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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조고의 곤손자 이염순 | 李廉順 | ||
관직 | 생원(生員), 호장(戶長) | |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염순(廉順) | |
부친 | 이긍휴 | |
모친 | 이씨(李氏) | |
부인 | 오씨(吳氏)[1] | |
형제 | 6명 형 or 남동생 | |
자녀 | 이승삭 | |
16대손 | 태조 | |
생몰년도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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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국성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의 6대손.2. 상세
이긍휴의 아들로 이름은 염순이며, 벼슬은 생원(生員), 호장(戶長)을 지냈다. 배위는 첨대정승(僉隊政丞) 정익조(鄭翼祚)의 딸이다.`생원'은 옛날 소과(小科) 종장(終場)에서 경서(經書)의 뜻을 묻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호장'은 조선시대에는 지방 관아의 6방(六房) 중의 하나로 낮은 벼슬이었으나, 고려시대에는 향리(鄕吏)의 으뜸 구실로 당대등(堂大等)이라고도 했는데, 오늘날의 지방자치단체의 장쯤에 해당했다.
《완산실록》에는 이염순에 대한 일화가 없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다음과 같은 긴 이야기가 전한다. 이 두 책에서는 이염순이 철중(鐵中 : 哲重)으로 나온다.
`그는 7형제 중 맏형(또는 중간)이었는데, 나머지 6형제는 모두 농아였다. (이염순) 혼자만 준수하고 문장에 능하여, 26세(또는 28세)때 문명(文名)을 날려 중국으로 들어가 송나라(북송) 휘종(徽宗)때 문과에 급제하고 귀국하니, 고려조에서 기특하게 여겨 예천태수(醴泉太守)에 임명했다. 그 뒤 그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천자의 눈에 들어, 마침 쳐들어온 금(金)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대도독부원수(大都督副元帥)로 임명되어 40,0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의 부인 오씨(吳氏)가 7세 된 아들 화선(和善 : 華先)을 업고 9개월을 걸어 중국에 들어가 완탑촌(玩榻村 : 完塔村)에서 묵을 때였다. 이날 밤 꿈에 팔척대인(八尺大人 : 六丈鐵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당신 남편의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 《충효전》에는 蜀山으로 적혀 있음) 아래 있다.” 고 했다. 그래서 오씨가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자살하려 하니 먼저 노인이 또 꿈에 나타나 “죽지 말라. 훗날에 복을 받으리라” 라고 하여 깨닫고, 이튿날 문 밖을 나갔다. 그때 한 여인이 슬피 울며 오는데, 거마(車馬)와 좌•우에서 모시는 시녀들이 굉장했다. 오씨가 나아가 물으니 답하되 “나는 운남국(雲南國 : 漢南國) 우도독(禹都督)의 딸입니다. 남편인 곽필성(쥦必誠 : 郭必成)이 도원수의 종사관(從事官)이었는데, 항주 대전에서 전사하여 그 시체를 찾으러 가는 길입니다” 라고 했다. 오씨도 그 동안의 일을 말하니, 그 우씨가 수레에서 내려 오씨의 손을 잡고, “나라는 비록 다르지만 인심은 같으니 어찌 차마 모른 체하겠소?” 라 하고 함께 차에 태워 항주로 갔다. 그러나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울부짖으며 낮에는 찾아 다니고 밤에는 복파장군(伏派將軍)의 사당에서 잤다. 몇 개월이 되어도 찾지 못했는데, 하루는 한 노인이 지팡이를 들고 와서 하는 말이, “나는 조선에서 온 부원수의 사령(使令)이었는데, 이(염순) 부원수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나는 다리에 살을 맞아 살아났으나 이렇게 불구가 되었습니다.” 라 하고 부원수의 시체를 가리켜 주었다. 그래서 (이염순의) 시체를 모셔올 때 중국에서 모든 절차와 비용을 제공하여 3개월만에 귀국한 뒤 선산에 장례지내니 조상꾼이 인산인해였다.\'
그러나 이 일화의 경우, 《완산실록》에는 이긍휴의 사적에서 비슷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 세 책이 거의 허구적인 사실을 기록한 소설적인 사료임을 짐작케 한다.
[1] 첨대정승(僉隊政丞) 정익조(鄭翼祚)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