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엄은 『보한집』을 저술한 최자(崔滋)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품이 워낙 욕심이 없고 이름 나기를 바라지 않아서 벼슬에 진출한 10년 동안 관직을 옮기지 않았다고 한다. 충렬왕이 오랫동안 그 이름을 듣다가 즉위하자 감찰잡단으로 임명하였고 이내 그를 감찰시승으로 승진시켰는데, 정치에 대해 직언하는 소를 올렸다가 충렬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서 대청도로 유배되었다.
승지 조인규가 충렬왕에게, "최유엄은 힘써 지조를 지키며 왕을 받들었으니 가볍게 버려서는 안된다"고 두세 번이나 간청하자 충렬왕은 화가 풀려서 그를 소환해 복직시켰다. 그런데 시사 심양(沈諹) 등이 상소를 올려 극간하자 충렬왕이 화가 나서 심양을 순마소(巡馬所)[3]에 가두고 최유엄을 바닷섬으로 유배보냈다. 그러나 조인규가 다시, "최유엄은 병가 중이어서 집에 있느라 상소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밝혀준 덕분에 유배를 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두 번의 유배라는 우여곡절을 겪은 최유엄은 이후 우부승지가 되었고 부지밀직사사, 감찰대부까지 승진하였으며, 우상시, 판삼사사, 도첨의찬성사를 역임하였다.
1307년 원나라 황제가 고려의 신하 가운데 재능있는 사람을 뽑을 때 최유엄도 원나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정동행성의 평장 활리길사가 노비제의 폐단을 지적하며 고려의 노비제를 적극 혁파하려고 하였으나 최유엄을 비롯한 여럿 대신들이 옛 관습을 지킬 것을 주청하였고 이에 충렬왕도 동의하여 직접 원나라 황제에게 노비제 개혁 반대 상소를 올려 마침내 원나라 황제의 허락을 받아내자 최유엄은 충렬왕으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아 녹권(錄券)[4]을 하사받았다. 시간이 지나 충렬왕이 태자를 폐하고 서흥후 왕전을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자 최유엄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반대했다.
“전하께서는 일찍이 경령전(景靈殿)에 제사를 지내지 않으셨사옵니까? 태조와 친묘(親廟)의 영정이 다 모셔져 있는데, 만약 서흥후가 즉위하면 왕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서원후(西原侯)와 시양후(始陽侯) 두 분을 추존하여 입부(入祔)할 것이므로, 전하의 친묘의 신주(神主)는 옮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천 년의 세월 뒤에 그리 되지 않는다고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고종과 원종은 신이 섬겼으며, 지금은 늙었어도, 하루아침에 갑자기 제사를 폐하는 짓은 차마 할 수 없사옵니다. 신이 만약 간언하지 않는다면 지하에서 선왕들을 뵈올 수 없을 것입니다.”《고려사》 열전 110권 최유엄전
이 말을 들은 충렬왕은 한참 동안 얼굴색이 참담하게 변했다. 대화에 심각한 충격을 먹었는지1308년 충렬왕이 훙서하자 태자 왕원이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고려에서 충선왕으로 즉위하였다. 최유엄은 충선왕의 즉위에 도움을 준 공을 인정받아 옥띠(玉帶)를 하사받고 곧이어 수충순의보리공신(輸忠順義輔理功臣)에 책록되어 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1309년 3월 27일, 충선왕이 밤에 단행한 인사에서 그를 도첨의중찬 판전리감찰사사[5]로 임명하였다. 이후 충선왕이 원나라의 법에 따라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려 했으나 최유엄의 반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애초 상서 이덕수의 딸이 선발되어 원나라로 들어갔다가 뒤에 원나라 황제로부터 총애받는 신하의 첩이 되었다. 이덕수의 딸이 승지 채종린(蔡宗璘)과 노비 문제를 두고 다툼이 발생했는데, 이덕수의 딸의 남편이 이를 원나라 황제에게 말해 공부상서 합자태(哈刺台)를 보내어 채종린 형제를 행성에 가두고 채종린의 노비 문권을 뺏으려고 하자 최유엄이 격한 어투로 끝까지 다투었고 이에 합자태가 결국 노비 문권을 빼앗지 못한 채 베끼기만 해서 돌아가니 나라 사람들이 다들 '진정한 재상'이라고 감탄하였다. 왕은 최유엄이 나이 많다는 이유로 닷새에 한 번씩 도당(都堂)에 나와 군국의 큰 일을 의논하게 하고, 유청신으로 하여금 일반적인 업무를 맡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유청신으로 그를 대신하게 했다.
충숙왕 때 다시 기용되어 1324년 수첨의정승 판선부사 대령부원군'으로 임명된다. 오잠(吳潛)과 조적 등 심양왕 왕고의 일당이 충숙왕을 폐위시키려다가 실패한 뒤 고려를 원나라에 편입시키려고 책동했다. 그 때 최유엄의 나이는 구순에 바라보는 85세 고령의 나이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겸 신년 하례 사신으로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에 파견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고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삼한행성(三韓行省)을 설치하고 귀족들에게 세습되는 녹봉과 또 노비에 대한 제도를 혁파하려고 했다. 그러나 최유엄과 이제현 등이 중서성을 직접 찾아가 부당함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삼한행성의 설치를 저지시키고 불개토풍에 따른 노비제 유지와 왕고 세력의 음모를 분쇄한 뒤 귀국하니 나라 사람들이 경의를 표하고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울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충혜왕이 즉위한 해인 1331년에 사망했고 당시 그의 나이 92세였다 하며[6], 시호를 충헌(忠憲)이라고 하였다. 그의 집안이 4대에 걸쳐 벼슬하니 나라의 원로로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의지하며 존경받았다고 전해진다.
[1] 밀직부사(密直副使)와 문한학사(文翰學士)를 지냈다.[2] 동경유수와 판관(判官)을 지냈다.[3]원 간섭기 나라의 도적을 잡고 위법행위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4] 공신들에게 하사하는 것 중의 하나로 공신임을 증명하는 문서다.[5] 전리사 및 감찰사의 판사.[6] 최유엄은 고려 기록상 매우 장수한 인물 중 한 명이지만 92세까지 생존한 그의 기록을 뛰어넘는 사람도 있는데(...)바로 보국대장군 송능과 표기대장군 유손이다. 송능과 유손은 예전에 태조 왕건을 섬겼던 무인으로 현종 4년(1013년) 9월 경술일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그들의 나이가 100세에 달하여 대광의 품계를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