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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 | 元嬪 洪氏 | |||
서삼릉 빈·귀인 묘역 전경 | |||
출생 | 1766년 6월 22일 | ||
조선 한성부 서부 서강방 신정리 근수정 (現 서울특별시 마포구) | |||
사망 | 1779년 6월 9일 (향년 12세) | ||
조선 한성부 창덕궁 양심합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 |||
능묘 | 인명원(仁明園) → 원빈풍산홍씨지묘 (元嬪豐山洪氏之墓)[1] | ||
재위기간 | 조선 원빈 | ||
1778년 7월 14일 ~ 1779년 6월 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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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부친 - 홍낙춘(洪樂春) 모친 - 우봉 이씨 이유(李維)의 딸 | ||
형제자매 | 오빠 - 홍국영(洪國榮, 1748 ~ 1781) | ||
배우자 | 정조 선황제 | ||
자녀 | 양자 1남파양 | ||
봉작 | 원빈(元嬪) | ||
궁호 | 숙창궁(淑昌宮) 효휘궁(孝徽宮) | ||
사당 | 원빈묘(元嬪廟) | ||
시호 | 인숙원빈(仁淑元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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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조의 간택 후궁. 아버지는 홍낙춘(洪樂春)이며, 어머니는 이유(李維)의 딸이다. 동복오빠는 홍국영이다. 조선 역사상 살아서도 죽어서도 전무후무한 예우를 받은 유일한 후궁이다.그녀의 가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홍이상이 8대조이고, 정명공주의 남편 영안위 홍주원이 6대조 조상이 된다. 따라서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인한과 연결되어 있으며, 원빈 홍씨와 정조는 12촌이 되는 셈이다.
또한, 그녀의 5촌 당고모는 경주 김씨 김한희의 부인이자 김면주의 어머니였다. 김면주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그 오빠 김귀주와 6촌이 된다. 홍국영이라는 인물이 정조 시대를 다루는 사극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 유명하다보니 집안이 이미 왕실과 인연이 있다는 점은 간과되는 편이다.
2. 생애
2.1. 출발선부터 파격적인 대우
1778년(정조 2) 5월 2일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빈어(嬪御)를 간택하라는 언서를 내린다. 이때 정순왕후는 "불행하게도 중전(효의왕후 김씨)에게 병이 있어서 후사를 볼 가망이 없게 되었다"고 밝혔다.[2] 이에 따라 금혼령과 함께 간택이 치러지고, 1778년(정조 2) 6월 13세의 어린 나이에 후궁으로 책봉된다.[3]원빈 홍씨에 대한 예우는 파격적이었다. 본래 후궁들은 대부분의 절차를 의례적으로 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홍씨는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까지 간택의 모든 절차를 거쳤으며, 가례의 의절과 의장은 대명집례[4]와 당나라와 명나라의 예를 모두 찾아본 다음 시행하였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채제공이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온 다음, 대전에서 중궁전까지 순서대로 인사를 끝냈다.[5] 그런데 숙창궁의 승언색(承言色)[6]이 채제공에게 온 것이다. 이에 채제공이 놀라서 "세자를 탄생한 빈궁(嬪宮)이 아니면 문안할 수 없는 것이 예법인데, 누가 이를 예로 정하였는가? 유독 하늘에는 두 해가 없는 이치를 모르는가?" 라고 말했다.[7][8] 비록 원빈이 간택후궁 중에서도 후사를 넓힌다는 뜻으로 들어온 인물이기는 했지만,[9][10] 엄연히 왕비인 효의왕후가 건재하고 세자를 낳지도 않았는데 원빈에 대한 예우가 선을 넘었다는 의미.
훗날 정조도 이것이 너무 파격이었다고 생각했는지 두번째 간택 후궁인 화빈 윤씨를 들일 때는 "이번에는 그렇게 할 것 없으니, 품계가 있는 빈원의 예를 참고해서 하라."고 한다.[11]
2.2. 효의왕후와의 갈등
역사상 왕실에서는 '후사를 넓힌다'는 뜻으로 종종 후궁 간택이 있었다. 그러나 성종, 선조, 인조, 숙종 등이 후궁을 간택한 전례와 비교하면, 간택된 처녀들은 집안의 유무에 상관없이[12] 내명부 종2품 숙의의 품계로 입궁하였다가 차차 승급하였다.[13] 그런데 원빈 홍씨는 처음부터 무품 빈(嬪)으로 입궁하더니 빈호에는 으뜸 원(元) 자를 썼다.[14] 일개 후궁에 대한 이런 무리한 예우는 자연스레 왕비였던 효의왕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당시 효의왕후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숙창궁입궐일기》가 있다. 여기서 효의왕후는 더위를 핑계로 원빈 홍씨의 조현례를 받는 걸 며칠이나 미루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부녀의 도리 자연 적국(측실)을 꺼림이 예사라"는 표현으로 효의왕후 입장에서 원빈 홍씨를 꺼리는 건 예삿일로 말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효의왕후의 처지는 상당히 곤란했던 것으로 보인다. 혜경궁 홍씨가 죽고 김조순이 지은 지문에서 '중궁이 누차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다'는 내용이 있다.
홍국영(洪國榮)의 악(惡)이 무르익었을 적에 그 누이동생을 궁중에 들이고는 원빈(元嬪)이라고 일컬으면서 분수에 벗어나는 일을 넘보았으므로 중궁이 누차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으나, 〈빈께서는〉 간사한 싹을 미리 꺾어 극력 보호함으로써 마침내 안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궁중의 일은 은밀하여 아는 이가 없기 때문에 불만을 품은 무리가 도리어 간사한 말을 퍼뜨리기를, '중궁이 위험에 빠진 것은 자궁이 주장하여 꾸며낸 일이다.'라고 하였다.
《순조실록》 순조 16년 1월 21일
《순조실록》 순조 16년 1월 21일
2.3. 이른 죽음
1779년 5월, 원빈 홍씨는 창덕궁 양심합에서 1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한중록》에 따르면, 홍국영은 여동생 원빈 홍씨가 갑자기 죽은 이유를 효의왕후에게서 찾았다.하늘이 밝으시고 국영이의 죄악이 천지에 가득 차니, 그 누이는 들어온 지 일 년도 못 된 1779년에 별안간 죽었느니라. 이 일로 국영이가 독기와 화를 이기지 못하여, 제 감히 누이 죽은 것에 중전을 의심하여 정조를 돋워 중전의 내인들 여럿을 잡아다가 칼을 빼들고 무수히 협박하며 조사하니라.
《한중록》
《한중록》
하지만 정조가 직접 지은 행장에서는 원빈 홍씨가 종기를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온다. 원빈 홍씨는 어려서부터 평소에 병이 없었는데, 1778년(정조 2) 겨울부터 종기가 여러 번 발병하여 차도를 보이지 않았고, 종기를 앓지 않는 달이 없었으며, 증세가 갈수록 심해져 죽기 1달 전부터는 통증이 극심했다.[15]
야사에서는 정조와 합궁하고 출혈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16]
이렇듯 원빈의 나이가 너무 어린 것도 문제였지만[17] 행장에서 "종기를 따면 회복되었다가 종기가 다시 발병하고, 종기의 뿌리가 매우 커서 보통 사람이 감내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었다"는데, 아픈 사람과 실제 합궁이 이뤄질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원빈이 어리기도 했지만 입궁하고 채 1년도 못 살고 숨졌는데 그 짧은 기간의 거의 대부분 동안 몸이 성치 못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 어린 나이에 오빠의 등쌀에 떠밀려 부모와 떨어져한참 연상인 정조와 결혼해 급변한 환경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주목받으며 지엄한 왕족과 살아야 했고, 몸과 정신이 채 성숙하기도 전에 무리한 성관계와 임신을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니 그 스트레스가 13~14살의 나이로는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빈의 신체적 건강에 악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2.4. 사후
당시 원빈 홍씨의 상장례는 후궁으로서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 원빈 홍씨가 사망한 당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정조를 비롯하여 정순왕후 김씨, 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조정의 대신들은 선화문 밖에서 슬픔을 표시했다. 또한, 지난날 현빈 조씨의 전례대로 5일 동안 조회와 장시의 업무를 정지시켰다.[18] 그리고 당나라 황귀비의 예를 좇아서 시호를 인숙(仁淑), 궁호를 효휘(孝徽), 원호를 인명(仁明)이라고 추증하였다.[19]이때 홍국영은 은언군의 맏아들 상계군 이담을 원빈 홍씨의 양자로 삼아서 대존관(代尊官)으로서 상을 주관하게 하였고, 봉호를 고쳐 '완풍군(完豊君)'이라고 하였다. 완풍군은 전주이씨의 관향을 뜻하는 '完'자와 풍산홍씨의 관향을 뜻하는 '豊'자를 합한 의미다. 종실을 후궁의 양자로 삼는 일은 전례가 없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조실록》에서 사관은 이같은 행태를 두고 홍국영의 방자함이 날로 극심해서 온 조정이 감히 거스르지 못했다고 썼으나 후세의 평가일 뿐, 당시 장례 절차와 예우는 정조의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고, 조정에서도 앞장서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조는 원빈 홍씨를 위해 직접 행장까지 지었다.[20]
원빈 홍씨의 신주는 경희궁 위선당에 모셔졌고, 원빈 홍씨의 원소인 인명원에는 묘표, 상석, 향로석, 혼유석 등의 석물을 배치했을 뿐만 아니라, 정자각과 재실, 홍살문까지 지었다. 그러나 1786년(정조 10) '인명원'에서 '원빈묘'로 강등되면서 홍살문 등은 모두 헐렸다.[21]
3. 가계
- 고조부: 홍중해(洪重楷)
- 증조부: 홍양보(洪良輔)
- 증조모: 청송 심씨(심척(沈滌)의 딸)
- 조부: 전라도관찰사 홍창한(洪昌漢)
- 조모: 기계 유씨(유두기(兪斗基)의 딸)
- 백부: 홍낙순(洪樂純)
- 백모: 전주 유씨(유복명(柳復明)의 딸)
- 종형제: 홍복영(洪福榮)
- 숙부: 홍낙빈(洪樂彬)
- 숙모: 함안 조씨(조중회(趙重晦)의 딸)
- 종형제: 홍익영(洪益榮)
- 고모: 이하영(李河永)의 처
4. 여담
- 인명원 자리는 1946년에 고려대학교에 매입되어 '애기능'이라고 불렸는데, 고려대에서 이 '애기능' 주변으로 이공계 학과들을 이전 및 신설하였다. 그래서 자연계 캠퍼스를 애기능 캠퍼스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원빈 홍씨의 묘는 1950년 6월 13일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5. 대중매체에서
- 황인경의 소설 《목민심서》에서는 초야 관련 야사를 차용해, 정조와 원빈이 동침하던 밤에 큰 소동이 벌어진 것을 두고 상궁 두 사람이 "어른이 아이 버선에 억지로 발을 디밀어 넣으면 어떻게 되겠소?"라고 에둘러 표현하는 묘사가 있다.
<colbgcolor=#89236A> 〈이산〉의 원빈 홍씨 |
- 2008년 MBC 드라마 〈이산〉에서는 배우 황금희[24]가 연기했다. 실제 역사와 달리 현대의 정서를 고려해서인지 성인으로 나왔다. 작중 히로인인 의빈 성씨를 괴롭히는 악역으로 등장했으며 의빈 성씨에게 질투심을 품고 괴롭히거나 뺨을 때리는 등 매우 악랄한 성품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상상임신을 숨기려다 들키는 바람에 효의왕후에게 탈탈 털렸는데 죄를 용서받고자 효의왕후에게 석고대죄를 하다 그만 병을 얻었고 오빠 홍국영 앞에서 "오라버니에게 원손을 낳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하며 죽는다. 이 때문에 홍국영 캐릭터가 180도 변하는 것으로 나온다.
- 강미강의 로맨스 소설로 2021년 MBC에서 드라마화된〈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도 어려서 입궁해 고생하다가 병에 걸려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절한다. 간택 후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입궁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합궁 당일에 정조는 원빈의 침소까지 동행한 대전 상궁들의 눈치에도 불구하고 옷도 벗지 않고 원빈의 곁에서 시간만 좀 보내다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침수를 든다. 보통 저런 경우에는 왕이 합궁한 후궁의 침소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수라까지 드는 게 관례였다. 이 때문에 당시 대전의 지밀나인이었던 주인공 덕임은 정조가 원빈과 합궁하던 날에 불침번이었지만 최소한 다음날 아침까지는 쉴 수 있으리라 믿고 마음 놓고 졸고 있었는데 정조가 한밤중에 갑자기 돌아와 잘 수 있도록 이부자리를 펼치라고 지시하자 크게 당황한다. 차후에도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됐고 급기야 정조는 남몰래 마음에 두고 있던 덕임에게 너는 언제 초경을 시작했냐고 물으면서 '원빈이 너무 어려서 합궁하기 곤란하다'며 남모르는 고충을 토로한다. '홍국영은 원빈이 초경을 했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다'는 말도 한다. 드라마판에서는 배우 박서경이 연기했다. 6화에서 첫 등장해 오라비 홍국영을 만나러 궁궐에 왔다가 퇴짜를 맞았으나 성덕임의 도움으로 입궐했다. 역사에서 첫 등장 시점의 나이는 5세였으나 본 드라마에서는 입궐한 시점의 나이와 엇비슷하게 나온다.
6. 관련 항목
[1] 세자를 낳지 않은 후궁이 원(園)을 칭하는 것은 참람되다고 하여 혁파된다.[2] 정조실록 5권, 정조 2년 5월 2일 신유 3번째 기사. #[3] 보통 관례와 계례를 15세에 치른다. 예종이 12살에 장순왕후에게서 첫 아들 인성대군을 얻긴 했으나, 장순왕후는 예종보다 5살 연상인 17살이었다.[4] 대명집례(大明集禮)는 명나라 홍무제 때 당시까지의 모든 의례를 담은 책이다.[5] 1778년(정조 2) 채제공은 진주사(陳奏使)로 연경에 다녀왔다.[6] 내관의 벼슬 중 하나로 말을 전하는 역할이다.[7] 순조실록 21권, 순조 18년 9월 20일 을묘 8번째 기사. #[8] 《다산시문집》 제17권, 번옹(樊翁)의 유사. #[9] 한마디로 먼저 아들만 낳는다면 그 아이를 미래의 세자이자 왕으로 삼아준다는 뜻이였다.[10] 사실 간택후궁들도 대부분 숙의에서 시작했지 정1품 빈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전례없는 일이였다. 빈은 본래 왕자를 출산한 후궁이나 오래전에 죽은 선대왕의 후궁들에게 추존할때 붙여주는 품계로, 왕비의 바로 아랫자리인 만큼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11] 정조실록 9권, 정조 4년 2월 22일 신미 2번째기사. #[12] 일단 간택 후궁이라는 것 자체가 양반가 여식이라는 의미다.[13] 후궁에서 왕비가 된 정현왕후나 인조의 후궁 귀인 장씨,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도 처음에는 숙의의 품계였다.[14]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이름에다 '으뜸 원'자를 쓴 뜻이 흉하니라"라고 언급하였는데, 당연히 왕비를 제치고 후궁이 '으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15] “嬪自兒時 素無疾 昨冬以後 腫症乖常 幾乎無月不作 濱危而破腫 旣蘇而復 痛 竟至于今 怪哉 腫時核甚大 人所不堪 而嬪終不以腫處見于予 亦未嘗以跛 倚呻噤之容見之於人 及慈宮往見之 嬪起迎拜跪 無異不病之時 慈宮大奇之 自去月晦 病勢轉篤 以至初六日夜 猶危坐整襟 予入則必起立拱手 七日曉 聞 疾亟 予蒼黃入見 則嬪端拱扶坐 微視之 有不自安之色 予問曰痛否 嬪對曰唯 聲已而絶 至奄逝 少無動容 以是不知其垂盡 猶令試鍼 鳴呼 此豈凡人所能爲 者哉.” 《어제원빈홍씨행장》[16] 그럴 만도 한 게, 당시 정조의 나이는 28살이었지만 원빈 홍씨는 만 12~13세로 이제 막 초경이 시작된지 얼마 안된 아직 어린 소녀였기 때문.[17] 정말로 후사가 급했다면 충분히 자라 당장 임신해도 몸에 무리가 없을 10대 중후반의 후궁을 간택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홍국영의 무리한 욕심 때문에 미처 임신에 알맞을 나이가 되기도 전에 후궁으로 입궁하며 일이 복잡해진 것.[18] 사실 이는 과한 처산데 아무리 무품빈이라 하더라도 현빈 조씨는 왕세자빈이고 원빈 홍씨는 후궁에 불과하다. 일개 후궁의 상례를 왕세자빈에 준하게 치른 것.[19] 정조실록 7권, 정조 3년 5월 7일 경인 1번째기사. #[20]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이 남아있다.[21] 본래 '원(園)'은 왕의 친생부모로서 왕이나 왕비가 아닌 사친의 묘소를 일컫는 말인데,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원빈의 무덤을 '원(園)'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여론에 따른 조치였다.[22] 딸이 후궁이 되기 전까지 변변한 벼슬 하나 못하던 사람인데, 1778년(정조 2) 6월에 부사과를 거쳐 호조참의에 제수되고 이듬해에는 지중추부사까지 오르면서 딸의 덕을 본다.[23] 1998년 MBC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는 효의왕후 역, 2000년 KBS 드라마 〈가을동화〉에서는 한채영의 아역. 2006년 뇌종양 진단을 받고 투병 중 2007년 20세로 요절했다.[24] 당초 영조의 후궁인 숙의 문씨 역에 캐스팅되었는데 정순왕후와 화완옹주와의 악역 캐릭터 유사성 문제로 이 배역이 삭제되면서 대신 원빈 홍씨 역으로 등장한 것.