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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 문하시중 문헌공(文憲公) 최충 崔沖 |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89호 홍천 노동서원 최충 초상 | |
출생 | 984년[1] |
서해도 해주 | |
사망 | 1068년 10월 19일[2] (음력 문종 22년 9월 15일) |
개경 | |
시호 | 문헌(文憲) |
본관 | 해주 최씨 |
자 | 호연(浩然) |
호 | 성재(惺齋), 월포(月圃), 방회재(放晦齋) |
아버지 | 최온 |
자녀 | 최유선, 최유길(崔惟吉) |
직업 | 정치가, 교육자, 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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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문종 시기의 문신. 일반적으로는 해동공자라는 이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에도 등장한다.2. 생애[3]
고려 행영 군단 | |||||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 |||||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강조 | |||||
행영도통부사(行營都統副使) | |||||
이부시랑(吏部侍郞) 이현운 |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 | ||||
판관(判官) | |||||
기거사인(起居舍人) 곽원 | 시어사(侍御史) 윤징고(尹徵古) |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 | |||
수제관(修製官) | |||||
우습유(右拾遺) 승이인(乘里仁) |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 최충 | ||||
(중략) | |||||
통군사(統軍使) | |||||
형부상서(刑部尙書) 최사위 | |||||
(중략) | |||||
휘하 장병 | |||||
300,000명 |
여요전쟁이 종결된지 1년이 지난 1020년에는 중서문하성 기거사인에 임용되었으며, 1024년에는 중추원직학사, 1025~1026년에는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고 및 한림학사 지공거에 임명되었다. 1025년에는 원주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 비문을 지었고, 이듬해인 1026년에는 과거시험을 주관하여 몇몇 인물들을 정계에 선발하였으며, 홍경사 비문을 지은 공로로 태자중윤에 올랐다. 거돈사의 탑비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보물 제78호, 홍경사의 비갈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보 제7호로 지정되었다.
1030년에는 현종의 왕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태자유우덕에 임용되었고, 이듬해인 1031년에 현종이 승하하자 그의 치적을 찬양하는 표문을 공표하였다. 이후 덕종 대부터 형부상서 등 여러 관짐을 역임하였고, 정종 대에는 중추형부상서, 상서우복야, 상서좌복야, 문하시랑 등에 등용되었다.
1046년에 최충은 당시 고려의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이었던 최제안 등과 함께 선정전에 모여 문종과 정사를 논의하였다. 최제안 사후 이듬해인 1047년에 최충이 문하시중에 등용되어 법률을 제정하였다. 그는 공신을 위한 공음전시법, 세금을 면제하는 재면법, 세금을 감면하는 담험손실법, 노약자를 우대하는 구휼법, 중죄인을 심문할 때 3인의 형관이 공정한 재판을 심의하는 삼원신수법 등을 공표하여 민생안정을 위하여 힘을 썼다. 1049~1050년에는 사추충찬도공신에 올라 원로 대신들과 그들의 아내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고, 복지정책을 실현하여 봉양할 이가 없는 고아, 과부, 홀아비, 폐인, 병자 등을 편안히 보살폈다. 같은 시기에 서북지역의 휼민대책을 건의하였고, 당시 고려의 국경을 침범한 여진족들을 석방하여 그들과의 친선 외교를 도모하여 공신 작위를 받았다.
1053년 음력 12월에 최충은 문종에게 퇴직을 청하였지만, 문종은 허락하지 않고 예법에 의거하여 편한 의자와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약 1년 반 정도가 지난 1055년 음력 7월에 최충은 약 칠순이 되어서야 퇴임하였다.
2.1. 은퇴 이후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 | ||
대중재(大中齋) | 진덕재(進德齋) | 대화재(大和齋) |
성명재(誠明齋) | 경업재(敬業齋) | 조도재(造道齋) |
솔성재(率性齋) | 대빙재(待聘齋) | 낙성재(樂聖齋) |
<보한집>은 최충의 집은 누각이 12개나 있고 화려한 것이 마치 옥청의 집과 같았다고 표현했다. 저자 최자는 부연설명을 덧붙였는데 재상 집은 이 정도였다며 놀랄 일이 아니라고 했다. 당시 고려의 국력과 문벌귀족의 사치를 엿볼 수 있다. <보한집> 권상에 따르면 최충은 두 아들에게 사치를 멀리할 것을 충고하는 글을 지어 주었다고 하는데 시간이 지나며 후손들이 잃어버렸다고 한다. 또 문종이 연회를 열었는데 늙은 재상 최충이 두 아들 재상에게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자 사람들이 상서령이 중서령을 돕고 온다며[7] 다들 우러러 보았다고 한다. 당시 해주 최씨 가문의 위세를 알 수 있는 부분. 해동의 공자라는 별칭까지 붙었으니 그의 학문과 인품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중기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문은 별로 현존하는 것이 없다. 무신정변 이후 문신들이 대거 살해당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문집도 함께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 공자에 비견되는 사람의 저술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문종은 1058년에 국가 중요정책이나 군국대사를 자문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예물을 하사하기도 하였고, 1065년에는 그에게 양평부원군 등의 작호를 내렸다. 1068년에 그가 서거하였을 때에 백성들 및 문종은 그를 기리는 조문을 썼고, 유학 교육을 통해 유능한 인재를 배출한 공 덕분에 사후에도 사학의 시조이자 해동공자로 불렸다.[8][9]
3. 후손
최충은 최유선, 최유길(崔惟吉) 두 아들을 낳았다.장남 최유선은 최사제(崔思齊)를, 최사제는 최용(崔湧)을, 최용은 최충의 고손자 최윤의를 낳았다.
차남 최유길은 최사추를, 최사추는 조선국공 이자겸의 아내 조선국대부인을, 조선국대부인은 예종의 아내 문경태후를, 문경태후는 최충의 외고손자 인종을 낳았다. 인종 이후의 모든 고려 국왕은 인종의 직계 후손이므로 그들은 최충의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
여몽전쟁 당시 제1차 자모산성 전투에서 빛을 발한 최춘명[10]은 최충의 8대손이며 훈민정음 반대 상소로 유명한 최만리는 12대 후손이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최경회도 그의 후손이다.
4. 경력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최종 경력 | ||
직위 | 문하시중(門下侍中) | 중서문하성 소속인 종 1품 최고위 직위. |
품계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정식 품계인 문산계 종 1품 최고위 품계.[11] |
수직 | 수태사(守太師) | 수직은 행수법에 따른 것으로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인다. 최충은 종1품, 태사는 정1품이다. |
훈위 | 상주국(上柱國) | 공신을 치하하기 위해 내리는 훈위 중 최고위 훈위. |
공신호 |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協謨同德致理功臣) | 문종에게 받은 공신호. |
퇴임 후 | ||
직위 | 내사령(內史令) | 고위 명예직. |
중서령(中書令) | 내사령에서 직명이 변경. 그대로 명예직이다. | |
공신호 |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 | 문종이 공신호를 더했다. |
4.1. 실록 편찬
현종조 사관(史館) 국가기록원 관료 고려 7대사적 편찬자 | |
감수국사(監修國史) 사관 장관 | |
이부상서(吏部尙書) - 참지정사(叅知政事) 최항 | |
수국사(修國史) 사관 차관 | |
예부상서(禮部尙書) 김심언 | |
수찬관(修撰官) | |
시어사(侍御史) 황주량 | 우습유(右拾遺) 최충 |
예부시랑(禮部侍郞) 주저 | 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 |
4.2. 문하생
보한집에서는 최충 문하생의 두 부류를 소개한다. 정종 원년(1035) 진사시에 급제하고 상서 등 관직에 오른 10명은 상서방(尙書牓)이라 불렸고, 문종 37년(1083)에 급제하고 뒤에 관직을 떠나 은거한 두명은 처사방(處士牓)이라 불렸다. 처사방이 급제한 과거에서는 명망있는 관리가 된 사람이 없었는데 처사방은 관직까지 버렸으니, "모름지기 상서 합격패(尙書牓)에 이름을 올려야 하거늘, 검소하게도 처사과에 급제했구나."[須占尙書牓, 休登處士科.]라고 조롱을 듣기도 했다.상서방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아직 최충이 현역 관료로 있을 때의 일이므로 이들이 9재 학당에서 수학했을 가능성은 낮다.
5. 대중매체
- 2023년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김선빈이 연기했다. 사실상 최충이 등장하는 최초의 드라마이다. 최충(고려 거란 전쟁) 문서 참조. 학교 교육과정의 한국사 교육이나, 100명의 위인들 노래에 '해동공자 최충'으로 나오듯이 문벌귀족 전성기의 문관의 이미지가 매우 강한 최충이지만, 정작 사극에 첫선을 보인 것은 젊을 때 군인의 모습인 것에서도 짐작되지만 고려는 조선보다 확연히 문무겸비가 요구되는 사회임을 알 수 있다.
[1] 해주 최씨 대종회 기록 986년.[2] 율리우스력 10월 13일[3] 자세한 일대기는 해당 링크 참조.[4] 고려시대 군대에서 각종 문서 작성이나 서류 작업을 도맡아 하던 관리다. 뒷날 이규보도 동경민란 진압 때 이 일을 한 적이 있다.[5] 조선 시대에는 붕당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재현된다.[6] 현대로 따지면 고등고시 수석 출신에 고등고시 출제 위원장, 청와대 사회수석, 교육부 차관,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이 입시 학원을 차린 셈. 그야말로 인기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7] 최유길은 섭(攝) 상서령에 오른적이 있다. 고려에서 상서령은 왕족만이 오를수 있던 관직으로, 왕족이 아닌 사람이 상서령에 오른 것은 최유길이 유일하다.[8] 아쉽게도 끝내 문묘에 배향되지는 못했는데,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보기에는 불교에 오염된(...) 신라와 고려에 박하여 고려는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과 정몽주만이 문묘에 들어갔다. 그렇게 따지면 설총은 승려의 자식인데? 하긴 이이도 한때 입산하여 불도를 닦긴 했다. 설총과 최치원은 고려의 문묘에 들어갔던 것을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9] 그러나 중앙과는 다르게 지방의 문묘에서는 최충과 그 아들 최유선을 모시는 경우도 있었다.[10] 아이러니하게도 최춘명을 구명한 것은 몽골의 다루가치였다. 살례탑과 항복을 권유하러 갔던 고려 관료이자 대집성은 명령 불복종으로 사형을 주장하여 그대로 선고되었다. 그러나 정작 몽골이 파견한 다루가치가 그는 우리에게는 적이었으나 너희에게는 충신이요, 이미 강화를 맺고 우리도 그를 죽이지 않은 마당에 너희가 스스로 끝까지 성을 지킨 충신을 죽이는 것은 어찌된 일이냐?하고 꾸짖었다고.[11] 명예 품계로는 무산계, 향직 품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