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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왕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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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왕후의 성렬 존호는 대왕대비 시절에 바쳐진 것이므로 왕대비 틀에서는 표기하지 않음.
2. 인성왕후는 인순왕후와 동서지간이었기에 선조조에도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왕대비로 재위함.
3. 효의왕후는 생전에 존호를 사양하였으므로 별도로 표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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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 宣懿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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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조 왕대비
경순왕대비 | 敬純王大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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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의릉1.jpg
의릉 선의왕후 능침
출생 1705년 12월 3일(음력 10월 29일)
조선 한성부 숭교방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1]
사망 1730년 8월 1일(음력 6월 29일)
(향년 24세)
조선 한성부 경덕궁 어조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능묘 의릉(懿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718년 10월 25일 ~ 1720년 7월 5일
조선 왕비
1720년 7월 8일 ~ 1724년 9월 30일
조선 왕대비
1724년 10월 5일 ~ 1730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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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함종 어씨
부모 부친 함원부원군 어유구
(咸原府院君 魚有龜, 1675 ~ 1740)
모친 완릉부부인 전주 이씨
(完陵府夫人 全州 李氏)
형제자매 2남 6녀 중 4녀
배우자 경종
자녀 없음
전호 경휘전(敬徽殿)
존호 경순(敬純)
휘호 효인혜목(孝仁惠睦)
시호 선의왕후(宣懿王后) }}}}}}}}}
1. 개요2. 생애
2.1. 노론계 세자빈2.2. 늦은 왕비 책봉2.3. 영조 즉위와 왕대비가 되다
3. 여담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 20대 경종의 계비.

2. 생애

2.1. 노론계 세자빈

영돈녕부사 어유구(魚有龜)[2]의 딸로서 어유구는 노론 영수 김창집의 제자이며 일가가 모두 노론계이다. 즉, 소론계의 배후를 갖던 경종과는 정치 성향이 반대인 집안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은 것.[3][4]

1718년 14세(만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5], 같은 해에 왕세자어의궁에서 친영례를 치르고, 경희궁 광명전에서 동뢰를 치렀다. # 다음 해인 1719년 9월에 관례를 올렸다.

2.2. 늦은 왕비 책봉

1720년 숙종이 사망하고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경종의 정비인 단의왕후 심씨의 왕비 추봉과 선의왕후의 왕비 책봉을 동시에 주청한 것이 청나라에 트집 잡혀 1721년에야 고명을 받을 수 있었다.

경종 1년, 경종 부부에게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하여 노론 4대신[6]과 혜순왕대비 김씨(인원왕후)의 강력한 추진으로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이 결정되었을 때, 선의왕후의 나이는 갓 17세에 불과했다.[7][8] 일설에 따르면 선의왕후 어씨는 연잉군을 반대하여 종실과 비밀리에 연합하여 소현세자의 직손인 밀풍군 탄, 혹은 밀풍군의 아들인 관석을 입양하려 하였으나[9] 경종의 급서로 실패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기록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선의왕후가 이인좌 등에게 비밀리에 언문교서를 내렸는데 "왕실의 씨가 바뀌었으니[10] 바로 잡아라"는 하교를 내렸다고 전한다. 이인좌 등이 왕대비(선의왕후)의 밀명을 받았다고 주장한 흔적은 영조 실록에 수차례 등장한다.

또한 효장세자 독살 의혹[11]의 배후로 추정되는데 당시 세자를 독살을 했다고 추정되는 궁인이 왕대비 어씨를 끌어들였다. 일개 궁녀가 국본인 왕세자를 독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당시 친국에서도 궁녀가 김상궁이 사주했다고 납초하였고 실록에도 김상궁은 동조(東朝)[12]를 섬기던 상궁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 영조가 이를 서둘러 차단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2.3. 영조 즉위와 왕대비가 되다

1724년 경종이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불과 20세의 나이로 왕대비가 되었다. 영조 2년에는 대비전이 있는 창덕궁이 아닌 경종이 세자 시절 거처하던 창경궁 저승전에서 지냈으며, 1730년 8월 12일(음력 6월 29일) 경덕궁 어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겨우 26세(만24세)로 조선의 역대 왕대비 중 가장 단명한 왕대비이다.[13]

선의왕후를 죽음으로 이끈 병명은 밝혀지진 않았으나 실록에서 왕후가 죽기 전날의 기록을 보면 죽기 직전까지 몸을 떨며 통곡을 하고 읍성[14]을 냈다고 한다. 또한 손으로 뭔가를 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영조가 의관들에게 그러한 증후를 본 적이 있는지 묻자 중관이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

선의왕후가 거처하던 저승전은 후에 세자궁으로 개조되어 사도세자의 처소가 되었으며 저승전 건너편에 위치했던 취선당[15]은 세자궁의 소주방으로 개조되었는데,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정신 질환을 앓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불길한 저승전에서 자라고 취선당에서 지은 밥을 먹은 탓이라 하였다. 사도세자의 이른 죽음을 저승전의 이름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풍수지리적인 이유를 빼고 보더라도 저승전이나 취선당이라는 장소가 영조에게 있어서는 어쨌든 생애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을 누군가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입지였다.[16]

저승전은 영조 24년(1746년) 월랑이 화재 피해를 입었고# 16년 뒤인 영조 40년(1764년) 건물 전체가 불에 타 사라졌다. 이후 신하들이 저승전을 다시 지을 것을 청했으나, 영조는 "조종의 검소한 덕을 본받아야 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저승전은 두 번 다시 재건되지 않았다.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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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의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캠퍼스가 있는 명륜동 일대이다.[2] 노론계열의 명유이자 호락논쟁에서 낙론을 이끌었던 어유봉의 동생.[3] 아이러니하게도 딸 선의왕후는 소론으로 전향하면서 아예 영조의 철천지 원수이자 정적이 되었지만 아버지인 어유구는 그런 딸과 정반대로 일관되게 노론으로서 영조를 옹호했다. 이 때문인지 선의왕후가 왕대비가 된 이후에도 영조는 형식상 외척이나 다름없는 어유구에게 따로 벼슬을 내리려했다.[4] 참고로 어유구는 딸 선의왕후보다 10년 더 오래살아 1740년에 사망했고, 그 중간인 1735년에 영조에 의해 벼슬을 했다가 사퇴하였다.[5] 이때 본래는 18세~22세까지의 처녀를 간택하려고 했는데 이는 어떻게해서든 당시 30살이던 경종과의 나이차를 최대한 좁히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혼 풍습으로 13,14세가 되면 거의 다 결혼을 해버리는 까닭에 들어오는 간택단자가 매우 적어졌고 결국 범주에 드는 나이를 몇번이고 낮추어 당시 14세였던 선의왕후가 간택될수 있었다.[6]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7] 이게 당장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게 그때 경종의 나이가 34세로 몸이 약하기는 해도 나이가 창창한 왕에게 후사를 보시라고 권하는 게 아니라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라고 하는 시점에서 경종이 앞으로 후사를 볼 수가 없다고 전제하고 일을 추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제 책봉 과정도 수렴청정 중도 아니고 경종 자신이 친정하는 상황인데도 굳이 대비에게 가서 "세제 책봉에 대해 대비께 동의를 받으시라"고 권하는 등, 심하게 말하면 경종이 당장 내일이라도 왕 노릇 그만둘 사람처럼 대한다. 당장 세제 책봉을 청에 알리러 갔을 때도 청에서 "왕이 아직 젊은데 왜 벌써 동생을 세제로 책봉한다는 거냐?"며 의아해 했고, 이때 조선 사신 이건명의 대답이란 "왕이 발기불능이라서 자식을 둘 수가 없다"라는, 군주로써의 경종은 물론 이균(李昀)이라는 인간 개인에 대해서도 대놓고 그 인격을 모욕하는 발언이었다.[8] 보충하자면 이것은 왕비인 선의왕후를 간접 모욕하는 것이기도 했다. 동서고금 왕비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후손을 생산하는 것인데 선의왕후는 아버지인 어유구부터가 강경 노론에 속해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경종의 왕비라는 이유로 아버지와 같은 편인 노론에게 자손 생산 능력이 없는 것으로 낙인이 찍혀 왕비로서의 존엄성을 훼손당한것이었다. 즉, 어처구니없게 뒤통수를 맞은셈이다. 선의왕후 입장에서는 왕비로서의 자리보전 자체도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고, 먼저 뒤통수를 당한 쪽이니 소론으로 전향할수 밖에 없었던 것.[9] 다만 이쪽도 딱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게 밀풍군은 경종과 촌수가 8촌으로 왕실에 자손이 없기로서니 엄연히 친동생이 있는 마당에 밀풍군 영입은 명분없는 행동이었고, 소현세자의 후손들이 복권되었다고 하지만 잘못하면 예송논쟁마냥 효종의 정통성 역린을 건드릴 수 있다. 물론 양자가 된다는 건 아들이 되는 것이므로 아들이 동생보다 정통성에서 보다 우위에 서기는 한다.[10] 물론 '씨가 바뀌었다'는 말도 유전학적으로 이씨 종실의 왕족이 아닌 자가 왕이 되었다는 의미라기보다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즉 정통성이 부족한 자가 왕이 되었다는 의미로 보면 말은 된다.[11] 효장세자의 공식적인 사인은 병사이다. 다만, 실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효장세자가 독살당했다고 추정은 해볼 수 있으나 결국은 사건이 유야무야되어 정확한 진상은 파악할 수 없다.[12] 대비의 처소를 가리켜서 동조라고 부른다.[13] 물론 선의왕후의 전후 배경상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연사했을 확률이 낮은것도 크다. 공교롭게도 왕대비 중에서 두번째로 단명한 사람은 선의왕후의 시조모인 명성왕후인데 명성왕후도 무당의 말만 듣고 한겨울에 얼음물 세례를 받아서 사망한걸 생각하면 역시 완전 자연사 했다고 보기엔 어렵다.(명성왕후의 사례까지 자연사했다고 보기 어려우면 자연사한 왕대비 중에 가장 단명한건 인순왕후이다.)[14] 눈물을 흘리며 우는 소리[15] 희빈 장씨가 살던 곳.[16] 선의왕후 어씨는 경종의 왕비로 시동생인 영조와의 사이가 결코 양호하지는 못했고, 희빈 장씨는 숙종에 의해 사사되었을 뿐 아니라 경종의 생모다.[17] 선의왕후의 사망날(1730년 8월 12일)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730년 11월 27일[18] "시신이 상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한다. 정성왕후는 "여름이라 그런 게 아니냐"고 하지만, 선의왕후는 "추석 지나고도 열흘 뒤의 일인데 날씨 탓을 할 수 있냐"고 반박한다.[19] 이 작품에서는 경종이 영조가 올린 게장과 생감을 먹은 후 사망한 것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