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1-06 01:17:29

무고의 화


1. 개요2. 배경3. 무고 사건4. 태자의 반란5. 결말

1. 개요

전한의 황제 한무제 치세에 벌어진 후계자 관련 분쟁을 이르는 말이다. 무고의 난(巫蠱─亂)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무고는 없는 사실을 일러바치는 誣告가 아니고 巫蠱. 그러니깐 짚이나 나무로 만든 인형 등에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이나 머리카락 붙여놓고 바늘로 찌르는 따위의 주술을 뜻한다. 물론 허위사실로 여럿 죽은 것도 사실이다.

2. 배경

기원전 91년 1월 승상 공손하와 위황후의 언니 위유 사이의 아들인 태복 공손경성(公孫敬聲)[1]군비 1,900만 전[2]을 횡령했다가 적발되어 체포된다. 당시 위황후는 무제의 사랑을 잃은 상태였는데, 무제는 이 기회를 틈타 위황후 세력을 축출한다. 특히 위씨 가문은 대장군 위청이 15년 전인 기원전 106년에 이미 죽었지만 위항 등 그 아들들은 한 차례 좌천을 당한 후에도 여전히 권세를 갖고 있었기에 무제로서는 눈엣가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승상 공손하[3]한무제에게 당시 유명한 도적 주안세(朱安世)[4]를 잡으면 아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빌었고 무제는 이를 허락한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공손하[5]는 토벌군을 이끌고가 어렵지 않게 도적을 토벌하고 주안세를 잡았지만, 주안세는 영악한 자로 무제가 어떻게든 위씨 세력을 제거하고 싶어함을 알고는 오히려 무제에게 "공손경성이 위황후의 딸인 양석공주(陽石公主)[6]와 사통하고 감천궁의 치도에 인형을 파묻어 황제를 저주했다"고 고발한다. 무제는 대노해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해 투옥해 조사했고 공손하 부부와 공손경성은 사건이 발생한 그 달이 지나지 않아 옥중에서 사망하였으며[7] 양석공주는 자매인 제읍공주(諸邑公主)[8]와 함께 투옥되어 반년에 걸쳐 심문을 받다가 결국 그해 윤5월에 모두 처형당하면서[9] 여태자 유거의 자리가 위태해지기 시작했다. 유거는 위황후의 아들이자 처형된 양석공주와 제읍공주의 오빠이기 때문이다.

3. 무고 사건

양석공주와 제읍공주를 처형한 후, 무제는 병을 앓고 있던 중 나무인형들이 몽둥이를 들고 자신을 때리는 꿈을 꾼다. 이에 무제의 측근인 수형도위(水衡都尉)[10] 강충(江充)[11]은 이를 "누군가의 무고 때문"이라고 부풀렸고 이말에 분노한 무제는 강충, 한열, 장공, 소문[12] 등에게 사건 조사를 맡긴다. 강충은 흉노 출신 무녀와 짜고 저주도구를[13] 미리 파묻고 땅에 술을 뿌려 의식을 행한 흔적을 만든 다음 무고의 증거라며 조작하고, 주변에 굿을 하는 이들을 모두 잡아와서 단근질 등 고문을 가하며 역모로 몰았는데, 이때 처형된 이들이 수만명에 달하였다. 결국 조사범위가 황후, 후궁까지 확대되고 급기야 태자인 유거에게까지 조여오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강충은 태자와 원한을 산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14] 이 때문에 강충은 그를 싫어하는 여태자가 무제 사후 보복할 것이라는 우려를 했으며 이 기회에 여태자를 쳐내려는 목적으로 흉노 출신의 무녀와 짜고 이 사건을 벌인 것이다.[15]

4. 태자의 반란

궁지에 몰린 태자는 소부[16] 석덕(石德)[17]과 상의했는데, 석덕은 진시황의 장남 부소의 일을 상기시키며 먼저 강충을 칠 것을 권했다. 이에 태자는 반란을 일으켰고 먼저 강충의 당여부터 쳐서 한열을 살해했지만, 장공에게는 부상만 입히는 데 그쳐 장공은 무제가 있는 감천궁으로 도망쳤다.[18] 이후 태자는 미앙궁에 들어가 사태를 위황후에게 알린 후 위사들을 동원해 강충을 참수하고 흉노 무녀는 태워죽였다. 그 다음에는 군사를 동원해 황궁인 장락궁 전체를 장악한다.

하지만 태자는 승상부를 점거하면서 승상 유굴리(劉屈氂)[19]를 놓친다. 도주한 유굴리는 먼저 온 장공과 함께 감천궁에 있는 무제에게 태자의 반란 사실과 강충과 한열이 태자에게 살해된 사실을 알렸다. 이에 충격을 받은 무제는 격분하여 유굴리에게 대장군직을 겸임해 반란을 진압할 전권을 하사했고 유굴리는 군대를 소집하여 태자의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태자는 무제의 명령을 사칭해 백성, 죄수들까지 동원한 수만 병력으로 장락궁에서 유굴리의 관군에게 저항하였고 5일간이나 치열한 격전을 치러 관군과 반군 양측 모두 수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무제가 장안으로 돌아오고 태자가 황명을 사칭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전세가 태자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어 백성들과 반란군이 모두 관군에게 항복하자 태자는 전투를 포기하고 아들들과 함께 도주하였다.

5. 결말

관군의 추격을 받으며 호현 천구리까지 도망간 태자는 아들 둘과 함께 신발장사의 집에 숨었는데, 결국 지인들과 연락하는 과정에서 관군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출동한 관군에게 포위당하자 목을 매어 자살하였고, 이 과정에서 태자의 두 아들과 그를 숨겨준 신발장사도 저항하다가 관군한테 살해되었다. 결국 태자의 어머니 위황후는 폐위되어 감금되었다가 자살하고, 태자를 따르던 이들은 줄줄이 반역죄로 처형당했으며, 태자의 후궁 사양제[20], 아들 유진, 며느리 왕부인도 처형되었다. 태자의 딸은 평여후의 아들의 아내였는데, 그녀 역시 무사하지 못하여 멸족 시에 출가한 딸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당시의 법 규정에 따라 형장으로 끌려와서 남편과 함께 목이 잘렸다.

이후 전천추의 상소에 의해 진상이 드러나자 무제는 강충의 일족을 멸하고 태자를 복권시켰으나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1] 생몰: ? ~ 기원전 91[2] 현재가치를 중국 현대 기준으로 잡는다면 1전은 0.5위안이므로 950만 위안이다. 현대 중국 물가 감안한다면 엄청난 액수를 횡령한것이다.[3] 생몰: ? ~ 기원전 91[4] 생몰: ? ~ ?[5] 한경제 시절부터 기병으로 종군하여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무제의 흉노 정벌전에는 장군이었으며 여기서도 공을 세워 남표후라는 공직까지 얻을 정도였다.[6] 생몰: ? ~ 기원전 92[7] 이때 고문을 무자비하게 했던터라 고문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8] 생몰: ? ~ 기원전 92[9] 한서에는 양석공주와 제읍공주가 무고의 화에 연루되어 주살되었다고 나온다. 자살이나 자살 강요로 죽어 사서에 사인이 자살로 명기된 다른 황족들과는 달리, 양석공주와 제읍공주의 최후에는 주살이라는 표현이 나오기에, 공개참수형 등 처형당하는 방식으로 죽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중국에서는 황제와 가까운 황족이라도 반역에 연루될 경우에는 황족으로서의 대우가 사라지고 중형에 처해졌다. 일례로 당나라 연간에 정변으로 살해된 위황후안락공주 모녀만 해도, 참수되어 거리에 효수당하기까지 한다.[10] 당시 황제의 정원인 상림원과 화폐주조를 담당하는 관직이었다.[11] 생몰: ? ~ 기원전 91[12] 무제의 최측근 환관으로 강충과 친분이 깊어 그의 조사와 고문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나중에 이를 알게되어 분노한 무제의 명령으로 화형에 처해진다.[13] 인형에다 무제를 저주하는 글을 써서 파묻었다.[14] 강충은 뛰어난 행정능력을 가진 관료였는데, 엄격한 성격이라서 귀족은 물론 황족이라 할지라도 법을 어기면 가차없이 처벌했다. 얼마나 엄격했냐면, 무제의 고모이자 장모인 관도장공주(생몰: ? ~ 기원전 116)가 황제 전용 도로인 치도를 마차로 다니는 것을 보고 이를 따지며 바로 관도장공주의 마차를 압수했을 정도였다. 황태자 유거 역시 예외가 아니라, 그의 스승이 마차를 타고 멋대로 치도를 사용하자 황태자의 마차를 압수했으며 봐달라는 황태자의 부탁에도 무제에게 보고했다. 그래서 황태자는 무제한테 질책을 받았고, 황제의 스승은 코가 잘리는 형벌을 받게된다. 이때부터 무제는 강충을 총애하며 측근으로 기용했다.[15] 무엇보다 예상 외로 처형된 사람들이 많아지자 무제도 측근들이 무고를 한 게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게되고 이를 눈치챈 강충은 황태자에게 모든 혐의를 씌우려 했다. 특히 저주도구인 무제를 저주하는 글을 쓴 인형들을 태자궁 주변에 많이 묻어 증거를 조작했고 태자가 무제에게 제대로 찍히게 만들었다.[16] 황태자의 스승으로 교육을 담당하는 고위직[17] 생몰: ? ~ 기원전 91[18] 강충이 자신의 조사를 보다 편하게 하기 위해 당시 말년에 접어들어 건강이 좋지 못했던 무제한테 불로장생술을 연마해야 하니 수도 장안에서 80km 떨어진 감천궁으로 갈 것을 간언했고 무제가 이를 받아들였기에 무제는 감천궁에서 생활하고 있었다.[19] 생몰: ? ~ 기원전 90[20] 양제는 이름이 아니라 태자의 후궁이 받는 품계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