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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8:59:04

나성

1. 지명2. 인터넷 방송인 김나성3. 개신교 교단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약칭4. 羅城5. 懶性6. 羅星

1. 지명

2. 인터넷 방송인 김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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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신교 교단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약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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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羅城

수도성의 구조 중에서 가장 외곽에 있는 . 외성(外城), 도성(都城)이라고도 한다.

나() 자는 '벌여 놓다'란 뜻으로, 나성은 임금의 궁궐, 수도를 둘러싼 성을 말한다. 나성 안엔 황성이 있다.

본래는 중국 당나라 시절에 제대로 정립된 용어이다. 황궁을 중심으로 먼저 자성(子城)을, 그 바깥으로 나성(羅城)을 두른다. 그리고 나성의 바깥에는 아성(牙城)을 두르는데, 아성은 돌로 제대로 쌓은 성이 아니라 흙을 돋워 만든 토성이다. 따라서 제대로 만든 석성으로서는 나성이 바깥이 된다.

현대에는 정의나 함의가 무색하게 도성제나 성곽을 논함에 있어 한국 도성제뿐만 아니라 종주국인 중국 도성제를 논해도 당대(唐代)의 정의처럼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다.이제 나성이란 표현도 자주 쓰이지 않고 외성(外城)으로만 지칭하고 굳이 나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즉 수도를 둘러싸기만 하면 다 나성 혹 외성이라 부른다는 것. 우리나라는 나성이 꽤 늦게 등장하는데 이는 우리나라 왕조들의 도성 체제의 독자성 때문이다. 고신백 삼국 모두 초중기엔 넓은 평지성을 쌓아 궁궐을 만들고 근처 산지에 산성을 쌓아 요새를 만드는 이중수도 체제였다. 이후 고구려장안성, 백제사비성을 쌓으며 기존 이중수도를 일원화된 종합수도로 바뀌었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의 초창기와 유사한 이중수도 체제를 끝까지 독자적으로 유지하며, 통일신라를 거쳐 멸망할 때까지, 삼국시대 이후 주요 왕조 중에선 유일하게 서라벌을 나성으로 둘러싸지 않았다. 신라가 경주에 처음 자리잡은 건 중국 문화가 들어오기 이전이었고, 그 시절부터 단 한 번도 천도를 하지 않았으므로 초기의 도시구조가 계속 이어졌으며 고구려나 백제처럼 도시계획을 중국 스타일을 받아들여 새로 시작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주는 주변의 몇몇 단층 가도만 틀어막으면 도성을 둘러싸는 천연 방벽이 되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실질적인 도시 방어/도성 경계 구분은 나성으로 둘러치는 게 아니라 포인트마다 관문성, 명활성, 남산 신성 등을 만들어서 때웠다. 예를 들어 관문성은 왕경의 일부로 간주되던 현 경주 외동읍의 남쪽에 지어져, 도성 경주와 지방인 울산을 구분했다.[1]

다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삼국통일 직후 문무왕서라벌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할 때 지으려고 했다가 의상대사의 반대로 그만둔 수도 성곽을 나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때는 나당전쟁 직후이므로 무리한 공사라 생각했지만 나중에 지을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으므로 신라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듯하다.

평지성과 산성을 합친 평산성식 나성은 고려, 조선에도 그대로 이어져 개경 나성, 한양도성으로 이어진다.

한국사에 등장하는 나성은 여러가지가 있다.

5. 懶性

게으른 성질을 뜻하는 말.

6. 羅星

이 죽 늘어선 것.


[1] 다만 통일기를 기점으로 경주도 당나라식 도시구조를 일부분 차용했다. 그런데 일본이나 발해가 당나라식을 그대로 이식하다시피 도입한 것과 달리, 신라는 고대도시 경주와 섞인 독자적인 형태로 받아들였다. 일반적인 중국식 도시계획과 정반대로 주작대로에 해당하는 도로가 경주 월성 북쪽으로 나 있는 것이 그 예. 월성의 남쪽은 자연 해자 역할을 하던 남천 물길로 막혔다.[2] 참고로 조선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산성과 일원화된 방어체계를 구축했다.《조선 수도성곽과 방어산성》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