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호가 비슷한 조선의 추존왕 원종의 왕비에 대한 내용은 인헌왕후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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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숙종의 제1계비 인현왕후 | 仁顯王后 | |||
명릉 숙종•인현왕후 능침 | |||
출생 | 1667년 5월 15일(음력 4월 23일) | ||
조선 한성부 서부 반송동 사저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1가 일원) | |||
사망 | 1701년 9월 16일(음력 8월 14일) (향년 34세) | ||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능묘 | 명릉(明陵) | ||
재위기간 | 조선 왕비 | ||
1681년 음력 5월 14일 ~ 1689년 음력 5월 2일 | |||
조선 왕비 (복위) | |||
1694년 음력 6월 1일 ~ 1701년 음력 8월 1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 여흥 민씨 | |
휘 | 정□(正□)[1] | ||
부모 | 부친 여양부원군 민유중[2][3] (驪陽府院君 閔維重, 1630 ~ 1687) 친모 은성부부인 은진 송씨[4] (恩城府夫人 恩津 宋氏, 1637 ~ 1672) 계모 풍창부부인 풍양 조씨 (豊昌府夫人 豐壤 趙氏, 1659 ~ 1741) | ||
형제자매 | 5남 7녀 중 차녀 | ||
배우자 | 숙종 | ||
자녀 |
| ||
종교 | 유교 (성리학) → 불교 | ||
전호 | 경녕전(敬寧殿) | ||
존호 | 효경숙성장순원화 (孝敬淑聖莊純元化) | ||
휘호 | 의열정목(懿烈貞穆) | ||
시호 | 인현왕후(仁顯王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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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두 번째 왕비.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가 이른 나이에 승하하면서, 그 뒤를 이어 숙종의 계비로 책봉되었다. 이후 1689년(숙종 15년)에 폐위되었다가, 5년 만에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다. 폐비 시절 복위운동을 전개해[5] 생전에 복위한 유일한 왕비로 정적인 희빈 장씨와 더불어 드라마틱한 생애의 인물로 유명하다.
본관은 여흥, 가문의 당적은 외조부 송준길이 효종~현종 때 당수를 역임했던 서인 산당이었다가 그녀가 왕비가 된 해이기도 한 1681년(숙종 7년)에 경신환국으로 남인에 대한 숙청 문제로 시발(始發)된 노소분당(숙종 7년~숙종 10년)으로 일제히 노론이 됐다. 능호는 현재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이며, 시호는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孝敬淑聖莊純元化懿烈貞穆仁顯王后)이다.
2. 생애
2.1. 유년기
1667년(현종 8년) 음력 4월 23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사이)[6] 한성부 반송동 사저에서 민유중(1630~1687)과 그의 첫 번째 계실인 은진 송씨(1637~1672) 사이의 넷째이자 적차녀로 태어났다. 생모 은진 송씨는 효종~현종 때의 서인 산당 당수이자 민유중의 스승이었던 송준길의 딸로, 일찍이 순화군(선조의 서자)의 외손녀 덕수 이씨와 혼인했던 민유중이 자식을 얻지 못한 채 상처(喪悽)한 후 맞이한 재취 부인이다.동기로는 전모 덕수 이씨 소생은 없으며, 생모 은진 송씨 소생으로 위로는 첫째이자 장녀인 언니 민씨(1656년생), 둘째이자 장남인 큰오빠 민진후(1659~1720, 아명 관(觀))[7], 셋째이자 차남인 작은오빠 민진원(1664~1736, 아명 인(寅))[8]이 있으며, 아래로는 다섯째이자 3녀였지만 요절하여 호적에 등록되지 못한 여동생 신(愼: 1671년생?[9]), 그리고 1672년(현종 13년) 송씨가 사망 전에 낳은 쌍둥이 자매인 정성(正性)과 정제(正悌)가 있는데 이 중 1명 역시 요절하여 민유중의 최종 가계에서 누락됐다[10]. 이 외 민유중이 1676년(숙종 2년)에 삼취로 맞이한 계모 풍양 조씨 소생의 이복 아우 민진영[11]과 2명의 이복 여동생이 있으며 민유중의 측실 소생의 두 서제(민진창, 민진오)와 두 서매가 있다.
인현왕후가 6세였던 1672년(현종 13년) 여름, 당시 평양에 머물던 중이던 외조부 송준길이 노환으로 쓰러져 송씨가 친정아버지의 병수발을 위해 평양으로 달려갔는데 당시 송씨는 임신 중이었다. 수개월 후 송준길의 상태가 나아져 송씨가 출산을 위해 남편과 자식들이 있는 한양으로 돌아왔는데[12] 이내 다시 송준길의 상태가 다시 악화됐다는 전갈이 당도하니, "부친에게 돌아가겠다"는 송씨와 "출산을 앞둔 만삭의 몸으로 한겨울 장거리 이동은 위험하다"며 반대하는 민유중 사이에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감정이 격해진 송씨가 돌연 산기를 일으켜 준비 안 된 출산을 하게 되니, 심지어 쌍둥이 출산이었던 만큼 상당한 난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산후 출혈이 멎지 않아 민유중이 직접 치료해보고자 하였지만
한편, 송씨가 사망했을 당시 인현왕후의 언니는 이미 이만창(이숙의 장남)과 혼인하여 친정 신접을 마치고 시가로 들어간 상태였고, 큰오빠 민진후는 14세로 정혼은 한 상태였으나 아직 관례[14]와 혼례를 모두 치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차녀인 인현왕후는 6세. 이외 차남인 작은오빠 민진원은 9세, 3녀인 신이는 돌박이, 그리고 신생아인 정성과 정제가 있었다. 여기서 문제는 집안의 대소사를 주관하고 노비를 다스려 가족의 의식주와 가계를 운영해야 할 주부(主婦: 부녀자들의 수장)이자 미성년 딸들의 양육과 교육을 책임져야 할 모친이 부재해진 것이다. 더욱이 이때는 이미 민유중의 모친과 조모, 장모, 처형이 모두 사망한 상태였으며, 송씨의 종용으로 분가를 한 것이었기에 본가로 돌아가 두 형수에게 주부와 모친을 역할을 맡아 달라 청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고, 그렇다고 갓 시집으로 들어간 장녀를 다시 친정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는 터. 이에 갓 과부가 된 누이 민씨[15]와 두 조카를 불러들여[16] 이 역할을 대행시켰으나, 중도에 틀어진 듯 민씨 모자는 곧 안국동 친정 본가로 거처를 옮겼다. 이에 송씨의 3년상을 마친 직후 장남 민진후를 정혼녀인 연안 이씨(부제학 이단상의 딸, 김창협의 처제)와 혼인시켰으나 연안 이씨는 딸 하나[17]를 낳고 죽어버리니[18], 1676년(숙종 2년), 민유중 본인이 다시 혼인하여 풍양 조씨를 삼취로 맞이했다. 당시 민유중의 나이가 47세에 이르렀고 이미 관례와 혼례를 올린 적장남과 곧 관년에 이를 적차남도 있어 후사가 완성된 상태였던 만큼, 삼취 조씨는 민유중의 두 전처에 비해 지극히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고 나이 역시 송씨 소생의 장남 민진후와 동갑이였다. 이는 조씨와 그녀의 자식들이 송씨 소생의 자녀들과 관계가 원만치 못했던 배경으로 추정된다.
1674년(현종 15년) 음력 2월 23일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당시 57세)가 사망하면서 2차 예송논쟁이 시작됐다. 효종의 계모(적모)인 장렬왕후 조씨(인조 계비)가 인선왕후보다 6세 연하였고 인선왕후는 오랜 지병으로 담화를 앓았기에 현종은 모친 인선왕후가 계조모 장렬왕후보다 먼저 승하할 수도 있음을 예상하고 지난 15년간 스승 송시열과 집권당인 서인 산당과 맞서 1차 예송논쟁 때의 굴욕을 씻고 스스로 훼손한 부친의 명예와 정통성을 회복할 준비를 해왔다. 이 수단은 서인 산당의 독재 정권에서 당익과 사익을 배제한 채 온전한 아군이 되어줄 신하를 둘 수 없었던 현종이 왕실 내척과 외척에게 실력을 실어주어 그들을 수족으로 삼음과 동시에 국혼 물실을 당책으로 삼은 서인 산당의 주요 인물들을 혼혈동맹에 끌어들여 내부의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왕실 내척(종친과 의빈)과 외척(왕의 외친과 처족)에게 막대한 재물을 주는 것으로 시작, 그리고 이들과 혈연이나 혼연에 있는 자들을 중용하여 초고속 특별 진봉의 특혜를 부여하고 웬만한 비리부정 및 범법행위에 왕의 입장을 적극 이용해 노골적으로 대놓고 비호해줌으로써 면죄 혹은 감형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자 산당의 당원들이 왕실 내외척과 혼연 관계를 맺거나 유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종국엔 친누나가 죽자 자형(김석주)에게 어린 처제를 바치고, 형제자매가 처/시 숙질 조손, 서자매가 적오빠, 적언니, 혹은 적아우의 첩시모나 첩장모가 되는 등 윤리와 질서마저 파괴되기에 이르렀으며[19], 자신과 가문의 이득을 위해 윤리와 질서를 포기한 자들은 자신들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보복이라도 하듯,
이로 인해 산당에 불구대천의 원한을 가진 김우명 이하 청풍 김씨 외척이 고위 실직과 막강한 힘을 얻어 현종의 오른팔이 되었고,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김씨가 현역 당상 문관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광산 김씨 외척이 현종의 왼팔이 되었다. 청풍 김씨 외척은 1차 예송논쟁에서 송준길의 역심[20]을 의혹했던 남인과 연합하여 2차 예송논쟁에서 산당의 복설을 와해시켰고, 광산 김씨 외척은 중립을 지킴으로써 결국 산당의 패배와 더불어 독점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현종이 바란 것은 오랜 독재 정권으로 이미 괴물화가 된 서인 산당을 궤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균등한 힘을 가진 여러 당파가 각자의 당론을 펼치는 가운데 왕이 가장 합당한 것을 선택해 국가를 운영하는 탕평이었던 듯. 실제로 현종은 산당에 대한 강경처분 대신 1차 예송 당시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일부 숨긴 채 거짓 보고를 올렸음을 실토했던 김수흥 등 관련자들 몇 명만 온건히 처분했으며 승하하기 전 어린 아들 숙종이 곧 정쟁의 한가운데에 오를 것을 염려해 '허적(남인 온건파 영수)과 김수항(서인 산당 당수 송시열의 후계자. 노론 초대 당수 겸 훗날 노론 시파의 시조)은 믿어도 되는 자들이니 곁에 두고 중용하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왕권 강화 및 서인 산당 정권의 와해를 꾀해 해금을 풀고 왕실 내외척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했던 현종이 목적 달성 후 뒷수습을 차마 하지 못한 채 이 해 8월 18일에 돌연 사망(승하)하면서 당시 14세였던 현종의 왕세자가 왕위 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조선 제 19대 국왕인 숙종이다. 부계로는 3대째(효종-현종-숙종), 모계로는 4대째(김육-김우명-명성왕후-숙종), 그리고 본인 스스로[21]도 서인 산당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고 있던 숙종은 즉위 후 산당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이윽고 아버지 현종의 탈상이 있던 1676년(숙종 2년)에 기다렸다는 듯이[22] 서인 산당을 정계에서 완전히 내치고 남인 정권을 수립함과 동시 송준길, 송시열에 대한 강경처분을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1675년(숙종 즉위년), 인현왕후의 중부 민정중과 부친 민유중이 소년왕 숙종에게 건방지다는 죄명으로 장 100대형을 받고 파직됐으며, 1679년(숙종 5년),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때 인현왕후도 흥해(대전)로 유배가는 부친을 동행해 함께 지냈다.
1680년(숙종 6년) 3월 10일, 지난 해 입수했던 정보[23] 확인을 위해 동지사로 파견했던 이관징[24]과 이단석이 돌아와 삼번의 난에 대한 정보를 최종 확인한 숙종은 1675년(숙종 즉위년) 당시 '삼번의 난으로 청이 혼란스러운 것을 기회 삼아 북침을 하자'는 구호로 준비해왔던 2차 북벌 계획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리고 3월 28일, 숙종은 서인 산당을 복관하여 정계로 불러들임과 동시에 군사 및 인사 관련 남인 대신들을 파직하여 산당으로 교체하기 시작, 4월 5일 김석주의 고변 아래 삼복의 옥이 터졌다. 지난 6년간 숙종이 북벌을 위해 공을 들여 군사와 병기로 중무장해온 도체찰사부(북벌 특수 기구)가 허견과 삼복(복창군·복선군·복평군) 형제가 복선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모반을 꾸며 군사와 병기로 중무장한 역모 기지로 탈바꿈된 것이다. 허견은 탁남(남인 온건파) 영수 허적의 서자로 지난 해인 1679년(숙종 5년), 김우명(김석주의 숙부, 명성왕후의 부친)의 첩인 처형을 폭행한 사건으로 김석주와 견원지간(원수)이었으며, 삼복(복창군·복선군·복평군) 형제는 1675년(숙종 즉위년), 명성왕후와 김우명이 무고로 홍수의 변을 벌여 제거를 꾀했다가 청남(남인 보수파)의 탄핵 탓에 실패했던 자들이다.
이 사건으로 허견의 부친이자 도체찰사부의 도제조였던 허적(탁남 영수)이 민정중 이하 서인 산당의 집요한 요구와 빗발치는 상소 아래 결국 사형에 처해졌으며[25], 2차 북벌론을 주창했던 장본인이자 도체찰사부의 재설치를 건안했던 장본인으로서 삼복의 옥이 조작 사건임을 안 청남(남인 강경파) 영수 윤휴가 허적의 구명을 위해 나섰다가 역시 공범(사문난적)으로 몰려 사형에 처해졌다. 여기에 청남과 탁남 당원들이 당수의 구명을 위해 항거하다가 이 사건의 수사를 담당한 민정중 휘하[26] 서인 산당에 의해 남인이 대거 살상되었으니, 이로 인해 남인은 1689년(숙종 15년) 2월 2일 기사환국까지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옛 서인 한당의 마지막 잔류 세력이기도 한 청풍 김씨 왕실 외척과 서인 산당이 비로소 합당한 서인 일당 독점 정권이 수립됐다. 이것이 경신대출척이다.
같은 해인 1680년(숙종 6년) 10월 26일, 숙종의 원비이자 갓 수립된 서인 정권에서 다소 불안 요소가 잔재하는 산당과 청풍 김씨 외척의 연합 관계 및 산당을 수호하는 성녀 역할을 수행해야 할 인경왕후 김씨(본관은 광산 김씨, 당시 19세)가 천연두 발병 8일만에 격리 요양 중인 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국법과 왕실 원칙 상 정궁(正宮)이 사망하면 3년상을 마치기 전까지 재혼할 수 없었으나 송시열의 추천과 김석주의 합의 아래 경신대출척의 1등 공신인 좌의정 민정중의 질녀인 인현왕후가 새로운 성녀로 채택되어 아직 인경왕후의 시신이 장사조차 되기 전[27]인 1681년(숙종 7년) 1월 3일, 명성왕후 김씨(청풍 김씨)가 다시 왕실 최고 여성의 고유권한을 불법 점유[28]하여 숙종의 재혼 속행 결정을 선고했다.
2.2. 왕비 등극 과정
1681년(숙종 7년) 3월 5일, 금혼령이 실시되고 처녀단자 수집이 시작됐다. 이미 왕비가 될 대상이 내정된 국혼(國婚)이었던 만큼 절차상 후보의 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날짜를 단축하여 한양 현 거주자로 제한함과 동시에 혼인법마저 개정해 혼인 가능 대상을 법적으로 제한했고, 후보자의 나이 역시 숙종이 당장 후사를 보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대폭 축소하여 당장 합례[29]가 가능한 당시 법적 성인인 정미생(1667년, 당시 15세)부터 계묘생(1663년, 당시 19세)까지로 제한했다. 또한 '생모가 사망하여 부친이 이미 새장가를 든 처녀(전처 소생)는 후보에서 제외한다'는 조항을 제거했는데 이 모두가 내정자인 인현왕후가 해당됐던 탓이다.[30]3월 9일 초간택 길일이 당장 나흘 뒤인 3월 12일 묘시(卯時: 새벽 5시~7시 사이)로 택일됐고, 바로 다음날인 10일에 한양내 처녀단자 제출이 마감되어 관상감이 처녀의 사주와 숙종과의 궁합을 감정할 시간도 없이 12일 묘시에 초간택이 바로 실시됐다. [31]
3월 18일 사시 재간택, 3월 26일 묘시 삼간택을 거쳐 내정된 대로 왕비로 최종 간선(선발)돼 어의궁 별궁으로 이동해 부친(민유중)에게 천자문과 소학, 내훈 등 초등 교육을 단기 속성으로 익히며 담당상궁에게 궁중 예절 및 국혼 예행연습과 같은 신부수업을 수련 받기 시작했다. 4월 13일 사시 납채가 실시, 4월 20일 오시 납징 실시, 4월 25일 고기가 실시됐고, 5월 2일 사시 책비례를 올려 왕비로 등극했다. 이 날 인명피해가 발생 정도의 대지진이 발생하여 논란이 있었는데 훗날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비하며 책비례가 있던 날 대지진이 일어나 하늘의 조짐인 것 같아 불길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32] 5월 13일, 숙종의 반친영으로 입궁하여 동뢰를 실시하고, 다음날인 14일 이젠 시모가 된 명성왕후를 조현(朝見)하고, 대혼례 교서 반포와 더불어 종친과 문무백관의 축하, 하례의식을 올렸다.
2.3. 희빈 장씨에 대한 견제
왕비가 된 직후 장옥정을 먼저 들이자고 제안할 만큼 현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장옥정이 재입궁한 이후에는 태도가 완전히 바뀐다. 사실 드라마나 전해지는 야사[33]와 달리, 인현왕후가 희빈 장씨를 질투한 기록은 여럿 남아 있다. 숙종의 총애를 받는 희빈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영빈 김씨[34]를 들이도록 하기도 했고, 희빈 장씨의 버릇을 고친다며 아랫사람을 시켜 종아리를 친 적도 있었다. 아랫사람이 후궁에게 매질을 가하게 명한 것은, 당시 후궁이었고 자기네들 서인세력이 보기에는 숙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면서 오만방자하게 구는 것같이 행동하는 희빈 장씨에게 상당한 모욕감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해석도 있다.다만, 이 매질 사건이 벌어진 데에는 당시 종4품 숙원이었던 희빈 장씨의 부적절한 처신이 있었다. 궁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던 때에, 숙종이 희빈과 관계를 하려고 하니[35] 희빈이 내전으로 뛰어가 "저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록에는 '내전[A]의 기색을 살피기 위함이었다.'고 하는데, 굳이 인현왕후의 상황을 살피려는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첩이 본부인(정부인)에게 가서 "우리 남편이 자꾸 저랑 자겠다고 귀찮게 해요, 저 좀 살려주세요" 한 셈이니 본부인 입장에선 굳이 은밀한 부분을 얘기하고 다니는게 대단히 불쾌한 행동이다. 그러나 질투의 화신이라는 대중 인식이 강한 희빈 장씨가 나름 건방지게 굴었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은, 정사에서 이 한 가지뿐이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1686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 기사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으로 삼다
숙종에게 “명성왕후께서 꿈에서 계시를 내리길, 장씨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발언을 한 기록이 숙종실록에 실려있다. 이것이 폐출될 때 ‘시부모의 계시를 방자한 죄’에 들어갔다. 물론 꿈의 계시라는 비현실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봐도 명성왕후는 남인을 매우 적대시하고, 그에 따라 시증조모인 장렬왕후가 중용한 희빈 장씨도 내쫓았던 사람이었다. 어찌보면 인현왕후는 그런 명성왕후의 유지(유언)를 이어받아 희빈 장씨와 남인을 멀리하도록 종용했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숙종 입장에서는 서인이든 남인이든 누굴 등용하는 건 내 마음인데 왕비가 왜 정치에 이래라저래라냐 생각했을 수는 있다. 어머니인 명성왕후의 월권에 시달렸던 숙종 입장에서는, 어머니 명성왕후를 예시로 들어 정치에 관여하는 게 오히려 분노를 더 키웠을 수도 있다. 정작 숙종은 이 때 당시에는 이런 이유들, 즉, 시부모의 계시를 빙자하고 투기한 죄로 바로 폐위하지 않고 3년 후에야 뒷북으로 내밀어서 폐위했는데 객관적으로나 결과적으로나 치졸하기 그지 없지만 숙종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1686년으로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장렬왕후가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이다.[37] 장렬왕후가 장희빈이 환궁해서 후궁이 된 뒤에도 인현왕후보다 총애하긴했지만 엄연히 장렬왕후도 서인 명문가 출신에 속한데다 대왕대비였기에 그런 장렬왕후가 있는 상황에서 인현왕후의 폐위를 추진한다는건 숙종 입장에서도 불가능했기 때문.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꿈에 선왕과 선후를 만났는데 두 분이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전(內殿)[A]과 귀인(貴人)은 선묘(宣廟) 때처럼 복록(福祿)이 두텁고 자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숙원(淑媛)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도 없으니, 오랫동안 액정(掖庭)에 있게 되면 경신년에 실각(失脚)한 사람들에게 당부(黨付)하게 되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다. 부인(婦人)의 투기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어찌 선왕·선후의 말을 가탁(假托)하여 공동(恐動)시킬 계책을 세운 것이 이토록 극심한 지경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1689년,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4월 21일 (정해) 1번째기사
-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1689년,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4월 21일 (정해) 1번째기사
투기하는 것 외에도 별도로 간특한 계획을 꾸며, 스스로 선왕(先王)·선후(先后)의 하교를 지어내어서 공공연히 나에게 큰소리로 떠들기를, ‘숙원(淑媛)은 전생(前生)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신년 역옥(逆獄) 후에 불령(不逞)한 무리와 서로 결탁하였던 것이며, 화(禍)는 장차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 팔자(八字)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노고(勞苦)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며, 내전(內殿)[A]에는 자손이 많을 것이니, 장차 선묘(宣廟)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삼척 동자(三尺童子)라도 반드시 듣고 믿지 아니할 것이다.
-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1689년,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5월 2일 (정유) 2번째 기사
-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1689년,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5월 2일 (정유) 2번째 기사
숙종이 신하들이 있는 자리에서 대뜸 인현왕후를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하자, 신하들이 당황해서 인현왕후를 옹호한다. "부인이 질투하는 일은 여염집에서도 흔히 있는 일인데, 중전께서도 여염집(사가)에서 자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지난 9년을 국모로 있었으니 그런 부분은 적당히 넘어가시라"며 인현왕후를 옹호했다.[40]서인만 옹호하고 남인은 숙종을 부추겼을 것이라고 오해하지만, 이 때 서인이든 남인이든 한 마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인현왕후가 서인의 입장으로 나온 왕비고 희빈 장씨 덕분에 남인들이 집권했다고 해도, 엄연히 국모인 왕비를 폐출하라는 말을 따르는 것은 신하의 도리에 어긋나며 명분도 없는 일이었다. 되려, 숙종이 신하들의 그런 충고를 듣지 않았다.[41]
신하들의 말대로, 이 정도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도 그냥 넘어가 줄 수 있는 정도의 가벼운 투기였다.[42] 그리고 심각한 투기를 하더라도 삼불거의 원칙으로 아내를 함부로 내칠 수 없었다. 이러한 원칙은 후에 인현왕후가 복위될 때의 명분으로 사용되는데, 인현왕후 민씨가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지만, 시부모의 상을 같이 지낸 조강지처이기 때문에 지나친 벌이었다는 것이다.
2.4. 폐비가 되다
아이를 낳지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대왕대비 장렬왕후가 1688년 승하한 직후 희빈 장씨와 숙종의 첫 아들인 왕자 윤이 태어나며 원자 책봉 문제가 불거졌다. 서인 측은 전례가 없는 급한 행동에 당황하여 온건한 반대 의견을 개진했으나 숙종에 의해 무시되었고, 송시열이 일이 다 정해진 후에도 강경하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숙종을 더욱 폭발하게 만들었다. 숙종은 이를 빌미로 1689년(숙종 15년)에 기사환국[43]을 일으켰고 조정은 남인들이 차지한다.폐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탄일문안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대왕대비이자 숙종의 (법적)증조할머니인 장렬왕후의 국상 기간이라 "중전(인현왕후)의 탄일문안을 생략하라"고 어명을 내렸는데도, 인현왕후가 문안을 받은 사건. 당시 숙종에게 "진실로 나의 죄이다. 어찌 할 것인가? 폐출시키려거든 폐출시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4일 경인 3번째 기사
사실 '국상(國喪)'이라는 명분을 들었지만, 애시당초 숙종이 인현왕후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 과거 성종이 1479년(성종 10년), 폐비 윤씨의 탄일 문안을 금지시키고, 생일 다음날 폐위를 시킨 전례가 있다. 숙종이 이것(선례)을 알고 있었다면, 인현왕후의 탄일문안을 금지시킨 시점에서는 이미 폐위를 예고한 것이다. 유의할 점은 폐비 윤씨 때와 인현왕후의 폐위는 서로 상황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폐비 윤씨는 도가 넘은 경우였고, 인현왕후는 그냥저냥 넘어갈수 있는 정도였다 무엇보다 국상이라는 명분을 들었는데 국상 중이기 때문에 인현왕후에 대한 폐위는 상식적으로 봐도 더 신중해야 했다.[44] 심지어 투기가 드러났던 1686년에는 정작 폐위하지 않았다가 이제서야 들먹인건데 1686년 당시에는 살아있던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눈치를 봤다가 그녀가 승하한지 1년 차가 되어가니 바로 폐위를 시킨 것이다. 객관적으로나 인륜적으로나 치밀하고도 치졸하기 짝이 없는 것.
이 탄일문안 사건에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김덕원, 그리고 병조판서 민암과 이조판서 심재, 예조판서 민종도 등등의 신하들이 모여서 ‘왕후의 탄일문안은 당연한 예법인데, 이리 진노하는 이유가 뭐냐’는 상소를 올렸다. 참고로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민암, 심재, 민종도 등은 죄다 남인이다. 결국 인현왕후 역시 폐비가 되어 안국동에 있는 사가로 내쳐진다. 노론, 소론은 물론, 남인들조차 대다수 반대했는데도 숙종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한 일이다.
인현왕후에게 물어진 죄는, '자식이 없는 죄', ‘죽은 시부모의 계시를 빙자하여 왕에게 거짓을 고한 죄’, ‘왕의 육체를 조롱한 죄’[45], ‘투기로 내전의 일을 조정으로 확대시켜 국정을 어지럽힌 죄’, ‘내전에서 궁인의 당파를 나누어 붕당을 일으킨 죄’가 있다. 칠거지악 중 3가지나 범했으나, 사실 인현왕후가 저지른 죄 정도는 당연히 그냥 눈감고 넘어갈 수 있는 미미한 죄였다. 남인조차 폐출에 반대한 것도 정실 왕후를 이런 사소[46]한 이유로 폐출한다는 건 해도 너무한 무리수였기 때문이다.
인현왕후를 폐위한 후, 숙종은 폐비 민씨의 흔적이 남겨진 물건을 모두 불태워버리도록 명하였으며, 민씨가 가례를 올릴 때 입었던 장복은 대내에서 공개적으로 태우도록 했다. 심지어 숙종은 "인현왕후와 가례를 올리는 날에 지진이 있어서 어쩐지 불길했다." 라고 직접 말하기까지 했다. 1689년(숙종 15년) 5월 2일에 숙종이 내린 비망기에서 언급된다.
2.5. 왕비로 복위되다
이후 1694년(숙종 20년)에 남인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숙종은 처음에는 "폐인[47]을 언급하지 말 것"과 "국본(후의 경종)에게 위해를 가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명을 내리나, 번복하여 전비(前妃) 민씨를 서궁(경운궁)으로 들일 것을 명한다. 1694년(갑술년) 4월 12일 민씨가 전비(前妃)의 자격으로 서궁에 입궁하였다. 처음에는 궁호(宮號)만 주고 서궁에서 여생을 보낼 것으로 보였으나…그 날, 예고 없이 희빈 장씨(장옥정)에게 "중궁전을 저녁까지 비우라"는 명이 떨어진다. 인현왕후는 복위된 날 중궁전(창덕궁)이 아니라 서궁에서 보냈으며, 이는 민씨를 입궁시킨 목적이 처음에는 복위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만약 인현왕후를 복위를 목적으로 들였다면, 애초부터 희빈 장씨에게 미리 중궁전을 비워두고 인현왕후를 입궁시키는 것이 맞는 절차였다. 물론 숙종의 성격 상, 총애가 시들시들해진 희빈 장씨를 그냥 엿먹이려고 그랬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이런 숙종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조정을 차지했던 소론 신하들은 강력히 반대 의사를 표출한다. "9년(인현왕후 재위기간)과 6년(희빈 장씨 재위기간)이 중한가? 아니면 아들이 있고 없음이 중한가?" 라면서 왕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 더 귀하다며 당시, 인현왕후의 완벽한 복위를 원하던 노론과 대립한다.[48] 하지만, 소론의 영수였던 남구만이 "자식이 부모[49]의 일을 거론하는 것은 그릇된 일" 이라고 말하며 소론을 중재했다.
이러하듯, 드라마에서는 희빈 장씨가 죄를 짓고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모함을 받아 폐위되었다는 게 드러나고 겨우 며칠만에 간단히 복위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인현왕후가 복위될 때의 명분은 삼불거의 규범이었는데, 인현왕후는 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와 증조모인 장렬왕후의 상을 같이 치른 조강지처이므로 폐위의 처분은 가혹하다는 것이다. 삼불거의 규범에서, 쫓겨난 정실부인을 다시 들이면 새로 들인 정실부인은 친정으로 돌려보내거나 첩으로 강등시킨다. 즉, 인현왕후가 무죄라 복위된 것도 아니고, 희빈 장씨가 죄를 지어 강등된 것이 아니라, 국법을 따른 것이었다.
어쨌거나 결국, 인현왕후는 숙종의 변덕스럽고 갑작스런 결정으로 입궁한 당일에 왕비로 복위되었다. 숙종실록에 인현왕후가 서궁에 입궁하기 전날부터 복위될 때까지의 밀당(?)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숙종이 내려준 옷을 "분에 넘친다"고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숙종이 "그 옷을 안 입고 오면 너의 궁인들에게 중죄를 내린다"고 엄포를 놓자, 결국 입고 왔다. 인현왕후가 입궁했을 때 숙종이 직접 마중을 나갔는데, 그 자리에서도 인현왕후는 "내 죄가 너무 크다"고 자책하였다. 숙종이 "부원군과 부부인의 작호를 회복시키겠다."며 계모의 작호를 물으니, "기억 안 난다"고까지 했다.
당연하지만 먼 친척도 아니고 자기 어머니의 작호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이 정도면 어깃장을 놓는 걸로 보인다. 당시 인현왕후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어깃장이어도 이상하지 않은 게, 왕비 시절의 일화를 보면 알겠지만 인현왕후는 그렇게 소심한 성격이 아니다.
복위된 이후로도 끝까지 아이는 낳지 못했으며,[50] 희빈 장씨의 아들인 왕세자(경종)가 인현왕후 아래로 입적된다. 인현왕후전에 따르면 인현왕후는 원수의 자식인 왕세자를 친자식처럼 귀여워했으며, 왕세자도 적모(嫡母)인 인현왕후를 매우 따랐다고 한다.
인현왕후전은 역사적 사료의 가치가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무조건 믿을 수는 없지만, 인현왕후의 오라비인 민진원의 단암만록에서도 인현왕후가 "세자(경종)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조석(朝夕, 아침저녁)으로 내 곁을 떠나지 않으며, 사모하고 공경함이 사친(장희빈)한테 하는 것보다 낫다"고 표현했다는 점을 봐서는 서로의 관계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인현왕후는 복위된 이후로도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왕세자나 왕자들을 돌볼 상태가 아니었다. 다만, 당시 왕세자가 적모 인현왕후의 곁을 지키며 간호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현왕후 입장에서는 숙종이 또 무슨 변덕을 부릴지 장담할 수도 없고 폐위 시절의 후유증으로 몸도 나빠서 아이를 낳는 걸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왕세자(경종)를 자기 곁에 두면 남인이 왕세자를 내세우는 것도 차단시킬 수 있다. 왕세자의 입장에서도 자기 생모인 희빈 장씨가 부왕 숙종에게 버림받은 상태에서 희빈 장씨가 역관(중인 출신)의 딸이라 뒷배도 약하고 자기 후견을 맡아야 할 남인은 인조 대부터 약소 야당인데다 힘이 강한 여당 서인은 언제 자신을 쫓아낼지 모르니, 차라리 중전인 인현왕후를 후견인으로 삼아 자기 지위와 안전을 도모하는 게 훨씬 이익이다. 복위된 귀인 김씨가 지나치게 뒷배가 강해서 양쪽에게 부담스럽다는 걸 생각한다면 서로 필요에 의한 동맹으로 볼 수 있다.[51][52]
2.6. 죽음
사극에서는 어느 날 쓰러져 약간 앓다가 깔끔하게(…) 유언 남기고 대낮에 승하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실제로는 1년 6개월 이상 처절하게 투병했고 갖은 후유증과 합병증까지 앓아가며 고통받다가, 한밤중 새벽에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다. 사인은 종기와 부종의 합병증으로 추정된다. 이것을 한의학에서는 '옹저'라고 부르는데, 악성 종기로 생각하면 된다. 인현왕후는 이런 종기가 고관절 부위에 생겼다고 한다.기록에 따르면, 인현왕후는 양쪽 다리가 붓고 통증이 심해 참기도 어려운 상태였으며, 밤이 되면 통증이 더 심해져서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너무 따가워서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뒤이어 경련 증세가 나타났는데, 처음에는 다리에 경련이 일다가 전신으로 확대되어 의료진까지 놀라게 하는 것이 1달 가량 이어졌다.
내전(內殿)[A]이 다리 부위가 붓고 아픈 증상이 있었는데, 오른편이 더욱 심하여 환도 뼈 위 요척(腰脊) 근처에 현저한 부기가 있으므로
약방에서 침을 놓을 것을 계청하고, 제조가 의관을 거느리고 입직(入直)하였다.
- 《숙종실록》 34권, 숙종 26년(1700년, 경진 / 청 강희(康熙) 39년) 3월 26일 (기미) 2번째기사
약방에서 침을 놓을 것을 계청하고, 제조가 의관을 거느리고 입직(入直)하였다.
- 《숙종실록》 34권, 숙종 26년(1700년, 경진 / 청 강희(康熙) 39년) 3월 26일 (기미) 2번째기사
환도혈의 종기를 따고도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허리 밑이 곪아서 침으로 종기를 땄는데, 이때 이미 손으로 만져보면 근육과 피부가 분리되는 것이 만져지는 상태였다. 정상적으로 회복하는 환자라면 종기를 딴 후 고름이 다 빠지고 새 살이 돋아야 하는데 인현왕후는 회복기로 접어들지 못했고, 1년 가량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오심(惡心)[54], 구토, 복통, 설사, 발열이 끊임없이 교대로 나타났고, 당연히 먹는 것도 힘들어서 밥을 줄였으나 기껏 먹은 것도 모두 게워냈다고 한다. 그러다 1701년(숙종 27년) 7월부터 기력이 쇠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 쉬는 게 힘들어지고, 밤중에 손발이 차디차게 식는 등의 죽기 직전 말기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소변이 막히고 구강(입안)에 부스럼이 생기는 등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갔다.
1701년(숙종 27년) 8월 13일에는 친정 오빠들인 민진후와 민진원을 숙종이 궁궐로 불러들인다. 이날 밤에는 아예 의식을 잃고 부정맥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더니, 결국 복위 8년 후인 1701년(숙종 27년) 8월 14일[55] 새벽 2시경, 창경궁 경춘전[56]에서 깊은 통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승하하였다. 그런데 인현왕후는 자신의 병을 두고 친정 오빠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내가 복위된 뒤, 세자의 사친(私親)[57]을 받들어 올리는 규정을 논하면서 '마땅히 일반 후궁과는 달라야 합니다.'라고 하니, 그때부터 궁 안 사람들이 다 희빈 장씨에게 기울어졌다. 원래 궁중의 법도에 따르면 후궁 처소에 속한 궁녀들이 내전에 드나들 수가 없는데, 희빈 장씨의 궁녀들이 내전을 수시로 출입하고, 창에 구멍을 내서 동태를 엿보는 등의 잘못을 많이 했다. 나로서는 돌아가는 상황이 한심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이렇게 몸이 아프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하는데, 나도 이런 상황이 의심스럽다.
인현왕후가 한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명색이 왕후인데도 궁궐 안에서 입지가 좁았다는 뜻일 수 있다. 희빈 장씨 항목의 장례 관련 내용에서도 알 수 있지만, 후궁 중에서도 정1품 '빈(嬪)'으로 사망하였지만 세자의 생모인 데다 이미 왕비로 재위했던 경력이 있어서 희빈 장씨는 사약을 먹고 사사되었어도 거의 왕비에 준하는 엄숙한 장례 절차를 밟았다.
그렇다면 살아생전에도 비록 똑같은 빈이어도 일반 후궁과는 다른 위세를 가졌을 것이고, 궁 안 사람들도 와병 중인 인현왕후보다는 세자의 생모인 희빈에게 연줄을 섰을 가능성이 있다. 출신이 빵빵한 귀인 김씨는 숙종의 미움을 사서 인현왕후와 같이 복위했음에도 여전히 무시당했기 때문에 출신만 높지 궁내에서 별다른 힘을 못쓰는 상황이라 말년에는 천민이었던 숙빈 최씨의 도움을 받기까지 할 정도로 처지가 매우 비참했었다. 인현왕후가 죽기 직전에 '귀인 김씨를 왕비로 삼으라'고 따로 요청했던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었던 것 같지만. 숙종은 귀인이 너무 싫은 나머지 희빈 사후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법을 만들고 새 간택령을 내려 인원왕후를 새 왕비로 삼는다.
아무리 세자의 생모라지만 후궁 처소의 궁녀가 감히 중궁전 창문(창호문)에 구멍까지 내면서 염탐하는 것이, 다른 시절 같으면 허용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희빈 장씨의 위치가 죄를 지어 국모에서 폐위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왕세자의 친모이기 때문에 일반 후궁들과 비교할 수 없던 특수성도 고려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의 입지를 고려하면 비참한 모양새라고 볼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옹저(癰疽)를 ‘억울한 일을 당하여 마음이 상하거나 소갈병이 오래 되면 반드시 옹저(癰疽)나 정창(疔瘡)이 생긴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흔히 이런 옹저가 생긴다’고 설명한다. 동의보감에 기록된 내용이다. 현대 의학에서도, 종기는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면역력 저하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화농(化膿)[58]을 2개 다 땄는데도 고름이 멈추지 않고 새살이 돋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체의 면역력과 회복력이 극도로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현대의 의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고관절 부위에서 화농성 관절염이 생겼고, 이것이 뇌수막염으로 번져 경련 증상이 생겼으며, 점차 복부로 퍼져 복통, 구토, 설사 등을 동반하는 복막염이 되고, 끝내 심장으로 퍼져 심내막염이 되어 합병증으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59]
숙종은 그녀의 능(명릉)을 조성하면서 훗날에 본인이 인현왕후 곁에 묻히길 희망했으며, 실제로 승하한 후 그 곁에 묻혔다. 일반적으론 원비인 인경왕후와 묻히는 게 관례지만 숙종이 미안했는지 그러기를 바랬다. 다른 왕들도 반드시 지키지는 않은 원칙이기도 했다. 이후 3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의 무덤도 바로 옆에 지었는데 이를 명릉이라고 하여, 고양시에 있는 서오릉 중 하나이다. 이 능은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놓여 있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 쪽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져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의 무덤이다.
숙종은 이후 다시 새장가를 드는데, 이 세번째 정실부인이 인원왕후다. 아내들 중 가장 긴 시간인 18년을 함께한 사람임에도 그녀에게는 철저히 무관심했기 때문에, 인원왕후는 당시 법적으로는 자신의 아들인 의붓아들 영조에게 "나도 숙종 대왕이 있는 명릉에 묻히고 싶다"고 졸라서 인원왕후에게 구명받기도 했던 영조가 두 사람을 같이 묻어주었다.
3. 가계
- 친정(여흥 민씨)
4. 여담
- 인현왕후를 주인공으로 한 궁중 소설 〈인현왕후전〉[63]에는 희빈 장씨가 저주를 내려 인현왕후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희빈 장씨가 처소 뒷편에 신당을 차려놓고 무녀들을 불러들여 인현왕후를 저주한 사실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았다고 한다. 실록을 보면 무녀들을 시켜다 인현왕후 초상화에 활을 쏘라고 명하였다.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은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에 이미 '신당과 굿은 몸이 약했던 세자 윤의 건강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있었으며 인현왕후의 병은 폐비가 되었을 때 했던 몸고생 마음고생의 후유증으로 보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을 듯하다. 실제로 현대 의학자들은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보았을 때 폐비 시절의 힘든 생활 때문에 결핵성 질환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그 후로 각종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것으로 본다. 인현왕후는 사가 시절에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자책하면서 식사를 거르는 등 건강을 챙기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실 신분제 사회에서, 그것도 자존심 있는 사대부가의 출신으로 중전이었다가 하루 아침에 폐서인이 되었다는 것 자체로도 죽느니만 못한 취급이었다. 폐비는 중죄인 취급이라 사사로이 재물을 축적하거나 밖을 나다니는 일조차 항상 조심해야 했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도 대단히 심각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궁에서 간혹 의복과 음식을 보내주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미움을 받은 폐서인에게 온정을 베푸는 일을 다들 꺼렸음이 공공연한 사실이라 험한 음식만 먹었다. "질투나 분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항상 온후했다."고 하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제때 감정 표출을 해야 정신건강에 좋은데 인현왕후는 감정 표출을 제대로 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쌓아 놓기만 했다는 것과 같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인현왕후의 천성은 오히려 자존심이 강하고 격정적인 것으로 추정되며 '부종과 등창으로 고생했다'고 쓰여있는데 대체로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고 늘 아파서 누워있거나 하여 더 악화된 듯하다.
- 서인(특히 노론) 측에서 희빈 장씨를 천하의 악녀, 인현왕후를 궁극의 성녀로 만드는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그와 별개로 현숙한 국모로서 당대에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장씨 남매와 남인들이 권세가 하늘을 찔러 백성들의 사정이 궁핍해질 때 그에 대항하는 상징이 되었기에 더욱 그러한 듯하다. 야사에 의하면 인현왕후가 궁궐에서 내쳐질 때 백성들이 모두 슬퍼하며 울었다고 하며 그 유명한 '미나리는 사철, 장다리는 한철'이라는 가사의 민요가 폐출되었던 시기에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서 '미나리'는 인현왕후, '장다리'는 희빈 장씨를 뜻한다. 한철인 희빈 장씨는 결국 내쫒기고 결국 인현왕후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얘기. 그래서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머물던 사가를 지나갈 때 눈물을 흘리지 않은 백성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여기에는 숙종이 희빈 장씨에게 내리는 총애에 과한 면이 있었다는 점도 있다. 사례로 희빈 장씨를 위한 전각을 지을 때 나라 사정이 좋지 못하여 신하들이 반대했는데도 상당히 호화스럽게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지어진 전각이 바로 취선당이며 현대에는 없어졌다. 상황이 이러하니 백성들 사이에서 "여자 때문에 왕이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올 만도 했다. 사실 왕의 애인/후궁을 악녀화, 정실 부인을 성녀화하려는 시각은 동서고금에서 흔히 발견된다.
- 보드게임을 고안해 낸 왕비이다. 인현왕후가 고안한 보드 게임은 규문수지여행지도(閨問須知女行之圖). 줄여서 '여행도 놀이'라고도 부른다. 이 게임은 인현왕후가 폐출되어 사가에 있을 때 외로움을 달래고자 어린 조카딸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 아이와 놀아주려고 만들어낸 놀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 남자아이들이 즐기던 보드 게임인 승경도 놀이를 여성 버전으로 컨버전(탈바꿈)한 게임이라고 보면 된다. 승경도가 조선 시대판 인생 게임으로 조선조의 관직들을 대상으로 한 게임이라면 이 게임의 말판에는 당시 여성들의 덕목이나 조선과 중국 역사에 남은 열녀, 효녀, 악녀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승경도가 말이 사약에 가면 게임 오버인 것에 반해 이 게임에서는 말이 '금수(짐승)' 칸으로 빠지게 되고 결국 게임 오버된다. 또한 승경도에서는 궤장이나 도원수에 이르면 승리하는데 이 게임에서는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64]에 이르면 승리한다.[65]
- 인현왕후의 둘째 오빠 민진원은 훗날 노론 중에서도 최고 강경파가 되어 신임옥사로 인해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 등 사대신이 모두 처형되어 무주공산이 된 노론의 수장 자리를 차지한다. 민진원은 한때 여동생(인현왕후)이 폐위되고 집안이 몰락한 것에 소론에게 한이 맺혔는지 영조 재위 초반까지 정력적으로 활동하며 소론과 피터지듯 정말 개싸움을 벌였다. 영조는 민진원을 불러 소론 수장 이광좌와 손까지 잡게 하며 화해를 중재했으나 화해는 그 때 뿐이고, 이후에는 다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결국 영조도 설득에 실패했고 1736년(영조 12년)에 노론 강경파이자 공동 수장이었던 정호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의 친정 일족은 조선 말기에 다시 왕비를 배출해내며 일족이 세도를 누리는데 바로 명성황후 민씨 및 여흥 민씨 척족이 그들이다. 이들은 구한말 세도정치로 악명을 떨쳤으며, 세간에 끼친 피해가 그 유명한 안동 김씨를 능가한다고 원성이 자자했으며 실제로 임오군란을 비롯한 조선 멸망의 방아쇠를 크게 당기고 만다. 특히 명성황후는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5대 종손이자 큰오빠 민진후의 현손인 민치록의 딸로 종갓집 출신이며 둘째 오빠 민진원의 후손이 민영익과 순명효황후 민씨이고 남동생 민진영의 자손이 민승호, 민겸호, 고종의 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남매이다. 단, 훗날 민승호가 명성황후의 양오빠가 되고 민영익이 민승호의 양자가 된다. 그녀의 큰아버지인 민정중의 후손이 바로 남연군의 부인이며 흥선대원군의 어머니가 되는 군부인 민씨이다. 인현왕후의 전임이었던 인경왕후와는 아주 묘하게 연결되는데, 인경왕후의 5대조인 김계휘의 동생인 김은휘라는 인물이 있는데 김은휘의 딸[66]이 송이창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송준길의 누이)이 민유중과 결혼하는데 여기서 태어난 딸이 바로 인현왕후이다. 즉, 인현왕후의 외가가 광산 김씨인 것. 촌수로 따지면 인현왕후는 인경왕후의 할머니뻘에 해당된다.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 이유는 김계휘와 김은휘 형제의 나이 차이가 15살이나 났기 때문이다. 김계휘의 아들인 김장생과 김은휘는 조카-숙질 사이지만, 나이 차이는 고작 김은휘가 7살 연상으로 거의 동년배다. 이미 김계휘 때부터 1세대 정도 차이가 났으니, 삐끗하다 보면 이렇게 벌어지는 것은 순식간인건 불보듯 자명한 일이다.
- 인현왕후전에서는 청순하고 우아한 절세미녀로 묘사되나 진짜 실록에 절세미녀로 기록되어 있는 희빈과 달리, 정작 그녀의 외모에 관한 별다른 기록은 없다. 인현왕후전의 묘사와는 달리 실제 인현왕후는 실록은 물론, 그 어디에도 미인이란 기록은 없으며 별다른 외모에 대한 기록이 없는 걸로 보아 보통의 조선 왕비들처럼 단정하며 귀티가 나긴 하지만, 희빈처럼 빼어난 미녀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인현왕후의 얼굴을 알 수 있었을 기회가 있긴 했다. 복위 1년 후인 1695년 음력 7월 27일 숙종이 인현왕후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했으나 일개 화공이 국모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만약 초상화를 그려 보존했다면 인현왕후의 얼굴이 전해질 수도 있었을 일이다.
- 사후 시호로 인현왕후(仁顯王后)와 장의왕후(莊懿王后) 2개의 후보 중에서 인현왕후로 결정이 되었다.[67]
5. 대중매체에서
장희빈과 함께 드라마 속 중요 인물로 자주 등장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매우 익숙한 한국 역사 속 왕비 중 1명이다. 드라마에서 희빈 장씨가 팜므 파탈 이미지의 여배우를 캐스팅한다면 인현왕후는 대체적으로 단아하고 청순한 이미지의 여배우들이 맡았다. 희빈 장씨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항상 궁극의 천사표 캐릭터로 나왔지만 현대에는 대중들에게 다소 식상해져 보다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다. 심지어 희빈 장씨가 주인공인 연극에서는 궁극의 흑막, 지독한 위선자로 나오기까지 한다.[68]- 1961년 개봉한 영화 <장희빈>에서는 배우 조미령이 연기했다. 고전적이고 연약한 이미지의 인현왕후를 훌륭히 소화하며 대중의 큰 호응을 얻었다. 조미령이 연기한 인현왕후는 훗날 만들어지는 수많은 인현왕후 캐릭터의 교과서적 표본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 1968년 개봉한 영화 <요화(妖花) 장희빈>에서는 배우 태현실이 연기했다. 기품있고 인내심강한 외유내강 캐릭터로 표현하며 조미령의 인현왕후와 차별화를 꾀했다. 영화 자체도 전 작품인 <장희빈>보다 높은 평가를 받으며 호평을 받았다.
- 1971년 MBC 드라마 <장희빈>에서는 배우 김민정이 연기했다. 당시 장희빈 역의 윤여정은 시청자들에게 미운 털이 박혀서 광고모델을 하차하는가 하면, 길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로 욕을 먹은 반면, 인현왕후 역의 김민정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격려품 덕분에 행복한 비명을 질러야 했다고 한다. 인현왕후의 죽음이 방송된 날에는 이에 항의하는 시청자들의 전화가 빗발쳐 방송국 업무가 마비되기도 했다.
-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인현왕후에서는 배우 박순애가 연기했다. 복스럽고 덕성스럽게 생긴 고전적 미인상이라 캐스팅이 잘 되었다는 평을 받았고 장희빈 역의 전인화와 함께 훌륭한 연기를 보였다. 인현왕후가 사망하는 장면에서 시골 할머니들이 같이 TV를 보다가 단체로 울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재의 중노년층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인현왕후라 할 수 있다.
- 1995년 SBS 드라마 <장희빈>에서는 배우 김원희[69]가 연기했다. 당시 김원희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귀여운 말투를 쓰는 <서울의 달> 호순이 캐릭터로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탓에 드라마 초반에는 미스 캐스팅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날이 갈수록 안정적인 연기력을 선보이며 기대 이상의 인기를 누리며 드라마 자체도 승승장구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 2002년 KBS 드라마 <장희빈>에서는 배우 박선영[70]이 연기했다. 단아하고 온후한 면보다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후궁들을 강단있게 제어하려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중반부 노선 변경 등의 여파로 기존의 이미지로 돌아간 면도 없지 않아 있다.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인현왕후의 친정어머니가 계모라는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아서 시청자들이 어머니를 생모로 알고 넘어가기 일쑤인데, 친정어머니 스스로 자신이 인현왕후의 계모라고 밝히는 장면이 있다.[71]
- 2010년 MBC 드라마 <동이>에서는 배우 박하선이 연기했다. 기존의 기품있는 모습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선보여 ‘단아 인현’이라는 칭호까지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또한 의외로 초반부 한정으로 왕의 총애를 못받는 중전에 그치지 않고 내명부 수장으로서 상궁들과 궁녀들을 단속하는 면모도 보여주었는데 이는 실제 역사적 고증대로 중전이 내명부의 수장인 걸 묘사한 것이기도 하다. 배우 본인에게도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작품.
- 2013년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배우 홍수현[72]이 연기했다. 왕비와 후계에 대한 야심이 있으며 장희빈을 질투하면서도 그 삶을 동경하는 인물로 그려졌으나 작가의 작본 실력이 형편없어 실패로 남은 캐릭터.
6. 참고 문서
- 갑술환국
- 경종
- 기사환국
- 김만기
- 김만중
- 김석주
- 김수항
- 김우명
- 김육
- 김집
- 김춘택
- 명릉
- 명성왕후
- 무고의 옥
- 민유중
- 서궁
- 사씨남정기
- 삼복의 변
- 송시열
- 송준길
- 숙안공주
- 숙종
- 숙종실록
- 승정원일기
- 영빈 김씨
- 영조
- 영조실록
- 예송논쟁
- 인경왕후
- 인원왕후
- 인현왕후전
- 장렬왕후(자의대비)
- 장희재
- 정지화
- 조선/왕사
- 조선왕조실록
- 창경궁
- 창경궁 경춘전
- 창덕궁
- 창덕궁 대조전
- 허견
- 허목
- 허적
- 현종
- 현종실록
- 희빈 장씨
[1] 《제망실송부인문》에 인현왕후의 자매들 중 일부의 본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인현왕후의 본명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안타깝게도 알 수 없다. 인현왕후뿐만 아니라 당시 이미 시집을 간 상태였던 인현왕후의 언니 역시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단, 쌍둥이 자매(4녀, 5녀)가 이름 앞 자에 '정(正)'을 돌림자로 쓰고 있고[73], 삼녀 신(愼: 삼갈 신), 사녀 성(性: 성품/자태 성), 오녀 제(悌: 공손할 제)가 모두 마음 심(忄)을 부수로 쓰고 있으며 유교 사회에서 여성에게 권장한 행실 관련 한자였던 만큼, 이때의 정서상 인현왕후의 이름 역시 민정X(閔正X)로 뒷자 X는 마음 심(忄)을 부수로 쓰고 있으며 유교 사회에서 여성에게 권장한 행실 관련 한자이고 관, 인, 신, 성, 제의 음과 다른 음을 가진 한자였을 것까지는 추적이 가능하다. 인현왕후의 언니 또한 인현왕후처럼 이름의 첫 글자가 “정”일 확률이 높다.[2] 9대 국왕 성종의 6대손[3] 성종 → 딸경숙옹주 → 아들민희열 → 딸민연향 → 딸허순영 → 딸민광훈의 처 이씨 → 아들민유중 → 딸인현왕후[4] 송준길의 딸.[5] 조선왕조실록에는 토막난 정보들에 불과해 장희재와 남인의 무고로 정의되어 왔으나, 최근 경상북도 김천시와 청암사에서 인현왕후가 폐비 시절에 청암사에서 3년간 머물렀던 사실을 공개하면서 복위운동의 근거로 뒷받침되고 있다. 소론이 인현왕후에 대한 국모 의리론을 완전히 청산하고 복위 반대 시위를 벌이며 희빈 장씨의 지지 세력으로 돌아선 진짜 배경. 이 중엔 박태보의 생부인 박세당마저 있었다.[6] 정미년 을사월 정묘일 병오시 생.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1701년) 11월 23일 병오 2번째 기사 중 숙종이 쓴 행록에 "숭정(崇禎) 기원 후 40년 정미년 4월 23일 정묘일 오시(午時)에 경사(京師)의 서부(西部) 반송동(盤松洞) 사제(私第)에서 후(后)가 탄강(誕降)하였는데"라고 생시가 명기되어 있다.[7] 고종비 명성황후 민씨의 부친 민치록이 민진후의 적장고손으로,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적장현손이자 봉사손이었다.[8] 순종원비 순명효황후 민씨의 부친 민태호의 5대조.[9] 요절한 탓에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으나 1673년(현종 14년) 2월 12일에 민유중이 쓴 《제망실송부인문》에 "갓 돌을 넘겼다"고 쓰여있다. 1672년(현종 13년) 11월에 송씨가 쌍둥이 자매를 출산하고 사망하였으니 신의 생년은 1671년(현종 12년)경으로 추정된다.[10] 조선의 호적법은 현대와 달라 탄생과 동시에 부모자식 관계가 성립되고 조선의 백성으로 등록된 것이 아니라, 성년(15세, 왕족은 10세)에 이른 후 등록과 성립이 이뤄졌다. 이 시절 미성년자의 입장은 현대로 치면 복중태아에 비유할 수 있어, 현대의 태명 꼴인 아명을 썼고, 미성년일 때 사망하면 유산이나 사산된 태아처럼 가계에 등록되지 못했다. 단, 예외가 있었는데 성년에 이르기 전에 이뤄진 혼례(=조혼)와 왕족이 세자, 대군, 공주, 군, 옹주 등으로 책봉되는 책례이다.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책례, 혼례 연령이 빨라져 조선 말에 이르면 2-3세 세자·세손(사도세자, 헌종 등)이 등장하고, 민간에서도 더 이상 법으로 제재가 불가능할 정도로 조혼이 성행하여 조선 말 남자의 평균 초혼 연령이 10세 안팎에 이르렀던 것. 현대에도 흔히 상용되는 '결혼을 해야 어른(=성인)이 된다'라는 말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말이다.[11] 고종의 생모인 순목대원비 민씨의 5대조.[12] 이때 송준길을 본택이 있는 충청도 회덕(현 대전광역시)로 이동하면서 송씨는 한양으로 돌아온 듯. 송준길은 회덕에서 사망했다.[13] 제사나 손님맞이 등에 요구되는 가정 예절[14] 《제망실송부인문》을 지은 1673년(현종 14년) 2월 12일엔 갓 관례를 올린 상태.[15] 정명공주의 적중자 홍만형의 처, 훗날 홍국영·원빈 홍씨의 고조모[16] 《숙종실록》에 수록된 인현왕후의 지문엔 인현왕후가 홍만형의 집으로 가서 양육된 것처럼 쓰여있다.[17] 이 딸은 훗날 인현왕후가 폐비되어 잠시 친정에 머물 때 데리고 지낸 질녀로, 이후 조규빈(조태채의 조카, 조사석의 종손자)에게 출가하여 영조 때의 간신 조영진[74]을 낳았다.[18] 이후 민진후는 다시 현감 이덕로의 딸 연안 이씨를 계배로 맞아들였다.[19] 때문에 경신환국 후 송시열이 혼인법을 재정해 혼인 가능 대상의 범위를 대폭 축소시켰다.[20] 송준길은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강빈(당시 폐빈. 숙종 때 복관 추증)의 5촌 진이당숙이다. 또한 인조가 적차남인 효종을 덜컥 세자로 삼았던 배경엔 맏아들 소현세자가 사망했을 당시에 원손 석철이 볼모 등의 문제로 아직 책례를 올리지 않은 상태에 부친상 탓에 책례가 다시 3년 뒤로 연기되자 시아버지 인조와 며느리 강빈의 사이가 나쁜 것이 불안했던 송준길이 제도를 무시하고 '당장 원손을 세손으로 책봉하라'는 상소를 올려 인조가 '또 강빈이 왕과 법을 능멸하며 제멋대로 굴려고 한다.'고 대노했던 탓이다 이때 송준길은 인조의 격분을 얻어 서인 산당의 중재에도 다시 벼슬을 얻지 못하다가 효종이 즉위한 후에야 비로소 정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정계로 돌아온 송준길은 이종질녀인 폐빈 강씨와 그 자녀들의 신분 복원 운동을 총지휘. 때문에 송준길이 효종을 위한 자의대비의 상복을 부친을 승중하지 못한 적중자를 위한 상복인 기년복으로 지정했던 것에 대해 효종의 정통성을 훼손하여 제 피붙이인 폐빈 강씨의 자손들의 계승서열을 높여주고 장차 이들로 왕을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냐는 역심 의혹이 생겼던 것이다.[21] 숙종은 현종 부부가 부친상 중인 효종의 탈상을 앞두고 불법으로 부부 관계를 맺어 잉태되었다. 법대로라면 부모상 중에 부부관계를 맺은 아들은 강상법에 따라 신분이 강등되고 80대 이상의 장형에 처해지며 관직자의 경우엔 파직(또는 삭탈관직)과 유배형이 더해지기도 했다. 또한 부모상 중에 부부 관계를 맺어 잉태한 자식은 호적에 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현종은 한 나라의 지존인 왕이었고 숙종은 왕위를 이을 원자이자 효종 대부터 이어진 2대 독자였던 탓에 법대로 처결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송준길과 송시열은 김육의 손녀이기도 한 명성왕후와 패륜의 증거인 숙종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감을 드러내며, 탄신 하례를 비롯해 이들과 관련된 모든 길례 행사에 의도적으로 참석을 거부했고 왕세자 이순의 스승이 되어 달라는 현종의 거듭된 간청도 번번이 완곡하게 거절해왔다. 이런 행동은 당연히 숙종의 강한 거부감을 부를 수밖에 없었으며, 2대 독자라는 배경과 천성적인 다혈질까지 합쳐져 속깊은 원한으로 이어진다.[22] 선왕의 국상을 마칠 때까지 선왕의 행적을 부정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관행인데, 이 행위엔 선왕이 중용했던 신하가 선왕의 재위 연간에 벌였던 행위이나 선왕 때 죄가 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죄를 묻는 것과 이 반대의 케이스(선왕 때 죄가 되어 처벌받은 인물의 방면)가 포함된다. 앞서 1651년(효종 2년)에 효종의 국상을 마친 뒤에 서인 낙당 당수 김자점(귀인 조씨의 사돈)이 처결됐던 것과 훗날 경종이 즉위한 후 노론이 숙종의 탈상 전에 경종을 하야시키려고 과격하게 진행했던 것도 이 관행 때문이다.[23] 1679년(숙종 5년)에 오삼계의 죽음 소식과 삼번의 난이 청의 승전으로 정리 단계에 있다는 정보를 여럿 입수했다. 이 정보 중에 오삼계가 아직 살아있을 수 있다는 정보도 있었기에 마지막 정보 확인을 위해 보낸 것.[24] 참고로 인현왕후의 할머니인 연안 이씨는 이관징의 종고모로 인현왕후와 이관징은 서로 7촌 관계이다.[25] 초기 숙종이 허적에게 선고했던 벌은 관직과 신분을 삭탈(삭탈관직)하고 귀향하여 시골에서 농사짓는 벌이었다. 삼복의 옥이 무고, 조작 사건 의혹을 받는 이유 중 하나. 군사반란을 꾀한 시역 미수 주범의 친부(허적)이자 군사반란 기지의 총책임자에게 내리는 벌로는 택도 없는 것이라 서인 산당이 가당치 않다고 가두시위를 벌여 결국 숙종이 유배형으로 찔끔찔끔 딜을 벌이다 결국 서인 산당세력의 집요한 시위에 포기하고 마지못해 사형을 선고했다.[26] 이 당시 서인 산당 당수 송시열은 뒤로 빠진 상태였고 그 애제자이자 후계자인 김수항이 송시열을 대리해 서인 산당 당수 대행직을 수행 중이었다. 그러나 애초 김수항은 이러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천성이 아니었던 탓에 그간 그래왔듯 민정중이 경신대출척(경신환국)에서도 사냥꾼 역할을 수행한 것.[27] (조선 1446년(세종 28년)의 개정부터)에서부터 왕과 왕비의 장례는 5월장, 왕세자 이하 4품 이상 관원 부부의 장례는 3월장, 그 이하는 1월장으로 규정하고 있다.[28] 정사 중에 언문교지를 내려 명령을 전달하는 것, 국혼(國婚)을 주관하는 것은 왕의 모친이 아니라 생존 중인 전현 정궁 중 남편이 가장 먼저 왕이었던 왕실 최고 여성의 고유권한이다. 앞서 숙종 1년에 명성왕후 부녀가 홍수의 변으로 실각하기 전까지 명성왕후가 자행했던 수렴청정 역시 왕실 최고 여성의 고유권한으로, 당시 왕실 최고 여성이었던 대왕대비 장렬왕후(자의대비)가 숙종의 직접 친정을 선언한 가운데 명성왕후가 제 멋대로 아들이자 국왕인 숙종 옆에 자리를 깔고 유사 수렴청정을 했던 것은 2차 예송으로 연맹/연합했던 남인과의 관계를 믿고 불법 점유한 것으로, 이것에 대한 남인의 불만이 축척되던 중 홍수의 변이 도화선이 되어 청남이 터트려 명성왕후 부녀가 실각해 뒷방 늙은이로 강제 소환됐던 것. 이번엔 삼복의 옥과 경신환국으로 연맹/연합한 서인 산당을 믿고 다시 불법 점유를 시작한 것이다.[29] 합궁 예식. 부부관계.[30] 한성 거주자, 정미생, 재혼한 부친을 둔 전처 소생.[31] 인현왕후의 사주(정미년 을사월 정묘일 병오시 생)를 관상감에서 합격시켜 초간택에 올렸다는 것은 풍수가 미신이라며 굳이 효종을 흉지(凶地)[75]에 매장했던 송시열이 이번에도 관상감의 감정 결과에 미신이라 치부하며 강제로 인현왕후를 합격토록 했음과 동시에 송시열과는 반대로 무속에 심취한 명성왕후에게 거짓 보고를 올리도록 압박했음을 증명한다.[32] 복위했을 땐 갑자기 연이은 천재지변으로 대흉작이 일어나더니 다음해부터 을병대기근이 시작. 민진원이 기상 관련 기사에 불법 사론 형식[76]을 동원하여 생뚱맞게 옥정을 소환시켜 옥정을 기상이변의 아이콘으로 둔갑시켰던 것이 이때문.[33] 인현왕후전, 수문록 등의 책은 모두 노론에 의해 주관적으로 집필되었다.[34] 간택후궁으로, 종2품 숙의로 입궁하였다. 심지어 영빈 김씨의 배경을 보면 상황에 따라서는 오히려 인현왕후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정작 영빈은 숙종의 미움을 사서 평생 아이가 없어, 나중에는 한미한 출신인 숙빈 최씨에게 의지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 버리지만.[35] 원문에는 欲戱, 즉 '희롱하고자 하다'라고 되어 있는데, 희롱은 성교를 완곡히 이르는 표현으로 흔히 쓰였다. 상호 동의 하의 화간, 권력형 성폭행,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강간, 몸을 못 움직이게 만든 다음에 하는 의제강간 등을 가리지 않고 모두 戱로 표현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A] 인현왕후[37] 장렬왕후는 1688년 9월 즈음에 승하했다. 당시에도 승하하자마자 바로 폐위하긴 어려웠으므로 일단 원자 정호만 밀어붙이는 정도에 그쳤다가 1년이 지난 1689년이 되어서야 폐위한다. 물론 이때도 국상 중이긴 했으므로 인륜적으로 좋은 행위를 한건 아니다.[A] [A] [40] 쉽게 말해, "마누라가 바가지 좀 긁은 것 가지고 왜 그러냐? 살다보면 괜찮아진다."라고 뜯어말린 것이다.[41] 남인들은 인현왕후만 허수아비로 만들고 희빈 장씨를 앞세워 권세를 누릴 생각이었지, 인현왕후를 폐출할 생각은 없었다. 이게 선례가 되면 나중에 남인 출신 왕비도 내쳐질 수 있으니까.[42] 이 당시 양반들은 사씨남정기를 보고는, 사씨가 너무 착하다못해 답답하다, 비현실적이다' 라고 생각할 정도였다.[43] 송시열도 이 때 기사환국의 피해를 입어 결국 숙종에 의해서 사약을 마시고 사사되고 만다. 그러나 추후 영조 대에 이르러 신원이 복권되었고 성리학을 만든 주자와 같은 동급의 성인군자, 자칭 송자로 추앙 받으며 노론계 인사들의 절대적, 맹목적인 추앙을 받는다.[44] 지금도 그렇지만 전근대 절대 왕권 국가라도 역모 혹은 그에 준하여 사형당해도 할말 없을 정도의 죄를 저지르는게 아닌 이상 아무리 국왕이라도 국상을 치르는 동안 만큼은 왕비를 비롯한 가까운 왕족을 폐서인하는 심각한 사안은 탈상은 빨리 하더라도 최소 2년 정도는 넘어가는게 합리적이며 상식적이었다. 거기다 조선은 유교 국가이기까지 했다. 그만큼 숙종이 얼마나 막무가내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45] “희빈 장씨의 팔자에는 아들이 없으므로, 왕이 가까이 해도 소용없다”는 얘기.[46] 차라리 명성왕후가 희빈 장씨를 장렬왕후의 반만큼이라도 예뻐했든지 했다면 시부모의 계시를 빙자했다는 명분이라도 큰 설득력이 있었을텐데 명성왕후는 희빈 장씨를 증오하다 못해 아들인 국왕 숙종과 시조모인 대왕대비 장렬왕후까지 생까며 아예 주도적으로 축출했고, 새 며느리 인현왕후의 주청에도 불구하고 장희빈을 숙종과 가까이하게해선 안된다고 생전부터 당부하며 인현왕후의 주청을 무시하기도 했다.[47] 당시 폐서인이던 인현왕후를 말한다.[48] 사실 양쪽 모두 명분이 있었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억지에 의해 폐위된 것이므로 복위되어야 마땅하지만 반대로 인현왕후는 숙종의 아들을 낳지 못했으나 장희빈은 무려 세자를 낳았기에 장희빈을 내치는 것 또한 힘들었다. 자칫 내치고 인현왕후가 아들을 낳아버리면 국본까지 뒤틀리는 대참사가 터지기 때문.[49] 군사부일체에 의거, 왕비는 국모라 그리 비유한 것.[50] 복위한 이후로는 인현왕후가 폐위 시절 고생했을 때 얻은 잔병 때문에 몸이 좋지 못해 임신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51] 한편 귀인 김씨도 비슷한 이유로, 집안의 뒷배가 없는 숙빈 최씨와 친하게 지냈다. 귀인 김씨가 집안이 아무리 좋은 것과는 별개로, 이상할 정도로 숙종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한번 폐서인된 전력이 있는 귀인 김씨로서는, 언제 숙종이 또 변덕을 부리기 전에 낳았다하면 아들이라 숙종의 총애를 받고 서인 세력도 밀어주는 숙빈 최씨와 친하게 지내야만 했을 것이고, 숙빈 최씨도 서인 세력의 보호를 더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52] 여담으로 인현왕후 사후 숙종은 궁중 여인들 간의 캣파이트에 질린 나머지, 새 왕비는 최대한 순종적인 여자를 고르려고 했다(...). 그렇게 간택된 게 인원왕후인데, 숙종 사후 인원왕후의 행적을 보면 지고지순이나 순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A] [54] 체하거나, 다른 이유로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나지만, 정작 구토는 안 나오는 증세.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차라리 토하는 게 편할 정도로 정말 미치도록 괴롭다.[55] 남편 숙종의 만 40세 탄신일 하루 전날이었다.[56] 인수대비, 혜경궁 홍씨도 여기서 승하했다.[57] 왕위를 물려받은 자의 친부모. 희빈 장씨를 의미.[58] 곪아서 생긴 고름[59] 방성혜·차웅석이 인현왕후의 발병에서 사망까지를 기록한 승정원일기를 연구한 내용이다. 한국 한의학 연구원 논문집 통권 34호.[60] 인현왕후가 폐비시절 거두었다는 조카의 어머니이다. 이 조카는 뒷날 노론 4대신인 조태채의 조카 양주 조씨 규빈과 혼인한다[61] 노론 강경파이면서 노론의 영수로 경종 때 당시 연잉군이었던 영조를 왕세제로 삼을 것을 주장했으며 추후 영조 집권 후에는 노론계 인사들의 권력 독점이 심해지자 영조는 탕평책을 내세워 소외되었던 남인을 등용시키자 탕평책을 비난, 반대한 인물이다. 민영익과 순명효황후의 6대조이며 명성황후의 종5대조가 된다.[62] 장렬왕후의 이종손녀인 '영풍군부인'의 질부(조카며느리)사위이다.[63] 작자 미상으로 〈계축일기〉, 〈한중록〉과 함께 궁중 수필의 수작으로 꼽힌다. 단,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를 극과 극으로 대비시키는 등 사료적 가치는 매우 떨어진다.[64] 유교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부인이자 어머니의 상(현모양처)으로 꼽히는 여성이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자신의 호를 '사임당(師任堂)'으로 정한 것도 '태임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임판을 보면 태임에 대한 간략한 설명에 한글로 '여편네 중 제일이라.'라고 적혀 있다.[65] 이 게임의 악녀는 의외로 정난정이다. 인현왕후가 사가에 있을 때는 장씨가 왕후라서 악녀로 둘 수 없기도 하고(...)[66] 김은휘의 또 다른 딸은 금천 강씨 강찬이라는 인물과 결혼하는데 아들이 강석기로 다름 아닌 소현세자빈(민회빈 강씨)의 친정아버지다.[67] [[https://sjw.history.go.kr/id/SJW-D27080200-01700|승정원일기 1701년 8월 20일자 기사][68] 이러한 경우에는 희빈 장씨를 지나치게 미화한다는 것도 역시 감안, 고려해야 한다.[69] 본인에게 인현왕후를 연기했을 시절을 얘기하면 매우 부끄러워하는데 아무래도 과거와 현재 이미지의 갭 때문인 듯.[70] 2003년 SBS 드라마 <왕의 여자>에서는 김개시 역.[71] 장희빈 때문에 궁궐안에서 인현왕후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자, 인현왕후의 계모가 인현왕후의 시고모인 숙안공주와 만나 도움을 요청한다. 그때 '중전마마께 무슨 일이 생기면 세상 사람들은 내가 계모라서 신경쓰지 않아서 그렇다고 욕할 것이다'라고 호소한다.[72] 홍수현은 이 역을 연기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까지 읽으며 만반의 준비를 기울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