는 위치였다. 이의방과 이고는 처음에 무신정변의 대표로 우학유[27]를 내정하였으나 우학유가 완강하게 거절하자 정중부에게 제의하고 정중부는 이를 받아들인다. 둘은 성향 차이도 확연한데 정중부를 비롯한 노장파 무신들은 온건파[28]로 분류되는데 반해 이의방 등의 소장파들은 문관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던 강경파였다.
4. 대중매체에서
* 2022년 신작인 박시백의 고려사에서는 정중부에게 문신들은 배부르게 먹는데 우리 무신들은 고단하고 배고프다며 항의하는 모습으로 첫 등장한다. 하지만 정중부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이의방을 말렸다. 그러다가 1170년 8월에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리자 이에 열받은 정중부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이의방은 이고와 함께 먼저 보현원으로 가서 순검군을 집합시켰고 의종이 보현원으로 들어가고 신하들이 나오자 이고, 이의방 등이 칼을 빼더니 한뢰를 비롯한 여러 문신들을 베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왕위에 올린다. 1171년 이고가 현소, 수혜와 함께 모반을 일으키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를 들은 이의방은 “이고가? 그 친구 참 주제를 모르네.”라며 어이없어하고 채원과 함께 궁문 앞에서 이고 일당이 오길 기다렸다가 이고를 철퇴로 때려죽였다. 그리고 얼마안가 채원도 이의방을 죽이려는 낌새가 보이자 이의방이 선수를 쳐서 재빠르게 채원을 죽인다. 김보당이 난을 일으키자 재빠르게 이를 제압하고 이에 가담한 문신들도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때 한 장군이 설득해 문신 살육을 그만둔다. 의종이 이의민에게 시해되자 이에 열받은 중들이 이의방을 습격했는데 이에 열받은 이의방이 절을 불태우려 하자 이에 놀란 이준의가 안된다며 말렸지만 이의방은 절을 불태웠고 이에 화난 이준의가 3가지 죄를 말하며 이의방을 질책하는데 이에 화가 단단히 난 이의방이 이준의를 죽이려하자 무신정변 때 살아남은 문극겸이 이를 말리며 자신을 죽이라고 하자 분을 못참은 이의방이 자신의 가슴을 찔러 기절한다. 하지만 후에 두 형제는 서로 화해하고 얼마 안있어 조위총이 조위총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러 갔는데 하지만 반란군에게 대패하는 굴욕을 얻는다. 후에 반란이 진압되지 않은 때 정중부에게 가서 부자관계를 맺으면서 정중부를 안심시키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정균이 종참과 모의해 이의방을 죽이자고 했고 1175년에 이의방이 종참에게 살해되면서 등장종료.
5.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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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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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우왕) (신창(창왕)) | }}}}}}}}}}}} |
[1] 이준의와 함께 《고려사》 <반역 열전>에 올랐기 때문에 훗날 국성이 된 전주 이씨는 족보에서 그들의 이름을 지워 관계를 단절하고자 했다.[2] 고려 시기 다른 반역자 중 하나였던 이자겸의 증조부 역시 이한(李翰)이라 둘이 동일 인물이라는 견해가 있다.[3] 직위 자체는 8품 밖에 안 될 정도로 낮지만, 실질적 권한이 막강하고, 왕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키다보니, 실세가 되기 좋은 자리였다. 대한민국만 해도 곽영주나 차지철의 예시가 있다. 그만큼 실제 입지도 남달랐다.[4] 때문에 이의방이 보현원에서 왕명으로 순검군(巡檢軍)을 동원할 수 있었다.[5] 그런데 이 말은 굉장히 모순적인 것이 족보에 의하면 이의방 본인의 외조부 이형은 재상이었다. 즉 이의방의 어머니는 문신 집안이었고, 이의방의 남동생들 이린, 이거 또한 문신이었다. 당연히 이의방의 동생들은 이러한 숙청 리스트에서 빠졌는데 이의방이 문신들에게 분노해서 아무 생각 없이 저런 말을 했다기보다는 어머니가 문신 집안이라 다른 무신들에게 의심받을지도 모르니 문신들에 대해 더욱 강경하고 잔혹한 태도를 보여 다른 무신들에게 "저놈의 어미가 문신 집안 여식이라 문신들을 싸고 돈다."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가 추측된다. 평민 출신에 문신인 김돈중에게 수염을 불태워지는 치욕을 당한 피해자의 입장인 정중부와 달리 이의방은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서 권력가 자제들이 갈망하던 자리인 견룡행수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배경이 좋다보니 일반적인 천대를 받는 무신들 입장에선 정중부의 입장에 더 감정이입하기 쉬웠을 문제도 있다. 근데 저 말을 이의방이 직접 한 건 아니고, 정변을 주도한 무신들이 사람을 시켜서 길거리에서 저 말을 외치게 한 것이다.[6] 그리고 이의방이 했던 이 말을 드라마 <무인시대> 첫 회 끝에서 대사로도 쓰이기도 했다.[7] 고려의 무관직은 상장군 > 대장군 > 장군 > 중랑장 > 낭장 > 별장 등등 순이다.[8] 지주사와 함께 임금의 선지(宣旨)를 선포하고, 임금에게 올라오는 문서를 관리 및 감독하는 매우 중요한 자리다.[9] 원래 궁(宮), 별궁(別宮)으로 불렸는데 의종이 소유한 별궁이 너무 많아서 댁(宅)으로도 불렸다. 의종이 별궁을 소유하고 짓는데 그 수도 많지만 이를 환관이 주관하면서 사익을 취하는 경우가 많아 원망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10] 이때 직접 궁문 밖에서 대기하다가 철퇴를 사용해 목숨을 빼앗았다고 한다.[11] 이의민 역시 평생 동안 임금을 시해한 대역죄인이라는 컴플렉스를 가지고 살았다. 경대승이 편전에서 대놓고 "선왕을 시해한 역적이 있는데 어째서 이대로 있는 거요?"라며 큰 소리로 일갈했을 정도. 결국 경대승과 도방을 두려워한 나머지 고향 경주로 낙향하게 된다.[12] 고려시대의 절은 흔히 승려들이 참선하는 이미지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고려에서는 승군(僧軍)을 국가에서 관리할 정도로 승려 집단은 나름 그럴싸한 무력을 갖춘 집단이었다. 때문에 호족들이 후원하는 사찰의 승려들이 호족들 간의 권력 다툼에 동원되기도 하였고, '만불향도'(萬佛香徒) 같은 불한당 무리가 나타나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13] 의종을 살해한 것, 의종의 저택을 빼앗고 의종의 후궁을 첩으로 삼은 것, 태후의 여동생을 겁탈한 것. 막가파인 동생 이의방보단 최소한 정치 센스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14] 하지만 나중에 이의방이 살해되는 과정에서 이준의도 정중부에 의해 살해된다. 즉, 정중부가 이준의를 죽이려던 건 라이벌인 이의방의 세력을 약화시킬 기회를 잡았다고 여겨서였을 가능성이 높고, 정중부의 부인은 그 대신 둘의 갈등을 이용하자고 봤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결국 둘 다 죽이는 데 성공한다.[15] 시호는 사평왕후.[16] 훗날의 강종.[17] 윤관의 손자로, 문신 출신이다. 윤관은 문신이지만 무신들에게도 존경받았기 때문에 윤인첨은 무신정권에서 승승장구했다.[18] 동북면 도지휘사이자 동북면 병마부사 최균(崔均)이 동북면 병마사 이의(李儀)를 만나기 위해 함경도 화주성에 머무는데, 한 낭장이 성문을 열어 서경 출신 장군 김박승, 조관이 이끄는 서경유수군(西京留守軍)이 들이닥쳤다. 조위총 측에 가담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으나 오히려 이를 꾸짖자 최균 이하 제장들까지 전원을 몰살시켰다. 다시 동북면으로 향한 두경승이 함경도 의주성을 함락하고, 최균과 제장들을 죽인 김박승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19] 최균은 조위총의 난에 맞서 의연한 죽음을 맞이했다며 완주백(完州伯)에 봉해지고, 전주 최씨(全州 崔氏) 사도공파(司徒公派)의 시조가 된다. 그런데 훗날 1세기에 걸친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상황이 바뀌어 당시 성문을 열어준 낭장은 정변을 일으킨 반란군에 맞서 서경유수군을 도왔다며 하빈군(河濱君)에 봉해지고, 하빈 이씨(河濱 李氏)의 시조이자 전주 이씨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의 파조(派祖)가 된다. 당시 무신정변에 반대하며 성문을 열어준 이 낭장이 바로 이의방의 동생이자 문극겸의 사위인 이거(李琚)였다.[20] 문극겸의 두 딸이 이의방의 동생 이린, 이거와 혼인하였다. 즉 문신들의 대표격이던 문극겸과 무신정변 주동자 이의방은 겹사돈이다. 겹사돈을 맺을만큼, 서로에게 파국적인 상황을 막기 위한 어떤 정치적인 공감대가 있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21] 1174년 11월 27일, 원수 윤인첨, 후군총관사 두경승을 지휘부로 하는 대규모 원정군이 구성된다. 그런데 여기에 승려들로 구성된 승군(僧軍)도 참여하게 된다. 승군(僧軍)이 원정군을 구성하기 위해 개경으로 모였다. 이들은 이의방이 암살된 후에도 명종이 이의방 딸인 태자비 폐출을 주저하자 보제사(普濟寺)라는 절에 모여서 태자비 폐출 관련 상소를 올렸다.[22] 이의방을 암살한 승려 종참은 그 이후로도 정균에 빌붙어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먹다가 1183년, 경대승에 의해 정중부 일파가 모두 쓸려나간 후 감히 승려의 신분으로 함부로 조정에 드나들고 권세를 취했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23] 훗날 희종(熙宗)이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폐위되자 즉위한 이가 바로 이의방의 딸과 혼인한 강종이다. 강종(康宗)이 왕위에 오르자 폐위된 태자비 이씨는 복위되었고, 사후 사평왕후(思平王后)로 추존된다. 둘 사이에 수령궁주(壽寧宮主)라는 딸이 하나 있다.[24] 문신들에게 치욕을 당한 피해자 입장이던 정중부지만, 이미 김돈중을 죽여서 복수도 한 마당에 괜히 원한도 없는 문신 전체에게 확대하기보다는 적절히 타협하는 편을 선호했다. 당장 이는 비단 정중부만이 아니라 정중부의 지지 세력이며 정중부 세력의 핵심인사들인 중방 원로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다. 그리고 정중부의 세력 중 네임드가 훗날 정중부를 죽인 경대승의 부친 경진이었다.[25] 대장군 정도만 되더라도 후대가 귀족 집안으로 취급되는 것을 보면 중방 원로들은 한뢰 같은 원한 품은 놈들만 제거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었다. 특히 급격한 사회의 변화보다는 문신들과 결탁해서 권력을 누리는 것을 더 선호했기 때문으로, 문신과 무신의 혼인동맹이 이렇게 탄생해 살아남은 문벌귀족들의 전횡이 이어진다.[26] 李를 파자(破字)하면 十八子가 되니, 이씨(李氏)가 왕(王)이 된다는 도참이다. 고려 왕실에서도 이 도참이 신경쓰였던지 '이왕도한양'(李王都漢陽), 즉 '이씨가 왕이 되어 한양에 도읍을 정한다'는 《서운관비기》(書雲觀秘記) 등을 믿어 한양을 남경(南京)으로 삼고, 이씨(李氏) 성을 가진 사람을 부윤(府尹)으로 삼아 운(運)을 지나가게 하며, 삼각산 아래에는 오얏나무(李)를 심어 번성하면 벌리사를 보내어 오얏나무(李)를 베고, 이 일대의 지명은 벌리(伐李)로 하여 이씨의 기를 누르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의 지명이 이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도참은 현실이 되어 조선 왕실의 문양은 오얏꽃, 즉 '이화'(李花)이다.[27] 김부식 휘하에서 묘청의 난을 진압한 우방재의 아들이다. 우방재는 무신이지만 공로가 많아 형부상서와 우복야를 역임했고, 생전 아들에게도 문신들과 다투지 말라고 타일렀다. 우학유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어 정변의 무리와 어울리지 않았는데 마침 아내가 이의방의 누이이기도 해서 큰 화를 입지는 않았다. 혼인한 시기가 흥미로운데 무신정변이 성공한 직후로 우학유가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걸로 추측된다.[28] "우리가 미워하고 원망하는 자들은 이복기, 한뢰 등 4~5인이다"며 대대적인 문신 숙청을 만류한 대장군 진준의 입장이 당시 고위 장군들의 시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진준은 이의방이 죽고 정중부가 정권을 장악하자 참지정사로 중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