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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제2대 심왕 왕고 | 王暠 | |||
출생 | 연대 미상 | ||
고려 | |||
사망 | 1345년 8월 19일[A] (음력 충목왕 원년 7월 14일) | ||
고려 | |||
재위기간 | 제2대 심왕 | ||
1316년 4월 9일[2] ~ 1345년 8월 19일[A] (음력 충숙왕 3년 3월 9일 ~ 충목왕 원년 7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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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고려: 고(暠) 원: 올제이투(完澤禿) | ||
부모 | 친부 왕자(王滋) 친모 미상 양부 충선왕 | ||
형제자매 | 3남 중 2남 | ||
배우자 | 노룬공주[4] | ||
자녀 | 1남 | ||
봉호 | 연안군(延安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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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왕족이자 제2대 심왕.제25대 충렬왕과 정화궁주 왕씨의 장남인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의 차남으로 몽골식 성명은 '왕올제이투'(王完澤禿)였다.
2. 생애
충렬왕은 태자 시절 정화궁주 왕씨를 태자비로 맞았으나,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 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를 왕비로 맞으면서 그 입김 때문에 정화궁주는 제2비로 밀려났다. 따라서 정화궁주의 아들 왕자도 태자가 되지 못했다. 즉 장자상속제에 따르면 원래는 충렬왕의 장남 왕자의 아들인 왕고가 차남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보다 계승 순위에서 앞섰다.어릴 때 작은아버지 충선왕(제26대)의 양자가 되어 궁중에서 길러지면서 '연안군'에 봉해졌다. 1313년에 충선왕이 김문연을 원나라에 보낼 때 왕고는 원나라에 체류해 인질이 되었으며, 1315년 10월에는 통주에서 계국대장공주 보르지긴 부다시리를 알현했다. 1316년 3월에 양부 충선왕으로부터 심왕의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원나라 양왕의 딸이자 계국대장공주의 조카인 노룬공주(訥倫公主)에게 장가를 갔다.
왕고는 고려의 국왕이 될 뜻을 넘보고, 사촌인 충숙왕 왕도를 여러 차례 참소했는데, 1322년 3월, 왕고가 원나라의 영종(제5대)에게 총애를 받자 많은 대신들이 그를 위해 충숙왕을 참소했다. 원나라에 충숙왕이 입조했을 때 형부에 가뒀다가 머리를 깎고 석불사에 출가시켜 승려가 되도록 만들기도 했다.
심왕부의 신하인 백응구가 고려로 도망치자 영종에게 아두라를 보내 백응구를 대도로 돌려보내는 지시를 내리게 했으며, 충숙왕이 이를 즉시 이행시키지 않자 왕고는 충숙왕이 그 칙서를 찢었다고 참소했다. 이로 인해 1321년 충숙왕이 입조하자 영종이 크게 격노해 그 일을 힐책해서 인장을 거두고 사신을 보내 조사하게 했다. 또한 왕고는 고려의 재상들에게
"충숙왕이 왕위를 계승한 이래로 영종의 사신을 영접하지 않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놀기만 했다."
면서 "샤데이가 도착하면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대답해야 한다."
고 했으며, 왕고는 고려에서 충숙왕에게 돈과 재물을 많이 보내는 것을 싫어해 양성주를 보내 영종의 명이라면서 그 재물들을 가로챘다.이때 흥미로운 것은 충숙왕 9년(1322년) 원나라에서 왕고의 모친인 안비에게 손수건과 만전향을 선물하고 모시를 요구하였다. 이것은 원나라가 고려에 정치적 기반이 없는 왕고가 얼마나 많은 물자를 동원할 수 있느냐를 시험해본 것인데, 왕고가 동원한 모시는 원나라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때문에 숙적인 충숙왕이 고려 국왕의 인장이 빼앗긴 상황에서도 왕고는 원나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왕고의 일당 10여 명이 원나라로부터 와서 왕고가 이미 나라를 얻었으니, 충숙왕의 과거 악행을 적어서 원나라 조정에 올리지 않겠냐고 따져서 원나라의 중서성에 왕고를 고려 왕으로 옹립할 것을 요청하는 글을 올리게 했으며, 충숙왕이 3년 동안 원나라에 머물면서 재정이 고갈되자 영종의 명을 내세우며, 신하들을 시켜 창고를 봉쇄하게 했다. 1323년에 진종(6대)이 즉위해 1324년 충숙왕이 고려로 돌아가게 되면서 문제의 발단을 만든 충선왕이 사람들에게 자신과 왕고가 서로 싸워 집안 싸움이 일어났다고 하면서 진종에게 지난 잘못을 생각하지 말고 모두 다 용서해달라며 상주했다고 한다.
1328년 7월에 왕고의 일당이 인종(4대)의 허가를 받아 상왕(충선왕)이 왕도(충숙왕)를 고려 왕, 왕고를 세자로 임명했지만 영종 때 이르러 왕도가 바얀투그스와 짜고 왕고의 세자인, 그의 전택, 그의 부하들의 전택 등을 빼앗았다고 했으며,
"충숙왕이 귀가 멀고 말을 못한다"
고 참소했다.1333년 여름 4월에 충숙왕이 임강의 난산채에 당도하자 왕고는 행궁을 찾아 알현했다가 충숙왕을 따라 귀국했으며, 1339년에는 그의 일파인 조적과 모의해 고려의 왕이 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 시도를 했다가 충혜왕에게 패배하면서 실패했다(조적의 난). 그의 부하가 원나라에 가서 왕고가 국왕이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자 충혜왕이 기병을 보내 왕고의 계략을 중지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심왕 왕고는 1344년 12월에 원나라로부터 귀국했다가 결국 왕이 되지 못하고 1345년 가을 7월에 죽었다.
3. 가족관계
- 아들: 왕덕수
- 손자: 왕토크토아부카
- 손자: 왕테크부카
아들 왕덕수는 강릉대군에 봉해졌다. 왕덕수에게는 독타불화와 첩고불화 두 아들이 있었다. 독타불화는 왕고의 뒤를 이어 심왕에 올랐고, 첩고불화는 중서성 평장정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