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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추존 존령 이한 | 李翰 | |||
이한의 묘 조경단(肇慶壇) | |||
출생 | 713년 추정[1] | ||
장소 미상 | |||
사망 | 754년 추정[2] (향년 41세 추정) | ||
장소 미상 | |||
능묘 | 조경묘(肇慶廟)[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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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한(翰) | ||
호 | 견성(甄城) | ||
국적 | 신라 | ||
부친 | 불명 | ||
배우자 | 시조비 | ||
자녀 | 이자연 | ||
22대손 | 태조 | ||
시호 | 시조고선공존령 (始祖考先公尊靈) | ||
관직 | 사공(司空) |
[clearfix]
1. 개요
조선의 국성 전주 이씨의 시조.또한 대흥 이씨, 영해 이씨의 원시조이기도 하다. 생년은 미상[4], 754년(신라 제35대 경덕왕 13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상세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사공(司空)의 직급을 받았다고 기록되며 당(唐)나라 천보(天寶, AD742~756년)말 때 방관(房琯)의 벼슬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5] 죽기 전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임무를 수행했다.[6] 제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해 이자연을 낳았다고 한다.[7] 《태조대왕실록》, 《증보문헌비고》 등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2세손이다. 이성계뿐만 아니라 그 전에 무신정권의 제1대 집권자로 유명한 이의방의 선조이기도 하며, 이성계는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의 직계 후손이다.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선대 조상들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중국 당나라 황실에서 기원했다는 설[8]과 신라의 토착 성씨인 경주 이씨에서 분적(分籍)했다는 설[9] 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에서는
'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건대, 본디 나온 곳은 경주 이씨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태조실록》 4권(태조 2년 9월 18일 경신 2번째 기사)에서는
'신이 삼가 선원의 기원을 살펴보건대, 전주의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서, 사공 휘 이한은 신라에 벼슬하여...'
라고 기록하고 있고, 《태조실록》 5권(태조 3년 2월 19일 기축 1번째 기사)에서는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 전주부-에
'토성(土姓)이 9이니, 이(李)•최(崔)•유(柳)•박(朴)•전(全)•유(庾)•한(韓)•백(白)이요...'
라고 기록한 것은 전주 이씨가 전주를 본관으로 한 토착 성씨[11]임을 의미하는 것일 뿐,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에 나오는 경주 이씨 기원 기사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즉, 적어도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전주 이씨는 경주 이씨에서 기원한 전주의 명망있는 집안이라고 나온다.[12][13][14]한편 1388년 위화도 회군 이전에 세워진 이자춘신도비에서는 전주 이씨의 역사를 고려시대 초기[15]의 아간(6등급) 이광희(李光禧)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광희 이하로는 실존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 이광희의 위로 이한-이자연-이천상의 3대가 추가되는데, 《인천 이씨 족보》에서 퍼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자연은 이한의 아들이고, 시중을 지냈다는 기록이 같다. 《인천 이씨 족보》에서 이자연의 동생으로 '이자상'(李子祥)이 있는데 《전주 이씨 족보》에 이자연의 아들로 이천상(李天祥)이 있으며, 이름은 다르지만 복야를 지냈다는 기록이 같다.
고려 제25대 충렬왕이 익조 이행리에게 사족(士族) 가문 출신이라고 언급한 점이나 예전부터 전주 이씨 가문이 계속해서 고려 조정에 음서로 출사한 점, 그리고 고려라는 나라가 철저하게 세습 문벌귀족들이 주도하는 나라였으며, 그들끼리의 이너서클 내에서만 끼리끼리 혼사가 이루어진 점 등을 보면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모 집안이기도 한 곡산 강씨(신덕왕후), 고려 왕조 창건때 삼한벽상공신 한란을 배출하기도 한 청주 한씨(신의왕후) 그리고 경주 김씨(정안왕후), 여흥 민씨(원경왕후), 개성 왕씨(이방번의 처) 등 명문 귀족 가문들과 개경 왕씨 왕가까지 모두 포함한 유수한 기득권 가문들과 지속적으로 혼인해온 전주 이씨 가문도 신원은 확실하게 보증된 기존 귀족 가문이었고, 더 나아가 고려 왕조의 혈통을 문제삼아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명분으로 왕씨의 고려를 무너뜨리며 일어섰으니 더 말할 건 없지만 왕가로 일어서자 그 격을 더 높이기 위해 당시 최대 명문가인 인천 이씨 가계를 일부 도용한 걸로 추정된다.
3. 묘소 조경단
전라북도 전주시 전북대학교 근처에 있는 '조경단'(肇慶壇)에는 이한의 추정 묘와 위패를 모신 장소가 있다. '조경단'(肇慶壇)은 조선 왕조가 시작(肇)되는 경사(慶)스러운 곳(壇)이라는 뜻이다.[1] 통일신라 중대의 최전성기였던 제33대 성덕왕 12년 추정. 조선 왕조의 가계 중 생년이 알려져 있는 시조 21세 이자춘부터 30세 정원군까지 10명의 생년을 가지고, 추세선을 구해서 추정한 이한의 출생연도이다.[2] 통일신라 중대 말기인 제35대 경덕왕 13년 추정.[3] 조선 영조 47년.[4] 조선 왕조의 가계 중 생년이 알려져 있는 시조 21세 이자춘부터 30세 정원군까지 10명의 생년을 가지고 추세선을 구하면, 시조 이한의 출생년을 약 713년(신라 제33대 성덕왕 12년)으로 추산할 수 있다.[5] '사공'(司空)은 중국의 관직으로, 한국사에는 고려에 있었지만 통일신라에는 사공 벼슬이 없었다. 신라에는 대신 한자가 다른 '사공'(司功) 관직이 있었는데, 도성의 토목건축사업을 담당하던 전혀 다른 관직이다. 이한이 신라에서 사공을 지낸 부분은 후대에 기록하는 과정에서 혼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방관(房琯)은 방관(房官)으로써 동방관(同房官)과 같은 직책으로 향시동고관(鄕試同考官)이다. 향시동고관과 합시동고관(合試同考官)을 겸임하여 시험관의 직급이다. 사관(史官)은 나라에서 귀중한 자료를 왕명을 받아 기록하고 저술하는 직책을 뜻한다.[6] 한림학사(翰林學士)란 당나라 때부터 처음 생긴 한림원(翰林院)에서 황실과 나라의 실록 및 문화·예술 전승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국정에 대해 논의하는 일을 하는 학사이다.[7] 이 기록은 신뢰하기 어렵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생년은 603년이므로, 이한이 제35대 경덕왕 연간에 활동한 인물이라면 기껏해야 4~5세손이 최대이다. 게다가 경덕왕 시대의 사람의 아들이 170년 후인 제56대 경순왕 시대의 사람이다.[8] 『전주이씨 충효전』 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전주이씨 시조 이세직은 본래 당황실의 종실로 중국으로부터 전주에 와서 살았는데 인물이 출중하고 자식들에게 의리를 중시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아들 8형제를 두었다.’ 라는 기록이 있으며, 『전주이씨 안원대군 파보 서문』에는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 당 고조의 20세손 리축 소선제(904~907) 때에 당나라를 후양 태조 주황에게 잃었다. 이 소선제의 아들 이경, 손자 이윤, 증손 이한으로 내려왔는데 이한은 우리나라로 도망쳐 와서 전주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9] 실제로 《경주 이씨 대종보》를 보면, 시조 이알평에서 중시조인 소판공 이거명 사이의 실전 세계를 부록으로 수록하면서, 중간에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실전 세계는 경주 이씨에서 분적한 합천 이씨의 조선 말기에 발견된 족보를 근거로 한 것이다. 다만, 경주 이씨 대종회에서는 신뢰성 문제로 실전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즉, 실전 세계는 조선 말기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알평에서부터 이거명까지의 36대에 이르는 경주 이씨 계보가 어느 날 갑자기 무더기로 발견된 점, 이희두(李禧斗)의 동생으로 '이진두'를 거명하며 '두'(斗)라는 동일 항렬자를 쓰고 있는 점, 동일 항렬자를 쓰는 것은 조선 말기 당시 족보 제작이 유행하면서 정착되었다는 점 등에서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10] 명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쥐어 보낸 문서 속 내용. 그러니까 중국 황제에게 보낸 서찰의 일종이며, 따라서 화자 신(臣, 신하)은 조선 태조가 스스로 낮추어 부른 것이다. 참조 또한 여기에 나오는 '조선'은 당연히 고조선이다.[11] '토성'(土姓)이라는 것이 그 지역에 뿌리내린 성씨라는 의미일 뿐, 꼭 그 지역에서 기원했다는 의미로는 확정할 수 없다.[12] 망조(亡朝)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조차 총 서너 번, 40여년이 걸리도록 꼼꼼하게 개수한 세종의 성정상 태조 당대의 구술보다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기록에 좀 더 힘이 실린다.[13] 성씨와 본관이 같은 동종불혼(同宗不婚) 및 근친혼 금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으나, 한민족은 고대(신라), 중세(고려)에 걸쳐 왕실의 근친혼만큼은 종종 있었던 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사정 때문인지 근세 조선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씨의 글자가 같은 경우(同姓不婚, 동성불혼)까지 원천적으로 제한되었다. 때문에 조선왕조 동안 이(李)씨 성을 가진 부마나 부인은 전혀 없고, 그래서 건국 이전인 추존 목조 이안사의 효공왕후(평창 이씨), 망국 이후에 남편을 따라 한국 호적에 편입한 이방자 여사 정도만 성씨가 오얏 리 글자를 쓴다. 물론 왕조 시작부터 입조했던 명나라 대명률의 영향도 있겠지만.[14] 어찌된 영문인지 이 원칙이 한번 깨진 일이 있었는데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의 생모 전산군부인이 전주 이씨였던 것이다.[15] 고려시대 초기에는 태조 왕건이 신라 및 태봉의 제도를 섞어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